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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 라이온즈 기술자문 | |
류중일(柳仲逸 / Joong-il Ryu) | |
생년월일 | 1963년 4월 28일 |
국적 | 대한민국 |
출신지 | 경상북도 영덕군[1] |
학력 | 삼덕초[2]-대구중[3]-경북고-한양대 |
신체 | 176cm, 80kg, A형 |
포지션 | 유격수 |
투타 | 우투우타 |
프로입단 | 1987년 삼성 라이온즈 1차지명 |
소속팀 | 삼성 라이온즈 (1987~1999) |
지도자 | 삼성 라이온즈 1군 주루코치 (2000~2007) 삼성 라이온즈 2군 수비코치 (2008~2009) 삼성 라이온즈 1군 수비코치 (2010) 삼성 라이온즈 감독 (2011~2016) 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 감독 (2013~2015)[4] |
프런트 | 삼성 라이온즈 기술 자문(2017~) |
종교 | 불교 |
보유 기록 | |||||
2011, 2012, 2013, 2014년 한국프로야구 우승 감독 | |||||
수상 기록 | |||||
1987년, 1991년 한국프로야구 유격수 골든글러브 수상자 |
삼성 라이온즈 등번호 1번 | |||||
황규봉(1982 ~ 1986) | → | 류중일(1987 ~ 1999) | → | 강동우(2000 ~ 2005) | |
삼성 라이온즈 등번호 75번 | |||||
최한경(1993 ~ 1995) | → | 류중일(2000 ~ ) | → |
삼성 라이온즈 역대 주장 | ||||
이종두 (1995~1996) | → | 류중일 (1997) | → | 양준혁 (1998) |
삼성 라이온즈 역대 주장 | ||||
양준혁 (1998) | → | 류중일 (1999) | → | 김기태 (2000) |
삼성 라이온즈 역대 감독 | ||||
선동열 (2005~2010) | → | 류중일 (2011~2016) | → | 김한수 (2017~) |
2013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 감독 | |||||
김인식(2006, 2009) | → | 류중일(2013) | → | 김인식(2017) |
재미난 건 KBO 리그사에서 전무후무한 4년 연속 정규 시즌 1위와 한국시리즈 우승을 동시에 차지한 명장이면서도, 삼성을 메이저리그식의 시스템 야구로 탈바꿈시킨 선진적 지도자이면서도, 팀 성적과 선수들의 건강을 공평하게 챙기는 가장 이상적인 감독이면서도, ‘이기는 감독’임에도 ‘지는 감독’들에게 비난받지 않는 사령탑이면서도 그가 한 번도 자신을 내세운 적이 없다는 것이다.ㅡ 박동희
내가 없으면 이 조직은 안 굴러간다. 이렇게 생각하는 구성원이 많다면 그 집단은 무너지게 돼 있다. 이 철학은 어느 조직이든 통용된다.ㅡ 스포츠서울과의 인터뷰
1 개요
2010년대 전반기 삼성 왕조를 이룩한, 삼성 라이온즈 역대 최고의 감독
KBO 리그 최초 4년 연속 통합 우승[5] 및 KBO 리그 유일의 아시아 시리즈 우승이라는 대업을 이룬 감독
대한민국의 전 야구 선수, 야구 감독. 삼성 라이온즈의 프랜차이즈 선수 출신이자 삼성의 1번 라인인 황규봉-류중일-강동우-윤성환 중 한 명. 삼성 라이온즈에서 원 클럽맨으로 활동한 선수 출신 중 최초로 감독이 되었다. 서정환이 삼성 선수 최초의 감독이긴 하지만, 프로 원년 다음 시즌부터 은퇴할 때까지 해태 타이거즈에서 뛰었기 때문에 원 클럽맨은 아니다.
프랜차이즈의 기준에 있어서 완벽하다. 경상북도 영덕군 출신으로 삼성에서만 선수로 뛴 원 클럽맨이며, 은퇴 후 코치와 감독 시기도 삼성에서만 보낸 진정한 성골 삼성맨이다. 원 클럽맨으로서 출신지까지 연고지와 일치하는 것은 물론, 선수, 코치, 감독 어느 부문에서건 뛰어난 성적을 올렸으니 순혈 프랜차이즈 스타의 좋은 예시라 할 수 있다. 물 건너 명문 야구팀도 이 정도의 순혈 감독은 가진 바가 없다.
2 아마추어 시절
황금사자기 전국고교야구대회 70주년 기념 OB All-Star in 2016. 동아일보 | ||||
장효조 OF / 상원고 | 이정훈 OF / 상원고 | 박재홍 OF / 광주제일고 | ||
류중일 SS / 경북고 | 김성래 2B / 경북고 | |||
김동주 3B / 배명고 | 남우식경북고 송진우세광고 | 유지홍 1B / 선린상고 | ||
백인천 C / 경동고 |
포항 중앙초등학교 2학년때부터 야구를 시작했으며 5학년때 야구부가 해체되자 대구초등학교로 전학하였으나, 5학년이 끝나고 대구초등학교 야구부마저 해체되자 삼덕초등학교로 다시 전학을 갔다. 참고로 초등학교 시절에는 강한 어깨를 살려서 포수를 봤었으나, 대구중학교로 진학하고 난 뒤에는 유격수로 전향하게 된다.
경북고 시절 |
전국 무대에 이름을 알린 건 경북고등학교 시절부터이다. 특히, 박노준, 김건우라는 한국 야구 사상[6] 최고의 야구 아이돌 스타를 보유한 선린상고와의 청룡기, 봉황대기 두 대회에 걸친 처절한 결승 명승부에서 경북고의 1번타자를 맡은 2학년 유격수로서 우승에 공헌, 다음 해까지 이어진 3차 경북고 전성시대[7]를 이끌며, 1981년 봉황대기 미기상, 경북고 주장을 맡은 1982년 대통령배 감투상, 대붕기 최우수선수상을 수상. 초고교급 유격수로 발돋음했다. 특히 1982년 7월 17일, 잠실 야구장에서 개장 기념으로 열린 부산고와의 경기에서는 잠실 야구장 개장 1호 홈런을 기록했다.기념품이라도 좀 주지..기사참조
당시에는 김재박을 존경했다고 한다. 사실 한국 프로야구 유격수 중에서 누가 김재박을 존경하지 않겠냐마는. 이종범 유지현 박진만 등을 존경하는 후배 유격수들이 있을 수 있긴 하나, 어차피 이종범 유지현 박진만이 존경하는 유격수는 김재박인 만큼 별 차이는 없을듯.
경북고 졸업후 한양대[8][9][10]로 진학해 국가대표 붙박이 유격수로 활약. 1985년도와 1986년도에 대학 올스타 유격수로 뽑혔다.
3 프로 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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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에 뛰어든 그는 1987년 삼성 라이온즈에서 입단 첫 해부터 오대석을 제치고 주전 유격수 자리를 꿰찼으며 11타수 연속 안타라는 진기록을 작성했으며, 1987년과 1991년 두 차례 골든글러브 시상식에서 김재박을 제치고 유격수 부문 수상자 자리를 차지했다.
1989년부터는 2루수인 강기웅과 콤비를 이뤘다. 이 키스톤 콤비는 김은식이 한국 프로야구 최고의 키스톤 콤비로 꼽은 바 있다. 강기웅과 류중일이 한국 프로야구 최고의 2루수와 유격수는 아니었지만, 키스톤 콤비만큼은 최고였다는 평.
선수시절에는 한국시리즈 우승과 인연이 없었다. 1987년 준우승, 1990년 준우승, 1993년 준우승. 게다가, 1993년 이후로 삼성은 1996년까지 3년 간 포스트시즌에 올라가지 못했으며 1997년 부터 은퇴 전 마지막 시즌이었던 1999년동안은 한국시리즈에 진출하지 못하였다. 코치로 전향한 뒤로 다시 한 번 준우승을 경험했으나(2001년), 드디어 자신의 소속 팀에서 우승을 거머쥐었다.(2002년, 2005년, 2006년)
은퇴할 때까지 삼성에서만 활약한 원클럽맨이며, 2000년 역대 현역 선수 중 처음으로 은퇴식을 치렀다. 삼성 구단 최초의 은퇴식이었다. 이후 김현욱, 김한수, 전병호, 김재걸, 양준혁으로 이어지게 된다.
7번을 달던 팀 선배 김용국이 태평양 돌핀스로 트레이드되고 나서도 1번을 계속 달 정도로 1번에 대한 애착이 강하기도 했다. 이 때문인지 경북고등학교 시절에도 등번호가 1번인 줄 아는 사람이 많으나, 경북고 시절에는 16번을 달았었다.#
장타력이 약했던 선수라는 인식과 다르게 위의 잠실 1호 홈런과 더불어 포스트시즌 4경기 연속 홈런이라는 기록도 가지고 있다.
그러나 키스톤 콤비로서가 아닌, 유격수로서의 실력이 아주 특출난 선수는 아니었다. 공격은 3할 타율을 한 번 달성하고 평균적으로 2할 중후반에서 타율이 형성되었으나 홈런 숫자는 대구야구장을 사용하는 선수 치고는 적은 편이었고, 통산 장타력은 .365인 등 장타력이 강한 선수 역시 아니었다. 하지만 유격수라는 포지션을 감안하면 이 정도 타격지표만 있어도 충분히 준수한 성적을 올린 것이며, 수비력이 나쁜 선수도 아니었고, 무엇보다도 골든글러브 수상 경력 또한 두 번이나 있기 때문에 한 시대를 풍미한 준수한 유격수라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다른 현역 감독들에 비하면 상당히 준수하다. 이 사람이나 이 사람의 선수시절 성적만 봐도
선수 시절에는 등번호 1번을 달았으며(1987~1999) 현역 시절의 별명은 '천재 유격수', '그라운드의 살구꽃', '수비의 달인', '어벙이' 등이 있었다.
3.1 연도별 성적
- 한국야구위원회 기록실에 표기되는 리그 TOP 10위 이내 기록은 순위가 등재. 붉은 글씨는 1위 입상 성적. 진한 표시는 리그 5위내 입상성적.
역대기록 | |||||||||||||||||
연도 | 소속팀 | 경기수 | 타수 | 타율 | 안타 | 2루타 | 3루타 | 홈런 | 타점 | 득점 | 도루 | 4사구 | 장타율 | 출루율 | |||
1987 | 삼성 라이온즈 | 104 | 352 | .287 | 101 | 17 (8위) | 2 | 2 | 28 | 57 (5위) | 8 | 42 | .364 | .362 | |||
1988 | 47 | 116 | .302 | 35 | 3 | 2 | 0 | 11 | 18 | 5 | 11 | .362 | .354 | ||||
1989 | 113 | 329 | .246 | 81 | 15 | 3 | 5 | 38 | 39 | 14 | 33 | .356 | .311 | ||||
1990 | 120 | 425 | .311 (5위) | 132 (3위) | 22 (4위) | 5 (6위) | 6 | 45 | 70 (5위) | 23 (4위) | 60 | .428 | .394 (7위) | ||||
1991 | 90 | 344 | .285 | 98 | 14 | 4 | 5 | 45 | 59 | 19 | 38 | .392 | .352 | ||||
1992 | 104 | 294 | .211 | 62 | 12 | 1 | 5 | 27 | 43 | 8 | 38 | .310 | .300 | ||||
1993 | 107 | 377 | .281 | 106 | 13 | 1 | 8 | 45 | 58 (8위) | 6 | 60 | .385 | .378 (5위) | ||||
1994 | 36 | 131 | .328 | 43 | 8 | 3 | 4 | 22 | 22 | 5 | 18 | .527 | .404 | ||||
1995 | 64 | 155 | .226 | 35 | 11 | 1 | 0 | 10 | 11 | 2 | 11 | .310 | .277 | ||||
1996 | 111 | 355 | .245 | 87 | 13 | 2 | 2 | 35 | 37 | 13 | 44 | .310 | .327 | ||||
1997 | 79 | 215 | .242 | 52 | 13 | 0 | 8 | 34 | 34 | 1 | 25 | .414 | .321 | ||||
1998 | 64 | 140 | .200 | 28 | 8 | 0 | 0 | 13 | 14 | 4 | 14 | .257 | .271 | ||||
1999 | 56 | 60 | .233 | 14 | 1 | 0 | 0 | 6 | 13 | 1 | 7 | .250 | .313 | ||||
KBO 리그 통산 (13시즌) | 1095 | 3293 | .265 | 874 | 150 | 24 | 45 | 359 | 475 | 109 | 401 | .367 | .343 |
4 은퇴 이후
현재까지도 삼성 라이온즈에 소속되어 있으면서 현역시절부터 삼성을 지킨 두 명 중의 한 명이다.(다른 한 명은 장태수) 삼성 입장에서는 꿩 대신 닭이라고 할까. 꿩인 이만수를 반강제로 은퇴시키면서, 닭인 류중일에 대한 배려가 강한 것은 아이러니. 단, 이만수의 경우는 현역 말년에 현역 유지 여부를 놓고 구단과 마찰을 빚어 구단과의 결별하는 모양새가 좋지 않았던 반면 류중일은 은퇴 당시 구단과 큰 마찰이 없었다는 점은 감안하자. 만약 이만수가 현역생활에 대한 욕심을 조금 접고 삼성과 타협했더라면 이만수에 대한 대우는 크게 달라졌을 거다. 물론 원년멤버로서 끝까지 생존했다는 자존심과 현역시절 내내 한국시리즈 우승을 해보지 못했다는 아쉬움에 이만수가 그렇게 쉽게 타협을 할 리는 없었을 거고, 그게 현실이기는 했지만. 콩라인에 있는 기간은 2002년까지다.
4.1 삼성 라이온즈 코치 시절
천하의 김응용에게 No를 외치던 유일한 코치
선수 은퇴 후 자신의 트레이드 마크였던 1번 대신 코치 시절부터는 75번(2000년~ 현재)을 달아 현재도 이 번호를 쓴다. 코치시절에는 수비와 주루 코치로 3루 코치박스를 맡았었다. 또한 김응용이 감독을 맡던 시절에는 기존 코치진 중 유일하게 김응용에게 인정받은 코치였다. 일화로 스프링 캠프에서 날씨 문제로 투수진 불펜피칭을 정시에 맞춰서 시키도록 코치들이 지시했는데 김응용이 소리를 지르며 불펜 투수들이 왜 미리 몸을 안푸냐고 화를 내자 다른 코치들이 허둥지둥대며 당장 준비시키겠다고 법석을 피우는 와중에 류중일이 혼자 김응용에게 가서 날씨 문제로 일부러 정시에 나오도록 지시했다고 이유를 설명했고 김응용 감독이 바로 화를 풀고는 대신 늦지 않게 준비시키라는 소리만 듣고 끝난 적도 있었으며, 뒤에서 설명하겠지만 김응용 감독이 수비훈련 방식을 뜯어고치라고 하자 한밤중에 김응용의 숙소에 직접 찾아서 1:1로 김응용과 말싸움을 벌인 끝에 김응용이 포기하고 류중일 감독에게 수비 훈련에 대한 전권을 맡긴 적도 있었다. 물론 류중일은 한때 최고의 유격수였던 만큼 수비코치로서 능력은 뛰어났고 그 능력을 인정받아 국가대표팀에서도 여러번 수비코치로 차출되기도 했다. 지도자 연수를 밟은 것은 아니지만 삼성 수비코치 시절 LA 다저스의 수비 교범을 구해서 직접 번역할 정도로 공부를 열심히 하는 코치였고, 그때 번역한 매뉴얼은 다른 팀에서 구해서 봤을 정도라 사실 지금은 전 구단이 보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수비코치로서 위기도 있었는데, 2009년 시즌을 앞두고 특별한 이유 없이 팀 쇄신 차원으로 2군 코치로 보직이 바뀐 적이 있었다. 이에 류중일은 자신이 인정을 못 받는다는 생각에 삼성을 떠나려 했다가 구단과 선배 코치들의 만류로 남았다. 그러다 팀이 5위로 추락하자 그 해 9월 다시 1군 코치직으로 복귀했다.
그 외에는 주루코치로서도 좋은 평가를 받았다. 단, 주루코치로서는 팬들간 호불호가 갈렸다. 충분히 홈으로 선수를 돌릴 법도 했는데 3루에서 멈추게 하거나, 홈에서 횡사할 게 뻔한데도 홈으로 돌리거나 하는 일이 종종 있었다. 좋은 평가를 바탕으로 대표팀의 수비, 주루코치도 여러 번 맡았다. 2009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과 2010 광저우 아시안 게임 대표팀 코치로도 뽑혔다.
2010년 한국시리즈에서 SK에 팀이 시리즈 스윕을 당할 위기에 처하자, 선동열 감독과 대조적으로 분노한 모습이 보인다. |
이 후 이 사진은 감독 선임 이후 4년간 호성적을 거두면서 '진정한 삼빠 아재' '얼마나 답답했을까'등의 이야기와 함께 재평가를 받고 있다. 물론 이 때 감독 선임을 예상하진 않았겠지만, 두 사람의 모습이 묘하게 대조적이다.
이 후 시리즈 스코어가 3-0이라 할지라도, 1경기만 더 지면 시리즈가 끝난다 할지라도 야구에서 지레 포기하고 저렇게 웃을 이유가 없다는 건 2013년 한국시리즈에서 류중일 감독이 다시 증명했다. 1, 2차전을 다 날리고 시리즈 스코어 3-1까지 몰렸을 때, 선발이고 불펜이고 모조리 다 집어넣어 진정한 '벌떼야구'를 실현하면서 반전을 이뤄낸 것이다. 3대0이라도, '1경기만 잡자'는 생각으로 전력을 다해 3대1을 만들면 실낱같은 희망이 생긴다. 거기서 쥐어짜서 3대2를 만들면 분위기가 달라진다. 야구는 흐름의 스포츠이므로, 5차전까지 최선을 다해 3대2를 만들 수 있다면 '야구 몰라요'가 되는 것이다.[11] 선동열은 이걸 몰랐고, 그냥 일방적으로 경기를 '던졌다'. 삼성 팬들은 준우승해서 기분이 나쁜 게 결코 아니었다.
2007년 오키나와에서 벌어진 연습경기에서 이만수 SK 와이번스 코치와 서로 얘기를 나누며 둘이 서로 우정을 나누는 것을 다시 한번 보여줬다. 부연설명을 하자면 이만수는 삼성 구단과의 사이가 껄끄러운 뿐이지 삼성 출신 옛 동료들과의 관계가 껄끄러운 건 아니었다. 같은 팀에 소속되어 있던 선후배로서 선수시절 웬만한 개인적인 원한이 없다면 새삼스러울 것도 없다. 이만수의 경우 삼성에 더 이상 감정이 없던 탓인지 김재하 단장과 악수를 나누기도 했다. 또한 삼성이 2010 올스타전 레전드 올스타를 선정했을 때에는 올드 멤버들을 초청하기도 했으며 대구시민 야구장의 마지막 경기에서는 삼성이 이만수를 시포로 선정하기도 했다.[12] 이로서 과거의 악연은 사실상 청산된 셈.
4.2 삼성 라이온즈 감독 시절
4.2.1 2011 시즌
2011년 골든글러브 시상식에서 |
선동열 감독이 경질당하면서 후임 감독으로 선임, 2011년 1월 5일에 감독으로 취임했다. 이제 막 감독 생활을 시작하게 된 터라 많은 팬들이 걱정하였으나, 초보 감독임에도 대단한 활약을 하고 성적을 시즌 1위까지 올려 SK 와이번스의 김성근 前 감독의 야신, 한화 이글스 한대화 前 감독의 야왕에 이어 '야통(야구 대통령)'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런데 자칭인 것은 안비밀 팬이 부르기 시작한 게 아니라 본인이 불러달라 했다. 그리고 한국시리즈 우승을 달성하여 '야통왕'야동왕까지 등극하였다. 이어서 아시아 시리즈까지 제패하는 등 취임 첫 해에 그 어떤 대한민국 프로야구 팀 감독도 달성하지 못한 우승 트리플 크라운을 달성하는 업적을 만들어냈다. 흠좀무...
자세한 내용은 해당 문서 참조.
4.2.2 2012 시즌
감독으로 데뷔하자마자 3관왕을 석권한 임팩트 때문에 강력한 우승 후보팀을 이끄는 감독으로 찬양받았으나 초반에는 한동안 6~7위에서 놀 정도로 부진[13]하여 답 안 나오는 믿음야구, 신의 한 수라고도 불리는 병X같은 투수운용, 교체 & 컨디션 고려 전혀 안 한 것처럼 보일 만큼 이해하기 힘든 타순으로 팬들에게 욕을 바가지로 얻어먹었다. 돌중일, 관중일(조금이라도 석연치 않은 판정이 나와도 어필을 하지 않는데다 감독으로서 하는 것 없이 관중처럼 덕아웃에서 멍하니 경기만 쳐보다 한 박자, 아니 세 박자 늦은 대처로 모든걸 망친다고 해서)[14], 관中一, 관중 1 등 모욕적인 별명이 무지막지하게 늘어난 상태. 또한 간디 중일, 류간디[15]로도 불린다. 그나마 2012년 여름에 삼성이 1위를 탈환하고 굳히자 이런 식의 조롱은 많이 줄어든 상태. 그러나 가끔 어이없는 경기 운영을 할때는 얄짤없이 돌중일, 관중일로 까인다(...)
2012년 10월 1일 2년 연속으로 페넌트레이스 우승을 차지하고, 11월 1일 역시 2년 연속으로 한국시리즈 우승까지 차지하면서 무능하다고 까이는 일은 거의 없어졌다. 아시아시리즈 때 라미고 몽키스의 선발 로리의 자료만 구하지 못했다고 패장의 변을 했을 땐 까이긴 했다
자세한 내용은 해당 문서 참조.
4.2.3 2013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2013 WBC 대표팀 출정식에서 |
2012년 시즌 우승팀 감독 자격으로 2013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대한민국 국가대표 감독을 맡게 되었다. 류현진, 추신수 등이 메이저리그 팀 이적으로 적응기가 필요했던 상황이라 국대에서 빠지며 최약의 대표팀이라는 평가를 받긴 했지만, 일단은 나름대로 선수들을 강훈련시키며 대회를 준비했다.[16]
2013년 3월 2일 중화민국 타이중 국제야구장에서 열린 네덜란드와의 B조 본선 1라운드 경기에서 부적절한 투수운용과[17] [18] 미숙한 경기운영등의 이유로 충격의 0:5 영봉패를 당하면서, 감독 자질 논란에 또 불이 붙고 말았다.(...)
결국 타이중 참사라는 이름으로 1라운드 탈락을 당하면서 실컷 욕을 먹었다.
이미 다음 아고라에는 류중일 감독의 사퇴 청원이 올라와 있을 정도.[19] 거기다가 예전 나가기 전 인터뷰를 보여주며 그 말대로 돌아오지 말라고 하고 있다. 1라운드는 올라가지 않겠나 라는 생각을 한다. 2라운드 못 올라가면 한국에 못 들어온다
이미 대다수 야구팬들은 가루가 되도록 씹어대고 있고, 그를 옹호하는 것은 극히 일부 삼성 라이온즈 팬들 뿐이며 나머지 일부팬들도 비판과 실망이라는 게 중론이다. 삼갤도 이번 건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반응이다 네이버 스포츠의 타이중 참사 관련 기사에도 베플은 대개 류중일 감독의 책임을 강조하는 글들이다.
김재박 감독과도 비교되었다. 공교롭게도 둘 모두 유격수 출신 감독에, 소속팀을 우승으로 이끌었지만 팀빨이라는 소리를 들었으며, 국제전에서 크게 죽을 쑨 이후 평가가 급락했다. 김재박:중일아 너도 LG와서 검증받아야 돼 나도 현대 있을 땐 우승 밥먹듯이 했어그리고 2016년 삼성은 김재박이 2005년 전년도 우승한 현대를 7위까지 떨어지게된 상황과 비슷한 그림이 그려지고있다.
이 타이중 참사로 인해 지금까지 쌓아왔던 좋은 이미지를 다 깎아먹고 역적 취급을 받게 되었으며[20], 결과적으로 야구팬이나 본인 모두에게 2013 WBC 국대 감독 커리어는 흑역사로 남고 말았다.[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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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국제공항으로 귀국 당시 |
이렇게 고개숙여 사과하는 모습을 보여서 어느 정도 까임은 덜해졌다. 그리고 양아들이라고 불릴정도로 류중일 감독이 좋아하던 김상수가 페북질을 하다가 된통 까이다 보니 류중일에게 몰리던 비난과 비판도 좀 줄어든 편. 아버님, 제가 아버님 대신 모든 욕을 먹겠습니다![22] 하지만 여전히 류중일 책임론을 들먹이는 사람은 많다.
그러나 WBC 직후 박희수, 최정, 정대현, 강민호, 윤석민 같은 경쟁팀 주축 선수들의 부상 소식이 전해져 오면서 해당 팀 팬들은 류중일 감독을 거의 원쑤 보듯이 하는 상태.[23]
4.2.4 2013 시즌
시즌 초반부터 경북고 위주의믿음의 야구를 구사하느라 삼성 팬들에게 엄청나게 까였으며, 지난 2년에 비해선 이래저래 미숙한 경기운영을 보여주기도 하였으나, 시즌을 마친 그의 자리는 사상 최초의 페넌트레이스, 한국시리즈 3연패 감독 등극이었다. 명실공히 삼성 왕조를 건국하였다.
자세한 내용은 해당 문서 참조.
4.2.5 2014 인천 아시안 게임/야구
전년도 우승감독이 국대감독을 맡는 방식을 유지하여 2014 아시안 게임 야구 감독으로 선임되었다. 그러나 2013년 한국시리즈 초반에 보여주었던 불안한 경기 운영으로 인해 몇몇 팬들은 2014 인천 아시안 게임의 국가대표 감독으로 활약하면 타이중 참사가 재현되는게 아닐지 걱정하기도 한다. 그리고 2013 아시아 시리즈 준결승에서 캔버라 캐벌리에게 패하면서 이러한 걱정은 점점 커지게 되었다.
결국 야구 국가대표 감독 선임 방식, 원점부터 재검토라는 기사가 나왔지만 달라진 거 없이 결국 2013년 12월 KBO 이사회에서 2014 아시안 게임 국대 감독으로 류중일을 선임했다. 병역문제가 걸려있는 국제대회가 늘 그렇듯 선수선발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왔으나 결과적으로는 우승했다.
4.2.6 2014 시즌
KBO 리그 역사상 최초로 페넌트레이스와 KBO 한국시리즈를 4년 연속 우승하는 통합 4연패을 이루어낸 감독1대 제국 건설
선수로서도 뛰어났지만, 감독으로서는 김응룡과 더불어 길이 KBO 명장으로 남을 업적이다.우승10번 감독과 4연속 통합우승감독
자세한 내용은 해당 문서 참조.
4.2.7 2015 시즌
시즌 내내 탈도 많고 위기도 많았지만 KBO 최초 5년 연속 패넌트레이스 우승 달성이라는 대업적을 세웠다.
그러나 한국시리즈를 앞두고 감독 인생 최대의 위기가 찾아온다.
그리고 그 위기를 극복하지 못하며 두산에게 무기력하게 패해 5년 연속 한국시리즈 제패에 실패.
4.2.8 2016 시즌
2016 시즌의 팀 전력의 붕괴와 동시에 프런트의 병크 및 삽질로 그 동안의 성적에 묻혀있던 삼성 라이온즈 시스템의 문제점들이 드러나는 와중에 시즌 전부터 프런트의 비판을 몸소 대신 받은 감독.
몇몇 선수들의 불미스러운 사건과 지독한 부상불운, 외국인 선수 스카웃 폭망으로 인해 힘겨운 시즌을 보낸 감독.
2016년의 삼성 선수단이 전성기 때의 모습이 아닌데다 주전 선수들을 뒷받침해줄 1.5군급 선수가 부족한 상황에 연이은 부상자 속출까지 겹치면서 어려움을 겪고 있다. 여기서 상황이 더 나아질 만한 부분도 보이지 않기 때문에[24], 팬들 사이에서 재계약 여부에 대해 논쟁이 심심찮게 붙을 정도다.[25]
6월에는 절대 제대로 된 운영을 했다고 볼 순 없지만 후반기 31승 30패를 기록하며 외국인 선수가 없고 부상선수도 많고 투수진이 완전히 망가진 팀 치고는 나쁘지 않은 성적을 거두기도 했다.
자세한 것은 해당 문서로.
4.2.8.1 그리고 재계약 실패
용병 마이너스 WAR, 주전 선수들의 줄부상은 통합 4연패 류중일도 어쩔 수 없었다.
9위로 떨어진 책임은 감독탓도 있지만 감독 외적인 부분에서 더 많다는 의견이 많았었고 10월 14일 재계약한다는 기사가 떴다. # 그러나 이후에 구단이 류감독과 재계약을 하지 않고 김한수 타격코치를 감독직에 올리면서, 물러나 기술고문 자격으로 잔류하게 되었다.#
팬들이 예상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 제일기획 이관에 따른 재정지출 감소[26]
- 도박 사건 이후 대처. 특히 윤안의 시즌 소화 불가가 그룹 지시였으면 가능성이 있다.[27]
- 장기집권으로 생길 피로감 예방 차원. 아무래도 7년 넘어가면 매너리즘에 빠질 거라 생각한 듯.
- 세대 교체가 안 되고 있어서. 시즌 내내 2군 선수를 제대로 기용하지 않았다는 평가가 있는데, 올해 삼성 2군은 압도적인 꼴찌를 기록했으며 2군에 제대로 된 훈련 시설도 없는 등 반박할 거리는 충분히 많다.
- 류중일 감독이 재신임되면 코치진들 물갈이가 안 되서. 기술고문으로 보낸 진짜 이유가 이거라는 추측도 있다. 특히 2군 코치진들 물갈이하려면 이거밖에 없긴 하다. 이렇게 되면, 왜 고위층에서 갑자기 방향을 틀었는지 알 수 있게 된다.
재계약을 확신한 기사 뜬 지 하루만에 감독에서 물러난다는 기사가 뜬 것을 볼 때 류중일 자신의 의중...은 개뿔, 위의 재계약 기사가 뜬 날 불가 통보를 전달받았다. 그리고 연대책임으로 안현호 단장도 같이 물러났다. 류중일은 아쉽지만, 안현호가 꺼졌다! 만세!
4.2.9 그 후
삼성 감독직에서 사실상 경질되다시피 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휴대폰 벨소리를 삼성 라이온즈 테마곡으로 해 놓았다는 인터뷰 기사가 났다. # 팬들의 반응은 말이 필요없을 것이다.
앞으로는 기술자문으로써 부상 방지 및 MLB와 NPB의 훈련 시스템을 공부하고 싶다고 한다. 역시 시스템 감독.
5 평가
류중일/평가 문서로.
6 기타
- 삼성에서만 선수로 13년 감독 포함 코칭스탭으로 14년을 재직한 진정한 의미의 삼성맨.[28] 그러나 류중일의 현역 마지막 경기가 1999년 플레이오프 7차전....ㄷㄷㄷㄷ
- 별명은 그라운드의 살구꽃(…). 류중일 본인의 인터뷰에 따르면 얼굴에 여드름이 많아서 멍게라 불렸는데, 이미 선동열 전 감독이 그 별명을 갖고 있었는지라 그와 비슷한 살구꽃이라는 별명이 붙었다고...한 마디로 피부 때문에 생긴 별명이다.
- 다시 태어나면 야구가 아닌 골프 선수를 할 것이라고 말하는 골프 매니아로 야구계 골프 최고수로 알려져 있다. 1991년 선수 시절 골프를 처음 접했는데 골프와 야구 스윙이 달라 골프가 타자에게 독이 될 것 같다고 생각하면서도 골프에 푹 빠졌다고 한다. 2002년에는 야구인 골프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하기도 했다.
- 한대화 감독이 야왕이란 별명을 얻자 1위 하면 야통이라 불러달라고 하였다.# 그리고 2011년 6월 28일 LG 트윈스와의 경기에서 4:3으로 역전승! 같은 날 0.5게임차 앞서 있던 SK는 한화에 1:5로 패하면서 순위가 바뀌어, 삼성 1위 등극과 함께 야통 등극.
하지만 어찌 된 게 야통이라는 별명은 잘 언급되지 않고 있다. 야왕 때문인가사실 대부분 돌중일, 관중일이라고 부른다2016년 7월 꼴찌로 떨어진 순간 꼴통이라는 복합 의미의 별명이 잠깐 붙었다.
- 2013 시즌에 당시 2위였던 LG 트윈스가 1위, 3위, 4위와 3연전을 앞두고 있을 때 이를 삼국지의 유비, 관우, 장비에 빗댄 도원결의 짤이 돌면서 1위였던 삼성이 유비 포지션을 맡았고, 이 때 류비라는 새로운 별명을 얻었다.
그리고 혼자 졌다혼자 지고 최종 승자가 되는게 정말 유비같다
- 불암콩콩코믹스에서는 가쿠란을 입은 교복 캐릭터로 나온다(…). 이름이 중일(中1)인데서 착안한듯 하다. 혹은 류중일과 무관한 에피소드에서는 관중석이 나오는 장면에 지나가는 관중1로 나오기도(...)
- 2012년 초에는 시즌 전 터진 2012년 프로야구 승부조작 사건에 대해 가벼이 여기는 것 같은 발언을 하여 논란이 있었고,[29] 시즌 초에는 야통, 류승사자 등 그런 거 없고 돌중일, 관중일, 류정일[30]로 진득하게 씹히기도 했으나 다행히 여름에 1위로 복귀하는 데 성공하여서 악질 까들의 입을 잠잠하게 했다. 재미있는 점은 2012년 시즌 초반에 삼성이 한참 삽을 풀 때도 "선동열 감독님을 자르고 류중일을 앉힌게 화근이다"라는 의견은 삼성 팬덤에서 매우 드물었다는 점. 왜냐하면 류감독이 6위에서 삽을 푸던 무렵 선감독도 7위에서 사이좋게 삽을 펐었기 때문.
- 모 인천야구 수치이자 팀 선배에게 본의아니게 수모당했다. 그 선배는 '초보감독이 첫해에 한국시리즈에 간 적이 있는가? 선수들은 나만 믿고 따라왔으면 한다.' 라고 말했는데, 이는 2011년 처음 감독으로 부임해 정규시즌 우승과 한국시리즈 우승을 한 류중일을 까맣게 망각하고 한 이야기다.
- 덕장으로 유명하지만 야구계에 몸담으면서 딱 3명에게 손찌검을 한적이 있다고 한다. 이 3명은 바로 노장진, 김진웅, 양용모.[32] 좀 더 자세히 설명하자면 노장진은 덕 아웃에 들어와 김응용 감독이 보는 앞에서 글러브를 집어던지고 쓰레기통을 걷어차는 난동을 부렸으며, 김진웅은 신인시절이었던 2000년 스토브리그때 친구랑 놀러간다는 이유로 선수단 소집을 무시했으며, 양용모는 새벽 4시까지 술먹고 오다 때마침 골프치러 나가던
백골퍼백인천에게 딱 걸렸다고 한다. 그 때문에 당시의 삼성 감독에게 사생활 문제로 질책받고 팀에서 쫒겨나는 걸 막기 위해 일부러 감독이 보는 앞에서 류중일이 먼저 선수를 쳤다고 한다.[33] 그리고 저 중 노장진과 김진웅은 결과적으로 자기관리 실패로 강제 은퇴를 하게 된다.[34]
- 평소 선수를 칭찬하기로 유명하지만 윤성환이 라디오 볼에서 인터뷰를 하던 도중 류중일 감독이 맨날 구속이 느리다고 구박하고 김태한과 오치아이 에이지 전 투수코치가 윤성환을 달래는 일이 종종 있었다고(...)
- 위에서 이어서 꽤나 독설가이다. 15년 시즌 부진한 장원삼에게 돈내놔라 먹튀야라고 하던가, 13년 시즌 부진한 이승엽에게 공안보이면 은퇴하라고 하던가, 나성범불러놓고 나성용과 비교하는 걸보면 엄할때는 엄한듯. 물론 위 믿음의 야구를 통해 볼때 다 애정이 있어서 그런 것이지 애초에 관심도 없으면 1군 올리지도 않는다. 대표적으로 12년도에 최고의 부진을 겪은 채태인의 연봉협상때 채태인의 연봉을 대폭 깎았으나 감독이 구단에 사정하여 옵션을 걸게 한다. 그리고 채태인의 13년도 성적은...
- 선수시절에는 삼성 시절 김성근 감독과 마찰이 있던 선수 중 한명이다. 나머지는 이만수, 김성래, 강기웅 등이 있다.[35] 네이버 라디오볼에서 9개 구단 중 사람 좋기로 유명한 모 감독이 김성근 감독에 대해서 정색하면서 싫어하는 모습을 보여서 놀랐다고 하는 언급이 있었는데, 엠팍에서는 이 인물을 류중일 아니면 김시진으로 보는 이유도 여기 있다. 딱히 김시진과 김성근의 접점이 거의 없다는 점을 생각하면 류중일일 확률이 더 높은 편.[36]
- 선수들과 내기를 많이한다. 감독 부임 이후, 삼성의 주요선수들과 개인성적을 걸고 내기를 하는데. 국내선수들과는 주로 돈으로하고 외국인선수들은 가방(배우자의)이나 지갑을 걸고 내기를 한다. 2012 시즌 목표를 달성한 탈보트와 조금 못미친 고든에게 2013 시즌 스프링캠프 때 루이비통여성용 가방을 사서 보냈다고 한다. 참고로 2012 시즌 여러 선수들과 내기에 건 금액이 3000만원이다.(...) # 그후, 2015 시즌을 앞두고 헐크와 나바로에게 작년 시즌 성적에 대한 내기로 선물을 주었다. #
1승차이로 못받은 마틴 지못미물론 2015 시즌에도 나바로와 피가로, 클로이드와도 내기를 했다,#
- 유독 성적에 비해서 인정을 못 받는 감독이다. 4년 연속 통합우승과 5년 연속 정규리그 우승에 2011 아시아 시리즈에서까지 우승을 차지했음에도 불구하고, 팀빨 감독으로 매도당하여 매년마다 시험대에 오르는 감독이다. [37] 2016년이야말로 그동안의 성적이 팀빨, 선수빨이 아니었다는걸 입증할 절호의 기회[38]였는데 역대급 부상악령으로 팀이 제대로 돌아가지 않을 지경에 이르며 입증에 실패했고, 재계약 불발되며 입증할 기회도 사라졌다고 할 수 있다.
- 2011년 재임 이래 KBO에서 수 많은 감독들이 잘리는 와중에 혼자만 제 자리를 지킨 덕에 류시퍼[39]라는 별명이 붙기도 했다.
- 2011년 우승 후에는 한 기자의 제안 덕에 야구 대통령의 줄임말 '야통'으로 불렸으나 그리 오래 가진 못했고, 이후로는 긍정적인 별명으로 ‘삼성밖에 모르는 야구광팬’, ‘살구아재’, ‘발전없는 감독’[40], 장수생, N수생[41]
실사판 프야매 즐기는 대구아재등으로 불리며 부정적인 별명으로는 '돌중일', '관중일',이런쳐중일 등으로 불린다.[42]
6.1 김도환 KBS 기자 관중일 발언 논란
2015년 8월 27일 아이 러브 베이스볼 방송 당시 김도환 기자가 뜬금없이 방송에서 관중일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일이 벌어졌다. 분명 이승엽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고 있었고 앞뒤 맥락을 고려해도 관중일이라는 별명이 나와야할 이유가 전혀없던 상황에서 이런 관중일이라는 별명을 언급했으며, 이 후 분위기가 어색해지자 변명이랍시고 "다른 기자들도 관중일이라 부른다"는 소리로 스스로를 포장까지 했다.
당연히 삼성팬덤은 이날 폭발했다. 삼갤과 엠팍은 물론이고 심지어 삼성 라이온즈 공식 홈페이지(삼피)[43]나 사자 사랑방까지 분노에 가득찬 글들이 올라왔을 정도[44]
이 후 변명이랍시고 한 다른 기자들도 관중이라 부른다는 발언에 대해 김은식작가와 손찬익 기자가 다음과 같은 트윗으로 정면으로 반박하고 나서 여론은 점점 악화되는 중. 김은식 작가의 트윗/손찬익 기자의 트윗
하지만 이후에도 별다른 사과가 없어서 삼성팬들의 분노는 계속 되는 가운데 이번에는 백종인 칼럼니스트가 야구는 구라다라는 칼럼에서 시작부터 관중일이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역시 비난받고 칼럼을 수정하는 일도 있었다.# 이에 대해 네티즌들의 반응은 백종인 기자는 원래부터 인터넷에 떠도는 별명들을 칼럼에 갖다 썼다며 언론에서도 잘 언급되지 않는 야통(야구대통령)이라는 별명을 썼다는 점을 들어 비하할 의도 없이 해당칼럼을 올렸을 것이라는 의견과 어설프게 후배기자를 감싸려고 굳이 화를 자초했다는 의견으로 나뉘었다.
6.2 류중일의 저주?
11시즌 한화전 9승10패
-> 한대화 감독 12시즌 도중 경질
12시즌 두산전 7승12패
-> 김진욱 감독 13시즌 준우승 후 경질
13시즌 엘지전 7승9패
-> 김기태 감독 14시즌 도중 야반도주
14시즌 두산전 6승10패
-> 송일수 감독 14시즌 후 경질
15시즌 한화전 6승 10패
-> 김성근 감독 현재 과거의 영광이 박살날 위기자신도 까인다는 게 함정
16시즌 롯데전 5승 11패
-> 조원우 감독 과연 어떻게 될지?
매 시즌 삼성전에서 가장 우세를 거둔 팀의 감독은, 다음 해를 무사히 마치지 못했다. 1경기 더 가져간 죄 때문에한대화 감독은 12시즌 도중, 김진욱 감독은 13시즌 후 경질되었다. 끝까지 삼성 긴장시킨데다 2경기 더 가져갔다는 이유로김기태 감독은 14시즌 도중 사직하는 사상 초유의 행동까지 벌였다. 삼성만 바라보다 다른데 신경못쓴송일수 감독은 14년에 우세 시즌을 보내고 바로 경질되었다. 물론 표본이래야 단 네 시즌에 불과하니만큼 법칙이랄 것까진 없지만, 너무나도 절묘해서 팬들 사이에서 이야깃거리가 되고 있다. 공교롭게도 2015년에 삼성전에서 가장 우세를 거둔 한화의 김성근 감독도 2016년 최악의 부진을 달리면서 커리어 박살 및 경질 위기에 놓여있다. 하지만 류중일 본인의 커리어도 위험하다 서로를 죽이고 있다
여기서 한가지 짚고 넘어가자면 13시즌에 삼성에게 상대전적 우위였던(7승 1무 8패) 넥센의 염경엽 감독은 햇수로 4년차인데 아직까지 건재하다. 비록 넥센이 13시즌에만 삼성에게 우위였으나, 14, 15시즌에 열세였다고 해도 염경엽 감독이 그대로 있는 것을 보면 억지에 불과. 저 드립이 흥할려면 염경엽 감독도 몇년전엔 옷벗었어야 했다. 그런데 그런 저주를 뿌리치고 현재 삼성 상대로 2승 1패로 우세에 있다. 아직 13경기를 더 치뤄야 하지만 사실상 꼴지나 다름없는 삼성을 상대로 최소 7번을 이기고 올라설듯. 그러니까 좀 끼워 맞추지 말라고 그래도 제일 크게 이긴 팀이 아닌 건 맞잖아?
화제로 돌아와서 2015년 삼성을 꺾고 우승한 두산의 김태형 감독도 이 범주에 포함될지 모른다는 의견도 있다. 시즌 전적은 5승 11패로 삼성에게 크게 밀렸지만, 한국시리즈를 앞두고 크나큰 재앙을 만나 분위기가 개판이 된 삼성을 상대로 4승 1패로 크게 일축시키고 우승했다. 더구나 두산은 OB시절부터 한국시리즈 우승 다음해에는 항상 크게 망하는 징크스를 갖고 있기 때문에(...), 과연 두산의 행보, 그리고 김태형 감독의 행보가 어떨지는 2016시즌때 판가름이 날 것이다. 그래도 부임 첫 해에 우승시켰기 때문에 경질까지는 가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지금 두산의 행보를 보면 잘리지 않을 것 같다. 리틀 김인식 또는 김인식의 부활이기 때문에 절대 안잘린다. 왜잘라? 한 10년 재계약 해서 10번 다 우승할건데 다만, 위의 것은 시즌 전적 기준이라 PS는 표본이 없어서 두산은 무난하게 갈 것으로 보인다.
두산이라는 예외 덕에, 삼성 상대로 우세를 보였던 팀들이 시즌 전 약팀으로 평가 받았던 팀인지라 체력 안배를 위해 무리를 하지 않아서 그런 것이며, 상기된 팀들은 13년 두산을 제외하고는[45] 팀 전력 상 다음 시즌을 장담할 수 없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그런 것일 뿐이라는 반론도 만만치 않다. 그리고 위의 팀들은 (두산 빼고) 그 시즌에 하나같이 돌풍의 팀이었다는 것이 있다. 아, 물론 두산도 포함되는데 안 좋은 의미로...;;; 실제로 11년의 한화는 뭐 말할 것도 없고, 12년의 두산도 2011년의 내홍 및 불펜진의 과부하가 표면화 되면서 약체 평가를 들었고, 13년의 LG는 여름 되기 전까지는 기대도 안한 상황 이었으며, 14년 두산의 경우 팀 분위기가 너무 뒤숭숭했다. 아직 판가름이 안난 15년 한화의 경우는 다소 애매하지만 객관적인 전력 상으로는 역시 약체라고 볼 수 밖에 없다. 게다가 상기된 팀들은 두산을 제외하고는 기반이 부실했으니 다음 시즌에 부진해도 이상할 게 없기도 하고 말이다. 정작 한화는 그 다음 시즌 우승후보로 점쳐졌다는 게 함정[46] 물론 저주 효과는 있는지, 김기태 감독이 2015년에 KIA를 맡은 김기태 감독은, 8승 7패 상태에서 자리 보전하기 위해(??) 동률을 만들었다고 하는 믿거나 말거나같은 이야기가 있다.
7 관련문서
8 감독 성적
역대 감독 전적 | |||||||
연도 | 소속팀 | 경기수 | 승 | 패 | 무 | 정규리그 | 포스트시즌 |
2011 | 삼성 라이온즈 | 133 | 79 | 50 | 4 | 1위 | 우승 |
2012 | 133 | 80 | 51 | 2 | 1위 | 우승 | |
2013 | 128 | 75 | 51 | 2 | 1위 | 우승[47] | |
2014 | 128 | 78 | 47 | 3 | 1위 | 우승[48] | |
2015 | 144 | 88 | 56 | 0 | 1위 | 준우승 | |
2016 | 144 | 65 | 78 | 1 | 9위 | - | |
총계 | 810 | 465 | 333 | 12 | |
- ↑ 흔히 포항시 출신으로 알려지기도 했지만, 실제로는 경북 영덕군 태생. 영덕에서 태어나, 포항에서 야구를 시작해 대구에서 성장 하였다..
- ↑ 단 야구를 시작한 곳은 포항 중앙초등학교이다. 자세한 사항은 아래 아마추어 시절 참조.
- ↑ 1년 유급
- ↑ 앞으로도 국제대회 감독을 역임할 경우 수정 바람
- ↑ 2015년 기록까지 합산할 경우 페넌트레이스 5년 연속 우승이라는 기록이 추가된다.
ㅎㄷㄷ.. - ↑ 프로야구 사상이 아니다, 전체 한국 야구 사상이다! 이 시절 박노준은 정말로 여고생을 몰고 다니는 아이돌이었다. 봉황대기 결승전 다음날 박노준이 입원한 병원에 당시 서울 시내 여고생들이 병원 앞에서 진을 치고 울먹이더라는 얘기는 아직도 고참 스포츠 기자들 사이에 회자되는 유명한 에피소드이다.
- ↑ 1차 전성기는 남우식, 임신근이 이끈 1970년대 초반, 2차 전성기는 황규봉, 이선희의 1970년대 중반. 그리고 이 때를 마지막으로 경북고 야구부는 기나긴 침체기에 접어들게 된다. 1981년 이후 경북고의 메이저 전국대회 우승은 이승엽이 2학년이었던 1993년에 거둔 청룡기 우승이 유일하다. 그럼에도 전국대회 통산 우승 회수는 여전히 1위이다.
- ↑ 삼성 라이온즈의 레전드들 중 대졸 출신은 한양대학교 출신이 많다. 장효조, 이만수, 김시진, 류중일, 성준 등. 이승엽도 한양대 진학이 예정되어 있었다는 일화가 있다.
- ↑ 사실 2010년대 프로야구 감독들은 고려대-OB 테크를 탔거나 그 둘 중 한 발짝이라도 걸친 경우가 대부분이며, 거기 속하지 않는 사람들은 죄다 한양대-삼성 테크를 탔다.
- ↑ 경북고 유격수로서 이미 스타 반열로 올라온 류중일에게 대학교의 러브콜이 쏟아진 것은 당연한 일로서, 본인은 연세대에는 이순철(참고로 이순철은 대학교 및 프로 1년차까지만 하더라도 내야수였다)이, 고려대에는 민경삼(여러분이 생각하시는 그 SK 와이번스 단장 민경삼이 맞다)이 있어서 한양대로 진학했다고 한다 기사참조
- ↑ 해당 문서를 보면 알겠지만
핵폭발 위험이 있는컨디션이 좋지 않았던 김희걸, 각각 전날 선발과 다음 날 선발로 예정된 윤성환, 장원삼을 제외한 9명의 투수를 투입했다. 한마디로 최소 인원만 남기고 모두 투입한 셈이다. 여기서 특기할 점은 다음날 선발인 장원삼도 올리지 않았다는 점인데 이는 마지막 발악이 아니라, 못해도 다음경기까지는 갈것을 생각하고 투수를 투입했다는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 ↑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80년대를 대표하는 스타 1명, 90년대를 대표하는 스타 한명, 00년대를 대표하는 스타 1명을 각각 뽑아서 시포, 시투, 시타를 맡겼는데 80년대를 대표하는 선수로는 이만수를, 90년대를 대표하는 선수로는 박충식을, 마지막으로 00년대를 대표하는 스타는 양준혁을 선정했다, 추억을 되살리려는 의도도 있었겠지만 강제은퇴 당한 이만수와 말년에 트레이드 당했던 박충식을 시민구장의 마지막 시구자로 선정함으로서 과거 레전드들과의 악연을 완전히 청산하겠다는 의미로도 해석할 수 있다. 거기에 구단 측에서 특별석을 마련해준 삼성 OB 모임에는 김시진도 참석을 했었다. 물론 김시진과의 관계는 선동열의 다음 감독으로 김시진을 섭외하려 했을 정도로 이미 풀어진 상황이긴 했지만.
- ↑ 그런데 1위와의 게임 차는 얼마 나지 않는 치열한 페넌트레이스였기 때문에 중반 이후 1위로 올라서는 게 이상하지는 않았다.
- ↑ 그런데 15시즌은 비디오 판독 성공률이 꽤 높다고 한다. 참고
역전재판 류중일근데 이건 경기 분위기를 바꾸기위한 판독 요청보다 진짜 오심이라고 생각할때만 사용해서 그렇다. - ↑ 심판에게 어필을 잘 안 해서 붙은 별명이라고 한다.
- ↑ 류현진이 빠지게 되는 과정에서 은근슬쩍 류현진에게 참가하라는 것 같은 압박성 발언을 했다는 논란이 한동안 오갔다. 추신수 또한 괘씸죄 때문인지 필요 이상으로 엄청 까인 감이 있었다. 정작 일본 메이저리거들의 불참에 대해서는 관대한 여론이 있었다는 것이 아이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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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양상문이 박희수를 올리자고 했으나 선수빨 소리를 듣기 싫어한 류중일은 이를 무시하고 노경은을 올렸다가 퐈이아...이상의 내용은 '현장의 지인으로부터 문자로 전해들은 소식' 이라는 WBC 뒷담화란 아프리카 개인 방송에서 나온 내용으로 엄밀히 이야기하면 사실 관계가 확인되지 않은 이야기라 할 수 있다. 글전문 당시 주전이었던 김태균이 경기 전까지 자신이 주전이었다는 것을 몰랐다는 상식 밖의 이야기나, 실제로 네덜란드 전 이후 연습을 가진 대표팀이 호텔이 틀어박혀 있었다는 등의 사실관계가 어긋난 이야기도 있는 걸 봐서는 이 방송을 완전한 사실로 받아들이기는 어려울 것이다. - ↑ 일단 오피셜 기사에 따르면 기사참조 노경은의 전천후 투수로서의 역할을 분배한 것은 양상문 코치이다. 물론 실제로 투수 교체를 한 것이 누구이든 그 책임을 감독이 져야 한다는 점에서 류중일 감독의 운영은 비판 받아 마땅하나 '선수빨 소리 듣기 싫어서 독단적으로 교체했다.' 라는 앞 각주의 이야기는 제대로 된 사실 관계가 확인되기 전까지는 루머로 생각해야 할 것이다.
- ↑ 사실 다음 야구 게시판이나 아고라 쪽에 올라오는 야구 관련 의견은 특정 팀의 의견을 참고한다면 모를까, 전체 네티즌의 의견을 대변하는 용도로서는 바람직 하지 않다. 일단 아고라 자체가 아무나 기분내키는 대로 청원을 남발하는 곳인데다가 미디어다음 문서를 보면 알겠지만 다음 관련 커뮤니티는 선동열 경질을 이유로 호사방 네티즌들이 친 삼성 라이온즈 성향 네티즌들을 축출하다시피한 상황이다. 따라서 다음 커뮤니티에 올라오는 의견 대부분은 야구팬들의 의견이라 보기엔 무리가 많고, 별 의미 없다고 보는것이 맞다.
- ↑ 2012 시즌에서도 초반에 삼성이 부진했을 때, 돌중일, 관중일이라 부르며 이미지를 점점 깎아먹일 조짐이 보이긴 했지만 어찌됐건 우승을 거두며 이런 조롱은 줄어들었다. 이 때는 설령 비난이 쏟아진다 해도 류중일을 실드쳐줄 팀팬들이 있었고, 그저 삼성의 막강 전력을 질투하는 이들의 징징거림으로 치부하면 그만이었다.
- ↑ 실제로 2012년 시즌과 2013년 시즌 두 시즌 모두 통합 우승을 달성 했으나 2012년에 비해 2013년의 류중일에 대한 평가가 매우 박해졌다. 김성근도, 김응용도 달성하지 못한 3년 연속 통합우승이라는 대기록을 세웠지만 이 타이중 참사 한방으로 인해 명장소리를 제대로 듣지 못하게 되었다.
- ↑ 이 드립은 실제로 불암콩콩코믹스에서 약간 바꿔서 써먹었다.
- ↑ 불행하게도 여기에 언급된 세 팀 모두 2013 시즌 가을야구 진출에 실패했다.
- ↑ 그나마 구자욱 정도만이 향후 삼성의 프랜차이즈 스타 후보로 자리잡고 있다. 내년에 최형우, 차우찬을 잡을 FA머니가 있을지는 의문이며 이 두 선수마저 일본, 메이저리그 또는 타 구단으로 간다면 더더욱 암울해질 전망이다.
- ↑ 이번 시즌이 끝나고 재계약하지 못할 경우, 그나마 좋은 시나리오는 김응용처럼 삼성 구단의 요직을 맡거나 본인이 계속 맡고 싶어하던 경북고 야구부의 감독으로 부임하는 것이다.
타 팀 가면 진골로 격하됨.프런트로 부임하는 것도 생각해 볼 수 있으나, 구단이 제일기획 산하로 편입된 이후의 삼성은 더 이상 예전의 삼성돈성이 아니라서 바뀐 환경에서 적응해나갈 수 있을지도 미지수다. - ↑ 작년부터 언급될만한 시나리오였다.
- ↑ 그룹 지시를 일개 감독이 거부한다는 게 가능한지?
- ↑ 류중일보다 한팀에서 더 오래 뛴 선수/코치로는 같은 팀의 장태수 2군 감독이 있다. 이쪽은 연수기간 1년을 제외하면 원년부터 2015년 현재까지 계속 삼성 소속이다. 장태수는 류중일보다 명백하게 4년, 구단에서 보내준 연수기간까지 합치면 5년을 더 오래 삼성에 소속되어 있으며 원년부터 현재까지기 때문에 더 찾아볼 것 없이 한팀에서 재직 최장기록이라 할 수 있다.
- ↑ 기사는 다음과 같다.
- ↑ 최형우라늄, 차르봄바, 채르노빌 등과 함께 핵실험을 한다는 이유로
- ↑ 감독이 난처한 상황에 처했을 때 나타나는 '한 대 피우고 싶으시죠?' 카피다. 잠실야구장 3루측 흡연구역에도 니코스탑 광고가 있다.
- ↑ 특히 노장진은 이 부문에 있어서는 그 정수근이 양반으로 보일 정도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개막장이었다. 자세한건 해당 문서 참고.
- ↑ 출처는 마해영과의 인터뷰.
- ↑ 노장진은 잦은 항명을 일으키다 모든 구단에 찍혀서 더 이상 현역생활을 이어 갈 수 없었으며, 김진웅은 대체 복무 기간 동안 체중관리를 전혀하지 않아 기회를 줄래야 줄 수 없을 지경까지 살이 불어버렸다. 팀 동료였던 윤성환과 대비되는 부분.
- ↑ 이만수, 김성래는 상당히 김성근에게 홀대받은 선수였으며, 강기웅, 류중일은 삼성 수비 시스템 수정에 대한 김성근과의 마찰이 컸다. 결론적으로는 삼성의 수비 스타일의 확립에는 류중일의 방식이 맞았다는 것을 확인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이전 버전에는 김태한도 포함되어 있었는데, 김태한은 당시 1군에 갓 들어온 신인이라 김성근 감독에게 덤비는데 앞장설 여건이 되지 못하였다. 다른 모 좌완투수를 착각한 것으로 보인다.
- ↑ 감독 취임 당시 감독으로써의 지향점이 당시 1위 팀 감독이던 김성근이 아니라 전년도에 치열하게 플레이오프를 치렀던 김경문이었던 것도 이를 뒷받침한다.
- ↑ 다시 한번 상기시키는 것이지만, 매년 전력이 상승한 상태에서 연속 우승을 한 것이 아닌, 매년 전력이 하락한 상태에서 연속 우승을 한 것이다. 이 쯤되면 설사 실패했더라도 시험대라는 말은 더 이상 하지는 말아야 할 수준이다.
- ↑ 2016 시즌 넥센의 전력과 현재 성적, 그리고 이로 인해 염경엽감독이 받고 있는 긍정적 평가를 보면 알 수 있다.
- ↑ 2011년 개막 때 감독들 중 팀이 바뀌지 않은 채 2016년까지 재직 중인 사람이 류중일 밖에 없었다. 김성근과 김경문도 지금까지 감독직이긴 하지만 이들은 중간에 새 팀으로 이직해야 했다. 2011~15 감독으로 있던 5년간 13명의 감독이 재계약 포기 내지는 사퇴했는데 류중일만 제 자리를 지키는 유일한 감독이였다.
김시진은 두 차례나 옷을 벗었다 - ↑ 늘 그랬듯 발전 없이 1등만 하는 감독이라는 칭찬이지만 2016년에는 진짜로 까는 용도의 별명으로 바뀌었다.
- ↑ 매 시즌마다 시험대에 오른다는 사람들의 반응때문
- ↑ 2016년 삼성이 원인 모를 긴 부진에 빠지자 더 자주 쓰이고 있다.
- ↑ 삼피 반응
- ↑ 류중일에게 온갖 육두문자를 날리기로 유명한 사사방의 매니저 조차도 분노에 가득찬 글을 남겼고, 해당 카페내에서도 당연히 분노에 가득찬 글들이 올라왔다. 삼성 라이온즈 갤러리 문서와 사자사랑방 문서를 보면 알겠지만 경기를 이겨도 단 한 가지라도 꼬투리 잡을 곳이 있으면 휴지통이라는 게시판이 류중일을 씹어대는 글로 폭발하는 카페라는걸 생각하면...
까도 내가 깐다!!! - ↑ 사실 김진욱은 성적이 문제가 아니라 시즌 이후 선수 유출 건으로 프런트와 대판 싸우다 경질 된 거다.
- ↑ 특히 한화는 2012시즌 당시 희대의 설레발과 상반된 성적 덕에 웃음후보라는 단어를 탄생시킨다.(...)
- ↑ 통합우승으로는 KBO 신기록
- ↑ 해태 타이거즈에 이은 한국시리즈 최다 연속 우승의 타이 기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