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른호르스트

1 프로이센군인

풀네임게르하르트 요한 다피트 폰 샤른호르스트(Gerhard Johann David von Scharnhorst).
1755년 11월 12일 ~ 1813년 6월 28일.

나폴레옹 시대의 프로이센 출신 군사전략가. 이름은 샤른호르스트가 맞지만 샤른호스트라고 불리는 경우도 많다. 아마도 창세기전 시리즈의 영향.

부농의 아들이며 하사관 출신 부친[1] 둔 사람으로 일찍이 아버지의 영향으로 군대에 투신할 것을 결심했다고 한다. 하노버에서 1777년 사관학교 졸업 후 독일 내 듣보잡 소국과 하노버 군대에서 싸우면서 능력을 인정받았다고 한다.[2] 1801년에 프로이센에서 대령 직위와 귀족 대우로 스카우트를 했고 받아 들이면서 프로이센군에 복무하게 된다. 1806년에 나폴레옹군과 싸우다 포로가 되었으나 풀려나, 1807년에 참모총장이 된다. 이때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가 샤른호르스트를 초빙할 때 육군개혁안을 제출하면서, 만약 이 개혁안을 받아들인다면 참모총장의 직위와 귀족 신분을 부여할 것을 요구하였고 둘 다 받아들여졌다!.

근대적인 참모본부제도를 세계 최초로 창시하고, 일반 시민에게 병역의 의무를 부여하고 국민군대의 창설에 힘쓴 인물로서 사실상 근대적인 징병제의 시초를 닦은 사람 중 한 명이며, 후일 大 몰트케에 의해 발전된 임무형 전술의 시초를 닦은 사람이다. 전격전소설이 된 현재 시점에서 제2차 세계대전 독일군 전술전략철학인 기동전의 시조라 할 수 있는, 이래저래 전쟁사에 빠질 수 없는 업적을 쌓은 인물.

앙투안 앙리 조미니와 함께 포스트 나폴레옹 세대의 전략전술의 가이드 라인을 제시한 인물. 전쟁론을 집필한 클라우제비츠에게는 사관학교 시절 스승이었고, 이후 참모본부 창설을 비롯한 주요 군 개혁 정책에서도 등용했다. 당연히 전쟁론 저술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으며, 실무상으로도 대단히 유능한 인물 이었다.

1813년 블뤼허의 참모장으로 러시아에서 큰 피해를 입고 물러나던 나폴레옹군을 추격했지만, 오히려 반격당해 전사한다.

2 제1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 제국군의 장갑순양함

제1차 세계대전기의 독일 해군 군함
연습함드랏해
건보트일티스, 파터란트, 그라프 폰 괴첸, 칭다오, 아터, 폴붸르츠급
어뢰정 / 함1898급, 1906급, 1911급, 1913급, 1914급, 1916급, 1917급, 1918급
잠수함U보트
항공모함I
경순양함헬라, 가젤급, 브레멘급, 쾨니히스베르크급(1905), 드레스덴급, 노틸러스급, 콜베르크급, 마그데부르크급, 카를스루에급, 그라우덴츠급, 필라우급, 비스바덴급, 쾨니히스베르크급(1915), 브룸머급, 퀼른급
장갑순양함퓌르스트 비스마르크, 프린츠 하인리히, 프린츠 아달베르트급, 룬급, 샤른호르스트급, 블뤼허
방호순양함클라스 플레밍급, 빅토리아 루이제급
순양전함폰 데어 탄급, 몰트케급, 자이들리츠급, 데르플링거급, 마켄젠급, 에르자츠 요르크급
전함
프리 드레드노트급브란덴부르크급, 카이저 프리드리히 3세급, 비텔스바흐급, 브라운슈바이크급, 도이칠란트급
드레드노트급나사우급, 헬골란트급, 카이저급, 쾨니히급, 바이에른급, L 20 α
기타G-101급, 제어들러
취소선: 건조 취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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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의 이름을 딴 막시밀리안 폰 슈페 제독 휘하 동양함대기함.

동급 장갑순양함 그나이제나우와 해적질통상파괴[3]을 하다 포클랜드 근처에서 영국 해군순양전함 인빈시블과 인플렉시블과 맞닥뜨려 교전 중 격침[4]되었다. 이 당시 치열한 교전중이라 구조에 참여할 함정이 없어서 승조원 전원이 전사했다.[5]

그 당시 장갑순양함 치고는 양 측면에 전체 화력의 75% 이상을 집중할 수 있어서 근대적인 설계라고 칭송받았지만, 순양전함 앞에서는 버틸 수가 없었다. 210㎜ 주포는 영국 순양전함의 305㎜보다 위력이 떨어지고 속력도 영국의 순양전함이 더 빨라 교전을 회피하고 도망칠 수도 없었다.

이때의 성공으로 순양전함의 장점에 맛을 들인 영국 해군은 장갑순양함 비교우위 함정으로만 사용되어야 할 순양전함을 떡장갑을 제대로 두른 정규 전함 상대로 정면에서 혈투를 벌이는 최일선 전투함정으로 사용하기에 이르렀다. 물론 그 결과는 유틀란트 해전에서 영국해군의 순양전함들이 탈탈탈탈 털리며 침몰하는 것이었다.[6]

3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 국방군 해군의 전함

샤른호르스트급 전함 참조.

4 제2차 세계대전 이전에 건조되어 사용된 독일의 여객선


사진출저
1934년에 건조되어 샤른 호르스트라는 이름을 부여받은 독일 로이드 기선소속의 1만톤급 화물 여객선으로 자매함은 그나이제나우, 포츠담이 있다. 이 3척은 브레멘-요코하마를 잇는 고속 극동 여객선으로 활동을 하고 있었다. 샤른호르스트는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할 당시에 일본에서 싱가포르로 향하고 있었는데, 본국에서의 무전을 받고 기수를 돌려서 고베에 입항했다. 승무원들과 승객들은 소련을 통해서 유럽으로 돌아갔고 선박은 고베에 장기간 계류되어 있었다. 그러던 중 1942년 9월에 일본이 독일로 부터 해당 함선을 구매하여 경항공모함 신요로 개조하였다.

5 창세기전 시리즈의 등장인물

1의 오마주. 자세한 내용은 샤른호스트 항목 참고.
  1. 위키백과에서는 부농이며 하사관 출신 아버지로 써있고, 히브리대 전쟁사학과 마틴 판 크레펠트의 저서 <전쟁 본능>에 따르면 아버지가 프로이센 군대 하사관 출신으로 확실한데 동독시절 동독군의 빈약한 역사와 전통성을 만들기 위해 영웅 만들기로 빈농 혹은 프롤레타리아 출신으로 둔갑시켰다고 한다. 대장장이 출신으로 여러 곳에서 써있는 건 이 영향인 듯 함
  2. 이 시기 유럽의 장교들은 타국 군대에서 복무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경우가 좀 다르지만 그의 제자였던 카를 폰 클라우제비츠러시아에서 복무한 일이 있다. 톨스토이의 소설 <전쟁과 평화>에서, 다양한 국적을 가진 귀족 장교들이 러시아군 진영에서 회의하는 장면을 볼 수 있다.
  3. 원래는 동양함대로 독일세력권이던 중국 산둥반도의 청도항에 배치 되었다가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영국 해군일본 해군(당시 영국과 일본은 동맹 관계였고, 또한 공고급 순양전함이 막 배치된 시기였다.)을 피해 본국으로 귀환하기 위해 태평양을 횡단해 라틴아메리카를 거쳐 대서양을 종단하는 루트로 머나먼 귀국여정중이었다.
  4. 그 전 칠레 앞바다에서 벌어진 해전에서 영국 장갑순양함 등이 격침당했고, 열받은 영국 해군이 급히 순양전함들을 파견, 독일 본국으로 귀환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지나쳐야 하는 포클랜드 앞바다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5. 동행하던 경순양함같은 다른 함정들을 모두 도주케 하고 어차피 속도가 느린데다 가장 큰 목표물이던 장갑순양함 2척만이 시간끌기용으로 싸운 것이었다.
  6. 실제로는 전함 상대로 정면전투를 벌인 게 아니라 전함급 화력을 가진 독일 해군의 순양전함들과 싸웠다. 당시 독일 순양전함은 영국형 순양전함과는 설계개념이 좀 다르긴 했지만 양측 모두 상대의 주포에 대한 방어가 안되는건 마찬가지(영국형 순양전함에 비해 독일형 순양전함의 장갑이 튼실하긴 했지만 독일순양전함들의 주포는 11인치에서 12인치였는데 영국 순양전함들은 12인치에서 13.5인치로 한등급이상 위였다.)였다. 비록 유틀란트 해전에서 영국 순양전함들이 대거 격침당하긴 했지만 독일 순양전함들도 거의 걸레짝이 될 정도로 두들겨 맞아서 자침한 1척을 제외한 나머지 함정들도 몇달씩 대대적인 수리를 받아야 했고 이 해전을 끝으로 독일 해군이 영국 해군에게 도전할 의지마저 상실했기 때문에 전략적으론 영국의 승리였던 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