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준규(1925)

이 문서는 대한민국의 전 · 현직 정치인을 다루고 있습니다.

정치적 · 이념적으로 민감한 내용을 포함할 수 있어 문서를 열람할 시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특히 개인적인 감정으로 인한 문서의 악의적 서술 · 편집은 민사 · 형사 상 소송이 발생할 여지가 있습니다.
파일:/image/001/2014/05/03/2030707p3328859 P2 59 20140503193703.jpg

朴浚圭
1925년 9월 12일 ~ 2014년 5월 3일

대한민국의 전 정치인이다. 호는 송산(松山)이다. 백남억씨가 그의 자형이 된다. 그리고 사육신 박팽년의 직계후손이다.

1925년 9월 12일 대구에서 출생하였다. 경북중학교 및 구제 마쓰야마고등학교를 졸업하였다. 구마모토 의과대학 재학 중에 8.15 광복을 맞아 경성제국대학 의학부로 편입하였으나, 동 대학 법문학부 정치학과로 전과하였고 이후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정치학과를 졸업하였다.

1954년 제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무소속으로 경상북도 달성군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조재천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58년 제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자유당 김성곤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60년 제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당시 민주당 구파에 속하였으마 같은 해 말 민주당 구파 소속 정치인들과 민주당을 탈당하여 신민당을 창당하였다.

1963년 제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공화당 후보로 서울특별시 성동구 을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1965년부터 1969년까지 대한민국 국회 외무위원장을 역임하였다. 1967년 제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민주공화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그러나 1971년 제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공화당 후보로 서울특별시 성동구 병 선거구에 출마하였다가 신민당 정운갑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그 해 10.2 항명 파동으로 중앙정보부에서 고문당한 김성곤국회의원직을 사퇴하여 치러진 경상북도 달성군-고령군 선거구 재보궐선거에서 민주공화당 후보로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1973년 제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공화당 후보로 경상북도 달성군-고령군-경산군 선거구에 출마하여 친여 무소속 박주현 후보와 동반 당선되었다. 같은 해부터 1979년까지 민주공화당 정책위의장을 역임하였다. 1978년 제1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공화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여 신민당 김종기 후보와 동반 당선되었다. 1979년 민주공화당 당의장에 임명되었다.

1980년 전두환 정권이 출범하자 정치규제를 당하였다가 1984년 해금되었다.

1988년 제1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정의당 후보로 대구직할시 동구 선거구에 출마하여 통일민주당 목요상 후보를 꺾고 당선되었다. 1989년 1월 민주정의당 대표위원에 임명되어 1년 동안 재임하였다. 1990년부터 1992년까지 13대 국회 후반기 국회의장을 역임하였다. 1992년 제1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자유당 후보로 대구직할시 동구 을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고, 14대 국회가 개원하자 13대 후반기에 이어 다시 국회의장에 선출되었다. 그러나 1993년 김영삼 정권이 출범하여 공직자 재산 공개를 할 때 재산이 문제가 되어 국회의원직을 사퇴하였다.이후 1995년 김종필자유민주연합을 창당하자 그와 손을 잡고 자민련에 합류하여 당 최고고문이 되었다.

1996년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자민련 후보로 대구광역시 중구 선거구에 출마하여 신한국당 유성환 후보를 꺾고 당선되었다. 박철언과 함께 자민련 내 대구경북세력을 대표했으며, 1997년 제15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DJP 연합을 성사시키는 데 적극적으로 앞장섰는데, 이는 박준규가 1공화국과 2공화국 시절 김대중과 함께 민주당에 몸을 담고 친밀한 관계를 맺어온 데 기인한다.하지만 김대중은 신파, 박준규는 구파 제3공화국이 출범하면서 박준규는 여당으로, 김대중은 야당으로 진로를 달리 했지만 인간관계는 계속 유지되었다. 박준규의 활약은 대구경북에서 김대중의 득표율이 상승하는 데(8.7%에서 13.1%로 상승) 기여했다. 이러한 공로에다 김대중과의 친밀한 관계 덕분에 15대 국회 후반기 국회의장 선거에서 공동여당인 국민회의자민련의 국회의장 단일후보로 지명되었고, 무려 3차 투표까지 가는 치열한 대결 끝에 당시 한나라당의 반란표가 쏟아져 나오며 국회의장에 당선될 수 있었다. 박준규는 이로써 의정 사상 최초로 국회의장 3선의 고지에 올랐다. 반면 한나라당오세응이 후보로 출마하였으나 패배하고 조순 총재 이하 지도부 전원이 국회의장 선거 패배의 책임을 지고 총사퇴하는 후유증을 겪어야 했다.

15대 국회 임기가 끝남과 동시에 정계은퇴를 선언했고, 2014년 5월 3일 세상을 떠났다.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박준규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div></div>