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레스덴 폭격

영어 : Bombing of Dresden
독일어 : Luftangriffe auf Dresd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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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허가 된 드레스덴을 내려다보는 동상. '천사'가 아니라 '친절'을 의인화한 동상이다.

독일인들은 누구든지, 제복을 입었든지 않았든지를 가리지 않고 모두 합법적인 표적이다.

- 아서 해리스가 드레스덴 폭격을 명령하며

우리는 독일 국민들이 인류에게 퍼부었던 비참함이 어떤 것인지 직접 맛 보게 해줄 것이다.

- 윈스턴 처칠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영 연합군 폭격기대의 대규모 폭격작전. 종전 직전인 1945년 2월 13일~2월 15일에 걸쳐 행해졌으며 유럽 전선의 폭격 작전 중 가장 큰 피해를 입힌 작전이자 가장 크게 논란을 일으키는 작전으로 평가받기도 한다.

1 폭격 작전의 배경

연합군 폭격기들의 폭격으로 독일 전역이 쑥밭이 되고 있었지만 드레스덴의 경우 용케도 폭격을 면하고 있었다. 전쟁 초반기에는 다른 도시들과 비교해 공업 시설이 많지는 않았으나, 1944년 당시에는 폭격을 당하지 않고 있었으므로 가장 공업 시설이 많았던 상황이었다. 독일 최고사령부(OKH)에 따르면 물자를 공급하는 중간규모 이상의 공장만 127개가 되었다고 한다.[1] 한편, 1978년에 해금된 미군의 리포트에 따르면 대략 110의 공장이 가동되고 있었고, 여기에는 항공기 부품 생산공장 및 독가스 생산 공장, 대공포, 야포 등을 생산하는 공장 및, 광학기기 등 군수산업의 복합체가 자리잡고 있었으며, 독일군 막사 및 탄약 저장고가 위치하고 있었다. 또한, 이 위치는 체코슬로바키아쪽으로 향하는 요충지였으며, 이 곳의 철도 또한 베를린-프라하-비엔나를 잇는 교통의 요충지였다. 실제로 드레스덴에 잡혀 있었던 미군 포로의 증언조차 그 당시 드레스덴은 동부 전선에 투입하는 물자를 생산 및 군사를 훈련시키는 군사 도시의 모습이었다.

폭격 작전이 계획될 당시 폭격 지휘부는 드레스덴을 목표로 지정하면서 근거로 "독일군의 저항 능력을 분쇄하고 이를 통해 소련군의 진격을 돕는 것"임을 내세웠다. 실제로 이 도시가 동부 전선으로 가는 물자를 생산하는 곳이었으므로 정확한 분석이었으며, 소련 또한 동부에 위치한 독일의 도시들을 전략 폭격하는 것에 대해 요청하고 있었다. 다만, 문제는 주로 폭격을 맞은 지역이 공장들이 위치한 주변부가 아니라 도심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총력전 상황에서 전략 폭격은 공장 뿐만 아니라 군수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도 목표물이 되었기 때문이다. 거기다가 기상의 문제로 도심에 폭격을 하는 경우도 있었고. 일부에서는 계속 서진하고 있는 소련에게 상대적으로 거리가 먼 연합군이 위력과시를 위해서 크게 폭격했다는 견해도 있으나 폭격의 규모 자체는 베를린이나 함부르크 같은 도시에 비해서 훨씬 작은 규모임을 생각하면 가능성은 높지 않아 보인다.

2 폭격의 진행 사항

2월 13일 최초 폭격은 미 육군 항공대가 실시했으며, 이 때는 이미 도심 근처의 철도 시설을 두 번이나 폭격한 뒤였다. 이 당시 미군의 폭격 목적은 또 다시 이 철도 시설을 폭격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14일의 주간 날씨가 좋지 않자 대부분의 폭격 작전이 취소되고 영국군에게 턴이 넘어간다.

좋지 않은 날씨에도 불구하고 영국 공군의 폭격은 이루어졌는데, 날씨 때문에 적어도 두 번은 때려야 한다는 결론이 나왔다. 결국 3시간차를 두고 두 번의 폭격이 행해졌고 이 덕분에 도시에서 첫 번째 폭격을 맞은 피해를 복구하는 구조가 이루어지고 있을 때 또다시 맞게 되어 피해가 가중되었다. 이외에도 주변의 공장 지대를 폭격하는 작전이 그 날 야간에 이루어져 독일 공군의 혼란을 일으키는 효과를 기대했다. 첫 번째 폭격시 주로 피격당한 곳은 오스트라게헤게 운동장이었는데, 이 곳은 구도심과 근접한 곳이었고, 이 구도심은 런던의 도심이 그랬듯이 나무 판자 건물이 많았던지라 엄청난 화재로 피해를 입게 된다. 폭탄 탑재량의 60%에 달했던 소이탄이 큰 피해를 준 것이다. 이들을 '쿠키' 홍차 한 잔과 쿠키의 여유나 '블록버스터'[2]로 불렸다. 폭격의 시작은 22:00시 밤중이었다.

이후 14일 아침, 미군의 8공군에서 주간 폭격을 위해 출발했다. 이들은 도시 이외에도 주변의 소도시들(주로 공업 지역)을 목표로 출발했다. 일단 도시를 폭격하는 그룹의 경우, 도심의 철도 시설을 폭격하기로 했으나, 날씨가 흐리면 도시는 놔두고 공업 지역을 폭격하는 것으로 계획되었다. 만일, 둘 다 여의치 않으면 도심을 폭격하기로 계획이 되어 있었다. 미군의 폭격 또한 영국군과 비슷하게 총 폭격량의 40%가 소이탄이었다. 철도 시설에 대한 폭격은 성공적으로 이루어졌으나, 공장 지역에 대한 폭격은 기상 악화로 도심에 대충 폭탄을 버리고 오게 된다. 이 당시 H2X레이더를 사용해 적절한 지상물을 찾기는 했으나, 걸음마 단계 기술이었으니만큼 정확도는 거의 무시할 정도였다. 이 당시, 혼란을 가중시키기 위해 호위 전투기들에게 도심 근처의 도로에 무차별 기총소사가 명령되기도 했다[3]. 다만, 독일측의 목격자들은 이런 공격은 없었다고 전한다.

15일에는 비로소 가장 주된 목적이었던 뵐렌(Böhlen) 합성유 공장을 폭격하려 했으나, 이 또한 구름 때문에 막혀 드레스덴을 공격한다!!!가 되어버렸다. 다만, 이 때도 구름이 짙게 끼어버려, 제대로 맞추지 못 하고 근교에 대충 떨구고 귀환했다. 그러니까 미군은 철도 시설 폭격한 거 빼면 아무데나 폭탄 던지고 돌아온 거 밖에 없다.

날짜목표물군세항공기 수고폭탄(톤)소이탄(톤)총 톤수
1944년 10월 7일철도미8공군3072.5없음72.5
1945년 1월 16일철도미8공군133279.841.6321.4
1945년 2월 14일도심영국공군7721477.71181.62659.3
1945년 2월 14일철도미8공군316487.7294.3782.0
1945년 2월 15일철도미8공군211465.6없음465.6
1945년 3월 2일철도미8공군406940.3140.51080.8
1945년 4월 17일철도미8공군5721526.4164.51690.9
1945년 4월 17일산업지역미8공군828.0없음28.0

드레스덴에 떨어진 폭탄 통계

즉, 폭탄을 떨군 양을 따지면 미군의 폭격만으로도 가공할 만한 위력이라 할 수 있으나 기상 문제로 제대로 맞지를 않았고, 드레스덴을 결정적으로 파괴시킨 건 영국 공군의 야간폭격때 떨어진 소이탄이었다. 대량의 소이탄 폭격으로 드레스덴 전체에 대규모 화재가 발생하였으며 장소에 따라 고온에 따른 화염 폭풍까지 발생하였다. 이로 인해 방공호 등지에 대피했던 민간인들 중 상당수가 희생당했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이러한 방공호 자체가 몇 개 있지도 않았고, 관리도 허술했다는 데에 있다. 이러면서 나치 독일이 홀로코스트시설은 철저하게 만들었다는 아이러니 이 때문에 제대로 방호가 될 리 없는 지하실에 숨어든 게 보통이었다. 이 지하실들은 건물마다 얇은 벽으로 막혀 있어 한 건물이 무너질 것 같으면 벽을 뚫고 다른 건물로 옮기는 방식이었는데, 이 덕분에 훗날 희생자들의 시체가 한 곳에 우르르 쌓여 있게 된 것이다.

3 폭격의 결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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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베 강피렌체"라던 고도(古都) 드레스덴은 그야말로 잿더미가 되었다. 드레스덴 시가지 중 6.5제곱킬로미터가 파괴되었으며 15만 채 이상의 집들이 파괴되었다.

인명 피해의 경우 꽤 논란이 많다. 독일의 공식 보고서인 "Tagesbefehl no. 47" ("일일지령, TB47")에 따르면, 3월 22일 집계된 사망자 수는 알트마르크트에서 소각된 6,865명을 포함하여 총 20,204명이며, 전체 사망자 수는 약 25,000명으로 추정되었다. 다른 보고서에는 4월 3일 집계된 시체 수는 22,096명이라 기록되어있다. 시립 공동묘지에서는 21,271명의 희생자가 공습으로 시립묘지에 묻혔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그 중 17,295구은 헤이데프리에드호프 공동묘지에 묻혔다고 한다.[4] 1966년동독치하에서 재건을 위한 공사 도중에 1,858구의 희생자가 한꺼번에 발견되기도 했다. 더 이상 시체가 발견되지 않을 것 같음에도 불구하고 통일 직전인 1989년에는 새로운 빌딩을 건설하기 위해 기초 공사를 하던 중 또다시 폭격으로 희생된 시체가 발견되기도 했다. 뒤늦게 발견된 10,000구의 시체를 포함해서 당국의 권한에 의해 제외됐던 희생자의 수를 합하면 모두 35,000명 정도 된다.

공식적으로는 3만 5~8천 여명의 사망자가 발생한 것으로 집계 실제 사망자는 이보다 더 많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일단 피난민이 몰려들면서 드레스덴으로 서류상의 거주지를 옮기지는 않았는데 드레스덴에 있었던 사람들이 매우 많았고[5], 건물이 붕괴되거나 고온으로 인해 시신 자체가 소멸되면서 사망자를 집계하는데 어려움이 꽤 있었기 때문이다. 일부에서는 사망자의 수를 10만명 이상 잡기도 한다. 죽은 사람들에 의한 노동력 부족으로 매장과 화장을 할 인력의 부족으로 인해, 시체들은 한꺼번에 화염방사기로 화장되기도 했다.

4 결론

폭격의 목표 지역 및 의도가 명확했던 다른 피해 도시와는 달리 드레스덴의 경우 군수시설 보다는 민간인 거주지가 더 피해를 많이 보았던지라 때로는 아서 해리스등 지휘 수뇌부의 감정적인 보복 행위라는 의견이 나올 정도로 매우 논란이 큰 작전이다. AP 통신이 2월 19일에 '연합군 공군 수뇌부가 독일의 인구밀집지역에 의도적으로 테러 폭격을 가하기로 했다'고 보도할 정도였다. 물론 실제로는 산업시설을 노리고 폭격을 하려고 했는데 날씨가 엉망이라 도심을 폭격하는것으로 대체한 결과지만. 한편 독일은 이 직후 드레스덴에는 산업시설이 없었다고 주장하였는데 여기까지 읽었다면 이는 어디까지나 선전을 목적으로 한 거짓말임을 알 수 있을것이다. 당장 독일 최고 사령부가 대규모 공장이 있다는걸 알고 있었는데 공장이 없다는건 말이 되지 않는다.

영국은 산업시설의 23%와 비 산업시설은 56%정도가 파괴되었다고 추산했다. 한편 드레스덴 경찰의 보고서는 200여개의 공장이 크고 작은 손상을 입었으며 136개는 심각한 손상을 입었으며 28개는 중간정도의 손상을 35개는 경미한 손상을 입었다고 한다. 손상을 입은 공장 중에는 광학기기를 제작하는 자이스의 공장도 있었다.

그리고 친독 성향의 밀덕들은 지금도 이 폭격을 지휘한 아서 해리스를 까고있다. 이들 중에는 드레스덴에 산업시설이 없었다는 나치의 거짓 선전을 그대로 믿는 경우(...)도 있다. 물론 왜 해리스가 이런 결정을 내려야 했는지 생각한다면 이 폭격이 잘못되었다고 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정말 해리스에게 불리하게 말한다면 전쟁범죄는 아니지만 도덕적으로는 문제가 될 소지가 있다고 할 수 는 있겠지만. 물론 폭격 자체의 필요성은 부정할 수 없는 부분이다.

5 여담

발터 모델 원수와 가족들이 폭격으로 폐허가 될 때 까지 이곳에서 거주했었다. 히틀러의 호출을 받고 베를린에서 작전회의에 참석해있던 모델이 2월 13일 드레스덴 폭격을 보고를 받고 히틀러에게 행방불명 된 자신의 가족들을 찾기 위해 잠시동안 드레스덴에 가겠다고 의사를 밝히고 허가를 구하였으나 이를 거절당하자 자신의 부관 테오도르 필링 대령을 하여금 드레스덴으로 급파시켜 행방불명된 아내와 두 딸을 구출한 후 뮐하우젠에 위치한 친형 오토 모델의 집으로 피신시켰다.

도심 한가운데의 '성모성당(프라우엔키르헤)'은 폭격 마지막 날 무너져 내리면서 개발살이 났다. 종전 뒤 공산정부는 이 폐허를 허물고 주차장을 건설해 종교적인 상징을 없애버리려고 했다. 그러나 시민들의 반대로 철회되었으며 기어이는 1989년 동독 붕괴의 신호탄이 된 시위가 라이프치히에 이어 성모성당 앞에서 일어나게 되었다. 성당은 동독 치하에서 복구되지 않고 있다가 2005년 파괴 60년만에 잔해 하나하나까지 살리며 꼼꼼히 복구되었다.

당연히 영국에 대한 시민들의 감정이 대단히 좋지 않았다.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이 냉전 종식 및 독일 통일 직후였던 1992년 드레스덴에 방문했다가 계란 세례를 받는 일까지 있었다. 적반하장

이 드레스덴에는 놀랍게도 미군 포로들도 있었다. 그중의 한명이 나중에 살아남고, 귀국해 미국으로 돌아가 이 끔찍한 기억을 배경으로 소설을 쓰게 되니 바로 제5도살장의 저자 커트 보네거트였다.

드레스덴 폭격을 배경으로 격추된 영국 파일럿과 드레스덴의 독일 간호사의 로맨스를 다룬 2부작 드라마 드레스덴2006년에 나온 적 있었다. 독일인 피해자들의 입장을 엿볼 수 있는 드라마.

K(애니메이션) 1기 9화에서 아돌프 K 바이스만의 누나 클로디아 바이스만이 드레스덴 지하에서 아돌프가 입수한 석판 임계시험 도중 폭격에 휘말려 프라우엔키르헤 앞에서 사망했다.폭격 날짜가 1월인 것이 고증오류지만 폭격기는 고증을 잘살렸다.이어서 아돌프는 드레스덴의 석판을 이용해 백은의 왕이 된다.

독일 극우들과 그 외 타국의 독빠 및 네오나치들이 연합국을 깔 때 써먹는 필수요소이다. 그미친놈들이 이 폭격을 언급할때마다 쓰는 명칭이 드레스덴 홀로코스트이다.

이 사건은 동시기 태평양 전선에 있던 미 육군항공대의 모 장군에게 깊은 영감을 주게 된다(...) 그리고 그 장군이 기획한 것이 바로 도쿄 대공습(...)
  1. 소규모 공장까지 집계하면 더 많아질것으로 추정된다.
  2. 한 블럭을 날려버릴만한 위력이 되었으므로. 그 후 이 단어는 '블록버스터 영화'의 어원이 된다. 자세한 것은 항목 참조.
  3. 독일 공군의 제공권 상실을 보여주는 예다. 더 이상 위협적인 독일 공군의 요격이 없게 되자(특히 아르덴 대공세이후) 호위기들까지 지상공격에 나서게 된 것. 이런 명령은 드레스덴 뿐만 아니라 다른 도시들에도 마찬가지였다.
  4. 집계는 알트마르크에서 화장한 재도 포함. 또한 이 집계는 다른 지역에서 매장된 희생자들도 포함해야 하기 때문에 이 수는 분명치 않다.
  5. 아이러니하게도 이들은 소련군을 피해 연합군에 항복한 지역으로 가려는 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