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서양 전투

(대서양 해전에서 넘어옴)

Battle of the Atlantic
Atlantikschlacht

1942년 여름에 초계선에 있는 U-보트들이 각기 상선을 딱 한 척씩만 더 격침하는데 성공했더라면 제2차 세계대전의 경과가, 어쩌면 결과까지도 달라졌을 것이다.

1 개요

제2차 세계대전에서 독일 해군크릭스마리네영국 해군(로얄 네이비)이 벌인 전투. 사실 전투라고는 하지만 그 실상을 보면 사냥꾼과 사냥감이 손바닥 뒤집듯이 뒤집힌 전투로, 초반에는 U보트를 앞세운 크릭스마리네가 영국과 미국 호송선단을 보이는 족족 고기밥으로 만들어버렸지만, 전황이 미국의 전시생산체제가 본궤도에 오르면서 어마어마하게 찍어낸 리버티쉽, 대잠초계기, 호위항공모함 등이 대서양에 집중되면서 크릭스마리네의 멸망으로 끝을 맺고 말았다.

2 전간기~1939년

2차대전 개전 후 지상전에서 일방적으로 발린 끝에 유럽 본토를 독일이 석권하자 영국은 1차대전의 악몽, 즉 "무제한 잠수함 작전"(Unrestricted submarine warfare)이 재판되리라는 공포에 떨었다. 석유를 위시한 전략 물자와 식량의 절반을 해상 보급에 의존하는 영국에게는 사실상 나라의 운명이 썩은 동아줄에 매달린거나 다름 없었다.

그러나 독일로서도 해군국 영국의 대함대를 물리치고 해상봉쇄를 추진하기에는 전력이 턱없이 부족했다. 당장 1차대전 패전후에 잠수함은 아예 보유가 금지되었고, 나머지 해군전력은 무늬만 남을 정도로 제한받았으며, 재무장을 시작할 때도 우선 수상함 전력부터 확충했기 때문이었다.

이런 이유로 인해 개전시 U보트 전력은 고작 56척, 게다가 그 중 일부는 실제 전투에 써먹기 어려운 실험용 잠수함이나, 항속거리가 절망적으로 짧은 연안용 잠수함이었다.

게다가 그나마 건조한 몇 안되는 수상함을 투입한 통상파괴전은 영국 해군의 봉쇄등으로 큰 실효를 거두지 못하고 어드미럴 그라프 슈페의 자침등 참담한 결과로 마무리되었다. 물론 상선으로 위장한 몇몇 보조순양함이나 포켓전함들이 먼 대양에서 뛰어난 전과를 올렸지만, 이미 개전시 각지에 개미같이 깔려있는 영국해군의 정찰망에서 벗어나 단독으로 임무를 수행하기에는 몇 척 안되는 금싸라기같은 수상함으로 감당하기에는 위험성이 컸다.

결국 크릭스마리네는 기존의 수상함 주류에서 잠수함 주류로 전략을 수정하게 된다. 하지만 이 때까지 억지로 정규해전에 투입해서 잃어버린 U보트 숫자도 20여척에 육박했기 때문에 U보트가 그렇게 강력한 힘을 발휘할 것이라고는 아무도 예측하지 못했다.

3 1940년~1941년

하지만 막상 전투가 개시되자 그 때까지 긴급건조한 것을 합쳐도 겨우 40척에 불과한 U보트[1]들이 당시 잠수함 전대 사령관이던 칼 되니츠가 도입한 이리 떼 전술(Rudeltaktik)(현재의 울프팩 전술)을 통해 수십배의 연합군 상선들을 격침시키는 괴력을 발휘하였다.

여기서 이리떼 전술에 대해 잠깐 설명하자면 아래와 같다.

  • 기존의 잠수함 전술 : 잠수함이 독자적으로 결정한 일정 수역에서 매복했다가 지나가는 배를 발견하면 단독으로 습격하는 것. 홀로 다니는 배를 습격하는 것에는 유리하지만, 상대방이 호송선단을 조직할 경우 대다수의 잠수함은 놀게 되고, 어쩌다가 호송선단을 발견한 잠수함도 고작 1-2척의 손해를 가하거나 역으로 호송선단 호위함에게 격침당하는 약점이 있다.
  • 이리떼 전술 : 육상에 있는 지휘소가 미리 잠수함들을 호송선단이 지나갈 것으로 예측되는 수역에 분산해서 배치한 후, 배치된 잠수함 중 하나가 호송선단이 지나가는 것을 발견하고 무선으로 지휘소에 알리면, 지휘소는 제한시간내에 해당수역에 갈 수 있는 모든 잠수함을 소집해서 호송선단을 잠수함떼가 습격하는 방식이다. 이러면 호송선단에 엄청난 피해를 줄 수 있으며, 호송선단의 호위함 숫자가 적으면 호위함까지 잠수함에게 발리는 결과를 기대할 수 있다.

덕분에 영국은 물자 부족으로 심각한 곤란을 겪게 되었다. 얼마나 당시 상황이 심각했는지 처칠이 전쟁중 가장 두려운 적은 U보트였다라고 회고했던 시점이 바로 이 때였다. 그래서 유보트 노이로제에 걸린 처칠은 이른바 빙산항공모함이란 희대의 엽기적인 아이디어를 내놓기도 했다. 이렇게 된 이유는 1940년 6월, 프랑스의 항복과 더불어 라로셀, 로리앙, 브레스트 등 대서양 연안의 항구를 얻으면서 기존의 유보트중 상당수가 항속거리가 짧은 관계로 북해 연근해에서 작전을 펼치던 수준에서 벗어나서 모든 유보트가 북대서양 항로를 직접 타격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영국은 소나의 전신인 ASDIC[2]의 성능을 믿고 구축함 등 대잠전력 확대에 큰 관심을 두지 않았기 때문에 야간에 수면 위로 부상한 후 수상공격을 해오는 유보트를 상대로 ASDIC만으로는 잠수함 탐지와 추격에 한계가 있음을 절감할수 밖에 없었다. 이 시기를 가리켜 유보트 승조원들은 "Happy time", 소위말해 잘나가던 시절이라 불렀다. U보트 에이스 오토 크레치머(Otto Kretschmer)와 요하임 셰프케가 국가 영웅이 된 시간이 이 시점으로 특히 오토 크레치머는 빈약한 호송선단의 외곽을 뚫고 중앙에서 부상하여 공격하는 대담한 전술과 함께 어뢰 한발당 배 한척(One torpedo one ship!)이라는 구호로 더 유명했다. 영국은 대전 이전부터 영연방을 포함한 대규모 상선대를 조직했지만 효과적인 대처법을 마련할수 없었고, 월평균 30만톤 이상의 물자가 대서양에 가라앉았다.

이에 대처하기 위해 영국은 금쪽같은 카리브해 군항들을 미국에 넘기고 1차대전 때 만든 구식 구축함을 받아오는 등 대잠전력 확장에 큰 노력을 기울인다. 이건 상당한 희생이었는데 영국은 17세기 이래로 차지하고 있었고, 미국의 팽창에도 불구하고 20세기 중엽까지 유지하고 있었던 카리브해의 제해권을 완전히 상실하는 결과가 초래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효율적인 수송선단 편성, 독일 해군 암호체제의 해독 성공으로 1941년이 말이 되면 영국과 독일의 입장은 서서히 역전, 영국의 구축함, 프리깃, 슬루프 함 등의 대잠함선에게 격침당하는 U보트가 늘어나는 반면 독일군의 영국 수송선단 격침 전과는 갈수록 줄어들게 된다.

이 사태는 이미 예견된 상태였다. 개전 전에 칼 되니츠 제독은 연합군이 개전 초기의 충격에서 벗어나기 전까지 최소한 300척의 U보트가 있어야 대서양 전투를 성공할 수 있다고 주장한 상태였다. 왜 300척인가 하면 통상적인 함대운용으로는 현장배치 100척, 이동중 100척, 수리보급 100척이 되기 때문에 항시 100척이 북대서양에 출격하는 상태가 되며, 이렇게 되면 진짜로 대서양 전투에서 이길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당장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가용 잠수함이 40척인데다가, 운이 좋아도 출격한 잠수함이 10척이면 대박이고, 어떤 경우에는 1척도 출격하지 못한 날이 많았는데도 엄청난 성과가 났는데, 그것보다 10여배 이상 많은 잠수함이 출격했다면... 영국을 말려죽이고도 남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설상가상으로 전쟁 초기에 이미 포켓전함 그라프 쉬페를 잃고 노르웨이에서 대부분의 구축함이 격침되거나 반파된데다가 차례로 비스마르크, 샤른호르스트 등의 대형함들을 영국군과의 교전으로 잃어가면서 독일 해군 수상 전력은 사실상 있으나 마나한 존재가 되어간다. 나중에 그나이제나우와 티르피츠마저 영국공군에 의해 각기 대파와 격침이라는 최후를 맞이하면서 사실상 독일 해군의 대형함은 없는 것이 되어버린다.

이러한 상황속에서 독일 해군이 선택할수 있는 유일한 카드는 밀리기 시작했지만 유보트를 이용한 통상파괴전밖에 없었다.

4 1942년

1942년에 이르러 전황이 다시 독일로 기울게 되는데 그 첫번째 이유는 아이러니하게도 새로운 연합국, 미국의 참전이었다. 당시 이탈리아 해군은 함대전이건 통상파괴전이건 거의 쓸모없음이 드러났고, 이탈리아 해군의 잠수함은 단독으로 특정 지역에 머무르면서 지나가는 함선을 습격하는 것에만 재능을 보였을 정도로 총체적인 난국에 빠진 상황이었다. 덕분에 독일 해군은 1941년 11월부터 지중해에 투입되었고, 아울러 소련에 대한 연합국의 물자 수송을 막기 위해서 북극해에 유보트를 분산 배치했다. 게다가 그 수량도 만만치 않아서 1941년 10월 이후 북극해에 상시 20척의 U보트가 배치되었다. 이는 연합국의 노르웨이 상륙을 우려한 히틀러의 입김도 작용했다. 따라서 이듬해 1월 미국동부해안을 공략할 수 있는 잠수함 척수는 부족했다.

하지만 북치기 작전(Operation Drumbeat).[3]으로 명명된 미국 동부해안 타격작전은 불과 5척의 잠수함이 17만톤을 격침시키는 성과를 보여줌으로써 이 해역은 유보트의 풍요로운 사냥터로 떠올랐다. 이에 독일 해군은 작전지역을 영국 근처인 북해와 북대서양 동부지역에서 미국 근처의 북대서양 서부로 옮기고, 아직 호송선단의 개념도 없었던 미국은 초기에 본토 항구 코 앞에서 무수한 피해를 입게 된다. 이 당시의 피해가 어느 정도였냐면, 전쟁이 터진 뒤에도 전쟁 분위기를 느끼지 못했던 미국 시민들이 해안에서 유보트에게 공격받아 불타는 상선들을 구경하려 모일 지경이었다.
6월 초 미국이 연안방어를 서서히 강화하자, 되니츠는 신형 보급잠수함(일명 젖소)인 14형 U보트를 이용하여 해상보급을 이용하도록 명했다. 이로 인해 기존의 U보트 작전시간이 약 2주정도 늘어나면서 이제는 7형 U보트로도 카리브해까지 충분히 왕복할 수 있는 시간이 되었다. 되니츠의 작전구상은 이런 항속거리 연장을 통해 미국 연안과 같이 아직 대잠방어가 미약한 연합군의 연약한 부분을 직접 강타한다는 것이었고, 실제로 U보트들은 카리브해와 멕시코만, 남아프리카, 그리고 캐나다 연안에서 기존보다 몇곱절의 전과를 거둘 수 있었다.

U보트가 우위를 차지하게 된 두번째 이유는 독일 해군이 기존 에니그마의 로터를 네 개로 바꾼 신형 에니그마, 이른바 트리톤을 가동하기 시작하면서 연합국의 암호 해독률이 급격히 떨어졌기 때문이다. 기존 3개 회전자에 바탕을 둔 방식으로 암호를 해독하던 연합국은 이로인해 1년여간 암호 해독 공백이 발생하였고, 그결과 1942년 한해에만 1160척 600만톤의 선박이 대서양에 가라앉었다.

5 1943년 5월 이후

U보트 함대의 우위는 1943년 3월까지 계속되었다. 그사이 연합군은 1942년 11월,호송선단 호위임무를 맥스 호튼 경(Sir Max Kennedy Horton)의 서부접근해역사령부(WESTERN APPORACHES)로 통합하고, 핼리팩스(캐나다 노바스코샤에 위치한 항구)와 아이슬란드에서 출격 가능한 B-24 리버레이터 항공기를 증강하여 대서양 중앙의 항공 암흑구역, 이른바 Air gap을 메꾸고자 했다. 이런 조치로 인해 대서양 전투의 연합군 전력은 체계화되었는데, 총지휘관인 맥스 호튼부터 잠수함 함장 출신이었으므로 유보트의 강·약점을 간파하여 호송선단에 소형 경계진함을 배치하고 소형항모가 중심이 된 지원단대를 구성하였으며, 장거리 공격항공기를 활용한‘Hunter-Killer’작전을 성공적으로 수행함으로써 영국을 유보트 위협에서 구출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맥스 호튼 제독은 양차대전에서 그의 조국과 영국 해군을 위해 혁혁한 공을 세운 인물로 추앙받을 정도니 유보트 입장에서는 진짜로 만만치 않은 인물이 상대가 된 셈이다.

하지만 이런 연합군의 조치에 불구하고 U보트의 마지막 대활약이 벌어졌다. 1943년 3월 16일부터 19일까지 4일에 걸쳐, 동진하는 HX-229와 SC122과의 교전에서 22척 147,196톤을 격침시킨것이였으며 불과 두달동안 연합군은 172척 83만톤의 상선을 손실하여 위기감이 고조되었다. 물론 되니츠와 독일 잠수함 사령부는 천신만고끝에 승리를 손에 거머쥐었다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나 전세는 거짓말같이 5월을 기점으로 급격히 연합군 쪽으로 기울게 되었다. 사실 1943년에는 독일 잠수함 세력도 전쟁 초에 비해 확장되었지만, 이미 영국 해군이나 미해군은 소나 뿐 아니라 항공기용 레이더(ASV)를 장비한 초계기를 활용하여 원거리에서 공기와 축전지 충전을 위해 물위로 떠오른 독일 잠수함을 탐지, 회피하거나 격침 시키게 되었다. 독일 또한 Metox, Naxos 등의 레이더 역탐지기를 개발하여 장착하였지만 연합국의 레이더기술은 독일에 비해 한걸음씩 빨랐으며, 그전에는 안전하다고 생각한 야간 수상 항해 중에도 격침되는 사례가 빈번해졌다. 이렇게 되면 가장 큰 위협인 비행기의 공습에 대비하기 위해 출격시부터 잠수항해를 해야 하므로 속도가 느려지고 연료소모량이 많아지는 등 유보트의 항속거리에 큰 악영향을 주게 되며, 앞서 말했듯이 잠항한 상태에서는 소나에 잘 걸리므로 위험성까지 높아진다.

또한 미국의 상상을 초월한 엄청난 공업능력으로 피해를 초과하는 톤수의 함선과 물자를 찍어냄으로써 손해가 발생하더라도 함선이 늘어나게 만들었다. 당장 1일에 1척은 꼭 리버티선이 건조되었다고 한다. 역시 천조국의 공업생산력은... 이에 더해서 영국 해군의 작전을 본받아 호송 선단을 구성하는 한편 초계기와 호위 항모를 적극적으로 사용함으로써 독일 해군을 압박한다. 연합군은 U보트 한척을 격침시키기 위해 15척의 구축함과 100대의 대잠기를 동원했고, 본격적인 보그급 호위항공모함이 대서양에서 작전을 개시하자, 이후 수상에서 공격위치를 점거하려는 유보트의 활동을 크게 제한을 받아 호송선단에 대한 공격력이 약화되었다.

결국 이러한 재래식 전력의 역전과 함께 독일 병과중 가장 뚫기 어려웠던 독일 해군의 에니그마도 해독하여 5월에만 40척의 U보트가 손실을 입었다. 당시 대서양에서 가용한 U보트가 200척 남짓한 시점에서 이러한 대손실은 더이상 기존의 U보트로는 대서양 전투를 수행하기 어려움을 반증하는 것이었다. 결국 되니츠는 북대서양에서 U보트를 철수시킬 수 밖에 없었다. 1944년이 되면 사실상 독일 잠수함 전대도 유명무실한 존재로 전락하게 되며,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저지하기 위해 소수의 잠수함들이 출격하기도 하지만, 연합군에게 별다른 손실을 끼치지 못한다.

이후 독일 해군은 대서양 전투의 우위를 다시 되찾기 위해 수중속력 17노트의 당시로서는 혁신적인 잠수함 21형 U보트를 건조하여 첫 양산형이 1944년 중순 건조됐지만 정작 첫 실전 투입은 1945년 4월 30일에 이루어져 전황에는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 그래서 당시 실전투입되지 못하고 항복시에 남아있던 21형 U보트가 118척이었다.

하지만 종전 직전까지 U보트 부대의 활동은 계속되었는데, 그 이유는 U보트가 활동을 정지할 경우, U보트를 잡기 위해 깔아놓은 엄청난 양의 연합군 해군전력과 공군전력이 지상전을 지원하기 위해 전환될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대서양 연안 기지를 연합군에게 잃고 노르웨이로 후퇴한 후에도 U보트 부대는 수중에서 축전지 충전이 가능한 '스노클'을 이용해 활동을 지속했다. 처칠은 항복 직전까지 해상에 나가있는 U보트가 40척이 넘는다는 사실을 매우 놀라워했으며 이들로부터 불굴의 의지를 보았다고 감탄했다.

1945년 5월 4일, 전 해군총사령관이자 2대 독일 대통령 칼 되니츠는 U보트 부대의 항복을 지시하고, 해상에 나가있는 U보트들은 각자 가까운 임의의 항구에 입항하도록 함으로써 처절한 6년여간 해전은 막을 내렸다.

6 뒷 이야기

2차대전 기간 보이지않은 주역인 수송작전에 대한 무용담(?)은 수없이 많다. 레닌그라드 승리의 원동력이 된 라도가 호수의 얼음길, 노르망디의 레드불 익스프레스, 악명높은 버마통로 등.. 그러나 그 전투 규모나 치열함, 결정적인 면에서 군사 전문가들 사이에서 대서양 전투가 가장 먼저 꼽히고 있다.

육상전에 비하자면 화려함(?)은 덜한 전장이었으나 잔혹함 만큼은 독소전쟁 못지않았다. 피격당한 상선이 폭발물이나 유류를 싣고 있는 경우 탈출이고 뭐고 없이 승무원 모두가 배와 함께 운명을 같이, 아니 끔살을 같이 해야 했으며 설령 구명보트로 탈출한다고 해도 혼자 움직이는 독항선이라면 구조신호를 보낼 방법이 없었다. 이론상으로는 침몰 좌표를 무선 연락한 뒤 탈출하도록 되어 있었다만 배 가라앉는 와중에 그럴 겨를이... 지금처럼 라디오 비콘이나 GPS가 도입된 시절도 아니었다. 그래서 거친 북대서양의 파도에 보트와 함께 삼켜지거나 보트에 탄 채로 고사하는 경우가 많았다. 기록에 따르면 17일 동안 바다에서 표류하다 겨우 구조된 사람도 있을 정도니... 게다가 북극 항로와 같은 일부 항로는 바닷물의 온도가 매우 낮기 때문에 일단 배가 침몰했다 하면 물에 빠지면 30분내에 동태가 되고, 구명보트를 탔다고 해도 추운 날씨로 인해 3일 뒤면 얼음덩이로 변하므로 침몰은 곧 죽음이라는 말이 통용될 지경이었다. 지금도 아일랜드와 영국 서해안에는 해안에 떠내려온 수많은 상선 선원들의 시신을 장사지낸 묘지나 위령비가 곳곳에 서 있다. 그렇다고 선단이라고 나은 것도 아니었다. U-보트 이리떼들에게 습격받은 상선들은 뿔뿔이 흩어져 달아나는 경우가 많았고 심지어는 호위로 붙은 구축함도 피격을 무서워해 침몰선을 내버려두고 달아나는 경우가 허다했다. 주간이라면 나중에라도 발견될 확률이 높았지만 야간에 기습을 받았다면 동튼 이후 침몰 좌표로 가봤자 생존자들은 파도에 떠내려가 찾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건 U보트도 마찬가지, '사망률'은 타 병과의 수치를 아득히 초월한다. 대전기간 U보트 783척이 격침되었으며 그와 함께 28,000명의 승조원들도 명운을 같이했다.

그리고, 연합군의 해군전력도 엄청난 피해를 입어야 했다. 비록 대서양 전투의 향방이 연합국 승리의 궁극적 요인 중 하나가 되었지만 그걸 감안하더라도 그 대가는 비쌌다. 치열했던 6년간 175척의 연합국 군함이 손실되었는데, 태평양 전쟁을 제외한다면 HMS 후드나 항공모함 HMS 글로리어스 같은 몇몇 사례를 뺀 나머지 연합군 군함의 손실은 유보트에 의한 것이었다. 당장 2차세계대전 당시 영국 해군이 손실한 항공모함이 총 8척(정규항모 5척, 호위항모 3척)이었는데, 그 중 5척(정규항모 3척, 호위항모 2척)]이 유보트에 의해 격침당했다. 해군력의 중핵이라 할 수 있는 항모가 이 정도 피해를 입을 정도였다. 그 중 각각 비스마르크 추격전과 타란토 공습에 참가한 항공모함 HMS 아크로열과 HMS 이글의 경우엔 모두 몰타섬에 물자를 공급하는 호송선단을 호위하던 중 지중해에서 격침되었다. 아크로열의 침몰지점은 불과 지브롤터에서 5마일 떨어진 곳이었다. 게다가 군함뿐 아니라 1,400만톤에 이르는 2,700여척 상선이 격침되었으며 이와 함께 35,000명의 수병들도 수중고혼이 되었다.

2차 대전 유럽전을 다루는 소설, 영화등에서 상당히 많이 언급되고 연관되는 전투이다. 데스 쉽 같은 불쏘시개도 있다. 순수하게 이 쪽들 다룬 작품은 특전 U보트가 가장 유명하고 한국에서는 번역도 되지 않고 영화도 소개 되지않은 미국 소설 "비정의 바다"가 고전[4] 대표적 오역 서술로 악명높은 에로 소설 작가 허문순 번역의 여왕 폐하의 율리시즈호는 이 쪽에서는 고전. 그나마 최근에 나온 영화로는 2000년작인 U-571이 있다. 이 영화에서는 직접적인 전투 뿐 아니라 에니그마에 대해서도 중요하게 다루고 있다.

  1. 칼 되니츠 제독이 항상 아쉬워 할 정도로 숫자가 적었다.
  2. 연합군 대잠 탐지 수색위원회(Allied Submarine Detection Investigation Committee)가 개발했다.
  3. 이 작전에서 9척을 격침하여 가장 좋은 전과를 올린 U-123 함장 라인하르트 하르데겐(Reinhard Hardegen)은 현재까지 브레멘에서 생존하여 얼마전에 내셔널 지오그래픽에서 제작된 2차세계대전 다큐멘터리 중 대서양 전투 파트의 고증을 맡기도 했다.
  4. 말 그대로 바다는 비정하다는 느낌이 든다. 그것도 상대적으로 편하다는 대서양 항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