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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 이름 | 가브리엘 오마르 바티스투타 (Gabriel Omar Batistuta) |
생년월일 | 1969년 2월 1일 |
국적 | 아르헨티나 |
출생지 | 레콘키스타 |
신체 조건 | 185cm, 73kg |
주발 | 오른발 |
포지션 | 스트라이커 |
소속 클럽 | 뉴웰스 올드 보이스 (1988-1989) 리버 플레이트 (1989-1990) 보카 주니어스 (1990-1991) ACF 피오렌티나 (1991-2000) AS 로마 (2000-2003) 인터 밀란 (2003) (임대) 알 아라비 (2003-2005) |
국가 대표 | 78경기 54골[1][2] |
1999 FIFA 올해의 선수상 | ||
수상 히바우두 | 2위 데이비드 베컴 | 3위 가브리엘 바티스투타 |
1 소개
"모든 것이 무너져도 우리에겐 축구가 있다."
아르헨티나 축구 역사상 최고의 공격수 중 한 명이자, 1990년대 당시 세계 최고의 스트라이커 중 한 명. 일명 바티골.
애칭은 '천사'[3], 사자왕(Re leone)[4], 그라운드의 마지막 로맨티스트.
클럽 통산 441경기 254골. 국가대표 78경기 54골.
2 플레이스타일
185cm 장신이라 제공권은 기본이고, 국적이 아르헨티나. 그런데 '저런 장신 선수가 현란한 아르헨티나 스타일로 볼을 찬다. 거기까지면 그냥 특출난 선수였겠지만, 그의 슈팅에 대한 철학은 "왜 슛을 약하게 쏘는가?"라고 할 수 있는데, 말 그대로 대포알같은 강슛을 날린다. 단순히 대포알 슈팅이 아니라, 보는 사람의 가슴을 뻥 뚫게 만드는 시원스러운 강슛은 소위 말하는 클래스가 남달랐다.
바티스투타의 인기는 이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만드는 슈팅에 있었다. 축구에 있어서 하이라이트는 누가 뭐래도 슛이고 바티스투타는 그것을 가장 임팩트있게 할 수 있는 선수였다. 그야말로 스트라이커의 로망을 보여줬던 선수.
여기까지도 참아줄 수 있는데, 그의 볼 컨트롤에 대한 철학이 두 번 이상 볼 터치는 사치다! 라는 것이다. 원터치 슛, 원 터치도 귀찮으면 그냥 발리 슈팅으로 벼락같이 공을 찬다. 이러니까 골키퍼로서는 한 박자 빠른 슛에 제대로 반응조차 못하고 멍하니 골을 먹기 일쑤였고 보는 이들은 그 간결한 터치에 이어지는 강력한 슈팅으로 캐스터가 그의 이름을 '바티'까지밖에 부르지 못했는데 골네트를 강하게 흔드는 골에 대한 환호에 함께 소리치게 만들 수 있는 당대의 슈퍼스타였고 다시는 등장하지 못할 정통 스트라이커의 로망을 집대성한 선수였다. 그래서 별명이 '바티골'이었다.
일명 '맞고 뒤져라' 식으로 강한 슈팅 이외에도 직접 프리킥도 준수하게 잘 찼으며, 헤딩 슛도 또한 엄청났다. 정통 스트라이커의 표본이자 최후의 로맨티시스트라는 별명은 다른 이유로 붙은 거지만, 2000년대에 들어서 현대축구의 흐름이 바뀌기 이전, 스트라이커의 로망을 마지막으로 보여준 선수다.
하지만, 그런 그에게도 치명적인 결점이 있었다. 바로 골 찬스가 생겼을 때도 패스를 절대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탐욕왕 그리고 온리 원맨 플레이(Only one man play). 굳이 말하자면 패스를 아예 안 한다기보다는 패스가 능숙치 않다는 게 맞다. 이는 바티스투타가 어릴 때는 다른 운동을 하다가 10대 초반에야 축구를 늦깎이로 시작했기 때문에 생긴 일이다. 물론 축구를 시작한 시점을 생각하면 그 정도 공격수가 된 것도 대단하다고 볼 수 있으며, 못 하는 패스를 할 바엔 욕심을 부려서라도 걍 슛을 꽂아넣는게 낫다고 판단하였던 걸지도 모른다.[5]
후방에서 골과 거의 관계 없는 패스라면 모를까, 직접적인 골 상황에서는 패스를 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후방 가담도는 바닥을 기는 현대축구에선 사라진, 오직 공격을 위한 정통 스트라이커 스타일. 팀 플레이라고는 딱 최전방에서 뒷공간 노리기나 최적의 슈팅 위치 탐색이 전부였지만 응?[6] 축구의 흐름이 변해가던 무렵에도 최전방 공격수라는 고전적 롤을 수행하며 그라운드를 지켜나갔다.
이 고전적 원탑 롤에 대해 요한 크루이프는 아예 대놓고 "바티스투타는 패스부터 다시 배워야 한다"고 노골적으로 깠다. 토탈 사커의 숭배자이자 패스, 점유율 축구를 중시하는 꾸레이프 크루이프의 관점에서 바티스투타는 위대한 축구선수가 아니라 그냥 축구의 기본조차 되어있지 않은 선수로 취급당한다. 하지만, 토탈사커로 출발하면서 점유율 축구로 진화한 현대축구에서 다시 원톱 롤을 찾아 해메는 시대라는 것을 잘 생각하면 이러한 비난은 아이러니하다고밖에 할 수 없다.
이러한 스타일을 떠나서, 팀 내 친화력이 별로 없다는 것 역시 바티스투타의 결정적 결함이다. 이런 점 때문에 대표팀 동료인 클라우디오 로페즈와 에르난 크레스포는 같은 아르헨티나의 공격수였음에도 사이가 좋지 못 했다. 로페즈같은 경우는 윙포워드이지만 엄청난 득점력을 가진 선수였는데도 대놓고 빵셔틀바티한테 패스나 하라는 식으로 돌아가던 국가대표팀 운영에 짜증이 났고, 크레스포는 2002년 당시 폼이 바티스투타보다 더 좋았음에도 불구하고 같은 타겟맨이지만 네임벨류와 팀내 영향력에 밀려 벤치에 앉아야만 했다. 그나마 함께 뭔가를 만들어갈 수 있는 아르헨티나 공격수는 아리엘 오르테가 정도인데 오르테가는 친화력 안 좋기로는 바티스투타는 명함도 못 내밀었으니 2002년 한일월드컵 마지막 경기에서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마라도나는 둘의 사이가 좋지 못하자, "저 두놈(바티와 크레스포)은 골방에 가둬놓고 한쪽이 숨질 때까지 서로에게 펀치를 날려야 한다."라고 디스. 요한 크루이프도 한 마디 했다. "크레스포는 2인자로 있기에는 너무 아까운 선수다. 특히 1인자가 바티스투타라면 더더욱." 사실, 크레스포는 전형적인 스코어러인 바티스투타와는 다르다. 바티스투타는 항상 골만을 노리는 득점 사냥꾼이었지만, 크레스포는 친화력 자체는 썩 좋지 않아도 포스트 플레이와 팀워크에는 능한 선수다.
3 클럽
리버 플레이트와 보카 주니어스를 거쳐, 1991년 코파 아메리카 우승과 함께 득점왕을 차지하며 세계의 명문구단들의 주목을 받았다. 결국, 세리에 A ACF 피오렌티나로 이적한다.
이적 첫 시즌에 13골을 기록하며 순조롭게 리그에 적응했고, 이후 줄곧 절정의 골 결정력을 보인다. 26골로 세리에 A 득점왕을 차지한 적도 있지만, 오랜 세월 우승과 인연이 없었다. 오히려 1994년 팀이 세리에 B로 강등당하는(...) 일까지 생겼다. 당연히 여타 명문팀에서 유혹이 따랐지만, 바티스투타는 피오렌티나를 위해서 모든 이적 제의를 거절하고 세리에 B에서 16골을 넣으면서 기어이 다음해 피오렌티나를 세리에 A로 재승격을 시킨다.
피오렌티나 시절의 커리어 하이는 세리에 A에서 기록한 리그 11경기 연속골, 그리고 이 당시 감독이 클라우디오 라니에리.
그러나 바티스투타가 남긴 훈훈한 미담은 여기서 끝이 아니라 시작이었다.
1990년대 후반 세리에 A는 이른바 칠공주시대였다.[7] 일곱 팀이 한발만 삐끗해도 우승권에서 멀어지는 치열한 각축전을 벌였고, 피오렌티나도 그중 한 팀이었다. 하지만 끝내 우승을 차지하지 못했고, 결국 피오렌티나는 재정 문제로 팀의 간판이었던 바티스투타와 루이 코스타를 떠나보낸다. 바티스투타는 2000년 AS 로마로 이적해[8], 00-01 시즌을 치룬다.
이 시즌 AS 로마는 피오렌티나와 벌인 경기에서 1:0으로 이겼는데, 결승골을 넣은 선수가 바로 바티스투타였다. 평상시 기관총을 난사하는 골 셀러브레이션으로 유명했지만, 이날 만큼은 골을 넣고 멍하니 서서 눈물을 흘렸다.
이날 한 신문은 그라운드의 마지막 로맨티시스트란 찬사를 바쳤고, 바티스투타가 흘린 눈물은 두고두고 인구에 회자되었다. 국내축구든 해외축구든 이적 문제를 놓고 온갖 잡음을 일으켜 끝내 팬들이 뒷목을 잡게 만드는 세태에 비한다면 실로 동화같은 이야기다.
당시 다른 팀들, 맨유등으로부터도 오퍼가 왔었지만 왜 피오렌티나와 붙을 가능성이 있는 로마로 이적하였는지는 후에 포포투에서의 인터뷰에서 바티스투타가 밝혔는데, 맨유같은 곳은 자신의 힘이 아니더라도 우승을 얼마든지 할 수 있지만, 로마라면 자신의 힘으로 우승을 시켜줄수 있기에 로마를 선택하였다고 밝혔다.
피오렌티나의 재정문제도 있었지만 나이가 들어가는데 우승컵 하나쯤은 제대로 들어보고 싶었기에 이적을 하기로 한것.
피오렌티나에서는 자신과 루이 코스타 만으로는 더 이상 무리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라한다. 하지만 30이 넘어서까지 피오렌티나에 남다가 간것만 보아도 피오렌티나에 대한 애정이 강하였기에 그러하였을것이다. 강등이 되어도 떠나지는 않았으니까. 이러한 사연을 뒤로 하고 바티스투타는 20골을 기록하며 AS 로마 우승[9]을 견인해낸다.
그러나 그의 생애 첫 우승을 차지하기 위해 모든것을 다 바친 탓일까, 급격히 기량이 줄어들어 다음 시즌엔 6골밖에 기록하지 못하고 이듬해인 02-03시즌에 4골을 기록하던 시즌 중반 인테르로 이적, 2골을 더 넣었지만 결국 2003년 이탈리아 생활을 정리하고 카타르의 알 아라비 클럽으로 이적했다. 이적한 첫해 18경기 25골을 기록해 카타르 리그 득점왕을 차지했고, 다음 시즌 3경기만을 뛴 채 2005년 은퇴했다. 은퇴 이후에는 축구 관련 일에서 모두 손을 떼고, 건설업에 종사하고 있다.
4 국가대표
1994년 미국 월드컵에 참가해 해트트릭을 기록하는 등 절정의 골 감각을 과시했지만, 마라도나의 코카인 파동으로 선수단 분위기가 시망, 겨우겨우 와일드카드로 16강에 올랐지만 16강전에서 탈락한다.
1998년 프랑스 월드컵에서 해트트릭을 기록하는 등 절정의 골 감각을 과시했지만, 하필이면 상대가 대한민국을 확 휩쓸어 버린 히딩크가 이끄는 네덜란드.... 결국 네덜란드에게 패해 8강에서 탈락한다. 이 때 통한의 슛이 하나 있었는데, 바티스투타 스타일로 원터치 슈팅을 날린 것이 그만 골 포스트에 맞고 말았다. 그리고, 골포스트를 때리는 '텅!' 하고 때리는 소리가 당시의 바티빠들에게 정말 잊혀지지 않는 통한의 슛이다. ㅆㅁ ㅈㅂ골대!!
심지어 골 포스트에 맞은 강력한 슛이 공중에 뜬 채로 거의 하프라인까지 공이 튕겨나와서 보는 이들의 눈을 의심케 할 정도로 초강력한 슛이었다. 최종 개인 득점은 이탈리아의 크리스티안 비에리와 동률인 5골이다.
어지간한 공격수는 리그에서 좀처럼 기록하기 힘든 해트트릭을 월드컵 무대에서, 그것도 2개 대회 연속 기록하는 괴수였지만 그가 참여한 국가대표는 그만한 성적을 거두지 못했다.
그리고 2002년, 월드컵이 처음 열리는 땅에서 선수 생활의 황혼기를 맞아 마지막 투혼을 다짐했지만, 아르헨티나 정부가 돈 없다고 배를 쨌다. 망했어요.
이는 우승 포상금이 문제가 아니라 나라에서 비행기표 값도 마련해지 못하는 상황을 의미했다. 그럼에도 경제적 위기에 처한 조국을 위해 바티스투타를 비롯한 아르헨티나 국가대표 선수들이 자비로 월드컵에 참가하며 일본에 입국했다.[10]
그런데 아르헨티나가 속한 F조 편성이... 잉글랜드, 스웨덴, 나이지리아.... 바로 죽음의 조였다. 게다가 영원한 맞수인 잉글랜드까지 포함된, 그야말로 사면초가의 상황.
운이 없게도 경기를 치룬 일본 열도는 데이비드 베컴 광풍이 일며 베컴과 그의 동료들인 잉글랜드 국가대표들은 거의 국빈 취급을 받았던 것에 비해, 상대적으로 아르헨티나는 듣보잡 취급을 받는 등 전반적으로 여건이 불리했다. 일본이 잉글랜드를 일방적으로 응원했으니, 절반 정도는 홈이었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의 상황.[11]
그래도 당시 아르헨티나 스쿼드와 남미예선 과정이 워낙에 좋았기에[12] 수많은 팬들과 전문가들은 아르헨티나는 거의 100% 조별 예선을 통과하리라 예상했고 심지어 프랑스를 제치고 우승후보 0순위라는 평을 받았다. 하지만 실제 벌어진 결과는 결코 아르헨티나에 닥친 경제 상황처럼 낙관적이지 않았다.
F조 첫번째 경기에서 아르헨티나는 나이지리아와 0:0 팽팽한 싸움을 벌이다 결국 바티스투타의 극적인 결승골로 1승을 얻는다. 반면 잉글랜드와 스웨덴이 1:1로 비기면서 유리한 고지를 선점한 듯 했다. 그러나 잉글랜드전에서 시뮬레이션에 의한 통한의 페널티킥[13]을 내주며 통한의 패전을 겪었다. 이는 오언이 아르헨티나 수비수 마우리시오 포체티노(現 토트넘 감독)에게 꾀병을 부린 결과였다.[14]
마지막 경기인 스웨덴전은 이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끌려가던 중, 경기 막판 크레스포의 동점 골로 마지막 희망을 이어갔지만 끝내 1:1로 비기며 1승 1무 1패로 예선에서 탈락하는 수모를 당했다. 그래도 위에서 말한 것처럼 프랑스의 성적은 제쳤다
모든 것이 무너져도 우리에겐 축구가 있다. 경제난에 고통받는 아르헨티나 국민에게 월드컵 개최기간 단 한달 동안이라도 희망을 선사하고자 했던 선수들은 결국 그라운드에 쓰러져 통곡한다. 후반전 발목 부상으로 교체된 바티스투타 역시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을 닦는 장면이 카메라에 잡혀 당시 많은 축구팬을 가슴 뭉클하게 했다. 물론 이걸 지켜보던 바티 팬들 또한 함께 눈물을 흘렸다. 결국 2002년 한일월드컵을 마지막으로 국가대표 활동을 쓸쓸히 마무리하였다.
일세를 풍미했던 실력에 비해 정작 바티스투타 개인이 얻은 수상 기록은 부족했을지언정, 모두가 인정했던 절정의 기량과 그보다 감동을 주던 인간미 넘치는 모습으로 인해 아직도 많은 축구팬들에게 사랑받는다. 가장 큰 성취를 이룬 때는 아마도 AS 로마에서 우승한 때겠지만, 자타가 공인하는 전성기 시절은 피오렌티나에 몸을 담았을 때였고, 지금도 피오렌티나의 레전드로 존경을 받고 있으며 아르헨티나 축구를 대표하는 살아 있는 전설이라고 부를 수 있다.
5 여담
바티골이란 애칭은 중계를 하다 보면 '바티ㅅ...골!'할 정도로 빠른 슛팅 때문이라는 통설이지만, 사실 유래는 아르헨티나 중계진이 당시 유행어에 맞춰 애드립을 친 것이라고. 그런데 막상 들어보니 그럴싸해서 팬들에겐 바티골로 굳어버렸다.
또 피오렌티나 시절 100경기 출장 기념으로 홈구장 앞에 실물 사이즈 동상을 세워준 일화도 유명하다. 현재 이 동상은 공식적으로는 '철거'했다고 하는데, 실상은 AS 로마로 이적한 뒤 상심한 팬들이 부숴버렸다고도 한다.
최근 월드컵 해설을 위해 남아공에 갔다가 강도를 당해 가진 돈을 싸그리 털렸다고 한다. 지못미.
최근 은퇴 직후 오랜 선수생활로 다리 연골과 인대가 심각하게 손상되어 집안에서 다니는 것조차 힘들 정도로 상태가 심각하여 절단을 고려하기도 했지만, 철심을 박는 수술을 통해 다행이 절단을 피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는 와전된 이야기로, 바티스투타의 아들에 따르면 치료 과정중에 고통이 심해 바티스투타가 차라리 확 잘라버릴까라는 식으로 한 마디 툭 던진 것이라고 한다. 수술을 성공적으로 마쳐 축구를 다시 시작했을만큼 도로 회복되었다고 한다.
여담으로 가수 이한철이 그를 기리는 노래인 '바티스투타'라는 노래를 만들었다.[15]
- ↑ 아르헨티나 축구 국가대표팀 역대 최다 득점자였지만 2016년 6월 22일에 후배 리오넬 메시가 그 기록을 갱신하였다.
- ↑ 바티스투타가 2골을 기록했던 1995년 슬로바키아와의 A매치를 공식 A매치로 인정하지 않으면서 56골에서 54골로 수정되었다
- ↑ 대천사 가브리엘.
- ↑ 길게 흘러내린 금발.
- ↑ 포포투 출처.
- ↑ 얼핏 들어보면 비슷해 보이지만 둘의 스타일은 정반대였다, 인자기는 최전방에서 대기하다가 오프사이드 라인을 깨부수고 테크니컬하게 여기저기 움직이며 몰고가다가 가볍게 밀어넣는 스타일이고, 바티스투타는 최전방에서 대기하다가 공이오면 가볍게 한번 터치하고 그대로 파워풀하게 꽂아넣는 스타일이다. 둘은 오히려 플레이스타일이 극과극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 ↑ AC 밀란, 인테르, 유벤투스, AS 로마, 라치오, 피오렌티나, 파르마
- ↑ 이적료가 약 400억원으로, 당시 축구 역사상 두번째로 높은 이적료였다. 노쇠화가 시작될 나이인것을 감안하면 대단한 금액이다.
- ↑ 로마 역사상 3번째이며, 또 한 명의 위대한 스타 프란체스코 토티의 유일한 우승이기도 하다.
- ↑ 어느 곳에서는 피파에서 자금을 대주기 때문에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고 하는데 아시는 분은 추가바람.
- ↑ 사실 아르헨티나도 열렬한 응원을 받았으나, 잉글랜드에 비하면 새발의 피. 참고로 2002 월드컵 당시 한국인들은 응원단을 둘로 짤라서 양쪽 모두를 응원했으나 일본인들은 일방적으로 인기있는 팀들을 응원했다. 당시 잉글랜드, 브라질, 이탈리아, 독일의 경기들을 보면 이게 일본인지 응원받는 나라의 홈인지 구별이 안되는 상황이다. 심지어 에콰도르는 이탈리아와의 경기에서 국가연주 때 일본인들의 야유를 받았고 덴마크도 경기 내내 야유를 받았다. 스웨덴과 세네갈의 16강전때는 유명한 선수가 더 많은 스웨덴을 일방적으로 응원했고 심지어 일본인들은 잉글랜드의 국가를 따라불렀다!
H조가 저 조편성이 아니라 일본/잉글랜드/튀니지/포르투갈이 돼도 그러나 보자. 아마 일본 대 잉글랜드전이어도 잉글랜드의 국가를 따라부를까? - ↑ 라이벌 브라질을 쳐발라버리고 조 1위로 예선통과. 이 때 브라질은 악전고투하며 3위로 올라갔다.
- ↑ 확실히 마이클 오언의 시뮬레이션이다. 이를 2006년에 데이비드 베컴이 인정했다. 베컴이 이것을 시뮬레이션이라고 인정하면서 같이 한 말이 내가 1986년 월드컵 당시의 디에고 마라도나와 같은 입장이였어도 손으로 공을 넣었다.라고 대놓고 말했다.
- ↑ 이 월드컵 이후, 마우리시오 포체티노는 두 번 다시 아르헨티나 대표팀 명단에 들어가지 못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것이 시뮬레이션을 인정한 백암선생은 98년 월드컵 당시 디에고 시메오네의 다리를 걷어 찬 것으로 국가대표에 다시는 못 승선할것 같았지만 4년 후 이 악연에 대해 증언하게 된다.
- ↑ 정확하게는 축구선수 바티스투타의 이름을 딴 이한철의 애견에 대한 노래이다. 가사중에 '내가 공을 던지면 너는 어느샌가 내 앞에 있어' 라는 표현만 봐도 이는 명확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