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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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널드 트럼프 · 생애 · 논란 · 트리비아
정책 및 행적등
역대 선거 · 2016년 공화당 대통령 후보 경선 · 2015년 · 2016년 · 2017년 · 대 특정 계층 행보 · 외교 · 행정명령

1 개요

도널드 트럼프의 출생부터 대통령 선거 이전까지의 생애를 다룬 문서.

2 성장기

소년시절의 트럼프1964년 군사학교 졸업사진

독일스코틀랜드 혈통이고, 부동산 사업을 하는 백만장자 프레드 트럼프의 아들로 뉴욕에서 태어났다.

도널드 트럼프는 자메이카 이스테이츠라는 부자 동네에서 자랐다. 퀸즈의 대저택에서 살았다고 한다. 트럼프 가족은 그 저택을 '타라'라고 불렀다고 한다. 침실이 9개고 기둥도 으리으리했다. 트럼프 가족은 무려 50년동안 이 저택에서 살았다. 그의 아버지 프레드 트럼프가 직접 설계하고 건축한 집이기도 하다.

도널드와 형제, 자매들은 매우 유복하게 자랐지만 부잣집 도련님처럼 자라진 않았다고 한다. 비가 오면 트럼프는 자가용을 타고 신문 배달을 했다고 한다.

부친 프레드는 매우 엄했다. 자식들에게 가업을 철저히 배우도록 강요했다. 프레드는 일주일 중 하루도 휴일 없이 일할 정도로 일 중독이었다. 주말이면 아이들을 자동차에 태우고 공사현장에 갔고 아이들은 못을 주웠다. 작은 못 하나라도 아낄 정도로 구두쇠였다.

도널드 트럼프는 아버지의 세계관을 배우며 자랐고 아버지에 영향을 많이 받았다. 도널드는 몇가지에 특히 공감했다. 프레드 트럼프는 경주용 말과 인간이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뛰어난 유전자를 받은 인간은 따로 있고 유전자가 뛰어난 남자와 여자가 만나면 우월한 자손들이 태어난다고 생각했다.

인생은 경쟁이라는 것도 부친 프레드의 지론이었다. 그는 세상에는 승자와 패자가 있다고 생각했다. 프레드는 승자를 킬러라고 불렀고 패배는 괴멸을 의미했으며 중요하지 않은 사람,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트럼프는 부친의 지론대로 항상 승자가 되려고 했다.

그의 남동생에 따르면 도널드 트럼프는 어린 시절 엄청난 악동이었다고 한다. 생일 케이크를 제일 먼저 집어던지는 아이, 누가 장난감 블럭을 쌓으면 어떻게든 무너트리는 아이였다고 한다.

도널드 트럼프가 13세가 되자 부친 프레드도 더 이상 참지 못했다. 그의 부친은 트럼프를 엄격하기로 유명한 기숙 학교로 보냈다. 뉴욕시에서 북쪽으로 100km 떨어진 뉴욕 육군 군사학교였다. 13세 먹은 금수저 출신 아이가 갑자기 군대 비슷한 학교로 오게 된 거다. 오남매중 자기 혼자 기숙학교로 쫓겨 나게 된 것. 안락했던 생활, 부모님과 헤어저서 교관을 만나게 됐다.

의외로 도널드 트럼프는 엄격한 학교에 기죽지 않았다. 그것도 우등생이 됐다. 그는 군사학교를 정말 좋아했다고 한다[1]. 그 중에서도 분명한 책임 소재, 명확한 규칙을 좋아했다. 무슨 일이건 잘하면 메달과 상을 받는다는 점이 좋았다고 한다. 트럼프는 곁에서 프로 야구 선수가 되라고 할만큼 운동 신경이 뛰어났다고 한다.

급우들은 트럼프가 가장 뿌듯해했던 순간이 따로 있었다고 말했다. 바로 남학교 최고의 인기남으로 졸업앨범에 기록된 순간이었다고 한다. 그의 학창시절 급우들은 또 어찌보면 트럼프는 전혀 변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1964년 기숙학교 시절에서 했던 이야기들하고 요즘에 하는 이야기들이 굉장히 비슷하다고 말했다.

트럼프의 성장기 시절을 애기할 때 마블 협동 교회도 빼놓을 수 없다. 트럼프는 이 곳에서 성공의 복음(이른바 '번영신학')을 들으며 성장했다. 이 교회는 노먼 빈센트 필 목사[2]의 교회였다. 필 목사는 트럼프에게 성공의 복음을 가르첬다. 성공은 그냥 좋은 게 아니라 엄청나게 좋은 것, 꼭 이뤄야 하는 것이라고 설교했다. 이 목사의 교회에는 정치인, 사업가가 모여들었다. 필 목사는 자본주의부자를 칭송했으며 트럼프의 성향과 목표, 부친 프레드의 야망과도 잘 맞았다.

1964년 군사 학교를 졸업 후 포덤 대학교로 진학하여 2년 동안 다니다 펜실베니아 대학교로 편입하였고 1968년 와튼 스쿨에서 경제학 학사 학위를 받아 와튼에서 경영을 배우고 아버지에게 인정을 받았다.

3 1970년대

아버지의 부동산 개발 회사의 견습사원으로 들어간다. 그의 형 프레드 주니어가 도전했다 실패한 자리기도 했다. 형 프레드 주니어는 아버지의 일에 도전했으나 일이 적성에 맞지 않았고 사업에 흥미가 없었다고 한다. 노력은 했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 그는 그의 아버지처럼 죽기살기로 경쟁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리고 자기의 꿈이었던 비행사에 도전한다. 도널드는 본인이 형에게 너무 모질었다고 애기 한적이 있다. 조종사가 된 형한테 비행기 조종사는 결국 버스 운전수와 같은 일을 하는게 아니냐고 몇번이나 형에게 말했다고 한다. 프레드 주니어는 알코올 중독으로 40대에 사망한다. 이에 도널드 트럼프는 충격에 빠진다.

도널드는 형의 죽음으로 자기의 신념을 재확인한다. 살아남으려면 킬러가 되야 하는 것이라고. 그리고 이때부터 아버지 앞에서 형과 정반대로 행동한다. 도널드 트럼프 본인은 아버지가 늘 윽박질러서 형이 그렇게 되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대인관계에서 주눅들지 않겠다고 결심한다.
도널드는 아버지의 브루클린 사무실에서 일을 시작해서 1971년 회사 전권을 물려받는다. 이때가 25세다.

1970년대 중반 트럼프는 고향 퀸스를 떠나 맨해튼으로 진출한다. 1970년대에 도널드가 아버지의 부동산 사무실에서 일을 시작할 때 그의 목표는 서쪽. 노동자 계급의 외부 자치구 너머의 맨해튼 스카이라인이었다.

트럼프 본인도 그걸 인식했고 예전부터 화려한 곳, 헐리우드 같은 곳을 동경했다. 뉴욕에서 그런 사람들이 사는 곳이 바로 맨해튼이었다.

아버지가 뉴욕의 외주 자치구에서 아무리 돈을 많이 벌었어도 맨해튼에서 성공하지 않으면 도널드 트럼프에겐 의미가 없었던 것.

트럼프는 부친도 못했던 맨해튼 부동산 사업을 하기 위해 열심히 일했다. 어떻게 계약을 따낼지 어떻게 맨해튼 부동산 사업에서 입지를 다질지 고민을 많이 했고 이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리고 트럼프에겐 멘토가 필요했다. 그래서 찾은 멘토가 하필이면 매카시즘으로 악명 높았던 로이 콘 변호사로 훗날 트럼프의 어그로 성향에 큰 영향을 끼친 인물이다.[3]

부친 프레드 트럼프는 도널드에게 맨해튼 투자는 어리석은 짓이라고 했다. 화려함 아래 있는 뉴욕시의 내면은 부패했다는 것이었다. 복지도시로 여겨졌고 범죄가 만연했다. 1966 - 1973년 사이 도시의 살인율이 130%로 ㅡ 도널드 트럼프는 이를 기회로 봤다. 그는 아버지 프레드의 반대에 맞서 손상된 자치구에 부가 있다고 설득한다. 맨해튼 부동산에 뛰어들기 좋은 시점이었고 70년대에 맨해튼에 투자한 사람은 대부분 성공했다. 그냥 사두기만 하면 됬으니깐.

1977년 첫번째 결혼을 하게 되는데 그녀의 이름은 이바나 젤닉코바. 체코의 스키 선수였다.

1978년 철도 용지에 컨벤션센터를 지으려고 로비를 하게 된다. 하지만 시에서 공식적으로 발표하기 전 도널드는 허풍쟁이 에드 코치 시장의 자문을 받지 않고 거래가 성사됐다고 밝혀서 몇 년 동안 에드 코치 뉴욕 시장과의 불화가 지속된다. 그가 처음으로 어그로이목을 끈 정치적 불화다.

4 1980년대

33~34세이던 시절, 로나 배럿(1936~)과의 1980년 당시 인터뷰 동영상

트럼프에게도 저런 젊은 시절이 있었다. 에너지가 넘치는 현재와 달리 오히려 젊었을 때는 지금보다 훨씬 차분한 모습.[4]

40대 초반이던 시절-1
(1988년)
40대 초반이던 시절-2
(1988년)
40대 초반 TV 출연 동영상 (00:39)

트럼프의 첫번째 전성기[5]

1976년 부동산 프로젝트를 시작한 트럼프는 뉴욕 그랜드 센트럴 역 옆 허름한 코모도 호텔을 뉴욕의 명소로 변화시킨다. 부친 프레드는 운이라고 치부하며 미심쩍어하며 타이타닉호 표를 사는 것에 비유했다. 하지만 도널드는 그랜드 센트럴 역 주변으로 관광객이 몰린다고 확신했다. 그러나 이 자신감에도 불구하고 이상을 실현하려면 아버지의 정치척 영향력이 필요했다.

그리고 트럼프는 한 지역 의원이 칭한 '세기의 세금 거래'를 한다. 시의 부동산에 영향력을 행사하며 뉴욕 부동산으로는 처음으로 40년간 세금 감면 혜택을 받게 된 것이다.

1980년 전면 유리로 된 호화로운 '그랜드 하얏트'가 공개된다. 이것으로 트럼프에게 모든 공이 돌아간다. 도시에서 처음으로 리모델링된 건물이었다.

1980년 트럼프는 낡은 '본위트 텔러' 백화점을 첫번째 고층 건물이자 핵심 자산이 될 '트럼프 타워'로 전환한다. [6] 처음으로 트럼프 이름이 건물에 눈에 띄게 새겨젔다. 훗날 트럼프 브랜드의 초석이 될 표시였다.

이때 트럼프는 자존심이 하늘을 찔러 부동산 외의 것으로 크게 눈을 돌린다. 신흥 미국 풋볼 리그 뉴저지 제너럴스를 매입한다. 3년이 지나고 트럼프는 리그에 위험한 제안을 한다.

모두 이해하시는지 모르겠지만 제 생각은 항상 봄은 황무지라는 거였죠. 이 리그를 가을로 이전할 겁니다. 처음에 봄으로 정한 유일한 이유는 가을은 NFL에 독점권이 있기 때문이죠. NFL과 맞붙고 싶지 않았던 거예요.

USFL은 NFL에 17억 달러의 손해배상을 청구했다. 그 리그가 시즌을 독점해 가을에 게임을 알리는 것을 막는다고 주장했다. 이 사건은 아주 큰 재판으로 이어져 두 리그간의 합병을 강요했는데 트럼프와 그의 팀에겐 호재였다. USFL이 NFL을 고소했고 독점 금지 소송에서 승소했다. 그것도 3배의 손해 배상 결과가 나왔다. 물론 리그는 잃었지만 리그가 붕괴하자 많은 사람들은 트럼프에게 비난을 했다. 트럼프에게 처음으로 큰 공개적 실패였다.

1986년 트럼프의 재산은 7억 달러에 다다르고 유명한 곳에 이름을 걸 기회가 생긴다. 그 곳은 센트럴 파크였다. 뉴욕은 6년동안 1.200만 달러를 들여 울먼 링크 스케이트장을 복원하려고 했는데 아직 진행중이었다. 시의 재정 부족을 이유로 트럼프가 그 프로젝트를 맡게 된다. 시의 낡은 공공 기반 시설을 복원하려면 자신이 나서야 한다는 식이었다. 스케이트장은 6개월만에 완공되었고 예산보다 75만 달러 적게 들었다. 하지만 끝내 뉴욕 시는 스케이트장에 트럼프 이름을 거는 것을 거부했다.

86년 울먼 링크 복원이 성공적으로 끝나고 트럼프는 책을 쓰게 된다. 그것은 바로 거래의 기술. 기업가의 성공에 대한 가이드 책이었다. 이 책은 뉴욕 타임스 베스트셀러 목록에 51주동안 1위에 올라 있었다.

이 책으로 트럼프는 최고조에 다다랐다. 새로운 명성도 얻었고. 이때 기준으로 트럼프의 호감도는 꽤 좋았다. 뭐든 가능한 뉴욕 사업가라는 찬양도 만들어젔다. 이 당시 포브스 선정 400대 부자 순위 26위에 오르기도 했다.

88년, 트럼프는 뉴욕 남쪽 210km 떨어진 곳에 가장 큰 모험을 준비했다. 애틀랜틱 시티의 휴양지에서 초점을 맞춘다. 당시 그곳은 죽어가는 휴양지였으며 전반적으로 상황이 매우 좋지 않았다. 애틀랜틱시티에 거는 첫 도박은 트럼프 플라자였다. 주차장도 있고 카지노도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1년 후 트럼프는 '트럼프 캐슬'이라고 이름짓는다. 동쪽 라스베이거스에서도 성공하기로 마음먹은 것이었다.

그리고 트럼프는 22개 은행에서 3억 8천 달러의 융자를 받아 이스턴 항공사를 매입한다.

이렇게 계속 부동산 목록을 확장할수록 트럼프의 도를 넘은 태도는 이사회부터 파산법원까지 위협했다.

5 1990년대

한미디로 요약하자면 이 시기는 트럼프의 흑역사 암흑기였다.

트럼프는 모험으로 가장 큰 돈을 벌길 원했다. 그리고 1990년 '타지마할'이라는 카지노 호텔을 오픈했다.

하지만 타지마할이 생긴 시점에서 부동산 시장은 급격히 쇠퇴한다. 1987년 주식 시장 붕괴로 경기 침체기로 접어들었고 1990년까지 완전한 불경기였다. 경기가 무너지자 트럼프의 '타지마할'은 빚더미로 무너진다. 이 건물을 지을 때 많은 전문가들은 유지되지 않을 거라 예측. 결국 그 예측이 맞았다. 경기 침체로 10억 달러의 슈퍼 카지노를 짓느라 빌린 돈의 이자를 감당할 수 없었다. 손익 평형을 보려면 타지마할에 매일 100만 달러가 들어와야 할정도 였다. 돈을 소화전처럼 뿌리는 카지노 시장에서 최고가 된다는 사업적 관점으로는 이익을 낼 수 없었고 장기적으로 자본화가 불가능했다.

이 사업으로 트럼프의 쌓인 빚이 어마어마했다. 재정난은 최종 결과 이상으로 영향을 미처 90년 승승장구하기만 하던 트럼프의 자존심에 강타를 날린다. 1982년 시작 이후 처음으로 포브스 선정 400대 부자 순위 선정에서 밀려나게 된다. 트럼프 기업은 엄청난 빚으로 구조조정이 필요했고 트럼프는 은행가와 협상에 성공해서 수백만 달러를 깎게 된다. 트럼프는 타지마할을 계속 영업하면서 빚을 재조정했고 그 대신 카지노의 개인 지분 절반을 포기한다.

하지만 또 트럼프에게 위기가 찾아오는데 트럼프가 80년대 후반 인수했던 플라자 호텔이었다. 88년 3억 9천 달러에 매입했는데 92년도에 빚이 5억 5천이었다. 이로 인해 트럼프는 자신의 지분 49%를 포기하지만 무급 대표이사로 남는다.

90년대는 트럼프의 사업 흑역사 시대다. 사업이 불안정하고 빚이 수백만 달러에 평판도 추락했다. 엎친대 덮친격으로 부인과의 불화설까지 터지며 이혼 소송까지 하게 된다. 그 이유는 트럼프가 26세 여배우 말라 메이플스와 바람이 났기 때문. 28일 동안 신문 1면을 차지했고 부부의 충돌이 대서특필됐다. 하지만 이게 좋든 나쁘든 트럼프는 결국 본인에게는 홍보 수단이었다. 미디어를 이용했던 것. 결국 이바나와 트럼프는 이혼했고 93년 바람난 말라 메이플스와 결혼한다. (...) 하지만 트럼프는 일이, 자신의 야심이 중요했다. 이러면서 말라와 트럼프 사이는 멀어지게 됬으며 결혼 4년 만인 1997년 이혼했다.

아이러니하게도 트럼프의 결혼 실패가 1면을 장식하면서 인지도는 더 높아진다. 부유한 사업가에서 팝 아이콘으로 자리 잡게 된 것이다. 모든 언론 덕분에 트럼프는 더 유명해젔다. 이때부터 인기 시트콤 '내니', '플레이보이 프린스', 그리고 영화 '나 홀로 집에 2'에 카메오로 출연한다. 10년 동안 트럼프는 방송을 즐기고 경기와 부동산 시장이 살아나 부를 다시 쌓는다. 1996년 포브스 400대 부자 명단에도 다시 오른다.

1999년 트럼프는 본인의 인지도를 높이기 위해 로스 페로가 설립한 개혁당에 들어가 대통령 출마를 고려한다. 트럼프는 방송에 출연하기 시작하고 내년 1월까지 출마를 결정한다고 밝혔다. 하지만 개혁당은 내분과 무체계로 혼란 상태에 빠진다. 2000년 2월까지 개혁당엔 진전이 없었고 트럼프는 개혁당에서 결국 손을 뗀다.

6 2000년대

트럼프는 정치적 열망을 접고 건축일로 다시 돌아간다. 2001년에도 계속 뉴욕 스카이라인을 형성해 국제연합 건너편에 세운 트럼프월드 타워를 공개했다. 90층 건물로 당시 기준 세계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었다.

그리고 처음으로 부동산에 브랜드를 접목시킨다. 먼저 브랜드를 만들고 부동산 사업에 적용시킨 것이다.

2001년 코메디 영화 '쥬랜더'에 카메오로 출연했다. 이때부터 방송 일이 금전적으로 가치가 있다는걸 알고 TV 프로듀서 마크 버넷의 도움으로 방송인으로 거듭난다. 인기 프로 '서바이버'에서 누가 주역을 맡을지 아이디어를 내는데 바로 트럼프였다. 경쟁 프로인 '어프렌티스'는 젊은 기업 수습생들이 트럼프의 회사에서 1년간 경쟁한 뒤 차례차례 탈락한 끝에 최종 우승자가 직원으로 발탁되는 내용이었다. 방송은 초대박나서 매 주 2070만명이 시청했다. 이때 유행어 'You're Fired'가 생긴다. 이 예능 프로 덕분에 90년대 실패한 사업가라는 이미지에서 이미지 세탁을 하게 된다.

그리고 2005년, 세번째 부인 멜라니아 트럼프와 결혼한다. 결혼 1년 후 60세의 나이로 트럼프는 다섯번째 아이를 얻게 되는데 아이 이름은 배런 윌리엄 트럼프.

트럼프 브랜드 중 하나였던 트럼프 스테이크 광고. [7]

일이 술술 잘풀리니 부동산 구매에서 새로운 분야로 눈을 돌려 자신의 브랜드를 판매하기 시작. 보드 게임, 가구 사업, 트럼프 향수, 트럼프 보드카도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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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자유로운 학업의 분위기가 아닌 엄격한 규율을 강조하는 군사학교에 들어가면서 오히려 적응을 잘 하고 체질적으로 좋아했던 인물로 중화민국의 장개석과 남한의 박정희가 있다.
  2. 베스트셀러 적극적 사고 방식의 저자
  3. 그는 피도 눈물도 없는 인간이었으며 엄청나게 냉혹하기로 유명했다. 그는 트럼프에게 악명도 이득이라는 조언을 하였고 로이 콘을 신봉한 트럼프는 유명해진다면 그것이 좋은 의미에서든 나쁜 의미에서든 결국에는 이득이 된다고 생각해 숱한 어그로를 끌기 시작했다. 그러다 상대방이 반론하면 적반하장으로 끝까지 공격하며 물고 늘었다. 누가 봐도 트럼프의 논리가 잘못되었다고 여겨도 트럼프는 끝끝내 사과하지 않을 뿐더러 결국엔 내가 이겼다고 정신승리의 표상을 보여주었다. 악명도 이득인 이유가 참 기가 막힌데 아무리 악명을 떨쳐도 시간이 지나면 사람들의 기억엔 그 사람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잊어버리고 이름만 남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름만 남으면 이미지 세탁은 누워서 떡 먹기로 실제 트럼프는 TV를 이용해서 이미지 세탁에 성공하여 막대한 돈을 벌어들였다.
  4. 사실 트럼프는 과거나 지금이나 차분한 성격이다. 단지 선거유세때 표심을 얻기위해 대중들에게 과격한 모습을 보여준것 뿐이다.
  5. 두번째 전성기는 당연히 2016년 대통령 당선
  6. 트럼프는 자신의 아내 이바나에게 디자인을 맡긴다.
  7. 2007년에 나왔으나, 지나치게 높은 가격과 그에 어울리지 않은 품질덕에 2달만에 망했다고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