김응용/인물평

1 야구 내적

1.1 야구 지도 스타일

모든 것은 자율, 네 목숨도 자율

기본 훈련 2~3시간을 제외하고는 전적으로 알아서 훈련하라고 선수들을 풀어놓고는 농땡이치는 놈이 있나 뒤에서 감시만 했다. 도루 사인 등도 일절 내지 않고 전적으로 이종범, 김일권 등 발빠른 선수들에게 그린라이트를 줘서 맘대로 뛰게 했으며, 번트와 강공의 선택 역시 선수한테 일임했다. 다만 도루나 번트 따위를 실패하거나 실책 등을 하면 그야말로 헬 오브 지옥이 벌어졌다. 난 맘대로 하라고 했지 맘대로 망치라고 한 적은 없다 포수 사인 역시 내지 않고 전적으로 포수한테 공 배합을 시켰으나, 포수의 볼배합이 조금이라도 엉성하다 싶으면 이닝 끝난 뒤 포수 타석에 말없이 대타를 내거나, 곧바로 포수에게 원산폭격을 시켰다. 해태 시절엔 장채근의 초년시절 리드를 제대로 못한다 싶으면 곧바로 장채근 타석때 대타를 써서 빼버리고, 삼성 시절 현재윤의 머리박아 사건은 위에 있다.

선수 입장에서는 미칠 것 같은 게 '알아서 해라'라고 감독이 손 놓고 보고만 있다가 잘 안된다 싶으면 곧바로 무지막지한 갈굼과 동시에 자기 앞에서 시계를 집어던지고, 쓰레기통 걷어차고, 방망이를 휘두르는 위협공세를 하니 살아남으려면 죽기살기로 알아서 해야하는 상황.

선수 조련에 있어서도 2군은 2군감독이 전담, 타격은 타격코치, 투수는 투수코치에게 전부 일임하고, 작전에 대한 전권은 수석코치에게 주었다. 해태 초기엔 김인식, 후기엔 유남호, 삼성시절엔 김종모가 작전을 냈다는 것. 직접적인 선수 지도는 하지 않고 부상 선수 관리나 1, 2군 콜업 등만 신경쓰는 매니저형 감독이다. [1] 팀 닥터고 뭐고 없었던 80년대 초 프로야구에서는 직접 뼈가 빠진 선수들 뼈를 끼워 맞춰주고 쥐가 난 선수 다리를 풀어줬으며 찢어지거나 벌어진 상처가 난 선수들에게도 직접 약 발라주고 붕대를 감아주고 했다고 승승장구에서 밝혔다.

1.2 애호 선수층

스스로가 현역 시절에 장타형 내야수였기 때문인지 젊고 체격 좋고 힘 좋은 타자를 굉장히 선호한다. 몸을 키우라고 선수들에게 육식을 권장했을 정도.

또한 좌완 덕후 애호가로도 유명하다. 덩치 큰 왼손잡이라면 타자건 투수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난다고 하며, 그 덕분에 장신의 좌완투수 강영식은 아예 직접 거둬서 밥을 해먹일 정도였다고 한다. [2] 참고로 해태 원년에는 좌타자가 한 명도 없었으며, 83년에는 송일섭, 김일환 딱 두 명이었으니... 김응용이 해태에 있을 적에 제대로 활약한 왼손 투수 역시 김정수신동수 정도 뿐이다. 한화에 온 계기도 류현진이 한화에 있어서라고 스스로 말했을 정도. 정작 류현진은 포스팅으로 메이저리그로 건너가버리자 와서도 가장 먼저 한 일이 장성호를 보내고 송창현을 데려왔고,둘 다 왼손잡인데? 한 명은 젊고 한 명은 늙었잖아 직접 미국에 가서 좌완 다나 이브랜드를 데려왔다.

삼성에서 해태로 트레이드되자 은퇴를 불사하겠다며 해태행을 거부한 양준혁을 팀으로 데려오기 위해 애지중지 달래며 1년 후에는 다른 팀으로 보내주겠다는 약속을 했고 이를 지켰다. 이후 삼성 감독으로 부임한 이후에는 강영식을 삼성으로 데리고 왔으며, 구단 프런트를 설득해 양준혁을 도로 삼성에 돌아오게 했다. 전성기의 해태에서 왼손잡이 선수라고는 눈을 씻고 봐도 찾기 힘들었기 때문에 더 왼손에 민감했을지도 모르겠다.

때문에 해태 시절에도 기회만 되면 왼손 선수들을 데려왔으나 정작 제대로 활약한 선수가 적다. 또 좌타 거포 김기태를 데려오기 위해서 생전 전화를 안하던 당시 쌍방울 김성근 감독에게 전화를 해서 '엄청난 제안'을 한 적도 있다고 한다. 결국 성사되지 못했기에 제안의 내용은 불명. 그러면서 정작 김기태가 삼성에 있었을 땐 쓰지도 않고 SK로 쫒아냈다. 김기태는 그 복수로 12년 뒤 김응용에게 개막전 13연패를 안겨준다.

결국 해태 말기에 임창용이 팔려갈 때 양준혁을 얻어내며 한을 풀었다. 그 덕에 양준혁, 장성호, 용병이였던 트레이시 샌더스를 포함해서 라인업의 반 이상이 좌타자로 도배가 되는 상황까지 벌어졌다. 재밌는건 삼성으로 와서 덩치 큰 좌완의 한을 완전히 풀고 오히려 도배했다. 기존의 이승엽, 강동우을 위시로 박한이 중용에 양준혁리턴, 그리고 사장 고문시절에 최형우 재영입지시, 채태인 직접영입, 지금의 삼성의 최강 좌타라인을 구축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만큼.

한편 출루율보다 타율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타율이 낮고 출루율이 높은 타자에 대해선 평가가 짜다. 대표적인 타자가 정신병자 박한이또라이 장성호. [3]

1.3 노력하는 유망주, 무명 선수들을 향한 애정

김응용 감독을 거친 선수들이 하나같이 고마워 하는 부분. 해태감독시절부터 노력하는 무명선수들에게 아낌없는 후원을 한 것으로 유명했다. 한화감독시절 팬들이 엄청난 욕을 하면서도 상당수의 팬들이 잘 모르는 부분[4]이자, 일부 빠삭한 팬들에게만 알려져있는 사실인데 이태양을 비롯해 돈없는 신인선수, 2군선수들이 비활동기간 제주도에 가서 개인훈련을 할 수 있게 재정적 지원을 해주고, 잘먹고 운동 열심히 하라고 용돈까지 주며 후원을 한 감독이, 바로 김응용감독이다. 한화 감독으로 부임하던 2년간 비활동시즌 훈련비용을 사비로 투자한 것만도 거의 1억에 육박한다고. [5]

또한 이태양이 부상으로 인해 2015 시즌을 홀랑 날려버리게 되자 몇몇 악성 팬덤노리타들이 킬끼리의 혹사라고 말하면서 무차별적으로 폭격을 가했는데 실제로 이태양은 철저하게 투구수나 등판 일정을 관리받았다는 것이 인증되자 금새 여론이 죽어버리고 말았다. 그만큼 유망주나 신인들을 확실하게 밀어주는 감독이라고 할 수 있다.

사실 한화에서만 이렇게 한 것이 아니라 삼성시절에도 채태인, 조동찬 등에게 용돈을 주며 사비를 들여 키웠다.물론 말 안듣고, 못하면 복날에 X잡듯 패긴 했다만 또한 해태시절에도 강영식유망주, 무명선수들에게 고기를 사주며 영양을 보충시켜주는 등 노력하는 선수에게는 아낌없이 투자했고 이는 이종범의 무릎팍도사편에서 잘 나타나있다.물론 먹기만 하고 훈련안하고 놀면 가차없이 빠따질

또한 용인에 사비를 털어 사회인/리틀야구장을 건립, 유소년 야구를 지원하는 것도 사람들이 잘 모르는 김응용 감독의 업적 중 하나다.[6]

2 야구 외적

2.1 세력싸움 균형의 조율사

많은 사람이 간과하는 사실이지만 프런트와 굉장히 잘 지내는 감독으로 꼽힌다. 이 점에 있어서는 부임하는 팀마다 뒤끝이 안좋은 김성근이나 백인천과는 정 반대. 어떤 야구팬들은 이를 김응용의 가장 큰 강점으로 꼽히기도 한다. 프런트의 꼭두각시 노릇을 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프런트와 원수지지도 않으면서 자신의 방향대로 팀을 이끌어나가는 것은 분명히 대단한 능력이다. 많은 감독들이 프런트와의 불화꼭두각시 노릇을 하다가 팀을 말아먹는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그룹의 지원이 너무 없어서 그야말로 막장 중의 막장이었던 해태 프런트와도 말년을 제외하면 사이가 매우 좋았다. 김응용 본인도 의리를 지켜 해태가 막장화되기 이전인 90년대 중반, 자신을 거액으로 스카웃하려고 했던 다른 팀의 파격적 오퍼를 거절하여 사실상 손해를 보면서도 해태에 남았다. 저 '다른 팀'이 LG라고 알려져 있으나, 실제 파워블로거 박동희의 인터뷰에서 밝힌 바로는 롯데였다고 한다. 해태의 구단주였던 박건배 그룹회장과도 사이가 좋아서 박회장이 매번 해외출장을 다녀올 때마다 김응용에게 기념품을 사다줬다는 일화가 있다.

이는 삼성에서도 마찬가지였고, 역대 감독을 쥐고 흔들기로 악명높았던 삼성 프런트조차 '김감독 같은분이 오시면 프런트가 정말 편하죠.'라고 김응용의 프런트 친화성을 호평했다. 이후 삼성 사장으로 선임되는데도 이런 높으신 분들과 친화적인 인품이 큰 작용을 했다. 해태 못지 않은 막장인 한화 프런트도 이런 점을 고려해서 김응용을 낙점한 것 같다.

2.2 감독을 키우는 감독?

선수 육성뿐만이 아니라 지도자 육성에도 넘사벽급의 스킬을 보여주는 면이 있었다.

우선 해태 타이거즈 원년부터 활약해왔던 김성한은 1995년 은퇴 이후 해태에서 계속 김응룡 감독을 옆에서 보좌하면서 자연스럽게 김응룡의 후임자로 성장. 해태 말년 김응룡이 삼성으로 이적한 후 감독직을 이어받았고, KIA 타이거즈로 간판이 바뀐 후 뛰어난 성적을 냈다. 우승을 못 했을 뿐이지 초보 감독이 승률 6할을 2년 연속으로 찍은 것은 대단한 업적이다. 그 김응룡도 2년 연속 6할 승률은 달성하지 못했다. 또한 김종모는 감독만 못 했을 뿐이지 해태와 삼성과 KIA를 오가며 수석코치 역할로 우승 2번(2002년 삼성, 2009년 KIA), 일반 코치로 우승 3번(1993년, 1996년, 1997년 해태)을 했다.

선동열의 경우 은퇴 이후엔 경기감독관 등의 명예직을 전전하다 2004년 삼성 라이온즈 수석코치 합류 이후 단 1년만에 김응용 감독의 후임으로 감독이 되어 삼성의 2년 연속 우승을 이끌었으며, 선동열의 후임 류중일 감독 역시 2000년 은퇴 이후 김응룡 감독이 삼성에 오자마자 코치를 시작해 우승을 맛보고 2011년 감독으로 부임한 후 정규 시즌, 한국시리즈, 아시아 시리즈 3관왕을 일궈냈으며, 양일환 투수코치 역시 2001년 김응용 감독 부임이후 삼성에 합류하자마자[7] 코치로써 우승을 맛봤다.

재미있는 사실은 선수시절 김응룡 감독 밑에 있다가 말년에 쫓겨나듯 타 팀으로 이적해서 코감독 밑에서 코치 수업을 받지 못한 지도자들은 하나같이 폭망했다는 공통점이 있다는 것이다. 이순철이라든가 한대화라든가 조계현이라든가...

성공사례의 공통점을 본다면 은퇴하고 갓 합류하거나 연수만 막 끝낸 풋내기 코치들이 첫 감독으로 김응룡을 모시게 되면 지도자로서 탁월한 능력을 보여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자신이 그 팀에서 떠나도 후계자들을 통해 강팀의 면모를 최소한 2~3년은 계속 이어가게 한다는 점은 구단에게도 상당히 유리하게 작용한다.

그리고 2012년 한화 이글스에서도 이제 막 은퇴하자마자 김응룡의 부름을 받고 한화로 온 풋내기 코치들로 이종범, 이대진이 합류했다. 과연... 하지만 이종범과 이대진은 2년동안 그다지 인상적인 모습은 보여 주지 못하고[8] 2014 시즌 후 김응용의 퇴진과 함께 모두 코치 자리를 떠났다. 미래의 감독감인 김종모,김성한 역시 성과를 내는 데 실패한 것은 동일하기에 현장복귀가 힘들어 보인다. 다만 이들은 프리미어 12의 감독이 될 가능성이 남아 있고 그래도 커리어라는 게 있으니 아직 기대할 게 없는 것은 아니다. 거기에 2013년과 2014년에는 자신의 수제자KIA 타이거즈에서 좋지 못한 성적을 3년간 기록하고도 재계약을 얻어냈으나 친정팀 팬들의 분노를 접하고 알아서 물러나면서 이런 평가도 금이 갔다. [9]
  1. 이런 형태와 정 반대의 케이스가 있는데 다름아닌 김성근 감독. 이쪽은 거의 모든 일을 자신이 관리하는 타입이다. 둘 다 상반된 타입이니 장단점이 갈려서 논쟁거리가 되곤 한다.
  2. 부산상고 후배인 채태인도 강영식과 같이 김응룡 집에서 살았다.
  3. 물론 세이버매트릭스 계열에서도 같은 출루라도 안타를 볼넷 출루보다 가치를 높게 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박한이와 장성호는 어마어마한 출루율을 가졌을 뿐만 아니라 타율도 높은 선수들이다.
  4. 1군 방송경기에서의 연패나 몇몇 선수들에 대한 혹사 논란으로 주로 비난을 했었다.
  5. 돈이 없는 선수들 같은 경우 비시즌 기간에 제대로 개인훈련을 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소위 말하는 스타 플레이어들이 개인 트레이너나 해외로 나가서 개인적인 특훈을 하는 것에 비하면 빈약하다고 할 수 있으며 몇몇 팬들이 프로야구의 빈부격차라고 말하는 케이스들 중 하나이다.
  6. 한화 감독시절에 받은 연봉 및 계약금 중 일부는 앞서 말한 2군 선수들 육성에 사용하고 남은 금액은 전부 용인에 야구장을 짓는대 투자했다고 한다. 현재는 양준혁이랑 같이 하고 있는듯 하다.
  7. 사실 양일환 코치는 원래 삼성에서 코치를 했었지만, 서정환이 감독이 되면서 잘렸다.
  8. 다만 팀 내에서의 평가는 그리 나쁘지 않았다고 한다. 이대진은 현재 KIA 타이거즈 코치로 일하고 있고, 이종범도 쫓겨난 것이 아니라 스승님이 물러났으니 나도 떠난다는 투로 그만둔 쪽이다.
  9. 그래도 선동열은 프리미어12에서 투수코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면서 대한민국 대표팀의 우승에 이바지한 공로를 세우긴 했다. 기아에서 커리어를 깨먹긴 했어도 기존적인 투수 조련이나 코치로서의 역할은 확실하게 날이 서 있는 편.그러니 각 구단들은 김응룡의 제자들을 감독으로 선임하는 것을 멀리하고 코치로 기용하는 것이 좋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