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키/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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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 문서는 터키역사를 다룬다.

터키에서 역사는 기본적으로 두가지로 나뉜다. 땅의 역사와 사람의 역사가 그것으로, 학교에서 역사 교육을 할때에도 터키 역사는 이렇게 양분시켜서 가르친다. 땅의 역사는 인류 최초의 도시문화를 만든 차탈회윅(Çatalhöyük) 문화부터 시작해 히타이트 제국, 그리스, 로마 제국 등등 터키 영토를 거쳐간, 맨 마지막에 온 튀르크를 포함한 수많은 민족들의 역사를 말하며, 사람의 역사는 튀르크 민족의 역사를 말한다. 애초부터 땅의 역사와 사람의 역사가 나뉠 필요가 없는 대부분의 문화권에서는 이질적인 분류법이라고 할 수 있으며, 그나마 땅의 역사와 사람의 역사가 차이가 나는 문화권에서도 거의 전부가 사람의 역사"만"을 중시하는 것에 비하면 땅의 역사와 사람의 역사를 각각 별개로 인지하며 모두 중시하는 터키의 역사관은 매우 특이하다고 할 수 있겠다.

2 아나톨리아 반도의 역사

아나톨리아의 역사 - 상고대 / 고대 / 중세 / 근현대
ANADOLU TARİHİ
Η ΙΣΤΟΡΊΑ ΤΟΥ ΑΝΑΤΌΛΙΑ
상고대고대
미탄니 제국히타이트신 히타이트아시리아메디아아케메네스조
페르시아
헬레니즘
제국
헬레니즘
국가

(안티고노스, 리시마코스, 셀레우코스,
프톨레마이오스, 아탈로스,
비티니아, 갈라티아,
폰토스, 카파도키아,
파플라고니아 등등)
로마 제국
프리지아리디아
히타이트[[리디아|리디아, 리키아, 카리아, ]]
미케네
문명
그리스 (이오니아 / 도리아 / 에올리아)
아나톨리아의 역사 - 상고대 / 고대 / 중세 / 근현대
ANADOLU TARİHİ
Η ΙΣΤΟΡΊΑ ΤΟΥ ΑΝΑΤΌΛΙΑ
중세근현대





비잔티움
제국
트레비존드 제국



영국 - 이태리 - 그리스터키
공화국
라틴 제국비잔티움
제국
비잔티움







오스만
제국
니케아 제국오스만
셀주크 제국룸 술탄국몽골 제국일 칸국투르크멘
공국들
투르크멘
공국들
앙카라 정부
일 칸국아르메니아
소 아르메니아맘루크공국들프랑스

3 터키 민족의 역사

터키 민족의 역사
TÜRKLERİN TARİHİ
유목정주근현대
알타이 산유라시아 스텝오우즈 스텝이란아나톨리아
흉노돌궐 제국서돌궐 제국강거 연맹오우즈 야구브 국셀주크 제국룸 술탄국오스만 제국터키

"튀르크족"과 "터키인"의 개념은 다르다. 터키가 Turk라는 튀르크족에게 보편적으로 적용되어야 할 표현을 선점해버렸기에 오해하기 쉽다. 그러나 터키인튀르크족의 일부일 뿐이다. 특히 혈통적으로는 터키인은 본래 아나톨리아 반도에 살던 민족들의 영향이 압도적으로 크고 중앙아시아에서 유래한 튀르크족 원형의 혈통이 상대적으로 옅기 때문에 어떤 면에선 이들은 튀르크족들 사이에서 방계에 가깝다고도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이들이 민족적 정체성을 과거 아나톨리아 반도에 거주했던 고대 민족들에게서 찾기 보다는 중앙아시아에서 유래한 튀르크족에게서 찾으므로 터키 민족의 역사를 튀르크족에 초점을 둬 기술한다. 이러한 터키인개념은 터키어를 말하면 터키인이라는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의 말에서 드러나듯이 혈통적이기보다는 문화적/언어적인 것에 가깝다.

터키인들은 자신들의 뿌리를 돌궐[1]에서 찾는다. 흉노를 두고도 말이 많지만 튀르크계가 주도한 국가라기보다는 구성원으로 참여한 정도로 이해된다. 많은 튀르크 제족들 중에서도 오우즈 스텝(이 표현은 민족명에서 유래했다)에 정착한 오우즈족이 현대 터키 민족의 뿌리가 되었으며, 현 터키어가 오우즈 어파로 분류되는 것도 오우즈족의 영향이다. 이들은 오우즈 야구브 국을 세웠으며 이들 중 일부가 남하하여 셀주크 제국을 세운다. 셀주크 제국의 치하에서 아나톨리아 지방에 튀르크인들이 정착하게 되고 이들이 룸 술탄국을 세우면서 아나톨리아 지방에 튀르크족의 영향력이 커진다. 이들 중 오스만 족이 성장해 비잔틴 제국을 무너트리고 오스만 제국을 세우면서 터키어와 터키 문화의 영향력이 아나톨리아 반도에 확대된다. 잘 나가던 오스만 제국이었지만 근현대에 1차 세계대전에서 오스만 제국이 패하면서 서구 열강에 의해 오스만 제국이 갈가리 찢어질 위기에 놓인다. 이때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터키를 서구 열강에게서 구하고 터키어를 쓰면 터키인이라는 개념을 기반으로 민족주의 바람을 일으켜 현재 터키인의 터키 민족 개념이 잡히게 된다.

아나톨리아 반도로 이동한 오우즈족 외에 다른 오우즈족들은 현지에 남아 투르크메니스탄 성립에 기여하거나 혹은 일부는 북서쪽으로 빙 돌아 발칸반도에 정착해 가가우즈족이 되기도 하였다. 이란으로 흘러온 오우즈족들 중에서 이란 북서부에 정착한 이들은 아제르바이잔의 성립에 기여하게 된다.

현재 터키 교과서에선 559년 중국을 이긴 돌궐을 실질적인 자기들 조상들 역사로 배우며 1959년에 건국 1400주년 기념행사를 했다. 그리고 몽골에 있는 톤유크 장군 비석을 연구하는 등의 조상들 역사로 연구에 노력하고 있다. 터키역사에서는 터키 땅의 역사와 터키 민족의 역사를 따로 구분해서 보며, 마찬가지로 오늘날 아나톨리아에 위치한 옛 문명들 - 히타이트, 트로이(윌루사), 프리기아, 그리스, 로마 등등 - 또한 자신들의 문화적 뿌리이며 흔적이라고 받아들이고 있다.[2]

4 셀주크 튀르크 제국

탈라스 전투를 통해 중앙아시아에서 압바스 왕조의 패권이 관철되자 중앙아시아의 튀르크족들은 점차 이슬람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9~10세기 이후에는 튀르크족들이 노예 용병(맘루크)으로써 이슬람 세계에 대거 침투하였고, 이후 압바스 왕조가 약해지자 군사력을 장악하여 아예 자기네 나라들을 세웠는데 결국은 11세기의 셀주크 제국으로 통일되었다.

하지만 셀주크 제국의 통합은 오래가지 못했고 산산이 분열되는데 개중 하나가 현재 터키 지방에 자리잡은 룸 셀주크 왕조, 혹은 룸 술탄국이다. 룸 술탄국은 마침 쳐들어왔던 십자군, 동로마 제국과 아웅다웅하며 그럭저럭 살다가 13세기에 전세계를 씹어먹는 몽골군에게 박살나고 이후 일칸국의 속국이 되었다.

5 오스만 튀르크 제국

그리고 1299년 룸 술탄국의 잔해에서 오스만 1세오스만 제국을 개국한다. 아나톨리아 지방의 수많은 튀르크계 군소 군벌 중 하나였던 오스만 왕조의 초기 역사는 주변 소국들, 그리고 동로마 제국과의 끝없는 싸움으로 점철되어 있다. 제4대 술탄인 바예지드 1세가 헝가리를 중심으로 뭉친 십자군을 니코폴리스에서 발라버리고 발칸반도를 유린하던 도중에 티무르 제국에게 뒷통수를 맛깔나게 털려서 술탄 바예지드 1세는 포로가 되고 나라가 거덜날 뻔한 위기도 있었으나 메흐메트 1세의 노력으로 다시 일어서 당대 유럽을 공포에 떨게 만든 대제국이 되었다.

1520년부터 1566년까지 쉴레이만 대제의 시기 동안이 최전성기. 이 시기에 오스만 제국은 헝가리 왕국 전체를 점령하고 북아프리카와 이집트, 시리아, 이라크, 이란 서부, 흑해 일대를 통치하는 대제국이었다. 포르투갈의 위협에 시달리던 동부 아프리카, 심지어 동남아인도네시아 군소 술탄들의 요청으로 함대까지 띄우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근대에는 나라가 기울어 오스트리아러시아 제국에게 털리고 이집트나 시리아 등지가 반 독립국이 되는 등 빈사상태에 있다가 제1차 세계대전독일과 함께 참전했다 패배한 것을 계기로 완전히 붕괴되었다. 1차대전 이후의 항복협상에서 아랍지역의 영토는 모두 강대국이 뜯어가고[3], 이스탄불 주위 일대를 제외한 아나톨리아(소아시아) 지역도 연합국에 의해 분할될 위기(즉, 콘스탄티누스 11세 시대의 동로마 제국 수준이 되는 것)에 놓였으며, 1920년에는 한층 더 앙숙인 그리스의 침공까지 받게 되었다.

또한 이 오스만 제국 시대의 말기는 터키인들에게 다른 면에 있어서 흑역사였는데, 바로 아르메니아인들과 아시리아인들, 그리고 자국내 그리스인들에 대한 대학살이 그것. 쿠르드인을 제외하면 단일민족 국가와 다름없는 현대 터키와는 달리[4] 당시의 터키는 수많은 소수민족들이 살았는데, 상당수가 민족주의의 시대에 정리되었다.

좀 더 설명하자면, 오스만 제국 시기에는 밀레트(Millet)라는 종교에 바탕한 공동체들이 각자의 대표를 뽑고, 그 대표가 술탄에게 세금을 바치고 공동체 내의 행정, 사법업무를 담당하는 식으로 통치가 이루어졌다. 예를 들면 오늘날의 그리스인과 루마니아인, 불가리아인 등등은 동방 정교회 밀레트에 속했고, 유대인은 유대교 밀레트에 속했고 그 안에서 자치가 이루어졌다. 하지만 이러한 통치는 1821년 그리스에서 독립전쟁이 시작되면서 깨지기 시작했다. 민족주의 의식을 각성한 소수민족들은 독립을 원했고, 당연히 오스만 제국은 이들을 탄압했다. 하지만 서구열강들에 힘입어 이들 소수민족들은 하나하나 독립해 민족국가를 세우기 시작했고, 한편 아르메니아인들도 1880년대에 들어 이러한 움직임에 동참하기 시작했다.

아르메니아인들은 그리스가 독립할 무렵에도 충직한 오스만 제국의 구성원으로 남았기 때문에 '충성스러운 밀레트' (Millet-i sadıka)라는 별칭까지 받으면서 정부의 요직들을 독점했지만, 오스만 제국과 번번이 대립하던 러시아 제국에서 아르메니아 독립운동가들을 선동해 반란을 일으키게 하자 오스만 제국 입장에서도 더이상은 좌지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게 되었다. 이렇게해서 아르메니아인들은 두번에 걸친 학살을 겪는데, 1894년과 1915년이 그것이다. 자세한 건 아르메니아 학살 참고.

아르메니아 문제의 시작은 1차 세계대전발발 당시, 아르메니아인들 가운데서 독립적인 성향을 가진 민족주의 과격단체들이 러시아의 지원을 받아 반,시바스에서 터키인 5000여명을 학살한데서 비롯되었다. 당연히 오스만 제국은 분노했고, 이들 과격단체들을 색출함과 동시에 이들과 협조가능성이 있는 아르메니아인들을 저 멀리 히자즈(지금의 이스라엘, 요르단, 시나이반도 일대)에 강제이주시켜 이들과 분리하는 계획을 세웠다. 이러한 강제이주정책은 과거 알바니아에서도 그러했고, 오스만 제국사에서 선례가 있는 정책이었다. 하지만 당시의 오스만 제국의 상황에서는 200여만에 달하는 아르메니아인들을 모조리 강제이주시킬 여력도 능력도 없었고, 결과적으로 이스탄불에 거주해서 통제가 용이한 아르메니아인들과 무슬림 아르메니아인들은 이러한 이주에서 제외되었다. 다수의 아르메니아인들은 강제이주령에 순응했고, 그들은 멀리 이주를 시작했다.

하지만 거기서부터가 지옥의 시작이었으니...오스만 제국의 재정상태로는 수백만에 달하는 아르메니아인들을 먹일수도, 기차를 태워 보낼 수도 없었다. 게다가 당시 히자즈 지방조차도 영국의 지원을 받은 아랍 반군들로 인해 전쟁터가 된 상황이었다. 결국 오스만 제국이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강제이주에 동참한 아르메니아인들은 상당수가 기아로 굶어죽거나,질병으로 죽어가거나, 겨울철에 얼어죽거나, 혹은 도적들에 습격당해 사망했고 심지어 같은 아르메니아인들도 분열하여 서로 죽이기 시작했고 덩달아 학살당하던 쿠르드족이나 시리아인들까지 가세하여(이게 아르메니아놈 탓이라고 분노) 서로 싸우며 죽어간 것도 제법 된다.

그리스터키 독립전쟁 당시 서로 정식으로 치고박고 학살도 했기 때문에 억울한 소리를 할 수가 없는 처지지만, 약소 피지배민족인 아르메니아인들과 시리아인들에게는 유태인들의 제노사이드보다도 더 뼈아픈 기억이다. 아니, 사실 이 학살이야말로 제노사이드라는 현대적인 개념을 정립한 어마어마한 일이었다. 아르메니아 주장으론 1915년 한해에 아르메니아인들만 무려 150만~200만명이 학살당한것으로 주장하되는데, 이는 당시 전세계 아르메니아인 인구의 절반이자 터키 인구의 10%나 되는 수치였다! 이 일로 터키내 상당한 세를 유지하고 있던 기독교 인구는 싹 쓸려나가 오늘날의 절대다수 이슬람국가 터키가 탄생하게 되었다. 한편 이스탄불의 아르메니아인들은 오늘날까지 그들만의 공동체를 이루며 살아가고 있고, 터키 독립전쟁이후 그리스로 쫓겨난 그리스인들과 달리 이들은 인구교환의 영향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 아이러니하게도 오늘날 터키에서 가장 큰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다름아닌 아르메니아 사도 교회이다.

아르메니아 문제는 1차 세계대전 이후 독립한 아르메니아가 소비에트에 합병되고, 스탈린 시절에 수많은 아르메니아 민족주의자들이 숙청되면서 쉬쉬하다가 냉전붕괴 이후로 수면에 드러나지 시작했다. 하지만 터키정부와 사회 전반의 인식은 일단 대학살은 우리의 잘못만이 아님이라 빠른 시일내에 빈말의 사과조차 받기는 힘들듯하다. 동아시아의 모국가가 떠오르는 반응[5]

참 비극인 것은 이 당시 이슬람교도인 쿠르드족들도 터키인들에 가세해 많은 사람들을 죽였지만 반대로 학살당한 피해자이기도 하다. 무수한 부족으로 나뉘어져 서로 싸우며 죽어갔고 쿠르드족들이 아라라트산 근처에 세운 아라라트 공화국을 뭉갤때도 같은 쿠르드족 군인들이 싸웠었다. 그리고 터키 공화국이 건립된 이후로는 터키정부의 강력한 튀르크화 정책으로 자기네들이 2등시민으로 간주되었다. 이들에 대한 푸대접은 밑으로 가서 더 보자.

6 아타튀르크와 근대 터키 공화국

1차대전의 전쟁영웅 무스타파 케말 장군이 아나톨리아앙카라에서 협상불복을 선언하고, 이스탄불의 술탄 정부를 반역자로 규정. 의회를 소집하고 군대를 모아 그리스군을 아나톨리아에서 몰아내고 현재의 터키 영토를 확보하여 재협상을 했다. 소위 터키 독립전쟁의 시작이다. 사실 터키의 국력은 연합군에 비하면 상대가 안되는데[6] 1차대전 직후의 피로로 더 이상 전쟁을 끄는 것을 싫어하게 된 연합국은 이것을 승인.[7] 터키 또한 피해가 엄청나서 빼앗긴 해외 영토들을 되찾을수 없어 본토 보존에만 만족하며 해외 영토들의 독립을 승인하고 말았다. 이리하여 1922년 터키공화국 건국선언 이후부터 현재에 이르고 있다. 무스타파 케말은 터키어의 로마문자화, 강력한 세속주의 정책을 펼치며 현대 터키 공화국의 정체성을 확립하는데 큰 영향을 끼쳤다. 다만 철권의 독재자였다는 사실은 부인할수가 없고, 거기다가 그 이후 군부가 케말의 후계자를 자칭하며 민간정권에 수도 없이 개입하였기 때문에 그 업적이 약간 바래는것은 어쩔수 없는 사실.

참고로 1990년대 중순까지만 해도, 우리나라 교과서 세계사에선 아타튀르크가 아니라 케말 파샤(케말 장군)라는 이름으로 건국자로 소개하였고, 2000년대 초반, 어느 여행 책자에선 터키를 가리켜 아타, 튀르크, 케말이라는 3국이 통일된 것이라는 주장을 피며 '삼국시대' 헛소리를 하기도 했다. 조선이, 성, 계라는 세 나라가 합쳐서 건국됐다고 해보시지 그것도 대한항공 기내지였는데 당연히 한국어를 할줄 아는 터키인들의 비난 속에 고쳤다.

하지만 오스만 제국의 해체로 인해 터키와 이슬람권이 강대국으로서의 위상을 잃고 만다. 그러다보니 터키인들은 이에 대한 열등감이 심해져 반서방 감정을 가지게 되는 계기가 된다.[8] 제2차 세계대전 때는 1차대전에서 독일과 손잡았다가 변변치 않은 결과를 초래했던 경험을 살려 중립국으로 지내다가 소련의 압력으로 1945년 독일에 형식적인 선전포고를 했다. 그 전에 나치가 1차대전 당시 동맹국이라는 점을 내세우며 터키로 나치 고위간부들이 방문하면서까지 터키 정부에 참전을 권유했으나 끝끝내 거부했다. 이 덕분에 이스메트 이뇌뉘 당시 터키 대통령의 이런 중립행보는 나중에 훌륭한 업적이라는 찬사까지 듣었다. 나치와 손잡고 싸웠더라면 터키 역사는 아주 비극이 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특히 미국이 주축인 연합군한테 개발살날것을 분명하고 1차대전과 달리 나라가 진짜로 분할될수 있는데다 공산화 크리에 이슬람 내전 크리가 줄줄이...

또 오스만 제국의 아르메니아인 학살, 쿠르드족 학살, 정교인 아시리아인 학살 등으로 국제여론에게 비판을 받은 경험이 있다. 세계 최초로 다국적군에 의한 치안유지가 실시되는 등 국제정치에 있어서 많은 선구자적 면모를 가진 국가이다. 안좋은 쪽으로. 쉬운말로 한국이 맞는 쪽이었다면 터키는 때리는 쪽에 가까웠다.

70년대 칠레, 아르헨티나, 남북한과 함께 인권탄압국으로 자주 이름이 올랐고 엠네스티 보고서를 본다면 70년대 남한이나 지금의 북한은 인권천국 수준이다.[9] 우습게도 이를 다루던 영화로 70년대에 작품성을 인정받았었던 미드나잇 익스프레스는 최근에는 제작진과 원작자도 사죄하는 터키 왜곡 차별영화가 되었다. 차라리 이 시절 터키의 적나라한 인권탄압을 참고하자면 터키에서 만든 스위스 영화(욜 항목 참고)을 보면 꽤 느낌이 올 것이다.

이 당시 터키의 인권탄압이라면 쿠르드인들에 대한 탄압도 유명한데, 현재 1500만명(추정)에 육박하는 쿠르드계 인구에 대해 터키정부의 공식적인 입장은 90년대까지 '그딴거 없다. 얘네들은 그냥 산지에 사는 터키인들일 뿐이야'였다. 쿠르드 문화에 대한 박해는 2000년대 이슬람주의 정권이 들어서기 이전에는 쿠르드어 사용 자체가 법적으로 금지되는등, 굉장한 무리수를 많이 두었었다. 하지만 이슬람주의 정권 수립후 쿠르드 문화에 대한 규제가 많이 풀려서 오늘날에는 이 앙금이 점점 풀리는 과정이기는 하다. 그러나 에르도안 대통령의 독재로 터키의 인권은 과거처럼 심하게 탄압받고 있다.

2000년대에 들어서며 급속도로 성장해 각광을 받는 나라이다. 탈이슬람으로 터키를 현대화 시키려했던 아타튀르크의 바람과는 달리, 이슬람주의당인 정의개발당(Adalet ve Kalkınma Partisi)과 그 당수인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Recep Tayyip Erdoğan)의 지도하에 있다. 그러나 에르도안 체제는 터키 정치계의 양날의 검이었던 군부 내 쿠데타 세력을 박살낸 이후 점점 이슬람주의 독재 체제로 나아가고 있고, 때문에 2013년부터 적잖은 저항을 받고 있다.

미래가 어쨌든 일단 에르도안의 지도하에 잠재되어 있던 포텐셜을 살려 상당한 경제/군사대국, 지역강국, 그리고 이슬람 국가들의 롤모델로 성장한 터키는 G20의 회원국으로 포함되었다. 예전까지는 EU 가입을 시도했지만, 이제는 좀 자랐다고 미련이 없는듯. 솔직히 터키 입장에선 EU가 그리스 경제위기를 비롯해 한창 망해가고 있는거 다 보이는 판에 발담그는건 손해다. 또한 EU에 가입하지 않은 상태에서도 유럽연합 회원국과 무관세 무역을 하고 있고 단물은 이미 다 빨아먹고있는 터에 완전가입까지 해야할 이유가 없기도 하고, 현 정부의 이슬람성향 때문에 EU에 발담그기를 회피한다는 분석도 있다. EU의 주요국 국민들도 종교적 차이와 경제적 문제 때문에 약간 꺼려하는 분위기이고.

2016년 터키 쿠데타로 그간 억눌리던 군부가 에르도안에게 저항을 시도했으나 오히려 제압당하고 에르도안의 독재가 강해지고 있다. 하지만 제압당했다 해도 터키에서 군부의 지위가 워낙 강하다보니 군부는 기회만 있으면 다시 쿠데타를 일으키려고 할것이니 터키의 정치는 굉장히 불안하다. 특히 억눌려살던 쿠르드인들도 폭발하여 반란을 일으키고 IS같은 이슬람 무장단체들이 게릴라전과 테러를 일삼아대어 터키는 내전과 테러로 갈수록 불안해지고 있다.
  1. 돌궐(突厥)은 몽골-> 몽고와 마찬가지로 튀르크의 한자식 음역이다. 당시 세워진 명문비석엔 '괵튀르크'라는 표현으로 등장하며 현대 터키에서는 돌궐을 괵튀르크 제국이라고 부른다. 이후 돌궐 제국은 중국과 대립하다 결국 당나라에 의해 멸망한다.
  2. 사실 현대 터키인들이 모두 동방에서 넘어온 튀르크인일 리는 없고 기원전 부터 아나톨리아 반도에 살던 민족들의 후손들 역시 튀르크인들과 섞여 현대 터키인의 근간을 이루고 있기 때문에 어찌 보면 당연한 소리이기도 하다.
  3. 러시아이란 북부, 영국은 이란 남부와 이라크, 요르단, 아리비아 반도를 점령하고 이집트를 보호령으로 삼았으며, 프랑스는 시리아, 레바논위임통치했다. 이 당시 영국이 오스만 제국의 후방을 교란시키기 위하여 아랍인과 유태인 모두에게 차후 독립국가 건설을 보장하는 이중플레이를 했다. 이것이 지금의 팔레스타인-이스라엘 분쟁의 시작이다. 이런 와중에도 프랑스와는 전후 아랍영토 분할 밀약을 맺었다. 즉 처음부터 아랍 & 유태 독립국가 보장은 뻥이었던 것. 결국 아라비아반도와 이라크, 요르단 일대에 아랍족장들의 소국이 생겨나서 지들끼리 아웅다웅하지만 어차피 영국의 반식민지들이었다. 지금의 아랍왕정들은 다 이때부터 출발한 것.
  4. 현대에도 정부가 공식적으로 통계를 내지 않을뿐이지, 터키에 거주하는 소수민족의 종은 70여에 달한다. 그중 메이저급만 언급하더라도 쿠르드, 그리스인, 유대인, 아르메니아인, 아제리인, 튀르크멘인, 보스니아인 등등
  5. 정확히 말해서는 "조사를 철저히해서 우리의 잘못으로 드러난거에 대해서는 인정하고 사과할수있다. 단 같은 아르메니아인들끼리 싸우다 죽은거나 쿠르드족의 아르메니아인 학살사례도 알려진게 꽤나 많으니까 일일히 다 따져보자" 라는게 현 터키정부의 입장이다.
  6. 지금도 터키와 서구의 국력 차는 넘사벽이다.
  7. 그것도 초강대국 미국이 터키 문제는 우리랑 상관없다며 끼어들지 않았다.
  8. 지금도 터키는 서방에 대한 감정이 나쁘다.
  9. 박종철 사건고문 고발 르포를 취재하면서 터키의 고문 실태에 대해서 신동아 잡지에서 고발한 게 있는데 건전한 청년들은 열람을 피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