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레데리크 프랑수아 쇼팽(Frédéric François Chopin)
(1810년 3월 1일 ~ 1849년 10월 17일).
1849년에 찍힌 쇼팽의 유일한 사진이다.[1] |
1 개요
폴란드 태생의 작곡가 겸 피아니스트.
이자 전세계 피아니스트 인대 부상의 주범
공범은 알캉과 라흐마니노프다
두목은 리스트다
이름을 폴란드어식으로 적으면 Fryderyk Franciszek Chopin(프리데리크 프란치셰크 호핀)이지만, 프랑스에 살게 되면서 프랑스식으로 바꿨다. 폴란드 현지에서도 프랑스어 발음을 따라 Szopen(쇼펜)이라 적기도 한다. 러시아에서도 Шопэн(Shopen, 쇼펜)으로 표기하는데, 발음이 같다. 그런데 그의 아버지는 프랑스인이었고 쇼팽 자신도 자기 이름은 쇼팽으로 발음했으니 굳이 따지자면 쇼팽도 맞다.
▲ 녹턴 Op.48 No.1. 아쉬케나지 연주.
폴란드인이 자부심을 갖고 존경하는 폴란드 최고의 위인중 한 명이기도 하다. 당장 폴란드의 관문 바르샤바 공항의 이름을 보자. 쇼팽 국제공항이다!![2]
2 생애
1810년 3월 1일 생으로 알려졌으나, 젤라조바 볼라 마을의 성당 기록에는 2월 22일에 유아세례를 받은걸로 나와있기 때문에 아마 실제 생일은 2월 중인걸로 보인다. 아버지는 프랑스인으로 폴란드에 와서 귀족의 가정교사를 하고 있었고, 어머니는 원래 귀족이었지만 집안이 몰락하여 다른 귀족의 집안에서 일하던중 가정교사와 만나 결혼하게 된 사이였다. 쇼팽은 평생 자신이 프랑스인 이였다는 사실을 몰랐다.
쇼팽은 위로 누나 셋이 있었고 아버지를 제외하면 집안에 남자는 쇼팽 한사람뿐이었다. 이런 환경은 쇼팽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쳤는지 남성임에도 어딘지 모르게 섬세하고 연약해보이는 쇼팽의 기질과 스타일이 여기에서 유래했다고 볼 수 있다.
어릴 때부터 피아노에 재능을 보였으며 7살때는 두개의 폴로네이즈를 작곡할 정도였다. 어린 쇼팽의 재능은 바르샤바의 귀족들에게까지 알려져 그들 앞에서 공연을 하기도 했다. 하도 잘쳤는지 그 당시 폴란드 언론은 "천재는 독일이나 오스트리아에서만 태어나는줄 알았지만 우리나라에도 드디어 천재가 태어났다."라고 했을 정도였다.
정식으로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한것은 1816년으로 지브니라는자신이 바흐의 직계 제자라고 소리치던 뻥쟁이(?) 피아니스트에게 배우게 되었다. 지브니는 보드카 중독자에 엄청난 골초였지만 쇼팽의 첫연주를 듣자마자 그를 천재로 보고 의욕적으로 가르쳐주었다. 훗날 쇼팽이 말하기를 "지브니 선생님 앞이라면 노새도 천재가 될겁니다."라고 했을 정도. 1818년에 기로체프의 협주곡을 완벽하게 연주하는 쇼팽을 보고 지브니는 더이상 가르칠게 없다면서 쇼팽이 자유롭게 성장하도록 거의 손을 대지 않았다.
이후 1822년, 바르샤바 음악원의 창설자인 엘스너에게서 본격적으로 음악을 배우게 되고 중학생때는 러시아 황제앞에서 연주할 기회를 얻게 되었다. 이후 피아니스트 뷔르너를 사사하며 바르샤바 음악원을 다녔다. 바르샤바 음악원을 졸업한 후, 1828~29년 이탈리아와 오스트리아를 여행하면서 음악의 중심지인 빈으로 가서 피아니스트로서 대단한 성공을 거두었다.
1830년 다시 한 번 빈에 간다. 이 때 그를 위한 고별 연주회에 그가 연모했던 콘스탄티아 그라도코프스카가 찬조 출연하는데 사실 그가 빈에 유학가는 이유는 그녀에게 고백하지 못하자 고민 끝에 그녀가 없는 곳으로 가기 위해서라는 카더라가 있다. 그의 곡 중 에튀드 3번 '이별의 곡'과 협주곡 1, 2번은 사실 그녀를 위해 작곡한 곡이라는 소문이 있다.
빈에 다시 한번 가서 카를 체르니, 훔멜 등과 교류했지만 빈의 청중들은 쇼팽에게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 그러던중 폴란드에서 러시아에 대항해 혁명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고 빈을 떠나 슈트트가르트에 도착했을때 러시아군의 잔혹한 진압으로 혁명이 실패로 끝났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이 때 겪은 분노와 조국과 집에 있는 가족들에 대한 걱정 등이 뒤엉켜서 쓰게된 곡이 에튀드 "혁명"으로 알려져 있다.[3]
이후 쇼팽은 프랑스 파리에 도착했다. 그러나 파리에서도 신통치 않은 결과만을 얻었고 자칭당대 최고의 피아니스트로 불리던 칼크브렌너에게 피아노를 더 배울까 생각했지만 칼크브렌너의 피상적인 연주 스타일이 쇼팽의 개성을 상실할까 우려한 친구 프란츠 리스트와 펠릭스 멘델스존, 힐러 등이 만류하였고, 3년이나 배워야 한다는 말에 그만두게 되었다.
파리에서도 별 소득이 없자 쇼팽은 미국으로 건너갈 생각을 하게 되었다. 만약 파리 길거리에서 고향의 귀족을 만나지 못했다면 쇼팽은 미국으로 건너갔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고향 귀족을 만난 일로 귀족들과 당대 유명인사들이 드나드는 살롱에 소개되었고 살롱에서의 연주회로 호평을 받아 쇼팽은 파리에 정착하기로 결심하고 본격적으로 후대에 널리 알려진 많은 피아노곡을 작곡하게 되었다. 쇼팽은 꽤나 명품중독자베스트 드레서였다고 하며[4] 우리는 쇼팽의 반평생 셔틀역할을 해준 짠한 율리안 폰타나를 기억해야 합니다.이따금씩 건반에 피아노 헝겊을 덮고 연주를 하는 묘기도 보여주었다고 한다(하지만 본인은 이런걸 별로 좋아하진 않았다고도 한다).
1836년, 드레스덴을 여행하던 중 바르샤바에서 사귀었던 여자친구 마리아 보진스카와 다시 만나게 된 쇼팽은 보진스카와 비밀리에 약혼했지만 쇼팽의 건강이 나쁜 것을 눈치챈 보진스카 주변 사람들의 반대로[5] 결국 파혼하고 만다.[6]
이후 마리아 다구 백작부인이 주최한 파티에서 당대 화제의 인물이었던 여류 소설가 조르주 상드(1804~1876)를 만나게 되고[7] 그녀와 사랑에 빠져 수년간 그녀와 연인이 된다.상드는 그 시대에 성공한 소설가로 문학계에서 상당히 뛰어난 인물로 평가되고 있다. 또한 여성인권옹호자였으며, 남자처럼 차려입고 살롱에 출입하며, 남편 외에도 많은 남자들과 염문을 벌인 여러가지 일로 화제가 되던 인물이었는데 보수적인 성향이 있던[8] 쇼팽은 그런 상드의 보이쉬함을 보고 처음에는 혐오했지만 점점 그녀에게 마음을 열게 된다. 병으로 인해 성적인 능력은 상실한 쇼팽이었지만 상드의 모성애적인 돌봄으로 그녀와의 관계는 약 10여년간 유지되었다.
참고로 널리 알려진 것과는 달리 상드의 일방적인 헌신으로 이어진 관계가 아니다. 작곡, 연주와 레슨으로 얻는 수익의 대부분이 상드와 그 아들딸한테 갔다.
쇼팽의 건강이 좋지 않자, 쇼팽과 상드는 요양차 1838년 지중해의 마요르카섬으로 가게 된다. 버려진 발데모사 수도원 근처의 오두막집에서 보냈는데 하필 그곳에 유례없는 추위가 몰려온 탓에(...) 쇼팽의 건강은 더 악화되고 말았다. 오두막의 환경이 최악으로 지하실 내지 다락을 방불케 했을 정도였다. 심지어 사육제에 코스튬을 한 사람들을 보고 진짜로 몬스터로 착각할 정도. 그런 중에도 쇼팽은 파리에서 마요르카까지 피아노를 옮겨와 수도원에서 피아노를 치며 작곡을 했다.
그러나 상드와의 관계는 점점 악화된다. 자유분방한 상드는 쇼팽과의 연애를 좋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보는 타인들의 시선을 무시했지만 쇼팽은 그렇지가 못했다. 그런 와중에 쇼팽의 건강이 악화되고 상드의 큰 딸 결혼문제를 둘러싸고 두 사람은 크게 다투게 되었다.이 시기에 상드의 인성이 드러난다. 결국 상드는 쇼팽을 떠났고 두 사람의 관계는 끝나고 만다. 후에 쇼팽의 장례식에도 참석하지 않는다.
파리에서의 쇼팽의 입지도 많이 좁아져있었고 경제적으로도 사정이 좋지 않아 쇼팽은 제자의 초청을 받아 영국과 스코틀랜드로 여행을 가게된다. 그러나 영국에서도 쇼팽은 큰 굴욕을 당해야만 했다. 영국 왕과 귀족,명사들이 참석한 파티에서 연주를 하게 되었지만 쇼팽 혼자 어두운 옆방에서 연주해야 했고 왕과 귀족들은 쇼팽의 연주에 관심조차 두지 않았다. 쇼팽 정도의 음악가가 한마디로 배경음악 취급을 받은 굴욕을 당한 셈이다.[9]
더욱이 영국의 기후는 쇼팽에겐 치명타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쇼팽은 런던에서 어렵게 사는 폴란드인들을 위해 열린 자선연주회에 참여하기도 했다. 이는 쇼팽이 대중 앞에선 마지막 연주회였다. 파리로 돌아온 쇼팽은 개인교수말고는 일체 다른 연주활동도 못할만큼 중병에 걸려있었다. 침대에서 화장실까지 가는것도 힘들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런 와중에도 면도와 옷매무새만큼은 단정히 했을 정도.
결국 1849년 10월 17일 쇼팽은 결핵[10]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죽기 전에 자신의 첼로 소나타 도입부를 연주해줄 것을 요청하였으나, 이를 채 다 듣기도 전에 극심한 고통을 호소하며 연주를 중단시켰다. 한편 그는 자신의 아버지가 두려워하던 것과 똑같이 살아있는 채로 묻히는 것을 막아달라는 육필 메모를 남겼으며, 자정 즈음 몸이 어떠냐는 의사의 질문에 "이제는 안아파요." 라고 대답하였다고 한다.. 쇼팽은 마지막에 "어머니...나의 어머니..."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하는데 일각에선 어머니를 조국 폴란드로 해석하기도 한다.
쇼팽의 소망대로 지인들은 쇼팽의 장례식때 모차르트의 레퀴엠을 연주하려 했지만 쇼팽의 장례식을 치룰 예정이었던 성 마들렌 성당에서 여자가수가 성당안에서 연주할 수 없다라고 반대하여 2주동안 장례가 미뤄졌지만 쇼팽의 간절한 마지막 소원이라는 지인들의 적극적인 설득에 성당측이 양보하여 모차르트의 레퀴엠이 연주되는 가운데 쇼팽의 장례식이 치뤄졌다. 쇼팽의 묘에는 쇼팽이 폴란드를 떠나기 전 은잔에 담아온 폴란드의 흙이 뿌려졌고,[11]후에 쇼팽의 심장은 바르샤바로 보내져 바르샤바의 성당에 안치되었다. 이 부분은 11월 30일자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에서 다뤘다.
3 음악 성향
쇼팽은 일평생 거의 피아노를 위한 곡만을 작곡했다. 물론 가곡이나 다른 악기를 위한 곡 같은 다른 장르의 작품도 있긴 하지만 피아노곡이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첼로 소나타나 가곡과 같은 곡이라 하더라도 그의 모든 작품에는 피아노가 들어간다. 당대는 낭만주의 음악의 시대였음에도 쇼팽은 자신의 음악이 낭만주의로 평가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심지어 초기에는 몇몇 사람들에겐 낭만주의자로도 인정받지 못했다. 그의 대담한 전조나 그 당시 절대 허용되지 않았다시피 한 불협화음, 기교 등은 그를 음악사에서 완전한 돌연변이로 만들다시피 했고, 심지어 때로는 그를 아마추어 음악가로 오해하고 착각하게 만들 정도였다. 그의 음악은 당시에도 완전히 이해되지 않을 정도의 음악이어서[12] 그와 비슷한 곡을 작곡한 몇 사람은 쇼팽 사후 쇼팽에겐 불명예스럽겠지만 그와 대등한 명성을 얻기도 했다(대표적으로 고트샬크(가초크)와 스테판 헬러 정도가 있다.[13]) 그렇지만 오늘날엔 낭만주의 작품의 대명사처럼 불리며, 대중들이 가장 잘 아는 낭만주의 피아노 작곡가 중의 한 사람으로 알려진다.
그의 작품에선 피아노로 다양한 음색의 창조를 위한 페달을 적극적으로 사용했다. 지휘자나 연주자의 재량에 따라 템포를 의도적으로 조금 빠르거나 느린 듯이 연주하는 기법인 루바토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기도 했으며, 당시 장식음이 대부분 기교적이기만 한 악절 정도로 취급됐다면 쇼팽은 장식음을 기능적으로 사용하여 선율의 하나로서 취급하기도 했다.
동시대의 작곡가이자 쇼팽의 동료이기도 했던 리스트의 음악에 비해 난이도 면에서는 왠지 모르게 어렵다는 평가를 하지 않는 듯하지만 피아노를 치다가 피아노를 박살내고 싶을 정도로 "애매하게" "왠지 모르게" 어려운 페시지가 눈에 엄청 자주 띈다. 리스트와는 다르게 왠지 어렵게 들리지는 않으나 상당히 어려운 곡들이 많다. 이유를 따지기에 먼저 하나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 리스트의 작곡 스타일 자체가 웅장한 효과, 화려함만을 부각시키기 위한 악절들을 상당히 많이 썼다. 즉 나쁘게 말하자면 곡 전체에 있어서 안 써도 될 부분을 남발했다는 점이다.[14] 쇼팽은 그런 악절들을 거의 쓰지 않았고 기교 자체를 중시하는게 아니라 내용적인 측면에서 기교적인 악절을 단순히 도구로 취급하는 스타일이었기 때문에 리스트보단 기교적인 효과를 중시하는 악절들이 상대적으로 눈에 덜 띄거나, 어떤 부분은 단순하게 봐선 어려운 악절인지 아닌지 파악하기 어렵게도 쓰여있다. 그런 면에서 슈만이나 쇼팽의 몇몇 곡들은 리스트보다 훨씬 치기 어려운 요소를 포함하고 있다. 단지 악보를 읽고 손놀리는 부분을 익히는 데에서만 어려움을 느끼는 것으로 테크닉적인 난이도를 평가하는건 절대 금물이다. 20세기 피아니스트 아르투르 루빈스타인은 리스트의 30분 가량의 소나타 보다 쇼팽의 짧은 전주곡이 더 연주하는데 힘들다고 말했다.
4 쇼팽이 피아노사에 남긴 업적
그는 작곡 면에서는 베버 등의 영향을 받았을 진 몰라도 피아니스트적인 면(기교적인 부분으로도 해석가능함)에서는 그는 누구의 도움도 거의 받지 않고 당시 세대의 아무도 상상치 못한 혁신을 일으켰다.
그의 연습곡에서 볼 수 있듯이 과거의 곡과는 거의 완전히 다른 기법과 기교를 사용하였다. (구세대식 교육을 받긴 했지만 훌륭한 예술가였던) 모셀레스는 한 때 그의 연습곡를 쳐보곤 '기교적으로 어렵고 비예술적인 부분에서 나의 손가락은 돌아가지 않았다.'라고 썼다.
그러나 쇼팽은 그의 곡을 자신이 직접 연주하면서 악기로서의 피아노 연주방식을 고려하지 않아 불가능해 보이는 부분과 비예술적으로 보이는 부분이 어떤 식으로 가능하게 연주할 수 있고 비예술적인 부분이 아니라는걸 증명해 보였고[15][16], 슈만 같은 훌륭한 음악가들이 그의 음악의 우수성을 끊임없이 주장하면서 평론가와 음악가들은 서서히 돌아섰고, 이 후 그가 완성하고 제시한 테크닉은 리스트에 의해 보급되고 향상되어 금세 낭만주의의 중추 역할을 하게 되었다. 이후 그의 스타일은 스크리아빈, 라흐마니노프 등에 의해 응용되었으며 고도프스키는 거기에 기초해 독자적인 기술과 음악의 세계를 발전시키기도 하였다. 동시에 인상주의 작곡가나 러시아의 프로코피에프 등에 의해 피아노 테크닉은 다시 한 번 큰 변화를 겪게 된다.
5 작품 목록
쇼팽은 일생에 걸쳐 200곡이 넘는 곡을 작곡했다. 아래는 그의 작품을 종류에 따라, Op 번호를 기준으로 정렬한 것이다. 그는 대부분의 곡에 표제를 붙이는 것을 꺼려했으므로, 그가 직접 붙인 제목 혹은 널리 사용되는 표제만을 썼다.
5.1 에튀드
프레데리크 쇼팽/에튀드 항목 참조.
5.2 녹턴
- Op. 9 3개의 녹턴(1~3번)
- Op. 15 3개의 녹턴(4~6번)
- Op. 27 2개의 녹턴(7~8번)
- Op. 32 2개의 녹턴(9~10번)
- Op. 37 2개의 녹턴(11~12번)
- Op. 48 2개의 녹턴(13~14번)
- Op. 55 2개의 녹턴(15~16번) "영웅"
- Op. 62 2개의 녹턴(17~18번)
- Op. 72-1 녹턴 제 19번
- Op. posth
- 녹턴 제 20번 <렌토 콘 그란 에스프레시오네>
- 녹턴 제 21번
5.3 왈츠
- Op. 18 왈츠 제1번 <화려한 대 왈츠> [20]
- Op. 34 3개의 화려한 왈츠(2~4번)
- Op. 42 왈츠 제 5번
- Op. 64 3개의 왈츠(6~8번)
- Op. 69 2개의 왈츠(9~10번)
- Op. 70 3개의 왈츠(11~13번)
- Op. posth
- 왈츠 제 14번
- 왈츠 제 15번
- 왈츠 제 16번
- 왈츠 제 17번
- 왈츠 제 18번 <소스테누토>
- 왈츠 제 19번
- 왈츠 제 20번 <우울한 왈츠>
5.4 마주르카
- Op. 6 4개의 마주르카(1~4번)
- Op. 7 5개의 마주르카(5~9번)
- Op. 17 4개의 마주르카(10~13번)
- Op. 24 4개의 마주르카(14~17번)
- Op. 30 4개의 마주르카(18~21번)
- Op. 33 4개의 마주르카(22~25번)
- Op. 41 4개의 마주르카(26~29번)
- Op. 50 3개의 마주르카(30~32번)
- Op. 56 3개의 마주르카(33~35번)
- Op. 59 3개의 마주르카(36~38번)
- Op. 63 3개의 마주르카(39~41번)
- Op. 67 4개의 마주르카(42~45번)
- Op. 68 4개의 마주르카(46~49번)
- 마주르카 제 50, 51, 52, 53번
- Op. posth
- 마주르카 54번
- 마주르카 55번
- 마주르카 56번
- 마주르카 57번
- 마주르카 D장조
5.5 폴로네즈
- Op. 3 서주와 화려한 폴로네즈(피아노, 첼로) C장조
- Op. 22 안단테 스피아나토와 화려한 대 폴로네즈(피아노, 오케스트라)[22] E♭장조
- Op. 26 2개의 폴로네즈(1, 2번)
- Op. 40 2개의 폴로네즈(3번 <군대>, 4번)
- Op. 44 폴로네즈 제 5번
- Op. 53 폴로네즈 제 6번 <영웅>
- Op. 61 폴로네즈 제 7번 <환상>
- Op. 71 3개의 폴로네즈(8~10번)
- Op. posth
- 폴로네즈 11번
- 폴로네즈 12번
- 폴로네즈 13번
- 폴로네즈 14번
- 폴로네즈 15번
- 폴로네즈 16번
5.6 전주곡
- Op. 28 24개의 전주곡
- 전주곡 15번 "빗방울"
- Op. 45 전주곡 제 25번
- Op. posth
- 전주곡 제 26번
- 전주곡 F장조
- 전주곡 E♭단조
5.7 발라드
흔히 아는 에튀드만 듣다가 발라드를 듣는 순간 다른 세계를 느꼈다고 하는 것처럼, 굉장히 완성도가 높은 작품들이다.
박자도 어렵고 독특한 매력이 있어 굉장히 많은 연주가들에 의해 개성있는 연주가 나오고 있고, 아르투르 루빈스타인, 크리스티안 짐머만 등의 연주가 호평받는다. 랑랑은 발라드 1번에서 엄청 까였다[23]
5.7.1 Op. 23 발라드 제 1번 g단조
크리스티안 짐머만의 연주.
임동혁의 연주.
5.7.2 Op. 38 발라드 제 2번 F장조
아르투르 루빈스타인의 연주.
조성진의 연주.
5.7.3 Op. 47 발라드 제 3번 A♭장조
아르투르 루빈스타인의 연주.
당 타이 선의 연주.
5.7.4 Op. 52 발라드 제 4번 f단조
소나타 형식을 차용한 악곡 구조를 가진다. 도입부 - 제 1주제(f단조의 애상적인 왈츠 풍 테마) - 제 2주제(Bb장조의 안정적인 교회 코랄풍 테마)로 제시부가 연주되고, 전개부를 경과한 뒤 재현부에서 두 주제가 몽환적인 왼손의 아르페지오와 함께 다시 연주되고, 감정의 최고조에 다다르다가, C장조의 짧고 안정적이면서도 긴장을 놓지 않는 경과부를 거쳐 광기 넘치는 코다로 마무리된다. 앞의 세 발라드와는 달리 미츠키에비치의 시를 참조하기 보다는 쇼팽 자신의 내면적인 모습을 묘사하여, 자전적인 성격을 띄고 있는 곡이기도 하다.
네 개의 발라드 중에서도 가장 난곡으로 뽑이는 곡임은 물론, 쇼팽의 모든 작곡 중에서 가장 어려운 곡 중 하나다. 고난도의 테크닉으로 장식된 후반부의 코다 때문인데, 앞부분의 우아한 느낌을 모두 망가뜨리는 듯한 화성의 붕괴가 매력적이다.
크리스티안 짐머만의 연주.
조르주 치프라의 연주. 정석적인 연주는 아니지만 개성적이고 강렬한 표현이 돋보인다.
5.8 소나타
- Op. 4 소나타 제 1번 C단조
- Op. 35 소나타 제 2번 B♭단조 "장례식 행진곡"
- Op. 58 소나타 제 3번 B단조
5.9 스케르초
- Op. 20 스케르초 제 1번 B단조
- Op. 31 스케르초 제 2번 B♭단조
- Op. 39 스케르초 제 3번 C#단조
- Op. 54 스케르초 제 4번 E장조
5.10 즉흥곡
- Op. 29 즉흥곡 제 1번 A♭장조
- Op. 36 즉흥곡 제 2번 F#장조
- Op. 51 즉흥곡 제 3번 G♭장조
- Op. 66 즉흥곡 제 4번 C#단조 <환상 즉흥곡>
5.11 피아노 협주곡
5.12 론도
- Op. 1 론도 C단조
- Op. 5 마주르카풍의 론도 F장조
- Op. 14 연주회용 론도 <크라코비아크>(피아노, 오케스트라) F장조
- Op. 16 론도 E♭장조
- Op. 73 론도 C장조
5.13 변주곡
- Op. 2 모차르트의 오페라 <돈 조반니>의 <라 치 다렘 라 마노>에 의한 변주곡(피아노, 오케스트라) B♭장조
- Op. 12 화려한 변주곡 B♭장조
- 벨리니의 오페라 <청교도>의 주제에 의한 헥사메론 변주곡 E장조
- Op. posth
- 로시니의 오페라 <라 체네렌톨라>의 <이젠 슬프지 않아요>에 의한 변주곡(플루트, 피아노) E장조
- 네 손을 위한 변주곡 D장조
- 두 대의 피아노를 위한 변주곡
- 독일 민요에 의한 변주곡 E장조
- 변주곡 <파가니니의 추억> A장조
5.14 에코세즈
- Op. 72-3 3개의 에코세즈
5.15 기타
- Op. 8 피아노 트리오(피아노, 바이올린, 첼로) G단조
- Op. 13 폴란드 민요에 의한 대환상곡(피아노, 오케스트라) A장조
- Op. 19 볼레로 C장조
- Op. 43 타란텔라 A♭장조
- Op. 46 연주회용 알레그로 A장조
- Op. 49 환상곡 F단조
- Op. 57 자장가 D♭장조
- Op. 60 뱃노래 F#장조
- Op. 65 첼로 소나타(피아노, 첼로) G단조
- Op. 72-2 장송 행진곡 C단조[24]
- Op. 74 17개의 폴란드 노래
- Op. 74-2 <봄> G단조
- 마이어베어의 오페라 <악마 로베르>의 주제에 의한 협주적 대2중주곡(피아노, 첼로)
- Op. posth
6 그 외
쇼팽을 기리기 위해, 1927년에 시작되어 1955년부터 5년에 한 번씩 열리는 쇼팽 국제 피아노 콩쿠르이란 대회도 있다. 이는 세계적으로 굉장히 권위있고 명망있는 대회로, 차이코프스키 콩쿨, 퀸 엘리자베스 콩쿨과 더불어 세계 3대 콩쿨이라 불리며 우승하면 온 세계에 이름을 알리게 되는 대회다[27] 아르헤리치, 폴리니, 부닌 등의 피아니스트가 이 대회에서 우승해 유명 피아니스트로 거듭났다. 우리 나라의 임동혁, 임동민 형제는 2005년 2위 없는 공동 3위를 차지하기도 했다. 그리고 2015년 조성진이 1위를 우리나라 최초로 차지했다!
쇼팽을 연습하는 사람들에게 조그마한 팁. 쇼팽이 생전에 사용하던 피아노는 플레옐 피아노로, 현재는 없어진 브랜드이다. 이 피아노의 특징은 페달을 밟았다가 떼었을 때에 어느 정도 그 효과가 유지된다는 것. 따라서 생전에 그가 의도했던 느낌을 살리기 위해서는 연주 시 페달링을 좀 더 길게 할 필요가 있다.
LOT 폴란드 항공의 허브공항인 바르샤바 오케시 공항의 별칭이 바르샤바 쇼팽 국제공항이다. 역시 쇼팽을 기리기 위하여 붙여졌다.
7 2차 창작물
7.1 트러스티 벨 ~쇼팽의 꿈~
7.2 Frederic: The resurrection of music
그의 고국(!) 폴란드에서 제작한 인디게임이다. 장르는 리듬게임. 비트콘 연결해서 하고 싶다 하지만 난이도가 투덱 4레벨 이하도 안된다는 것이 함정
스팀 appstore 구글플레이
1편. 9곡 + 히든곡(쇼팽 난이도로 스토리 모드 클리어) 1곡 + DLC 2곡(0.99$)로 있다.
역시 시대가 변해도 베스트 드레서 마침 상대도 베스트 드레서
2편인 Evil Strikes Back! 10곡이 전부.
마이클 잭슨, 레이디 가가 등의 현대 음악가들을 출연한 것과, 원곡의 작품명이 표기되지 않는 것과 후속작에 대한 떡밥이 없다....기보다는 딸랑 물음표 하나.
그런데 전작에 비해서 이스터 에그와 유머가 없고, 스토리도 흥미진진하지 않아서 재미가 영 떨어진다. 설상가상으로 쇼팽도 정이 떨어진다. 1편에서도 심장이 없어도 점잖게 행동하더니, 이제는 그것을 되찾기 위하여 수단을 가리지 않는 등 과도하게 너무 집착해댄다. 게다가 주변 사람들이 봉변을 당해도 "걔내들 자유의지니까."라며 신경쓰지 않는다. 여담으로, 음악으로 최면술을 부릴 수 있는 능력이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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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편에서는 쇼팽이 현대 시대에 누군가에 의해 부활되고, 세 명의 여신이 마차와 피아노를 주며 떠난다. 그는 세계를 떠돌아 다니며 쇼팽을 없애라는 명령을 받은 뮤지션들과 음악대결을 펼친 후에, 모든 음악가들의 저작권을 사재기하고 쇼팽을 없애라고 명령한 매스터마인드 X(보라색 망토)라는 사람과 결국 이겨 원상태로 되돌린다. 엔딩 후에는 누군가에게 습격을 받는데...
2편에서는 매스터마인드 X를 물리친 직후에서 이어지는데, 이번에는 그를 부활시킨 퍼펫 마스터가 갑자기 그의 심장을 도로 빼앗고 여신들까지 납치하고는 튄다. 심장이 없어져 성격이 건방지게 된 쇼팽은 다시 가 보지 않았던 세계를 떠돌아 다니며 쇼팽을 물리치려는 '인형'들과 음악대결을 펼친 후에, 퍼펫 마스터인 레이디 즈가가를 물리치고, 둘이 탔던 배가 사이보그 만악의 근원인 '그레이트 신디사이저'로 변하자 그것도 물리친다. 그러고 나서 쇼팽은 레이디 즈가가에게 사회봉사로 도시를 청소하는 벌을 준 다음에 여신들을 차에 태우고 간다.
7.3 피아노의 숲
이시키 마코토의 만화 피아노의 숲에 중후반부 메인 무대가 위에 언급한 쇼팽 국제 피아노 콩쿠르 이다.- ↑ 당시에는 사진 1장을 찍으려면 20분 이상을 꼼짝없이 기다려야 했기에 상당히 힘든 일이었다. 게다가 금액도 꽤 비쌌다.
- ↑ 덤으로 헝가리의 관문 부다페스트의 공항 이름은 리스트 국제공항이다.흠좀무.
- ↑ 쇼팽의 집도 당시 러시아군에게 작살나 사라진다. 전해지는 이야기론 러시아군은 그의 집에 남아있던 피아노도 도끼로 작살내 땔감으로 썼다고 한다. 이를 보고 쇼팽은 "하느님, 당신은 러시아인이십니까?"라고 말하며 분노했다고. 여담으로 술집에서 러시아인들이 "하느님의 최대 실수는 바로 폴란드인을 창조한거야"라는 말에 욕이 입술까지 올라왔다고 한다. 이런 러시아와 폴란드의 악연은 훗날 폴란드의 또 다른 위인인 마리 퀴리에까지 이어진다.
- ↑ 그는 가끔씩 버는것보다 더 못쓴다고 불평하기도 했으며, 버는 돈에 비해 낭비가 심하다는 말에 자신의 패션을 위해 쓰는 돈보다 버는 돈이 적은데 어떻게 많이 번다고 생각할 수 있겠냐며 불평하기도 했다 카더라.
- ↑ 쇼팽은 이미 폐결핵을 앓고 있던 중이었다.
- ↑ 마리아가 보내는 편지의 양이 줄어들고 점점 그의 어머니의 편지로 바뀌더니 위의 통보가 오게 되었다.
- ↑ 특이한 점으로 상드는 쇼팽의 친구인 프란츠 리스트와 사귀기도 했었는데, 상드를 쇼팽에게 소개해 준 사람이 바로 리스트 본인이었다(...).
- ↑ 그의 패션 또한 극단적으로 보수적이었다
- ↑ 그와 반대로 역시 뛰어난 피아니스트였던 리스트는 러시아의 황제 니콜라스 1세가 연주 도중 얘기를 하면서 제대로 듣지 않자 연주를 중단하고 일어나서 '니콜라스가 말하면 음악은 조용해져야 합니다.'라 말했다고(...)
패기 쩐다물론 쇼팽과 달리, 그는 사회적 명망도 쇼팽과는 비교도 될 수 없을 정도로 높았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쇼팽이 저랬으면 당장 불경죄로 투옥됐을 건 물론이고 아닌말로 그 자리에서 참수당했더라도(...) - ↑ 그가 사망하기 전에 했던 심한 설사를 고려해서 결핵이 장으로도 전이됐다고 하는 사람도 있다
- ↑ 이 흙은 그의 청년 시절에도 인연이 있었다. 그가 폴란드를 떠날때 사람들이 저 흙을 잊지 말라고 했었다.
- ↑ 리스트도 한때는 '대담하고 이상한 불협화음들 투성이'라고 그의 곡을 평가하기도 했다.
- ↑ 물론 고트샬크는 전성기 당시 실력이 굉장한 피아니스트이긴 했지만 그의 작곡은 몇 작품을 제외하곤 시대적인 매력은 있지만 소품 수준이거나 상당히 졸작들이 많은 편이라고 한다.
- ↑ 하지만 현대악파의 대명사인 브렌델이나 슈나벨 등이 집중적으로 연구했을 만큼 지금 세대에선 충분한 천재성이 담긴 작품들로 인정받기도 한다.
- ↑ 물론 모셀레스는 쇼팽이 연주하는 그의 곡을 듣고 다시 한 번 전적으로 그의 곡을 인정했다고 한다.
- ↑ 쇼팽은 몸이 약한 이유나 소심함 등 때문에 일생동안 공개연주회를 많이 하진 못했지만(30번 정도(...) 상대적으로 사람들이 적게 모이는 살롱에선 많이 연주했다고 한다. 참고로 이때의 연주회장이란 수용인원 2~3000명 정도 대비 살롱은 가장 큰 곳이 2~300명 정도라고 한다.
근데 예술의 전당 같은데가 아니면 요즘 연주회장 규모도 대부분이 큰 살롱 정도나 다를 게 없다는게 함정 - ↑ 쇼팽의 녹턴 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곡으로 들어보면 아~하는 곡이다. 드라마 가면에서도 나온 곡. 들리는 모습과는 다르게 연주하기 까다롭다.
- ↑ from '피아니스트 (The Pianist, 로만 폴란스키 作, 2002)' 멜론 - 피아니스트 OST
- ↑ 좀비 호러 액션 게임 다잉 라이트의 New Antalya Apartments라는 격리 구역에 이 곡이 연주되는데, 곡을 만든 사람이 폴란드 출신이고, 게임사가 폴란드 회사인 것을 생각해보면 게임사가 이 곡을 이스터 에그 형식으로 넣은 것임을 알 수 있다. #
- ↑ 홈플러스에 가면 한 번씩 들을 수 있는 곡이다.
- ↑ 영화 '말할 수 없는 비밀 (2008)'의 피아노 배틀씬에서 두 번째 대결곡으로 나온다.# 좀 더 오래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1990년에 MBC에서 방영된 최명길 주연의 고부 갈등을 소재로 한 드라마 '그 여자'에도 삽입되었다. 네이버 영화(모바일) - 그 여자 이 시기에 성년기를 보낸 사람이라면 이 곡을 듣고 본 드라마를 떠올릴지도?
이 시기에 국딩이었던 사람 중 일부도. - ↑ 영화 피아니스트의 엔딩 크레딧에서 나오는 곡이며 오케스트라 없이 독주로도 자주 연주된다.
- ↑ 후반부의 코다가 음악적 표현을 느끼기 힘들 정도로 지나치게 빠르다.
- ↑ 피아노 소나타 제 2번 3악장의 그 장송 행진곡과는 다른 곡이며 그쪽과는 달리 이쪽은 쇼팽의 사후에 유작으로 출판되었다.
- ↑ 가곡 <봄> G단조를 피아노곡으로 편곡한 곡이다.
- ↑ 벨리니의 오페라 <노르마> 중 "정결한 여신(Casta Diva)"을 피아노곡으로 편곡한 곡이다.
- ↑ 그러나 옛날 얘기라는 소리가 끊임없이 들린다. 확실히 짐머만,폴리니 등은 쇼팽 콩쿨 우승 이후로 이름이 알려지고 명망을 얻었지만 피아노에서 클래식이 대중들에게 차지하는 면적이 좁아지면서 콩쿨에 우승했어도 메스컴에 자주 노출되지 않으면 그대로 사장되는 경우도 있으며, 계약사가 계약을 연장해주지 않으면 쏟아져 나오는 다른 기라성들에게 의해 그대로 묻히기도 한다. 대표적인 예로 율리아나 이브디바나 잉골프 분더가 있다. 특히나 잉골프 분더는 2등상과 폴로네이즈 상까지 겸임하면서(블레하츠는 폴로네이즈 상, 콘체르토 상, 소나타 상까지 탔지만(...) 국제 콩쿨, 그것도 쇼팽 국제 콩쿨에서 수상에 다른 상까지 겸임한다는건 무지막지하게 힘든 일이다.) 매스컴이 '환생한 쇼팽'등으로까지
어떻게 보면 발린소리칭송했음에도 현재 소식이 제대로 들리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