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대야성은 원래 반파국의 영역이었지만 이사부 장군에 의해 신라에 편입됐다. 전라도 방면에서 오는 군세를 경상도 쪽에서 방어하기에 적합한 난공불락의 형세였던 덕분에 삼국시대와 후삼국시대 둘 다 활약하였다. 물론 후삼국 통일 이후로는 영호남이 같은 나라에 줄곧 통합되었으므로 역사상 큰 족적을 남기지는 못했다.
2 삼국시대의 대야성 전투
642년에 발발한 전투.
김춘추의 사위 김품석이 대야성의 도독으로 부임했는데, 당시 백제는 의자왕이 즉위한 후 신라에 대한 공세를 강화해나가던 시기였다. 김품석은 그놈의 색욕 때문에 부하 검일과 모척의 부인을 빼앗아 원한을 샀다. 642년에 백제의 장군 윤충이 대야성에 쳐들어와서 김품석은 수성을 준비했는데 검일이 창고에 불을 지르고 백제군에 항복해버렸고, 신라군의 사기가 크게 떨어졌고 결국 대야성은 함락당하고 김품석은 아내 고타소를 죽이고 자살했다. 김춘추와 법민(문무왕)은 이 사건에서 백제에 큰 원한을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1] 김품석의 시신은 나중에 김유신이 붙잡은 8명의 백제 장수와 교환해서 수습했다. 백제에 투항한 검일은 훗날 백제가 멸망하고 사비성이 함락될 때 붙잡혀 처형당했고 문무왕은 붙잡은 백제왕자 부여융의 얼굴에 침을 뱉으며 대야성의 원수를 갚았음을 천명했다.[2][3]
3 후삼국시대의 대야성 전투
후삼국시대에 여러 차례 벌어진 전투.
견훤은 후백제를 건국한 직후인 901년 대야성을 공격했지만 신라군의 방어로 실패했다. 사람들은 경애왕이 포석정에서 처참하게 털린 것만 기억하지만, 후삼국시대 전반부에는 신라가 그럭저럭 후백제의 공격을 막아내면서 3강 구도 비슷하게 유지는 하고 있었다. 이후 916년에 다시 공격하지만 또 실패하고, 920년에 세 번째 공격에서 드디어 대야성을 함락한다. 대야성을 차지한 후백제는 이후 서라벌 인근까지 직접 위협할 수 있는 전략적 우위를 선점했고,이후 후백제의 장수 추허조가 지키고 있었는데 927년에 고려의 장군 김락에 의해 함락되었고 928년에 후백제의 관흔이 왕충이 이끄는 고려군을 북방으로 유인한후 신속히 남하해 대야성을 다시 점거하는 등 이후에도 고려와 후백제 사이에서 주인이 계속 바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