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신정우회

유신정우회(維新政友會)

존재의 의미, 박정희와 현판.

1 개요

제4공화국 시기 출범하여 제5공화국때 전격 폐지되기 전까지 대한민국에 존재했던 특이한 교섭단체이며, 현재는 한국 정치사의 흑역사로 취급받는 조직. 약칭은 유정회(維政會). 오히려 약칭이 많이 불린다.

기존의 정치인들이 아니라 금배지 한번 달아볼려고 유신체제를 찬양하던 대학교수/학자/문필가/언론인들이 많아 무려 민주공화당에서 '유신의 친위대'라고 불르며 견제 했었고,[1] 주로 여야가 충돌할 때 앞을 다투듯이 나와 고함과 야유를 보내고 육체적 격돌을 담당하여 신민당에서는 '청와대 특공대'라고 불렀다. 그외 '관선 의원', '73명의 거수기' 같은 별명도 있다.

유신정우회라는 명칭은 일본의 1867년 '메이지 유신(明治維新)'과, 1900년 이토 히로부미가 만든 '입헌정우회(立憲政友會)'에서 따왔다는 것을 쉽게 유추할 수 있다. 그러나 어엿한 정당인 입헌정우회와 달리, 그 후신으로 1940년 결성된 '대정익찬회(大政翼贊會)' 가 유신정우회와 더 비슷하다. 대정익찬회나 유신정우회나 당시 정권을 후원하는 것만이 목적이고, 실질적으로 당의 강령이나 지도부 조직, 뭐 기타등등 당으로서 필요한 최소한의 요건이 하나도 없고, 오직 국회의원만 존재하는 껍데기 정당이나 유사 조직이라는 것이 동일하다.

일단 명목상 창설 이유는 "대통령이 창출한 유신 이념을 국정에 반영토록 한다"였다.

2 설립 배경

유신헌법에는 국회의원의 1/3을 대통령이 지명(지금의 미얀마와 비슷하다)하고, 이를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찬반 투표를 거쳐 선출하도록 되어 있다. 그런데 통일주체국민회의는 명목상으로는 국민의 직접선거에 의해 선출되지만 실질적으로 그럴 수가 없던 존재이기 때문에 사실상 대통령이 지명한 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사실상 대통령의 입법부 내의 친위 세력이나 마찬가지였다.

실제로 제4공화국 내내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박정희에 대한 찬성률은 단 한 번도 99% 이하로 내려간 적이 없었다. 두 차례 선거에서 나온 반대표는 0표. 무효표만 각각 2표와 1표 나왔다. 이 무효표도 글씨를 잘못 써서 나온 것이다.[2] 결국 국회의원의 1/3을 대통령이 실질적으로 직접 임명하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그리고 이 유정회 국회의원에 대해 하나하나 찬반투표를 하는 게 아니라 그냥 대통령이 선정한 총 의석 수 1/3의 유정회 국회의원 총 명단에 대해서 찬반 투표를 하는 것이었다(...) 물론 하나하나 뽑으나 단체로 뽑으나 반대표 따위가 나올 리는 없었지만 문제는 이 경우 선거를 통한 민의의 반영이 원천적으로 차단된다는 점이다. 결국 국회가 행정부의 거수기로 전락하고 대통령의 시녀로 전락하게 된다. 이는 민주주의의 대원칙 중 하나인 삼권분립을 전면 부정하는 것이다.

바로 이 임명된 국회의원들의 교섭단체가 유신정우회다. 임기는 당시 국회의원 임기의 절반인 3년. 인원은 9대 73명, 10대 77명이다. 그래도 교섭단체라고, 의원총회, 원내총무, 대변인은 갖췄지만 정당으로서의 바탕이 없이 출발한 것이니 그런 형식은 큰 의미가 없다. 박정희 자신이 총재로 있는 민주공화당이 있는데도 이런 껍데기 정당을 따로 만든 것은 심지어 여당인 민주공화당 내부에서 조차도 박정희 독재가 장기화 되면서 염증과 반발이 터져나오고 있었기 때문.[3]

당시 1973년 2월 27일 제9대 국회의원 선거는 이전과 다르게 1구 2인의 국회의원을 뽑는 중선거구제도였다. 즉 73명의 공화당 의원 당선이 보장되어 있는 상황. 여기에 유정회 73명과 합쳐 2/3이 박정희 지지세력이 되는 원리였다. 결국 9대 국회의원은 민주공화당 73석, 신민당[4] 52석, 민주통일당 3석, 무소석 18석[5]으로 정확히 73대73이였다. 여기에 유정회 73명을 추가하여 2백19명의 제 9대 국회가 구성되었다.

박정희의 정치인에 대한 냉소적 경시 풍조와 맞물려 이때 부터는 지금까지의 국회의원에 맞는 대우를 받지 못하였다. 8대 국회의원 까지는 국무위원 대우에 국회에서 답변할 수 있는 공무원의 하한선이 차관급이였지만, 9대 국회의원 부터는 차관과 차관보 중간급으로 대우가 격하 되었고, 국회 답변 하한선 역시 국장급으로 내려갔다.[6] 즉 국장급이 국회의원을 상대하는 '행정 우위의 시대'가 열렸다.

3 연혁

1973년 처음 임명되어 3년 임기로 1976년1979년에 각각 임명되었다. 1979년 정치에서 큰 파동을 일으킨 유정회 파동은 바로 유신정우회 의장이던 백두진(전 제4대, 제10대 국무총리)을 국회의장에 임명하려고 하면서부터 시작된 일이었다. 결국 국회의장 취임. 백두진은 이렇게 7년간 제9대 국회 1,2기와 제10대 국회 3기 의원을 모두 역임했다.[7] 1979년 10.26 사건으로 4공화국이 붕괴되면서, 사실상 그 기능을 잃기 시작, 결국 제 5공화국 헌법과 함께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백두진도 9개월만에 사퇴했다.

4 소속 의원들에 관련한 이것저것

기본적으로 "유신 체제의 가장 강력한 반대 세력이었던 학원을 포함한 지식인 사회에 대해 무마와 분열책으로서 임명제 국회의원을 최대한 이용"[8]했기 때문에 '이사람 이럴만한 인물이 아닌데?' 하고 고개를 갸웃거리게 만들만한 인물도 다수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대통령비서실김정렴의 증언에 따르면 "사전에 낙점을 받은 인사들을 설득, 수락시키는 과정에서 단 한사람도 거절하는 이는 없었다"

유신헌법의 기초자였던 갈봉근, 한태연 본인들은 유신정우회 의원을 7년간 3기 연임[9]하면서, 자신들이 만든 헌법의 혜택 을 누렸다. 그외의 3기를 모두 역임한 인사로는 백두진을 위시해 고재필(만주국 관리, 보건사회부 장관), 서영희(경희대학교 교수, 여성인사), 정재호(경향신문 정치부장), 최영희(육군참모총장, 육군 중장 퇴역. 4개국 특명대사, 전 대한민국 국방부 장관)가 있다.

백범 김구 선생의 차남인 김신[10]안중근 의사의 5촌조카인 안춘생[11]도 나란히 유신정우회 제9대 국회의원을 지내기도 했었다.[12]

심지어 참군인으로 칭송받고 있는 이종찬장군도 이 유신정우회 9~10대 국회의원 직을 지낸 바 있다. 친일 행적과 더불어 이종찬에겐 또 하나의 흑역사. 근데 항목에서 보듯이 강제로 지명당한 것에 가까우며, 이종찬의 의회 활동은 최소한도였고 김영삼 총재 의원직 제명 파동 당시 김영삼 의원 제명 건에서는 석상에서 반대하기도 했다. 하지만 당론에 떠밀려 표는 찬성표를 던졌다고 한다. 이종찬은 한 번 정도는 그래도 박정희와의 친분을 생각해 감수하려고 했지만, 또 지명되자 자신에게 신세를 진 바 있던 김재규 중정부장에게 전화해 화를 냈다고 한다.

5 관련 항목

  1. 대학교수만 따지면 1기 11명, 2기 21명, 3기 21명이다.
  2. 70년대 인명은 한자로 적어서 내는 것이 당연한 상식이었다.
  3. 공화당 실세 4인방 김성곤·길재호·김진만·백남억 의원이 박정희의 지시에 안따랐다고 중정으로 끌고가 각종 고문을 자행하여 반병신 만들어 놓은 10.2 항명 파동 사건이 이 직전인 71년에 터졌다.
  4. 이미 관제야당이라고 불리는 상태. 총재인 유진산은 반쯤 박정희 사람인 상태였다. 그바람에 무슨 일만 생기면 김대중, 김영삼을 포함한 당내 지도부는 잡혀가거나 가택 연금이 되지만 유진산 만은 경찰이 코빼기도 안보여, 유진산이 자신의 집앞에도 경찰이 와서 가택연금하는 것 처럼 보이게 해달라고 항의할 정도였다.
  5. 충청남도 대전시 선거구에 민주통일당 후보로 출마한 박병배 후보가 재검표 소송을 하여 당선되었다.
  6. 국회에서 답변 가능한 공무원의 하한선이 중요한데, 이전까지는 최소 차관급 대우를 했다면 9대 부터는 그냥 일반직인 국장급 대우라는 말과 동일하다. 차관과 차관보 중간급도 많이 봐준것이다.
  7. 이미 제7대, 제8대 의원부터 민주공화당의 비례대표였다.
  8. <박정권 18년 그 권력의 내막> 이상우. 317~318쪽
  9. 그러니까 재선 국회의원
  10. 전 공군참모총장이었다.
  11. 1912~2011. 1951년 육군사관학교가 4년제 학교로 재설치 되면서 초대 교장직을 수행했다. 교장이 되었을 당시의 계급은 육군 준장. 1998년~1999년 광복회 회장을 지내셨으며 1986년부터 1992년까지 독립기념관 관장을 역임하셨다.
  12. 박정희는 전대 이승만 정권보다 정통성을 강화하는 한편 만주군 출신이라는 정통성 약점도 보완하기 위해 집권초부터 독립유공자 후손들을 정부 요직에 중용했다. 물론 6.25 전쟁 전후 완고해진 반공 분위기로 인해 좌익계 독립유공자들은 전쟁 당시 대거 월북해서 이미 남한에는 별로 남지도 않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