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탕금

1 개요

內帑金. 조선 시대 조선 공식적인 비자금. 내수사에서 관리했다. 사실 존재 자체가 비밀인건 아니기 때문에 '비자금'이라고 하기는 어렵지만, 정확한 규모는 비밀이므로 비자금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아래에도 언급되지만 조선에서만 존재했던건 당연히 아니다. 어느 나라든 왕의 개인재산이 따로 존재한건 당연한 일.

2 역사

조선시대 왕의 사유재산은 태조의 개인재산에서 비롯되었다. 태조는 고려에 임관하기 이전부터 동북면(함경도)에 막대한 재산을 가진 대호족이었다. 고려 말의 무공으로 여러 차례 공신에 책봉되면서 태조가 형성한 재산은 가히 천문학적이라 할 수 있다. 조금 과장하여 말한다면 함경도 지역 토지의 1/3을 태조가 소유하고 있었다고 한다.[1] 이외에 태조가 소유한 노비의 수도 적지 않았다.

태조가 조선을 창업하고 왕위에 오르자 태조 개인재산을 국유로 할지 아니면 사유로 할지 의론이 분분했다. 정도전은 이를 국유재산으로 하여 회수할 것을 주장했으나, 정도전이 제거된 다음 태종이성계의 재산을 사유로 하고 이를 왕실에서 관리하는 것으로 했다. 이것이 왕의 사유재산의 원천이 되었다. 세종대왕 시기 일시적으로 합쳐진 것으로 보기도 하지만 세조 시대 이후로 완전히 분리된 상태가 지속된다.

고종 시기 내수사가 내장원으로 승격되면서 내탕금은 더욱 무지막지하게 늘어났으며, 광무개혁의 자금원으로 쓰이기도 했다. 하지만 일제강점기가 되면서 대부분 일제친일파에게 약탈당하고, 그나마 잔존한 재산도 일제강점기와 해방 이후의 혼란을 거치면서 일부는 1950년에 만들어진 구왕궁재산처분법과 뒤를 이은 구황실재산법에 의해 국고에 귀속되고 나머지는 모두 흩어져 소멸하게 된다.

3 운용

내탕금은 완전히 임금의 사유재산이었다. 조선에서 엄밀하게 사유재산을 보호하는 법률이 없었으므로, 유일하게 진정한 의미의 독립된 '사유재산'을 가질 권리를 가진 자가 바로 임금이었다고 볼 수도 있다. 내탕금은 조정 회계에 잡히지 않았기 때문에 조정의 관리들은 내탕금이 얼마나 되는지, 대체 어떻게 쓰이고 있는지 전혀 파악할 수 없었다. 내탕금의 사용 역시 왕이 임의로 처리했으므로 왕실이 내탕금을 어떻게 쓰건 말건 간섭할 수도 없었다. 애초에 왕이 나랏돈도 아니고 자기 돈 쓰겠다는데 신하들이 뭐라 할 수가 있겠는가. 실록에서 가끔 내탕금을 어떻게 썼다는 기록은 나오지만 액수나 사안이 모두 기록된 것은 아니다.

내탕금은 내수사에서 관리했으며, 내수사를 관리하는 이들은 왕실과 직결되는 내시들이었다. 내수사의 자금은 토지와 노비 등 다양한 경로로 구성되었다. 내수사에서 운영하는 토지는 다른 지주들의 땅에 비해 소작료가 쌌기 때문에 많은 백성들이 토지를 바치고 내수사 휘하에 들어가려 했다. 이 때문에 지나치게 내수사의 권한이 강력하다며 신료들이 항의하는 일이 적지 않았는데, 여기엔 내수사 자체의 문제점을 지적한 것이 컸지만 한편으로는 지주들의 이익을 대변하기 위함도 있었다.

또 몇몇 연구자들은 내탕금의 일부가 일수사채로 운용된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물론 왕실이 직접 사채에 나서는 것은 아니고, 돈주로서 몇 단계 거쳐서 최종적으로 왕실과 연계된 일수 사채업자가 시장 상인들에게 영업을 하는 형식이 아니었겠냐는 것. 실제로 성종이 내탕금을 사채를 돌리기는 하는데 이자율은 30% 정도이며 시중 일반 사채의 50% 보다는 싸니까 괜찮다고 변명하기도 했다.(…)

4 사용

내탕금은 왕이 마음대로 쓸 수 있는 '통치자금'이었다. 결과적으로 왕의 마음대로 쓰였는데, 용도는 여기저기 많이 있었다.

불사 등 왕실의 행사를 지탱하는 용도로 사용되기도 했고, 백성들에게 은혜를 베푸는 용도로 쓰기도 했다. 특히 불사는 대부분 내탕금에서 충당했다. 숭유억불이 국시인 조선에선 아무리 왕실이라고 해도 국고를 마음대로 불사에 사용하려 했다간 신료들의 무지막지한 반대를 받을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물론 불사 자체에도 반대하긴 했지만 내탕금을 불사에 사용하는 것 자체를 막지는 못했다.

정조사도세자 묘를 이장할 때 부근에 살던 백성들에게 땅값의 4배를 쳐주고 이사 자금까지 주었으며, 영조는 흉년이 들었을 때 백성들에게 내탕금을 털어서 도움을 주었다. 마음에 드는 신하들에게 상을 내릴 때도 내탕금을 썼다.

어떤 차이가 있는지 모르나, 대군이나 공주가 결혼할 때 국고를 쓰지 않고 내탕금에서 꺼내서 집을 사주거나 하는 경우도 존재하였다.

5 해외

일본 역시 메이지 유신 이후 이토 히로부미를 위시한 집권세력이 근대화 과정에서 수많은 공기업들을 메이지 덴노의 명의로 옮긴 바 있다. 그리고 덴노 본인이 받는 연봉 역시 막대한 편이어서[2] 이것이 사실상 내탕금 역할을 했다.

중국 대하사극인 강산풍우정에 보면 숭정제가 내탕고에서 돈을 꺼내 쓰는거에 인색해서 북경성 방위가 위험에 처해지는 장면이 나온다. 당시 명나라의 재정이 엉망이라 군사를 모집하는데 내탕금을 쓰지 않을수 없었는데 숭정제가 아까워서 돈을 풀지 않은것.

태합입지전 5에 보면 성주 이상이 되었을때 내탕고와 국고가 따로 분리되어 있다. 내탕고의 돈은 수련비나 장사자금 등 개인적인 용도로 쓰이며 국고는 토지개발이나 관개, 성벽 보수등 공적인 자금으로 쓰인다. 이런거 보면 당시 영주들도 따로 관리했던 모양.
  1. 다만 육진개척 이전 조선의 동북방면 영토는 사실상 길주 정도가 북방한계선이었기 때문에 함경도의 1/3이라고 해도 우리가 보는 함경도 면적 기준과는 좀 차이가 있다.
  2. 쇼와 덴노의 경우 시점은 애매하지만 대략 종전 이전 1930년대의 연봉은 약 180억 엔이었다는 기록이 있다. 당시 수상 연봉은 약 2억 엔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