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이스 캐럴

Lewis Carroll
(1832년 1월 27일 - 1898년 1월 14일)


1 개요

본명은 찰스 럿위지 더지슨(Charles Lutwidge Dodgson)[1], 루이스 캐럴은 필명[2]이다. 영국 빅토리아 여왕 시대의 수학자이자 소설가, 사진가.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저자로 널리 알려져 있으며, 초창기의 주요한 사진 작가이기도 하다.

2 생애

찰스는 잉글랜드 북부(스코틀랜드 말고) 채셔 지방의 작은 마을, 데어스버리에서 9남매의 맏이로 태어났다. 더지슨 일가는 성공회 성직자 일가였는데, 그 영향이었는지 그도 1861년 성직자가 되기도 했다. 하지만 설교는 별로 하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1850년, 찰스는 옥스포드 대학교 크라이스트처치에 들어가서 수학을 전공했다. 이후 1855년부터 크라이스트처치에서 교편을 잡았지만, 말더듬이 워낙 심해서 좋은 교수가 되지는 못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그가 교수가 되었을 즈음 해서 헨리 리들(Henry Liddell)이 크라이스트처치의 학장으로 부임한 후, 그는 헨리의 자식들과 금방 친해졌고, 그 중에서도 로리나, 이디스, 특히 앨리스 플레전스 리들(Alice Pleasance Liddell)를 아꼈다.

평생 독신으로 살았는데, 여기에 관련해서 루이스가 앨리스에게 청혼을 했다가 거절당했고, 루이스는 앨리스의 의견을 존중하여 평생 결혼을 하지 않고 아이들과 살았다는 설이 있다. 하지만 명확히 하자면 루이스는 리들부부에게 앨리스와 결혼하고 싶다는 완곡한 제안을 했다는 모톤 코헨 교수의 주장이 있다. 모톤 코헨 교수는 루이스의 전기를 쓴 사람 중 하나인데, 그는 82년, 북미 루이스 캐럴 협회에서 한 인터뷰에서 말하기를 20~40%가량의 미출간된 루이스 캐럴의 일기부분을 읽고나니 그가 앨리스와 결혼하고 싶어했다는 확신이 들게 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캐럴이 앨리스에게 청혼을 했다는 루머의 사실 여부는 논란이 분분하다. 이 루머는 캐럴이 리들 부부에게 1863년 어떠한 제안을 하고 그 이후 리들 가족에게서 멀어진 사실과, 캐럴의 사후 캐럴의 친척들에게 공개된 캐럴의 일기장에 이 시기를 포함한 10년 가량의 부분이(서양에서는 "the cut pages document"라고 불린다) 누군가에 의해 찢어져 있었다는 점, 그리고 캐럴이 생전 여러가지로 의심이 갈 짓을 많이 했다는 점(...)을 종합해 생겨난 것인데, 실제로 청혼을 했다는 확실한 증거는 없다.

이후 캐럴의 친척들이 일기장의 찢어진 부분의 개요를 적어놓은 종이가 발견됐는 데, 그 내용은 캐롤이 리들 부부와 멀어진 이유는 캐롤과 "로리나"의 별명인 "이나"와의 안 좋은 소문이 나돌았기 때문이었다. 앨리스가 아니였다니 이것도 여러가지로 떡밥덩어리인게, 로리나(당시 14살[3])는 앨리스의 언니 이름이지만, 앨리스의 어머니의 이름도 로리나였고, 소문이 났다는 것 뿐이라 확실한건 어디에도 없다.

많이 알려진 앨리스와의 떡밥 때문에 싸이 간지글로 러브스토리를 만들어서 유포되는 경우가 있는데 루이스 캐롤은 절대 아이들을 그런 쪽으로 터치하지 않았다.

3 소설가로서

지금까지 가장 많이 인용된 문학 작품 중 하나인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와 그 후속작인 거울 나라의 앨리스가 대표작이며, 그 외에도 장편시 스나크 사냥, 동화 실비와 브루노, 그리고 몇몇 수학책을 썼다. 빅토리아 여왕앨리스 이야기를 재미있게 읽고 그가 쓴 책을 모두 읽고 싶다는 편지를 냈다가 수학책과 논문들을 받고 당황했다는 일화도 있다.(…)

세상을 바꿨다는 건 사실로, 그의 문학작품이 안 인용된 곳이 없다. 이름이 앨리스인 캐릭터는 열이면 아홉은 캐럴의 영향을 받았다. 다소 과장하자면 소설부터 야겜에 이르는 엄청난 영역에 캐럴의 손이 닿아 있다. 다만 대부분 일본 쪽이고 해외에서는 역사적으로 볼 때 앨리스라는 이름이 그다지 드물지 않아서 앨리스라는 캐릭터가 나온다고 모두 캐럴 작품과 연관이 있으리라는 법은 없다.

그 외에 언어유희를 잘 사용하는 걸로도 유명하며, 셰익스피어처럼 이 사람이 현대 영어에 추가한 신조어가 꽤나 된다. (재버워키 항목을 참고하자.) 영문학계에서 그를 높게 평가하는 이유가 다 있다. 그러나 앨리스 이후 작품들은 패러독스적인 면이 전혀 없고 감상적이어서 큰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다. 대표적인 예가 장편동화 <실비와 브루노>인데, 내용은 엄청나게 방대한데 구성, 캐릭터성은 별로여서 앨리스 2부작에 비해 관심을 별로 받지 못한다.

4 수학자로서

앨리스 2부작이 사실은 일종의 수학논문이라는 주장이 있다. 동화의 이름을 빌려서 본인의 수학적 관점을 표현했다는것.
'찰스 도지슨(1832~1898)은 루이스 캐럴이라는 가명으로 쓴 동화책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로 잘 알려져있다. (중략) 빅토리아 여왕이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너무도 재밌게 읽었기에 캐럴이 다음에 쓴 책을 가져오라고 명령하자 (중략) 다음 책은 여왕에게 도착했다. 제목은 <연립선형방정식과 대수적 기하학에 적용된 행렬식에 관한 입문서>였다.'[4]

5 과학과의 관계

수학 외의 자연과학과 의외의 접점이 있다. 바로 진화론. 찰스 도지슨은 진화론의 주창자인 찰스 다윈과 편지 및 사진을 주고받는 등 교류를 유지했으며, '다윈의 불독' 토머스 헉슬리와도 친분이 있었다.[5] 여기까지는 단순히 과학자들과 친분이 있는 수준이지만 그가 만든 퍼즐 중 하나인 단어 사다리(Word ladder)퍼즐[6]은 진화론 연구에서 소(小)진화가 대(大)진화로 연결된다는 이론을 뒷받침해 주었다. 이보다 더 큰 영향을 끼친 개념이 바로 거울 나라의 앨리스의 '붉은 여왕'에서 모티브를 딴 '붉은 여왕 효과'이다. 도지슨 본인이 진화론에 대해 어느 정도 관심을 기울였는지는 불분명하다. 다윈 및 헉슬리와의 관계를 볼 때 도지슨이 진화론에 관심을 가졌을 가능성은 크다. 하지만 그게 어느 정도인지 알 수는 없다. 도지슨이 남긴 일기 중 진화론이 발표된 시기를 전후한 때의 부분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의 창작물이 이후 진화론의 연구에 큰 영향을 끼친 것은 사실.

아이러니한 점으로, 찰스 도지슨이 성공회 성직자가 될 당시 그를 서임한 주교가 바로 새뮤얼 윌버포스다. 진화론에 대한 논쟁에서 토머스 헉슬리에게 '과학을 조롱하는 당신같은 작자 보다는 차라리 원숭이의 후손이 되겠다'라는 조롱을 당하며 참담한 패배를 당한 그 사람 맞다.

6 사진가로서

자신이 쓴 책들의 삽화를 직접 그렸던데서 알 수 있다시피, 캐롤의 그림은 전문가 수준은 아니었지만 어느 정도 표현력이 있었다. 그는 어릴 때부터 그림을 즐겨 그렸고 그런 미술적 관심은 나이가 들어 사진으로 옮겨갔다. 1856년, 루이스가 사진기를 샀을 당시 사진은 등장한지 오래되지 않은 최신 기술이었고, 때문에 젊은 엘리트층이 사진기를 주로 쓰곤 했다. 당시 사진은 유화의 연장선상으로 여겨지기도 했고, 그러면서도 1850년대에 이르러서는 사진의 인화 등에 있어 큰 진보를 이룬 상태였으니, 루이스가 이 세계적인 빅 웨이브에는 탈 수밖에 없다며 사진기를 질러버릴 이유는 충분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직장에다가 인화실을 만들어놓은 건 너무했다. 도대체 학장을 어떻게 구워삶았을까

그가 사랑한 앨리스의 이름에 가려지긴 했지만, 루이스 캐럴은 동시대의 여류 사진가였던 줄리아 마가렛 카메론(Julia Margaret Cameron)과 함께 초기 사진계의 양대 작가로 꼽힌다. 루이스 캐럴은 아이들의 초상사진을 즐겨 찍었는데, 무엇보다도 그가 찍은 사진은 대단히 자연스러웠다. 사진 항목을 참조하면 알 수 있겠지만, 당시 사진 기술은 여러모로 개량이 이루어지긴 했지만 그럼에도 사진을 찍는 데 시간이 제법 걸렸다. 그런 탓에 당대의 초상 사진은 딱딱한 모습이 대부분이었다(프레데리크 쇼팽 항목에서 당시 초상사진의 전형을 볼 수 있다).

루이스는 사진을 찍을 때 아이들을 편안하게 있도록 해 주었다. 그의 사진에서는 머리받침대 같은 것보다 꽃과 풀잎을 더 많이 찾아볼 수 있다. 사진이 촬영되는 동안 아이들에게 이야기를 해 주면서 아이들의 자연스러운 모습을 잡아냈다. 때문에 그가 찍은 사진 속에서는 아이들이 대단히 자연스럽게 보인다. 지금은 사진술에 있어서 너무도 당연하지만(그리고 그래서 그의 사진계에서의 업적이 잊혀졌지만), 당시 그의 사진들이 준 충격은 대단한 것이었다.

루이스는 사진을 찍을 때 다양한 디테일에 엄청나게 신경을 썼다고 한다. 피사체가 최대한 아름답게 보이도록 하려고 다양한 요소에 신경을 썼고, 아이들을 편안하게 만들어 자연스러운 모습을 하게 만들도록 한 것도 그래서였다. 그러다보니 1860년대에 유행했던 천편일률적 명함판에 대해서 그의 시 '사진사 히아와타'를 통해 풍자하기도 했고, 줄리아 카메론의 사진을 혹평하기도 했다.

한편 그는 당대의 여러 유명인사들의 사진을 찍기도 했다. 이미 유명한 사진가이자 수학자, 소설가였으니 여러 유명인사들의 사진을 남기는 것도 어렵지 않았다. 전자기학의 기틀을 마련한 마이클 패러데이, 시인인 알프레드 테니슨과 화가인 존 에버렛 밀라이스 남작 등의 초상이 루이스 캐럴의 사진에 의해 지금까지 전해진다. 사실 그가 혹평한 줄리아 카메론의 사진 또한 루이스가 찍었다.

한편, 루이스는 안면인식장애를 가지고 있어 사람 얼굴을 잘 기억하지 못해 어제 같이 런던에서 식사를 한 사람의 얼굴도 못 알아봐서 처음 본 사람처럼 대했다고 한다.[7] 그 때문에 사진에 그렇게 유독 집착한 것일지도 모를 일이다.

7 소아성애자였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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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럴이 직접 사진찍은 앨리스 리들캐럴이 찍은 비아트리스 해치의 사진을 채색한 것.[8]

캐럴이 소아성애자였는지는 그야말로 백년간 묵은 떡밥인데, 캐럴이 생전 의심갈 짓을 많이 하긴 했지만, 선을 넘은 적은 없기에 논란이 분분하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쓴 계기도 자신이 사랑하던 열두 살 짜리 소녀 앨리스를 기쁘게 해 주기 위한 것인데, 앨리스와 만날 때마다 들려 준 이야기를 어느 날 앨리스가 책으로 써 달라고 부탁하자 집에 가서 밤을 새며 책을 썼다고 한다.

제일 의심가는 일은 역시 아이들의 부모의 허락을 받고 여아들의 나체 사진을 찍거나 그림을 그려서 보관했던 것이다. [9] 그 사진들은 아이들에게 피해가 가지 않게 하려는 캐럴의 유언에 따라 거의 불태워버려 현재는 몇 장 남지 않았고 그림들은 모두 아이들의 부모에게 돌아갔다. 부모가 불태우지 않거나 이런저런 사정으로 남은 나체사진이 몇 장 있다.

코헨을 비롯한 캐럴의 전기를 쓴 작가들은 모두들 캐럴이 소아성애자였다는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고 있고, 특히 코헨 교수는 "그의 사진들이 순수하게 예술만을 위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어리석은 생각이다. 그는 남에게는 물론이요, 자신에게 조차 인정할 수 없을 아이들을 향한 감정이 있었을 것이며, 그의 사진과 그림들은 그 감정의 배출구가 아니였을까"라고 적고 있다. 소아성애자라고 단정짓지 않는 작가들마저도, 캐럴이 아이들에게만 관심을 쏟고, 성인들의 세계에는 관심이 없었던 것은 사실이다 라고 적고 있다.

반면 캐럴이 생전 "설사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소녀를 발견한다 하더라도, 그림을 그리거나 사진을 찍을 때 그 아이가 조금이라도 옷을 벗는 것을 꺼려한다면, 나는 당장 그 요청을 그만두는 것이 하나님께 대한 신성한 의무라고 느낀다."라고 썼다는 말도 있고[10] 생전 "그의 사진이나 그림에는 한 치의 에로티시즘도 없다"고 그의 친구들에게 말하기도 했다. 캐럴의 조카는 "캐럴이 아이들에게 호감을 가진 것은 교사로서 아이들을 사랑했기 때문이다. 그는 항상 수업시간 중 모든 아이들에게 많은 관심을 보였다."라고 발언했다.

십 년 전까지만 해도, 캐럴이 소아성애자였다고 단정짓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지만, 최근엔 이를 반박하는 학자들도 많다. 작가들과 소문에 의하여 여러가지로 부풀려진 이야기도 많고, 결정적인 증거도 없다. 무엇보다 확실한 것은 그는 자신을 철저하게 절제했으며, 선을 넘은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결론은 각자 생각하시길.

소녀들의 후기로는 '애들 말을 잘 안듣고 지 좋을대로 하는 사람이지만, 좋은 사람이었고 이야기는 대단히 재미있었다.' 근데 이 말을 한 소녀의 다른 이야기를 보면 3~4시간 동안 줄곧 (그것도 즉석에서!)이야기 하게 한 다음, 같이 놀자고 하거나 다른 이야기를 더 해달라고 해서 루이스는 애들도 눈치챌 정도로 부자연스럽게 자주 자는 척을 했다고 한다... 이건 이해할 수밖에 없잖아! 뭐, 같이 놀 때 소꿉장난하고 싶은데 책을 보자고 한다든가 하면 애들 마음 모르는 짓은 좀 한 것 같지만.

반면 어린 남자애는 증오에 가까울 정도로 싫어했다고 한다. (다만 이 부분은 좀 부정확한데, 루이스 캐롤은 남녀 가리지 않고 아이들이라면 다 좋아했는 말도 있다.) 남아 있는 편지 중 하나는 소녀의 부모님과 소녀에 대해서는 매우 우호적이다 못해 찬미의 기색마저 느껴지는데, 소녀의 남동생의 대목에 이르면 온갖 욕을 다한다.

그 편지의 내용을 적자면 이러하다.

당신에게 나의 가장 귀중한 사랑을.

당신의 어머니에게는 나의 가장 다정한 인사를,
당신의 작고 뚱뚱하고 고집세고
무지한 남동생에게는 나의 증오를.
이제 모두에게 안부를 전한 것 같군요.아버지도 가족입니다

하지만 또 소년을 싫어했다고만 보기도 힘든 것이, 그레빌 맥도날드[11]라는 소년과 매우 친밀했고 앨리스 이야기의 출판도 이 소년의 말[12]로 결정했다고 한다. 원래는 그냥 앨리스나 아는 아이들에게만 구두로 이야기해주거나 보여주었다. 당시 소녀말고도 소년이나 가족들도 많이 찍은 것으로 봐서는 그냥 어린이를 좋아한 것이다. 사실 루이스 캐럴은 말더듬이 증세가 있었는데, 그게 이상하게 어린이들 앞에서는 말을 더듬지 않아서 이야기를 술술 할 수가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어린아이들을 좋아했다고. 또한 실제 앨리스 이후의 작품에서 캐럴은 어린이들의 순수함을 찬양했다. 로리콘이 아니더라도 로리를 좋아하는 것이다.

8 말년

교편을 잡은 이래, 그는 크라이스트처치에 계속 머물렀다. 1881년까지 학생들을 가르쳤으며, 그 곳에서 세상을 떴다. 그의 묘지는 런던 근교, 서리(Surrey)에 마련되었다.

9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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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리콘이었다는 결정적인 증거

유명한 사진이지만 이 사진은 합성이다. 아래 두 사진을 교묘하게 포토샵해 놓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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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실제 발음은 도드슨에 가깝다. 영국 BBC에서 제작한 Private world of Lewis Carroll에 나오는 앨리스 플레전스 리들은 1932년 인터뷰에서 그의 이름을 '도드슨'으로 발음하고 있다. 직접들어보기 http://www.hp-alice.com/lcj/zatugaku/dodgson/dodgson.wav 도지슨, 더지슨으로 알려진 이유는 일본어 번역판을 중역하는 과정에서 일본식 표기 도지손(ドジソン)을 따라했기 때문이다. 작품 속에서 도도새를 자신으로 비유한 점은 이 '도도'와 '도드슨'의 발음이 비슷하기도 하고, 말을 잘 더듬어 자신을 소개할 때 도,도드슨이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2. Lewis Carroll이라는 이름은 본명 앞이름 둘을 순서를 바꿔(Lu와 Do의 조합으로 루도비쿠스, Ch를 카롤루스로 변형) 라틴어식 이름인 루도비쿠스 카롤루스(Ludovicus Carolus)를 다시 영어식으로 바꾼 이름이다. Alice Liddell과 철자배치가 비슷하다는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Carroll과 Liddell은 아예 글자수, 자음과 모음위치가 같다.
  3. 이 시대의 14살이면 결혼해도 이상할것 없는 나이였다.
  4. 위대한 수학자의 수학의 즐거움, 레이먼드 플러드, 로빈 윌슨 저
  5. 도지슨 본인의 영향이 있는지는 불분명하지만, 도지슨과 가까운 사이였던 어린이 중 1명인 줄리아 아놀드는 이후 토머스 헉슬리의 장남인 레오나드 헉슬리와 결혼한다.
  6. 한 영단어에서 스펠링을 하나씩 바꿔가며 새로운 단어를 만드는 퍼즐. 최종적으론 원래 단어와 전혀 다른 단어를 만들 수 있다.
  7. 토머스 워스트, 글자로만 생각하는 사람 이미지로 창조하는 사람 中 주47
  8. 캐럴이 찍은 사진과 지시를 기초로 앤 리디아 본드라는 작가가 채색한 것이다. 참고로 비아트리스 해치는 캐럴의 사후 캐럴의 호평일색인 칼럼을 잡지에 써보내기도 했다.
  9. 지금 기준으로 보면 얄짤없이 아동성애자로 잡혀갈만한 내용이지만 이 당시 19세기에는 어린아이를 가장 신성하고 순수한 존재로 보는 게 대세였기 때문에 집의 벽마다 어린아이의 사진이 걸려있기도 했다.
  10. 마틴 가드너가 쓴 앨리스 책의 p.17 10번째 줄
  11. 아버지 조지 맥도날드는 공주와 고블린으로 유명한 판타지 작가
  12. "이런 이야기는 6만 권 정도는 있어야 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