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옥(군인)


2005년 02월 04일, 로스앤젤레스 다운타운의 리틀 도쿄에서 프랑스 최고 영예인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프랑스 총영사로부터 전달받은 후의 모습. 맨 왼쪽에 있는 사람이 김영옥과 죽마고우이자 한국계 피가 섞인, 아시아계 미국인 최초로 올림픽 금메달을 딴 새미 리, 그리고 김영옥 오른쪽에 있는 사람은 미국 내에서 유명한 동성애자이자 일본계 배우인 조지 타케이.[1]

Young-Oak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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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1월 29일 ~ 2005년 12월 29일
복무미합중국 육군
기간1941년 ~ 1946년
1950년 ~ 1972년
임관OCS(사관후보생)
최종계급보병대령
주요보직제7보병사단 제31보병연대 1대대장

1 개요

1919.01.29[2]~2005.12.29 한국계 미국인 군인. 제2차 세계대전한국전쟁 참전영웅이자 3개국에서(대한민국, 프랑스, 이탈리아) 최고 무공 훈장을 받은 전쟁영웅. 그런데 정작 미국에서는 수훈십자훈장(명예 훈장 다음으로 높은 육군 훈장)을 수여하였다. 그와 함께 싸웠던 동료와 그의 부하들은 "그는 명예 훈장을 받아야 마땅하다"라고 했지만, 끝내 수여받지 못했다.

2 그의 일생

2.1 입대하기까지

미국에 이민 간 한인 교포 2세이며, 고등학교 졸업 후 로스엔젤레스 사립 대학에 들어갔지만 1년 뒤 자퇴하고 이런저런 일을 하던 도중에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미 육군 모병소에 갔으나 그 당시 아시아계라는 이유로 거절당한다. 그러나 그 뒤에 1941년에 법이 바뀌어 아시아계도 징집 대상에 들어가 육군 으로 입대한다.

2.2 제2차 세계대전에서의 활약

육군 사관후보생으로 선발, 장교가 되고 나서 일본계로 분류되어 하와이 출신의 일본계 2세대로 이루어진 육군 442보병연대 100보병대대(442nd Infantry Regiment, 100th Infantry Battalion)에 배치되어 소대장을 맡았다. 100대대는 이른바 "니세이 부대"라고도 불렸는데, 니세이는 교포 2세대를 뜻하는 2세의 일본발음이다. 부대 명칭에서 알 수 있듯, 이 대대는 행정명령 9066호로 인한 부산물인 반쯤은 인질 같은 개념으로 창설된 것으로, 그 당시 적대 국가였던 일본 출신 미국인들이 일본 본국에 협조할지도 모른다는 것 때문에 반란 등이 일어날 경우 앞장설 가능성이 높은 징집 연령대의 남성들 중 자원자들을 뽑아서 묶어놓은 것이다. 그래서 원래 442연대는 하와이에 본적을 두고 있었지만 대대를 창설하자마자 감시 차원에서 미 본토로 옮겨버렸다.

당시 대대장이 일본인과 한국인의 사이가 안 좋다는 것과 그가 한국인인 것을 알고 있어서 전출 제의를 했지만, 그는 "여기엔 일본인도 한국인도 없습니다. 우리는 모두 미국인이며 같은 목적으로 싸우는 것입니다."라고 대답하고서 그냥 붙어있었다고 한다.

이후 미 육군 제5야전군에 배속돼서 이탈리아 전선에 투입된다. 다른 100대대 장병들도 자기들이 미국인으로 인정받고 싶어해서 싸우고 싶어했다고 한다. 100대대의 부대의 모토가 "Go for Broke!"[3]였고 퍼플 하트[4] 대대라고 불릴 정도로 격렬히 전투에 임했다. 상부에서도 100대대가 잘 싸우는걸 보고 100대대 비슷한 일본인계 대대를 더 만들기도 했다. 이게 다 인정받고자 하는 몸부림의 결과물이다. 그 때문인지 일본인 2세대 교포들은 일본에 대해 좋지 않은 감정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2차 대전이 끝난 후 이들 니세이 부대원들에 대한 일반적인 미국인들의 인식은 변함없이 'JAP'이었으며, 60년대에 미국 내에서 자성의 목소리가 나오면서 그제야 조금씩 인정받기 시작했다.

이후 전방에서 상당한 전과를 올리고 독도술에 능하며 기상천외한 전술을 써먹어서 주목받는다. 프랑스 비퐁텐느(Biffontaine)에서 김영옥 소대장이 수류탄 들고 독일 육군의 기관총 진지에 돌격하다 총에 맞자, 이에 울컥한 소대원 전부가 "반자이~!"라고 소리 지르며 기관총 진지에 반자이 어택을 감행해서 방어하던 독일군들을 충공깽에 몰아넣었고,[5] 김영옥 또한 사실은 경미한 부상만 입었기에 쓰러진 자리에서 가지고 있는 수류탄을 독일군 진지에 까 넣어 부대원을 엄호하기도 했다. 이는 유럽 전선에서 실행된 유일한 반자이 어택으로 현재까지도 회자되고 있다. 화력덕후 전통의 소대장님과 개돌 전통의 소대원님들

또한 정보를 얻기 위해 일병 한 명이랑 같이 해가 뜨는 아침에 갈대밭을 기어가서 참호에 잠입한 뒤에 독일 육군 진지 안에 잠입해서 독일 육군 지휘소 근무자 두 명을 생포해오기도 하고,[6][7] 도하 작전을 일부러 2번 실패한 뒤에 3번째에는 진짜로 밀고 들어가 버려서 전사자 단 한 명도 없이 피사를 점령하기도 했다.

로마 점령 이후 방면 사령관이 그를 보고 계급이 고작 중위라는데 놀라서 왜 겨우 중위냐고 물었다. 그는 진급 신청을 5번 했지만 거절당했다고 대답했고 그 말을 들은 사령관이 당장 옆에 있는 전속부관대위 계급장을 떼다가 붙여주면서 즉석 진급시켰다. 흠좀무 2011년 들어 국방일보에서 김영옥 일대기를 연재하고 있는데, 이에 따르면 김영옥 중위는 은성무공훈장을 수여받을 예정이었다. 그러나 훈장을 수여하던 사령관이 얼마 전 자신이 같은 물건을 수여해준 동양계 중위가 또 왔음을 알아보고 이런 질문을 했고 대답을 들은 사령관은 즉석에서 진급을 시켰다고 한다. 이 기억력 좋은 사령관의 정체는 다름아닌 미 육군중장 마크 클라크 장군으로, 한국전쟁 종전 당시 UN군 최고사령관이었던 사람이다. 흠좀무.

이후 남프랑스 전선에도 참전했으나 비퐁텐느에서 상부의 개 삽질 때문에 포위당해서 총상을 입고 후방으로 호송되어 로스앤젤레스에서 휴양 생활을 했다. 이후 회복되어서 유럽에 돌아가려다가 유럽 전선이 종료되었다. 지금도 비퐁텐느에 있는 교회 벽에는 그와 100대대를 기리는 명패가 걸려있다. 유럽 전선에서 그의 활약 덕에 이후 미 육군 교범이 다시 쓰일 정도였다고 한다.

2.3 6.25 전쟁에서의 활약

전쟁이 끝나고 나서 전역하고 세탁소를 열었는데, 이게 또 당시 미국에 흔치않던 코인세탁소 방식이라 상당히 잘 나갔다고 한다. 하지만 한국전쟁 발발 이후 예비역 소집 형식으로 재입대를 하고 한반도 전선에 도착한다. 이때가 태어난 이래 처음으로 한반도를 밟아본 것이라 한다.

투입되고 나서 탈북자[8] 중에서 뽑은 유격대를 지휘하며 정보 수집 임무를 맡다가 1951년 4월에 미 육군 제7보병사단 31보병연대 정보참모로 임명되었다. 이후 별 볼일 없던 31연대가 연전연승을 거두는 계기를 만들었다. 엄청난 타격을 입어서 사기도 최악이었던 연대에서 솔선수범하며 활약해 장병들을 독려하기도 했다.

5월 말부터는 적군이 공격을 해왔는데 당시 대대장목욕하러 후방에 가 있던 게 걸려서 짤린 대대장 후임으로, 상관이 김영옥 대위를 승진시킬 겸해서 실전 경험이 부족한 대대장을 앉히고, 대신 그가 실질적인 지휘를 맡게 한다. 이후 10월에 소령 진급을 겸해서 정식으로 1대대 대대장이 되어서 미 육군 최초의 아시아계 보병 대대장이 되었다.

1951년 6월에 오인 포격을 받아서 중상을 입고 치료를 받은 뒤 8월 27일에 복귀했다. 이때 오인 포격을 받은 이유가 걸작인데, 포병대대[9]의 판단에 따르면 아군 치고는 너무 북쪽까지 진군해 있어서 적인 줄 알았다고 한다.(...) 실제로 그는 1개 보병 대대로 전선을 돌파해서 겨우 20여일 만에 60km나 북진해 현재의 휴전선 형태를 만들어냈다.

이후 52년 가을에 미국으로 귀국했다. 이때의 부상이 군 경력에 있어서 큰 아쉬움을 남기는데, 당시 미 육군에는 전쟁지역에서 대대장이 일정 개월 실전경험을 채우면 자동적으로 중령으로 진급시켜주는 제도를 두고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김영옥 소령이 개월 수를 다 채우기도 전에 부상을 입고 병원에 있는 도중 이 제도가 사라져버렸다. 여담으로 평전에 의하면 이때 입은 중상 때문에 얻은 후유증의 고통으로 무척 고생하였다 한다. 오죽하면 그의 안타까운 사정을 잘 알고 있던 사람들이 "인사카드에 두꺼운 진료기록이 남아 있으면 장군 진급 물 건너 갈 거 각오해야한다."는 말까지 남겼을까.

2.4 화력 덕후

지원화력을 중시해서, 유사시 필요하다면 사단, 군단 포병까지 가리지 않고 하위부대 작전에 끌어다 썼다. 심지어는 독일군이 육군과 공군 방공포병대공포를 지상 지원에 쓰는 걸 보고, 루프트바페가 박살나서 놀고 있는 아군 대공포 부대를 끌어다가 포병 포격 이후 근접 제압 사격에 쓰기도 했다. 저 당시 "저 대공포 부대 좀 빌려주세요." 하니까 상관이나 대공포 부대에게 "야, 지상군 작전에 대공포 가져다가 뭐 하게?"라는 말만 들었다고 한다. 롬멜 장군은 대공포 잘만 썼다.

평전에 의하면 2차 대전 당시 중대급 작전에 군단 포병대를 동원하는 계획을 세우자 장교들이 다들 "부탁해봐야 소용없을걸?" 하며 반응했다고 한다. 당시에는 중대급 작전이면 사단 포병대에서나 지원받는게 당연하다고 여길 때였다. 그러나 정작 군단에 포병지원을 요청하니 군단 포병대는 흔쾌히 수락했다. 당시 군단급 포병대가 대포병 사격 대비 때문에 평상시에는 포를 잘 쏘질 않아서 심심했던 모양이다. 김영옥의 설명을 요약하면 "군단 포병대는 사단보다 대구경 포니 화력도 세고, 자주 지원요청을 받지 못하니 사단 포병대보다 더욱 신나게(...) 쏠 거다."라고 한다. 당시 미 육군의 군단 포병대에 배치된 야포들은 45구경 장 155mm 곡사포(롱 톰이라는 별명으로 유명하다), 203mm 곡사포는 기본이고, 이탈리아 전선이 산악지대에 구축된 요새지대를 공격/방어하는 양상이었기 때문에 공성포인 36구경 장 240mm 중 곡사포까지 군단포병에 상시 배치되어 있었다. 이쯤 되면 공격당한 독일군이 안습이다 그리고 그의 판단대로 군단 포병대는 아주 신나게 대구경 포탄을 쏴 갈겨댔다고. 한다.

여담이지만 독도법을 이미 만렙으로 찍었던 터라서 전투상황에서 포병 화력유도 할 적에는 포병 관측장교보다 명중률이 높았다고 한다. 국방일보에 일대기가 연재되었을 당시 포병 관측장교와 내기를 했는데 포병 관측장교는 조정을 해도 맞지를 않았으나 본인은 조정사격 3발을 쏴서 명중을 시켰다고 한다.

이런 든든한 화력지원을 통해 김영옥이 지휘한 부대는 2차 대전 및 한국전 내내 훌륭한 전과를 쌓을 수 있었으며, 이것을 본 미 육군 역시 포병운용에 대한 생각을 바꾼 덕분에 현대 미 육군 교리에 이런 부분이 들어가기도 했다.

역시 화력덕후 핏줄은 속일 수 없다

2.5 전쟁 이후

한국전쟁 종료 이후에 1972년까지 육군에 있었고 최종 계급은 대령. 그동안 미 육군보병학교 교관, 독일 주둔 육군 대대장, 주한미군 군사고문단 등을 역임했다.

당시에 미 육군은 선배 장교들과 후배 장교들 간의 '스폰서' 관행이 만연해 있었고, 그의 인품과 능력을 마음에 들어 하는 장군들 또한 많았던 만큼 본래 동북아계 최초의 장성 진급도 가능했을지 모른다.[10] 하지만 본인이 아무 생각 없이(...) 전후 한국에 도움을 주고 싶다는 마음만으로 주한미군 군사고문단에 전출을 신청해버리면서 안드로메다로 날아가버렸다(저서 《영웅 김영옥》에 의하면 거의 미군장성 퇴물집합소 같은 곳이었다고 한다.). 평소 김영옥을 아끼던 당시 미 육군 군단장은 뭐하는 짓이냐며 길길이 날뛰었지만[11], 결국 김영옥 중령의 결심을 꺾지 못하고 '거긴 퇴물들밖에 없어서 널 질투해 인사고과도 제대로 안 줄 건데...'라고 안타까워했다. 그러나 원래 뭔가에 연연하지 않는 성격이라 그리 후회는 하지 않았다고 한다.

덧붙여 안타까워했던 그 사령관은 지휘계통에서 벗어나 있었지만 김영옥 대령에게 몇 가지 지시를 한다. 첫 번째는 한국군 전시 병력동원계획 작성으로 예비군 치장물자 조사와 병력 이동계획이 병행되어 처리되어야 하는 작업이었고[12] 이 과정에서 항공력의 열세에 있었던 대한민국 공군을 커버하기 위해 대한민국 육군 방공포병 부대 창설[13]이 건의되어 호크나이키 유도탄이 대한민국 육군에 도입된다. 또 하나는 당시 수도방위사령부와 관련하여[14] 연합사와 대한민국 정부의 마찰을 중재하는 임무였다. 여기서 채명신 장군과의 협상을 원활하게 끌어내었다.

2.6 전역 이후

로스앤젤레스에서 살면서 여러 가지 사회봉사 활동을 했다고 한다. 그의 말에 따르면 전쟁에서 살아남아 무사히 돌아간다면 자기가 살던 사회를 더 나은 곳으로 만들기 위해 평생을 바치겠다고 생각했다고. 실제로 한국전쟁 때부터 직접 고아원을 만들고 병사들과 같이 고아원을 방문해 아이들과 어울리기도 했다고 한다. 이후 소식이 끊겼지만 결국 죽기 몇 년 전에 자신이 돌봤던 고아 중 몇 명과 만날 수 있었다고.

로스앤젤레스의 한인건강정보센터, 한미연합회, 한미박물관 등을 만드는데 공헌했고 아시안 여성 포스터 홈이라는 인종차별 반대 운동과 가정 폭력을 당하는 아시아계 여성을 보호하기 위한 단체도 설립. 노근리 양민 학살 사건의 조사 위원회에도 참가하고 위안부 문제에도 활약한다. 캘리포니아 의회에서 위안부 관련 결의를 하려고 하자 일본계들이 반대 로비를 했는데 그 사실을 알고 우리가 유럽에서 싸운 게 뭘 위해서였습니까? 라면서 설득해 반대 로비를 그만두게 했다고 한다. 미국의 일본계 내에서 2차 대전 참전자들은 '큰 어르신'이라서 이들의 발언권이 컸다고 한다.

전쟁 당시 입은 많은 상처 때문에 평생 동안 불편했다고 하며, 2005년 7월 방광암 수술을 위해 입원했으나 12월 29일 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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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옥 대령의 부하였던 노병들. 이들은 모두 일본계 미국인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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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전에 김영옥 대령과 절친한 사이였던 1948, 1952년 올림픽 다이빙 금메달리스트 새미 리(Sammy Lee 1920.08.01~). 김대령과 죽마고우였던 그는 이날 조사를 통해 독립운동가의 아들들인 고인과 나는 5살 때부터 희노애락을 같이했다며, 지난 가을 시더스 사이나이 병원에서 만났던 모습이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니 눈물이 앞을 가린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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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도예배 전경.

김영옥 대령이 태극무공훈장을 받고 국내에 점차 알려지면서 초등학교 5학년 국어교과서에 그의 삶이 수록돼었다. 그런데 웬일인지 2015년 교과서에서 빠졌고 올해도 마찬가지인데, 그 연유를 모르겠다고 문재인이 공식적으로 이의제기한 상황.

‘참군인’ 김영옥 대령을 추억하며

3 기타

그의 활약상은 《영웅 김영옥》이라는 책으로 나왔다. 웨스트포인트 사관학교 교재에 수록되어 있는 한국인 세 명 중 한 명(나머지 둘은 충무공 이순신권율). 일본에서도 일본계 부대인 100대대의 지휘관이라는 이유로 나름대로 알려져 있다고 한다. 또한 2011년부터 국방일보에서 《영웅 김영옥》에 나오는 것을 토대로 기고하였으며 7월경에 기고가 끝나고 독후감을 모집하기도 했다.

또한 로스앤젤레스에서 한 중학교를 김영옥 대령의 이름을 붙여 이름이 김영옥중학교가 되었다.(실제 영어이름도 Kim-Young Oak이라고 분명히 적혀있다!) 이것은 미국 최초로 한국인 이름이 붙여진 학교이다.

누나인 김월나(1917.07.03~)가 2016년 현재 만 98세로 미국에 살고 있다. 브로드웨이에서 1950년대 이전부터 무대의상을 제작해왔으며 토니상 에서 의상부문을 2회 수상하였다. 2013년 토니 상 리셉션장에서.

2011년 6월 20일 보도에 의하면, 미국의 포털 msn.com에서 '미국 역사상 최고의 전쟁 영웅 16인'중 한 명으로 선정되었다고 한다.

김영옥이 뽑힌 포털 사이트에서 선정된 전쟁영웅 16인먼치킨의 이름은 아래와 같다.

한블로거가 아주 맛깔나게 김영옥에 삶에 대해 자세히 다루고 있다. 직접보자
  1. 스타 트렉에서 히카루 술루 역, 히어로즈에서 카이토 나카무라(히로 나카무라의 아버지) 역, 레드얼럿3에서 요시로 황제 역을 맡은 사람이다. 심슨에서 일본계 캐릭터의 성우를 맡은 적도 있으며(시즌10 에피소드23, "일본 탐험(30 Minutes Over Tokyo)"편) 그리고 신상옥 감독의 모 영화에서 '한국어를 쓰는 어떤 가상의 나라'의 '부하에게 암살당하는 장군 출신 대통령' 역을 한 적이 있다.
  2. 도대체가 저서 맨 뒤 연표에 생일이 나와 있는 데도 한국 인터넷 상에선 그 어디에도 생일 기재가 안 되어있다. 미국 위키피디아도 마찬가지. 근데 일본 위키피디아에는 떡하니 적혀있다(...).
  3. 하와이 도박장 속어다. 뜻은 "올인." 한마디로 박살날 각오로 덤빈다.는 뜻. 현재 442보병연대의 모토가 되었다.
  4. 전상장, 일정 수준 이상의 적 공격에 의한 부상을 입거나 전사한 미군 장병에게 수여하는 훈장이다.
  5. 그러나 회고록에는 이 돌격이 그닥 성공적이진 않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보병들이 찌른 것은 나무 울타리여서 찰과상 때문에 다친 보병들이 대부분이라 한다. 진짜 기관총 진지를 침묵시킨 것은 뒤에 서술한 김영옥 소위 자신이 까넣은 수류탄이라 한다.
  6. 본인 스스로 "밤에 오히려 경계가 심하니까 경계가 심하지 않은 아침에 가면 되잖아?"라고 했다. 비범하다(...). 실제로 경계가 가장 느슨해지는 시간이 아침 직전의 새벽녘이다. 해뜨기 직전이라 긴장도 풀리고, 달이 지고 해가 뜨기 직전이라 매우 깜깜하다. 때문에 침투작전도 주로 이 시간대에 시도한다.
  7. 자서전에 서술된 바에 의하면 당시 서로의 방어선에 있는 독일군, 미군 모두 야간에 집중해서 경계를 서고 낮에는 밤을 새서 그런지 곯아떨어지곤 했다. 김영옥은 이를 노리고 평소 자기를 잘 따르던 병사들 중 한명을 데리고 '지뢰밭을 기어서' 독일군 참호로 들어갔다. 김영옥에게 붙잡혀온 독일 육군은 김영옥과 같이 간 병사가 자기 입에 총을 집어넣을 때까지 누가 오는 줄도 모르고 자고 있었다고 한다.
  8. 북한에서 탈출한 의사,교수,교사등등 상위계층이였다
  9. 이 포병대대는 미 육군에서도 가장 사격실력이 형편없기로 유명한 대대였는데 이상하게도 이 날은 사격이 정확했다. 그게 아군이었던 게 문제지만(...). 추후 원인분석단계에서 이 포병대에게 정보를 준 정찰기는 포판(반사판 같은 물건이다) 남쪽에 1대대 지휘소가 있는 것을 봤지만 후술했듯 너무 북쪽에 차려진 것으로 판단하여 포판을 옮겨서 아군으로 위장된 적의 지휘소라고 보고했고 실제 보고 위치도 추후 확인된 결과 실제 위치보다 훨씬 북쪽으로 착각했다고 한다. 만일 원인분석 말마따나 사격단계에서 훨씬 북쪽을 노리고 쏘았다고 했을 때 제대로 쐈더라면 안 다쳤을텐데 역시 궤멸적인 실력(...). 게다가 확실히 죽여 버리겠다면서 VT신관을 썼던 것이 결정타였다. 오발은 명중이다
  10. 실제로 그는 중령 때 이미 장군을 다는 장교들이 밟는 과정을 전부 밟았다. 실전경험이 있는 대대장, 주요 사령부의 작전장교, 보병학교 교관 중 하나라도 역임하지 못하면 장성을 달 수 없었다. 오인 사격으로 인한 부상이 없었다면 6.25 때 중령으로 진급했을 것이며 이 시점엔 대령도 달았을 실적이었다. 그 놈의 멍청한 아군 포병대의 궤멸적 실력이 발목을 잡았다. 아닌게 아니라, 이때 발목 부상을 입어 평생 고통스러워하셨다. 육체적으로도, 경력적으로도 제대로 발목이 잡힌 셈.
  11. 당시 ㄱㄷ 군단장은 입이 매우 험하기로 소문났는데 김영옥 중령이 군사고문단으로 한국에 있다는 소리를 듣자마자 김영옥 중령의 사무실에 전화해 "야 이 미친놈아 니가 있을 곳은 군사고문단이 아니고 길 건너에 있는 군단사령부 작전부서야 이 미친X아!!"(...)라며 날뛰었다고...
  12. 국군 내에 무기와 탄약이 얼마나 있는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작성해야 했다고 한다. 이를 위해 군사고문단 차원에서 지원받을 수 있도록 조치를 취했다.
  13. 현재는 공군으로 이관.
  14. 같은 명칭의 부대를 2개 만들어(정확히는 수방사로 파견 후 동명의 부대를 재창설하여) 이중지원을 받고 있었다(...).
  15. 남북전쟁 이후 정식으로 시민권 회복이 이뤄진 게 사후 100 여년이 지난 1974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