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니엘 파사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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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다니엘 알베르토 파사레야
(Daniel Alberto Passarella)
생년월일1953년 5월 25일
국적아르헨티나
출신지차카부코, 부에노스 아이레스
포지션센터백, 스위퍼
신체조건173cm
청소년 클럽1968~1971년 아르헨티노스 주니오스
클럽 커리어CA 사르미엔토 (1971-1973)
리버 플레이트 (1974-1982)
ACF 피오렌티나 (1982-1986)
인테르 밀란 (1986-1988)
리버 플레이트 (1988-1989)
감독 커리어리버 플레이트 (1989-1994)
아르헨티나 축구 국가대표팀 (1994-1998)
우루과이 축구 국가대표팀 (1999-2001)
AC 파르마 (2006)
CF 몬테레이 (2002-2004)
코린치안스 (2005)
리버 플레이트 (2006~2007)
국가대표70경기 / 22골
1978 FIFA 아르헨티나 월드컵 베스트 일레븐
FW
마리오 켐페스
(아르헨티나)
FW
파올로 로시
(이탈리아)
FW
로베르토 베테가
(이탈리아)
MF
롭 렌센브링크
(네덜란드)
MF
테오필로 쿠비야스
(페루)
MF
지르세우
(브라질)
DF
알베르토 타란티니
(아르헨티나)
DF
다니엘 파사레야
(아르헨티나)
DF
뤼트 크롤
(네덜란드)
DF
베르티 포그츠
(서독)
GK
우발도 피욜
(아르헨티나)
아르헨티나 축구 국가대표팀 역대 감독
알피오 바실레
(1990~1994)
다니엘 파사레야
(1994~1998)
마르셀로 비엘사
(1998~2004)

El Gran Capitán(위대한 주장)
70년대 후부터 80년대 초까지 아르헨티나 축구 국가대표팀을 진두지휘한 아르헨티나의 철벽이자 사령관
아르헨티나는 물론, 남미를 대표하여 세계적으로 손꼽히는 레전드급 수비수

1 선수 소개

아르헨티나의 전설적인 수비수이자 스위퍼. 많은 사람들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1978 FIFA 월드컵 아르헨티나 대회 때 아르헨티나가 우승하는 데 있어서 절대적으로 빼놓을 수 없는 일등공신. 파사레야가 있었기에 당시 아르헨티나는 든든한 수비와 더불어 뛰어난 파사레야의 후방 공격 전개로 우승을 거머쥘 수 있었다. 만일 파사레야가 없었더라면 아르헨티나의 우승도 없었을 것이다.

2 플레이 스타일

키는 173cm로 중앙 수비수라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신장이었으나 그것을 커버할 만큼 뛰어난 도약력과 지능적인 수비 지휘 능력, 그리고 전사라는 별명에 걸맞게 상대에게 쫄지 않고 과감히 덤벼드는 투지를 지녔다. 사실상 신체조건만 뺀다면 당대 수비수들 중에서 여러 방면으로 고루 우수한 모습을 보여주던 수비수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당시 남미의 베켄바워라는 별명까지 붙을 정도였으니...

격렬하고 과감한 대인 방어는 물론이고, 지능적인 위치 선점 및 공간 장악, 그리고 캡틴이라는 직에 걸맞게 수비진을 진두지휘하는 능력 등 수비수로서 갖출 것은 다 갖추었다. 뿐만 아니라 수비는 물론이고 공격적인 면에서도 뛰어난 면모를 보여주었는데, 특히 왼발에서 뿜어져 나오는 강력한 킥력은 그야말로 일품. 프리킥은 물론이고 페널티 킥 등에 능했을 뿐만 아니라, 파사레야의 왼발에서 시작되는 오버래핑 및 세트 피스 시의 공격 가담은 당시 아르헨티나 공격의 핵심 루트 중 하나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로 그 정교함과 강력한 위력을 자랑했다. 그만큼 공수 양면에 걸쳐서 전반적으로 우수함을 보여주었고, 골 넣는 수비수로서의 면모까지 부각되었다.[1]

게다가 주장직에 걸맞게 정신력과 팀워크 또한 강인해서, 아르헨티나 대표팀을 진두지휘하는 데 중추 역할을 담당했다. 당대 그의 카리스마는 마라도나의 등장 이전까지 대표팀 내에서 절대적인 영향력을 발휘했다. 사실상 당시 감독인 세자르 메노티가 파사레야를 중심축으로 하여 아르헨티나의 전술과 팀워크를 구상했을 정도였으니 말 다 한 셈이다.

3 클럽

파사레야는 부에노스 아이레스에 위치한 축구클럽인 아르헨티노스 주니어스의 유소년 팀에서 축구를 시작했다. 이후에 같은 곳에 위치한 클럽인 CA 사르미엔토에서 프로 데뷔전을 가졌다. 1974년에는 리버 플레이트에 입단하여 1982년까지 팀에서 1975, 1977, 1979, 1981년에 걸쳐 통산 4회의 리그 우승을 했다. 이탈리아의 ACF 피오렌티나로 이적한 이후에는 통산 26골을 기록하며 1986년까지 뛰었다. 인테르로 이적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리버 플레이트로 돌아왔고, 1989년 은퇴했다.

4 국가 대표

1978, 1982, 1986년 월드컵에 출전했다. 다만 1986년에는 예선에서 본선 진출을 이끄는 결승골을 넣는 등의 활약으로 대표팀 명단에 이름을 올렸으나 부상으로 인해 벤치를 지키면서 마라도나와 함께 뛰는 일은 없었다.[2]

5 감독

1989년 은퇴 후에 리버 플레이트의 감독으로 부임, 1989-90, 1991-92, 1993-94시즌 우승을 했다. 1994년부터 아르헨티나 축구 국가대표팀의 감독이 되었고, 1996년 하계 올림픽에서 결승전까지 진출했으나 나이지리아와의 결승전에서 2-2로 비기고 있다가 90분에 골을 내줘 패배했다.
1998년 FIFA 월드컵에도 출전했으나 8강전에서 네덜란드에게 2-1로 패했다. 당시 너무나 엄격하고 규율주의적인 면모를 보여주었기에 많은 선수들과의 반발 및 불화가 있었고, 그로 인해 팀 케미가 어수선한 적이 있었기에 논란이 일었다.[3] 결국 월드컵이 끝나고 그는 감독직에서 사임하였다가, 이후 우루과이 축구 국가대표팀의 감독이 되었다. 그러나 선수차출 문제로 2002년 FIFA 월드컵 지역예선 때 감독직을 사임했다. 2001년엔 파르마 FC의 감독이 되었으나 좋은 성적을 내는데 실패했다. 2003년에 CF 몬테레이의 감독이 되어 리그 컵을 우승했다. SC 코린치안스 파울리스타의 감독이 되었으나 좋은 성적을 내지 못해 해임당했다. 2006년 1월 9일 다시 리버 플레이트로 돌아왔으나 2007년 10월 15일 사임했다.

6 기타

축구에서 등번호 1번은 골키퍼가 달아야 한다는 규정이 도입되게 한 장본인이다. 1978년 아르헨티나 월드컵에서 파사레야가 1번을 달고 나와 관객들의 시선을 어지럽히자 FIFA의 권고를 통해 1번은 주로 골키퍼에게 돌아가게 되었고, 이후 규정이 신설되면서 A매치에서의 1번은 반드시 골키퍼가 달아야 한다는 규정이 생겼다.
  1. 당시 A매치 70경기에 22골, 수비수로서는 흔히 내기 어려운 득점 기록이다. 게다가 그가 선수 생활 내내 뛴 기록은 통산 451경기 34골... ㅎㄷㄷ 수비수로서는 가장 많은 골을 넣은 것이다. 다만 후에 이 기록을 깰 또 다른 네덜란드산 수비 본좌가 새로 나타내는데...
  2. 당시 메노티 이후 새로 부임한 카를로스 빌라르도 감독은 마라도나를 중심으로 전술을 짰는데 나이가 거의 많이 든 파사레야에서 마라도나에게로 서서히 주축이 기울어지는 터라... 게다가 오스카 루게리 등의 활약으로 파사레야의 공백을 메우게 되면서 결승까지 무난히 진출했기에 파사레야는 조명받는 일이 거의 없었다. 안습.
  3. 당시 반발한 주축 멤버는 페르난도 레돈도, 클라우디오 카니자가브리엘 바티스투타 등. 이유는 선수들의 두발을 짧게 깎으라는 감독의 지시를 불이행했기 때문에(...) 이후에 바티스투타가 감독의 뜻에 굽혀 머리를 짧게 깎는 단발령까지 불사하여 국대 승선에 성공했으나, 레돈도와 카니자는 끝까지 지시를 불이행하여 결국 대표팀에 승선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