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 한스후베르트 "베르티" 포그츠 (Hans-Hubert "Berti" Vogts) |
생년월일 | 1946년 12월 30일 |
국적 | 독일 |
출신지 | 뷔트겐 |
포지션 | 수비수 |
소속팀 | VfL 보루시아 묀헨글라트바흐 (1965~1979) |
스태프 | 서독 축구 국가대표팀 U-21 감독 (1979~1990) 서독 축구 국가대표팀 수석코치 (1986~1990) 독일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 (1990~1998) 바이어 04 레버쿠젠 감독 (2000~2001) 쿠웨이트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 (2001~2002) 스코틀랜드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 (2002~2004) 나이지리아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 (2007~2008) 아제르바이잔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 (2008~2014) 미국 축구 국가대표팀 특별 기술고문[1] (2014) 미국 축구 국가대표팀 기술이사 (2015~ ) |
국가대표 | 96경기 1골 |
독일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 | ||||
프란츠 베켄바우어 (1984~1990) | → | 베르티 포크츠 (1990~1998) | → | 에리히 리베크 (1998~2000) |
독일 역사상 최고의 라이트백
1 소개
VfL 보루시아 묀헨글라트바흐의 레전드로 팀의 황금기를 이끈 선수이자 역대 독일 베스트 일레븐 중에서도 손꼽히는 수비수, 현 미국 축구 국가대표팀의 기술이사.
독일 축구 국가대표팀을 이끌고 있던 당시에는 비록 유로 96 우승을 차지하는데는 성공하였으나 유로 92에서의 뜻밖의 패배로 준우승에 머물고 94월드컵에서 저조한 성적, 감독 후반기에 세대교체에 실패하며 리베크의 짐만 안겨주어 독일 축구의 암흑기를 가져왔다는 점에서 처음에는 역대 최악의 감독으로 꼽혔다. 그러나 후임 에리히 리베크가 제대로 유로 2000을 말아먹어 역대 최악의 감독 자리는 리베크에게 내주었고 그이후 루디 푈러까지 독일 축구의 암흑기가 이어지자 그래도 유로 96 타이틀이라도 안겨준 감독으로 리베크나 루디 푈러에 비하면 양반이라는 시각으로 시간이 서서히 흐르면서 희석되었다. 후에 쿠웨이트, 스코틀랜드, 나이지리아, 아제르바이젠 등 국가대표팀 감독직을 역임하며 꾸준히 활동했지만 국내 축구 팬들에겐 화제가 되지 않고 있다. 그래도 2005년 쯤엔 한국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 후보에 오르기도 했었다.
2 선수생활
VfL 보루시아 묀헨글라트바흐의 황금기를 이끈 선수시절, 좌로부터 울리 슈틸리케, 우도 라텍(감독), 유프 하인케스, 베르티 포크츠
1965년 스무 살의 나이로 독일의 명문 VfL 보루시아 묀헨글라트바흐의 수비수로 데뷔, 은퇴 까지 한 팀에만 머물렀다. 데뷔 때부터 주전생활을 하였고 특히 1965/66 시즌부터 1970/71 시즌까지 6시즌 내리 리그 전경기 출장을 하기도 한 포크츠는 묀헨글라트바흐의 핵심선수로 활동하며 다섯번의 분데스리가우승과 한 차례의 DFB-포칼컵 우승, 2차례의 UEFA CUP우승을 차지했다. 프란츠 베켄바워를 앞세워 리그와 유럽피언 컵 우승을 차지 하며 리그를 독차지 하고 있던 바이에른 뮌헨의 독주를 막아내기도 했다. 대인방어 능력이 일품이었고 그 덕에‘Der Terrier’(테리어)라는 별명으로 불리기도 했다.
라이트 백이긴 하지만 기술적으로는 좋기는커녕 몹시 나쁘다는 평가를 받았다.
카더라이긴 하지만 본인이 말하기를 '나는 리프팅을 세번정도 밖에 하지 못하지만 세계적인 선수가 되었다.' 라는 말이 나올 정도면...
그러나 뛰어난 피지컬에다가 별명처럼 사냥개 같은 끈기로 상대를 물고 늘어지는 선수였고 이따금 오버래핑에 나서서 공격에 도움을 주기도 했다. 이렇다고 해서 생각보다 대단하지 않은 선수라고 착각하면 안 되는 게 빌트지 월드 클래스를 7번 따냈다. 포그츠보다 월드클래스를 더 많이 평가된 선수는 베켄바우어와 우베 젤러뿐이고 6번 따낸 선수들로는 올리버 칸, 파울 브라이트너, 하랄트 슈마허, 칼 하인츠 슈넬링거가 있다.
국가대표팀에서도 맹활약하며 유로 72와 1974년 서독 월드컵에서 우승을 경험했다. 특히 74 서독 월드컵 결승전에서는 특유의 대인방어 능력으로 네덜란드의 요한 크루이프를 완전 봉쇄하면서 우승의 일등공신이 되었다.
14시즌 동안 한 팀에서 활동하던 베르티 포크츠는 서른 네살의 나이로 은퇴를 선언한다.
3 감독생활
유로 1996 우승 확정 직후 환호하는 포크츠 (그의 감독 생활 유일한 리즈시절)
베르티 포크츠는 1979년, 은퇴 직후 곧바로 서독 U-21 대표팀 감독으로 임명되어 1990년까지 활동했다. 그리고 그 중간인 1986년에는 서독 국가대표팀 수석코치로 프란츠 베켄바워를 보좌하며 1990년 이탈리아 월드컵에서 독일 대표팀을 월드컵 우승으로 이끌었다.
1990 이탈리아 월드컵 이후 베켄바워가 감독직을 사임하자 베르티 포크츠가 후임으로 임명되었다. 베켄바워는 베르티 포크츠가 물려받게 될 대표팀이 월드컵 우승을 차지한 서독과 당시 통일되어 합류하게 될 동독 선수(잠머, 울프 키어스텐 등)들을 감안하며 무적의 팀이라 칭하며 띄워주고 사직했지만 이러한 발언은 베르티 포크츠에게 상당한 부담을 안겨주었다.
첫 번째 메이저 대회인 유로 92에서는 조별 본선에서 스코틀랜드에게 2:0 승리, CIS에게 1:1 무승부, 네덜란드에게 1:3 패배로 불안하게 4강에 진출했고 스페인을 3:2로 이기고 결승에 진출했으나 미카엘 라우드럽이 이끄는 덴마크에게 일격을 당해 준우승에 머무르게 된다.
두 번째 메이저 대회인 1994년 미국 월드컵에서는 위르겐 클린스만을 앞세워 스페인과 무승부, 볼리비아와 한국을 상대로 승리하며 16강에 진출했으나[2] 당시 팀의 중원을 담당하던 슈테판 에펜베르크가 관중을 향해 가운데 손가락을 치켜드는 만행으로 중도 귀국 조치 시키기도 했다. 16강에서 벨기에를 상대로 3:2승리를 거뒀으나 8강에서 불가리아에게 1:2로 일격을 당했다.
유로 92의 준우승이야 넘어갈수 있어도 당시 1990 이탈리아 월드컵 우승 멤버와 잠머, 키어스텐 등의 동독 선수들이 전성기를 맞이할 나이라는것을 감안하면 94 월드컵에서 그것도 한참 전력이 아래인 불가리아를 상대로 일격을 당했다는건 용납하기가 힘들었다. 그리고 유난히 노장들에게 집착을 했는데 1994월드컵에서 루디 푈러,베르톨트,브레메 등 은퇴직전이거나 대표팀 일선에서 물러난 선수들을 등용해 평균 연령을 높였고 미국의 더위를 못이겨 결국 체력 저하로 16강 토너먼트에서도 지지부진한 모습을 보이더니 8강에서 제대로 당했다. 그리고 1990 이탈리아 월드컵 우승 당시의 전술을 그대로 답습했지만 이미 상대들은 독일을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알고 있었다. 게다가 에펜베르크가 관중을 향해 가운데 손가락을 치켜든 사건이나 팀의 핵심인 마테우스와 클린스만의 갈등으로 대표되는 부족한 팀 장악 능력, 소홀한 미디어 관리 등의 문제가 있었다.
이러한 문제로 베르티 포크츠는 1994 월드컵 직후 감독직을 사임하려 했고 실제 언론에서도 사임이 확실시 되는 분위기 였고 당시 바이에른 뮌헨, 레버쿠젠 감독설이 나왔지만 축구 협회의 만류로 사표는 반려되고 계속 독일 국가대표팀 감독직을 유지하였다.
유로 96을 준비하며 레네 슈나이더, 토드, 세바스티안 치게, 마르쿠스 바벨 등 A매치 경력이 없던 선수들을 적극 기용하며 세대교체를 준비하기 시작했으나 이런 신인들이 A매치에 바로 좋은 모습을 보여주지 않고 실수를 연발하면 다시 내치는 등 세대교체를 준비하는것 같으면서도 결국엔 노장들을 믿고 가는 모습을 보여줬다. 결국, 베르티 포크츠가 준비한 포메이션은 1-4-4-1로 마티아스 잠머를 스위퍼로 두고 그 위에 치게-콜러-헬머-로이타를 4백으로 두는 극단적인 수비적인 포메이션이었다. 결국 잠머의 수비능력과 한방이 가능한 위르겐 클린스만으로 경기를 끝내겠다는 베르티 포크츠의 전략은 유로 96에선 먹혀들어 경기당 1.17실점이라는 극강의 수비력을 바탕으로 결승전에서는 올리버 비어호프의 예상치 못한 활약을 바탕으로 우승을 차지한다.
그러나 공-수의 핵인 마티어스 잠머의 은퇴와 위르겐 클린스만의 하락세, 대체 선수가 없었던 상황에서 유로 96의 우승은 비록 우승이지만 오히려 독일 축구대표팀에게 독이 되버렸다. 유로 96의 영광유로 96의 운빨을 노리고 마티어스 잠머 대신 로타어 마테우스까지 복귀시키는 강수를 뒀지만 98월드컵에서는 요행이 먹혀들지 않고 8강전에서 크로아티아에게 0:3 완패를 당한다.
98월드컵 직후에도 독일대표팀 감독을 유지하던 베르티 포크츠는 결국 9월에 감독직을 사임한다.
2년간 휴식을 취하던 베르티 포크츠는 2000년 11월 바이어 04 레버쿠젠의 감독으로 복귀한다. 리그 4위를 기록해 다음 시즌 챔피언스리그 예선 티켓을 따냈지만 한 시즌만에 사임하고 2001년 8월 쿠웨이트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으로 임명된다. 6개월 동안 쿠웨이트 대표팀을 이끌던 베르티 포크츠는 2002년 3월 스코틀랜드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으로 직을 옮긴다. 참고로 스코틀랜드 축구 대표팀 역사상 최초의 외국인 감독이다. 아마 잉글랜드가 스벤 예란 에릭손 감독을 최초로 외국인 감독으로 영입하면서 잘 나가는 것을 보고 자극 받아 스코틀랜드도 개혁의 필요성을 느껴 유로 96에서 우승을 하며 능력을 검증한 포크츠를 영입한 모양이다.
그러나 스코틀랜드는 포크츠가 감독이 된 이후에 여러번에 굴욕적인 패배를 겪었다. 스코틀랜드 감독 시절 시작부터 프랑스한테 0:5, 한국에게 1:4로 참패 당하는 등[3] 내내 형펀없는 성적과 경기력으로 내내 언론의 질타를 받던 포크츠는 유로 2004 예선전에서 독일과 아이슬랜드, 페로 제도, 리투아니아와 같은 조로 편성되어 조 2위를 차지, 플레이오프에 진출하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플레이오프 상대인 네덜란드에게 홈에선 1:0승리를 거두었으나 원정 2차전에서 0;6 패배를 당해 유로 2004 진출에 실패했다. 유로 2004 예선 직후 친선경기에서 약체 몰도바와 무승부를 기록하며 스코틀랜드 언론으로 부터 비난을 받은 베르티 포크츠는 계약기간이 절반이 남았지만 스코틀랜드 감독직을 자진 사퇴한다.
2007년 1월 나이지리아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으로 4년 계약을 맺고 감독직으로 복귀했으나 2008 아프리카 네이션스컵에서 8강에 머무르며 1982년 이후 최악의 성적을 기록했다. 결국 여론의 압박을 못이겨 자진사퇴한다.
2008년 4월 아제르바이잔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으로 임명되었고 그 후 2010 FIFA 월드컵 남아프리카공화국, 유로 2012, 2014 FIFA 월드컵 브라질의 유럽지역 예선전에서 영 좋지 않은 성적을 거뒀다. 그러나 아제르바이잔 축구협회에선 만족한 듯 꾸준히 연장계약을 체결하여 지금까지 아제르바이잔 감독직을 수행중이...었으나 유로 2016 예선에서의 부진한 성적으로 인해 경질되었다.
위르겐 클린스만과의 친분으로 2014 브라질 월드컵 기간에는 미국 축구 국가대표팀의 특별 기술고문으로 임명되어 월드컵 기간에 클린스만을 보좌하며 좋은 성과를 거두었다. 결국 2015년 3월 미국 축구 국가대표팀의 기술이사로 정식 임명되었다.
4 우승 경력
4.1 선수 시절
- VfL 보루시아 묀헨글라트바흐 (1965/66 - 1978/79)
- 서독 축구 국가대표팀
- 유로 1972 우승
- 1974 FIFA 월드컵 서독 우승
4.2 감독 시절
- 독일 축구 국가대표팀 (1990 - 1998)
- 유로 1996 우승
- ↑ 브라질 월드컵 기간에만 활동
- ↑ 당시 한국과의 조별리그 마지막 경기도 3:2로 상당히 진땀나는 승부였다. 특히 막판에는 40도를 넘나드는 경기장 온도 속에서 체력이 방전된 독일 선수들은 거의 걸어다니는 상황이었다.
- ↑ 당시 이 결과에 대해서 스코틀랜드에서 충격이 컸는지 BBC에서 의견 수집까지 할 정도였다. B팀이라고, 주전 선수들이 빠져서 그렇다고 정신승리를 하는 의견도 보이는데, 당시 스코틀랜드는 2002 월드컵 예선에서 탈락한 뒤로 스코틀랜드 축구 대표팀 역사상 최초의 외국인 감독인 베르티 포그츠 체제가 막 들어서면서 세대교체를 시도 중이었기 때문에 오히려 더 비참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