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서 해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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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Sir Arthur Harris, 1st Baronet
'Bomber' Harris

1892년 4월 13일~1984년 4월 5일 (향년 92세)

난 사람을 죽이기 위해서 이 자리에 앉혀졌다.

태평양 전선 하늘에 미국인 커티스 르메이가 있다면 서부전선 하늘에는 영국인인 이 사람이 있다.
아서 해리스 경은 제2차 세계대전영국 공군의 장성이었다. '폭탄 해리스'라는 별명이 있었다. 별명에서부터 알 수 있듯이 적극적인 성격의 해리스는 1942년에 폭격기 사령부 지휘관에 임명된후 독일 본토에 대한 무차별 폭격을 명령하여, 함부르크, 베를린, 쾰른, 드레스덴 등에 불벼락을 내리고 쑥을 재배했다. 다른 별명으로는 butcher. 즉 도살자가 있다. 폭격 작전으로 인한 민간인 희생자와 작전으로 인해 전사한 폭격기 승무원들 때문에 붙여진 별명.

그 중 제일 유명한 것은 드레스덴 폭격이며 이 폭격의 위력은 2차 대전 당시 연합군이 수행한 어떤 폭격보다도 위력적이어서 확인된 사망자만 4만명에 달하며 추정치는 10만명까지 잡히기도 한다. 이 작전기간 동안 독일 민간인의 피해는 결코 적은것이 아니어서 쾰른과 함부르크에서 각각 4,5만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 한편으로는 영국 폭격기 승무원에게도 매우 위험하여 수만 명의 장병들이 하늘에서 목숨을 잃었다. 해리스는 1946년에 원수로 진급한후 퇴역하였고, 1953년 준남작 작위를 받았으나 아들이 자손없이 먼저 죽어 준남작 작위는 자신의 대에서 끝났다.

전쟁이 끝난후 "나치 전범들과 나의 차이는 그들은 감옥에 갔거나 교수형을 당한 반면 나는 자유롭다는 것뿐이다."라는 명언(?)을 남겼다. 연합군 장성으로써 적에게 보여 준 태도 때문에, 커티스 르메이와 자주 연관된다.

전쟁이 끝난 후 자신은 영국의 위대한 영웅이니 마땅히 자신의 동상을 세워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드레스덴의 피바다를 기억하고 있던 당시라서 영 분위기가 안 좋았고[1] 빡친 해리스는 이놈의 나라는 영웅을 대접할 줄 모른다면서 당시 대영제국·영연방의 일원으로 영국과 동군연합 국가였던 남아프리카 연방(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전신)으로 이민 가 버렸으나[2] 1953년 준남작 작위를 받고 윈스턴 처칠이 다시 수상 자리를 차지하는 등 상황이 변하자 다시 영국으로 돌아왔다. 배로 만든 집에서 살았다고 한다.

그리고 해리스가 죽은지 몇년 있다 런던의 한 교회에서 해리스의 동상 제막식이 열렸다. 여담으로 제막식에서 어떤 독일인이 히틀러도 1시간에 10만명을 죽이진 못했다고 울부짖었다고 한다. 그러나 일반적인 독일인들은 대충 넘어가는 거라고 생각하는데 이는 드레스덴 출신자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이를 독일의 전후반성이 철저했다고 하기는 무리가 있는 것이 SS를 비판하면서 국방군의 깨끗함에 대한 신화를 만드는 것도 반공적 분위기의 냉전에서의 정치적 의도가 있다. 또한 저것을 당연하다거나 그냥 넘어가는 것은 일반적인 (중도, 내지 중도우파적인) 정치성향을 지닌 전후 재건기의 독일인들의 태도이고, 좌파적 성향이나 평화주의적 성향을 띈 시민이나 정치세력 중에서 저런 일을 넘어가려는 경우는 일반적이라고 하기는 어렵다. 경우에 따라서는 그놈이 그놈이다(...)라는 입장을 가지는 경우도 많다고 한다.

하여튼 그 피해에만 주목하는 친독 성향의 밀덕, 2차대전 덕후들에게는 영국히틀러로(...) 불리며 좋은 평은 못 듣는데 주로 폭격 과정에서 민간인들이 많이 희생되었고 그가 단행한 드레스덴 폭격은 연합군의 전략 폭격에 당한 케이스 중에도 특히 심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에 대한 비판이 나치의 만행을 희석하는데 악용되는 일도 종종 있어서 제대로 된 평가가 힘든 경우이다. 일단 본인은 위의 말에서도 알 수 있듯이,누구처럼 자길 옹호하고 다니지는 않았으며 전략 폭격 자체는 전쟁 범죄가 아니기도 하다.[3] 물론 누군가에게 이용당할 수 있다는 이유만으로 비판을 덮어버려서는 안되며 전쟁법과는 별개로 도의적인 책임이 면제되는 건 아니다.

그러나 이 사람이 민간인 학살자라고 생각한다면 총력전항목을 다시 정독해 봐라. 2차 대전은 누가 뭐래도 역사상 가장 최악의 총력전이었고, 이 당시 일어난 일을 현재 우리 시각에서 판단한다는건 당시의 상황을 고려하지 않는 실수를 범하는 것이다. 드레스덴이 충격적이었던건 전쟁 다 끝난 마당에 3시간에 걸친 폭격에 그 많은 희생자가 생겼다는 것과 도시가 완전히 핵폭탄 맞은 것 처럼 날라갔다는 것인데, 사실은 69% 정도만 파괴되었으며 연합군의 폭격 목적지 중에서는 7~80%이상 파괴된 곳도 많았다. 차라리 욕하려면 이 총력전을 일으킨 히틀러제3제국을 욕해야 할 것이다. 먼저 저지르지 않았더라면 불벼락을 맞을 이유도 없었다.

게다가 일단 이러한 '사기 죽이기' 폭격은 괴링이 런던에 먼저 해 버렸다. 사실, 헤르만 마이어가 되기 싫어서 한 거지만[4] 이것 뿐만 아니라, 무장SS[5]가 지속적으로 V-1, V-2 같은 로켓을 쏘아대며 군, 민간인 할 것 없이 피해를 가중시키고 있었기도 했으므로 제공권을 장악한 시점에서 같은 명목으로 폭격을 감행하는 것을 현재 우리 관점에서 욕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이렇게 두들겨 맞은 것 덕분에 영국은 현재까지도 유명한 그 복지 제도를 도입하게 될 정도였고, 맛없는 영국 음식의 원류가 이것 때문이라는 가설도 나오는 상황이었으니까.

하지만 쿠르드 족을 독가스로 학살하라고 명령을 내린(독가스가 부족해 이뤄지지 않았지만 결국 영국군이 쿠르드인들을 학살한 건 같았다.) 처칠의 흑역사처럼 해리스도 1920년대에는 영국의 식민지인 이라크에서 비행 중대장으로 식민지 사람들을 폭격하는 데 적극적으로 나선 전력도 있다. 애초에 식민지 저항에 대한 폭격 진압으로 승진가도를 달린 사람이다. 2차 대전 당시의 행적이야 정당한 전쟁수행이지만 이쪽은 빼도박도 못할 까일거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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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런던의 성 클레멘트 교회에 휴 다우딩(1940년 영국 본토 항공전의 공군사령관) 장군과 함께 동상이 세워져있다. 영국 공군의 칼과 방패

2 어록

무기를 만드는 공장을 부술 수 없다면 그 공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죽이고 그들의 집을 잿더미로 만들자.
폭격의 목표는 적국의 민간인, 그 중에서도 산업 인력을 죽이는 데에 있다.
독일인들은 누구든지, 제복을 입었든지 않았던지를 가리지 않고 모두 합법적인 표적이다.
적국의 민간인도 적이다. 군인이건 민간인이건 적을 위해 흘릴 눈물 따윈 없다.
최단시간 내에 최다수의 폭격기를 통해 단시간에 최대의 단위면적을 쥐새끼 한마리 남기지 않고 모조리 초토화시켜야 한다.
나는 사람을 죽이기 위해 이 자리에 앉았다.
나치 전범들과 나의 차이는 그들은 교수형을 당했거나 감옥에 갔고 나는 자유라는 것 뿐이다.
세상의 고위 군인들과 정치인들이 전부 이랬으면 더 평화롭지는 않아도 더 정직한 세상이 될것 처럼 보이는 후덜덜한 돌직구들 밖에 없다(...)
  1. 뉘른베르크 재판 판결이 나온 직후 영국의 한 제독이 '"되니츠가 10년형이면 해리스는 종신형."'이라고 디스했다고 한다. 실제로 제3제국 국방군 중 그나마 페어 플레이(?)를 했던 것은 바로 독일 크릭스마리네고, 오늘날 독일 국방군이 냉전 시대와 달리 SS 못지않은 전쟁범죄집단으로 재평가 받는 와중에도 욕을 거의 안 먹고 있다. 물론 이는 크릭스마리네가 유독 깨끗한게 아니라 그 당시 전 해군이 서로에게 비교적 신사적이었던 거지만. 심지어 그 일본 해군조차도 육군보다는 깨끗했다. 그리고 되니츠는 해리스와는 달리 엄연히 전쟁범죄를 저지른 게 맞는데, 잠수함을 동원해 민간 상선을 격침한 것이 아니라 중립국 선박에 대한 무차별적인 공격, 전시 포로에 대한 부당한 처우(영국 코만도 대원의 즉결처분 등)나 점령지 민간인 등에 대한 강제 노동에 대한 서류에 책임자로서 서명한 점 등이 유죄로 인정된 것이다.
  2. 이 때 슬슬 남아프리카 연방에선 아파르트헤이트가 시행되어갈 무렵이었다. 만약 남아프리카 연방 정부에서 아서 해리스를 우대해 자리를 내줬으면 귀국하지 않고 정착했으면 얄짤없이 인종차별 범죄와도 연관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3. 군사적인 목표물을 공격하는 과정에서 민간인의 피해가 발생했다고 하더라도 전쟁범죄는 아니다. 설령 그 과정에서 민간인의 피해가 발생할것을 알았다고 하더라도 마찬가지라고 한다.
  4. 이전에도 폴란드바르샤바, 프람폴 등 독일군에게 점령당한 많은 국가들이 당했으며, 네덜란드로테르담도 거의 지도에서 지워질 정도의 피해를 입었다. 연합군의 전략 폭격이 유명해서 이 쪽만 부풀려진 감이 있는데, 사실 이런 폭격은 독일군이 시작한 것이었다. 그리고 연합군의 전략폭격은 엄연히 산업시설등을 목표로 한 반면에 독일은 민간인을 대상으로 했다.
  5. V병기는 공군과 SS가 관할권을 놓고 싸웠는데, 결국 SS가 이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