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왕국 Royaume de France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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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기 | 국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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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4년 ~ 1830년 | ||
국가 | 프랑스 왕자들이 파리로 돌아오다[1] 왕가의 품만큼 좋은 곳은 없다네[2] | |
위치 | 오늘날의 프랑스 | |
수도 | 파리 | |
정치체제 | 입헌군주제 | |
국가원수 | 국왕 | |
언어 | 프랑스어 | |
종교 | 가톨릭 | |
주요사건 | 1814년 왕정복고 1815년 3월~7월 백일천하 1830년 왕조교체 | |
통화 | 프랑 | |
성립 이전 | 프랑스 제1제국 | |
멸망 이후 | 7월 왕정 |
1 개요
1814년 나폴레옹의 몰락 이후 나폴레옹이 엘바 섬으로 추방되자 프랑스 혁명 이후 추방된 부르봉 왕가가 복귀하여 세운 왕정.
2 역사
나폴레옹을 폐위시킨 대 프랑스 동맹국 측은 새로운 프랑스의 왕위에 누구를 올릴지 여부를 놓고 대립했다. 영국 측은 부르봉 왕가의 복귀를, 오스트리아 측은 자신들 황제의 외손자이자 나폴레옹의 적자였던 프랑수아 나폴레옹을, 러시아 측은 스웨덴의 국왕이었던 장 밥티스트 베르나도트를 각각 지지했으나, 나폴레옹의 외무장관이었던 탈레랑의 지지를 등에 업은 루이 16세의 동생 오를레앙 공작이 새로운 프랑스의 임금으로 결정되면서 루이 18세[3]로 즉위한다.
오랜 전쟁에 지쳐있던 민중들은 초기 루이 18세의 즉위를 환영하는 분위기였지만, 루이 18세가 반동적인 정책을 펼치려는 모습을 보이자 이러한 지지는 빠르게 식어버린다. 이 틈을 노려 나폴레옹이 1815년 3월 30일에 엘바 섬을 탈출하여 파리로 돌아와 잠시 권력을 잃었으나 워털루 전투의 패배로 나폴레옹을 다시 세인트헬레나 섬으로 유배되면서 7월 8일에 루이 18세가 복위되었다. 복위한 루이 18세는 신성불가침의 세습왕권을 인정하는 헌법을 공표하는 한편으로 해외에서 망명중이던 귀족들의 귀국을 허락하면서 모든 것을 혁명 이전으로 되돌리려고 시도하는 것 아니냐는 우려를 낳았지만, 입법부와 사법부의 존재 인정 및 법 앞에서의 평등 등을 인정하면서 민심을 수습하려는 시도도 보였다. 실제로 1815년 내각을 급진왕당파들이 장악하고 각종 백색테러를 자행하자, 온건 입헌군주세력을 입각시켜서 이들의 행동에 제동을 걸려는 시도를 보여주기도 했다.
그렇지만 이후 왕제인 아르투아 백작의 아들이자 왕위 계승 2순위였던 베리 공작 샤를 페르디낭이 파리에서 암살당하자 절대왕정으로 회귀하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왕당파를 내각에 적극 등용하면서 자유주의 세력과 공화파들을 무자비하게 때려잡기 시작한다. 이렇게 반동적인 움직임이 거센 가운데 1824년 9월 루이 18세는 세상을 떠나고 루이 18세의 남동생이었던 아르투아 백작이 샤를 10세로 즉위한다. 하지만 샤를 10세는 루이 18세보다 한 술 더 뜨는 왕권신수설자로 입헌주의를 철두철미하게 반대하면서 의회를 해산하고 표현의 자유를 억제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이미 프랑스 혁명 이후 근본적으로 뒤집어진 시대 정신을 거스를 수 없는 상황이었고, 1830년 7월 혁명이 일어나면서 샤를 10세는 퇴위[4]한다. 이후 루이 필리프 1세에게 정권이 넘어가 왕조가 교체[5]되었다.
3 사회 변화
모든 것을 프랑스 혁명 이전으로 돌리기로 결의한 빈 회의의 의결에 따라 왕정체제가 복구되었지만, 이미 십 여년에 걸쳐 혁명을 경험한 프랑스 사회는 근본적으로 변화되어있었다. 1793년 헌법을 통해 폐지된, 앙시앵 레짐의 핵심요소인 신분제도와 봉건적 특권은 왕조가 복구된 뒤에도 부활하지 못했다. 물론 구 귀족계층들이 루이 18세의 복귀 이후 프랑스로 귀국하기는 했지만, 그들의 특권과 재산을 되찾는데는 끝끝내 실패했다.[6] 그리고 이렇게 생긴 권력과 부의 공백을 대체한 세력이 바로 부르주아로, 이 부르주아 세력이 19세기 프랑스의 역사를 주도해나가기 시작한다. 한편 절대왕정 시기부터 이루어지기 시작한 중앙집권화는 혁명을 거치면서 부르봉 왕정 시기에 최종적으로 완성되는 단계에 이르렀다. 표준 프랑스어의 보급을 통한 언어적 통일, 징집 혹은 자원 입대한 민중들로 이루어진 국민 군대의 창설은 민족주의를 싹트게 하면서 역사상 최초로 현대적인 프랑스, 프랑스인이라는 개념이 탄생하게 된다.
4 정치 체제
헌법상으로는 왕의 권한은 신으로부터 부여받은 것이었지만[7] 프랑스 혁명을 경험한 루이 18세는 양원제와 언론의 자유를 폭넓게 실시해주었다. 이 당시 프랑스에서 활발히 움직였던 정치세력은 크게 세 갈래로 볼 수 있는데, 좌파는 공화정을 꿈꾸는 자유주의자(libéraux)가, 중도는 입헌군주정을 지지하는 헌법파(constitutionnels), 우파는 구체제로의 복귀를 계획하는 왕당파(royalistes)로 구성되었다. 그렇다고 왕의 권한이 약한 것도 아니어서 절대왕정 시기 만큼은 아니더라도 꽤나 막강한 힘을 발휘하는 편이었다. 입법권과 사법권은 왕의 영향력으로부터 독립적이었더라도, 행정권만큼은 철저히 왕의 손안에 놓여있었으며 상원 의원은 국왕이 임명하도록 되어있었다. 한편 하원의 경우는 투표를 통해서 선출되기는 했지만, 이 시기는 보통투표의 실시가 매우 급진적인 사상으로 여겨졌던 때였고, 세금 납세액을 기준으로 투표권이 주어졌다. 문제는 이렇게 납세액을 기준으로 투표권을 받은 인물들이 전체 성인 남성의 1% 가량(...)- ↑ 비공식
- ↑ 왕가
- ↑ 루이 17세는 루이 16세의 적자였던 루이 샤를을 추존하는 과정에서 루이 샤를에게 넘어갔다.
- ↑ 샤를 10세를 왕위에 유지하면서 입헌군주제로 체제를 전환시키려고 했지만, 샤를 10세 본인이 입헌군주제를 거부하고 스스로 왕위에서 내려왔다. 이 때 샤를 10세가 한 말이 "(입헌군주국가인) 영국에서 왕 노릇을 하느니 차라리 숲으로 들어가서 나무꾼 노릇을 하면서 먹고 살겠다." (...)
- ↑ 부르봉 왕가에서 오를레앙 왕가로 교체.
- ↑ 이거를 되찾아주려고 했던 게 샤를 10세이지만 혁명이라는 역풍을 제대로 맞고 퇴위 크리(...)
- ↑ 헌법 자체에서 재민주권의 원리가 부정되는 판국이었다... 다만 당시로서는 재민주권의 원리가 매우 급진적인 정치이념이기는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