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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在淳 1926년[1] 11월 30일~2016년 5월 17일
1 개요
대한민국의 전 정치인, 출판인이다. 호는 우암(友巖)이다.
1926년 평안남도 평양부에서 태어났다. 서울대학교 상과대학 경제학과를 졸업하였다.
이후 1960년 제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당 후보로 양구군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당시 김영삼, 박준규 등과 민주당 구파에 속하였다. 같은 해 말 민주당을 탈당하여 신민당에 몸담았다.
그러나 5.16 군사정변 후 박정희가 실권을 잡으면서 박준규 등과 함께 여당인 민주공화당에 입당하였다. 이후 제6대, 7대, 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철원군-화천군-양구군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1970년에는 교양지인 월간지 샘터를 창간하였다. 1971년 민주공화당 원내총무에 선출되었다. 그러나 10.2 항명 파동 당시 항명을 제대로 막지 못하였다는 이유로 중앙정보부에 끌려가서 고문을 당하고 원내총무직에서 사퇴하여야 했다.
1973년 제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유신정우회 제1기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었다. 이후 제1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공화당 공천을 받지 못하자 무소속으로 춘천시-춘성군-철원군-화천군-양구군 선거구에 출마하였다가 민주공화당 손승덕 후보와 신민당 김준섭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이후 전두환 정권이 들어서자 정치규제를 당하지 않았음에도 정치를 잠시 멀리하고 월간지 샘터 발행에 전념하였다.[2]
1988년 제1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정의당 후보로 철원군-화천군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그리고 제13대 국회 전반기 국회의장에 선출되었다. 1992년 제1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민주자유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그러나 김영삼 정부 출범 이후 재산 공개 과정에서 축소 공개 등이 논란이 되어 국회의원직을 사퇴하였다. 이 때 토사구팽이라는 말을 남기면서 배신감을 나타내었다.
2016년 5월 17일 노환으로 타계했다.
2 선거이력
당 내부 선거가 아닌 대한민국 선출직 공직자 선거 결과만 기록한다.
연도 | 선거종류 | 소속정당 | 득표수(득표율) | 선여부 | 비고 |
1960 | 제5대 국회의원 선거 (양구군) | 민주당 | - | 당선 | |
1963 | 제6대 국회의원 선거 (철원군-화천군-양구군) | 민주공화당 | - | 당선 | |
1967 | 제7대 국회의원 선거 (철원군-화천군-양구군) | 민주공화당 | - | 당선 | |
1971 | 제8대 국회의원 선거 (철원군-화천군-양구군) | 민주공화당 | - | 당선 | |
1973 | 제9대 국회의원 선거 | 유신정우회 | - | - | |
1978 | 제10대 국회의원 선거 (춘천시-춘성군-철원군-화천군-양구군) | 무소속 | - | 낙선 | |
1988 | 제13대 국회의원 선거 (철원군-화천군) | 민주정의당 | - | 당선 | |
1992 | 제14대 국회의원 선거 (철원군-화천군) | 민주자유당 | - | 당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