맘루크 왕조

  • 본 항목은 이집트의 맘루크 왕조를 다루고 있다. 인도에서 성립된 맘루크 왕조와 혼동하지 말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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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성립

맘루크아이유브 왕조의 군사력의 핵심이었다. 1240년 당시 군주였던 쌀리흐 아이유브가 흔들리는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 맘루크의 권한을 강화시켜 사병으로 썼다. 게다가 1249년 루이 9세의 십자군을 성공적으로 격퇴하면서 맘루크의 정치적 권한은 매우 강력했다.

쌀리흐 아이유브가 사망하고, 후계자로 그의 아들인 무하잠 투란샤가 지명되었으나, 1250년 바흐리(Bahri) 맘루크들은 무하잠을 암살한다. 그러나 몽골군이 서아시아를 침략하자, 아이유브왕가의 라이벌이었던 쿠투즈 가문은 몽골에 대한 저항을 천명하며 세력을 규합한다. 맘루크들은 일단 아이유브 왕가의 편을 들었다.

한창 세계정복 중이던 몽골 제국서아시아를 제패한 뒤 이집트를 정복하기 위해 쳐들어왔지만 아인 잘루트 전투에서 몽골군을 패퇴시키고 결국 몽골군이 물러가자 바흐리 맘루크들은 아이유브 왕가를 부정하고 맘루크의 대장격인 바이바르스는 술탄을 칭하였다.

2 왕가 교체

1250년 왕조 수립부터 맘루크 왕조는 투르크계인 바흐리 맘루크에 의해 통치되고 있었다. 그러나 1377년 시리아에서 체르케스계 맘루크들이 대대적인 반란을 일으켰고, 1382년 이들의 대장격인 알 말리크 바르쿠크가 술탄을 칭하면서 바흐리 왕조는 문을 닫았다.바르쿠크 이후의 왕조를 부르지(Burji)왕조라고 칭한다.

부르지 왕조는 티무르 제국에 대해 적대적인 입장을 취하고, 오스만 제국과는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 1453년 오스만 제국이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했을 때는 이들의 관계가 최고조에 달했으나, 그 후에 카라만 공국의 문제[1] 인해 사이가 틀어지게 된다.

한편 왕조 말기에는 포르투갈이 아프리카 최남단을 돌아 인도로 가는 길을 열면서 홍해의 제해권 통제가 어려워졌다. 평소 사이가 좋았던 베네치아공화국으로부터 간접적인 지원을 받아 포르투갈의 홍해 봉쇄를 막으려고 하였으나, 참패하여 아덴이라는 항구를 지켜낸 것을 제외하면 인도양에서의 제해권을 제약받았고 포르투갈은 맘루크의 상선을 견제하여 맘루크가 중개하는 향신료 무역이 큰 타격을 받았다.

16세기 들어서 페르시아에 들어선 신생정부인 사파비 왕조와 함께 연합하여 오스만 제국을 견제하려 했고, 결국 1514년 오스만 제국의 술탄인 셀림 1세는 맘루크 왕조의 보호국이였던 둘카디르를 공격하면서 전쟁이 터진다.

3 멸망과 부흥운동

맘루크 왕조의 기병은 오스만 제국의 포병과 예니체리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술탄이 전투에서 패배해 전사하는 치욕까지 겪었다. 1517년 맘루크 왕조는 오스만 제국에게 정복당했으나, 오스만 제국은 맘루크들로 하여금 이집트를 계속 지배하게 했다. 이로써 이집트는 오스만의 평범한 한 속주가 되는듯 하였으나...

그로부터 200년이 넘게 지난 1768년, 알리 베이 알-카비르(علي باي الكبير)는 독립을 선포하고 술탄을 칭했다. 그는 오스만 제국의 관리들을 추방하고 오스만 제국의 술탄이 새겨진 동전들을 없애려 했다.

1770년 알-카비르의 군대는 히자즈와 시리아 지방을 탈환해 이전 맘루크 왕조의 강역을 대부분 회복하는데 성공했다. 대규모 병력을 이집트에 파견할 여유가 없었던 오스만 제국은 이간책을 쓴다. 알-카비르는 티그리스 지방의 민족주의자인 다헤르 알-오마르와 연합전선을 구축하고 있었는데, 이들과의 사이가 금이 가 결국은 알-카비르가 1772년 살해당한다[2].

오스만 제국의 계속된 공세와, 나폴레옹군이 이집트를 공격하기 시작하면서 맘루크들은 급격히 약화되었다. 1800년쯤 되면 카이로 근방의 한줌밖에 안되는 영토를 제외한 모든 강역을 잃게 된다.

그러나 이들의 투쟁은 멈추지 않았다. 그들은 포기하지 않고 계속 싸웠다.혼란한 국내 정세와 오스만 제국의 가혹한 통치로 인해 1805년 대규모 민중봉기가 일어났지만, 맘루크는 내부 분열로 정권을 되찾을 수 있는 마지막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당시 이집트 총독으로 부임한 무하마드 알리의 중재로 이집트는 반독립국가가 되었으나, 맘루크들은 권력을 잡지 못하고 1811년 무하마드 알리에 의해 숙청당했다. 소수의 맘루크들이 세나 술탄국[3]으로 흘러들어가 정권을 탈취하고 복수할 기회를 호시탐탐 엿보다가 1820년 이집트를 공격하나 역공당해 이제는 맘루크의 씨가 마른다. 이로서 맘루크 왕조는 아예 역사속으로 사라지게 된다.
  1. 아나톨리아 반도 동남부에 위치했던 투르크계 공국. 본래 아나톨리아 반도의 여러 투르크계 국가들 가운데 가장 강력한 세력을 자랑했으나, 오스만이 뜨면서 망했어요가 된다. 이후 오스만이 유럽으로 세력을 확장해나가는 동안에도 발목을 잡으려 했으나 오스만군이 마음먹고 쳐들어올 때마다 수도까지 밀리기가 일쑤였고, 15세기가 되면 맘루크 왕조에게 붙어서 오스만을 견제하는 처지가 된다.
  2. 여담으로 시리아에서는 1520년에 셀림이 죽자마자 반란이 일어났다. 본래 맘루크 왕조의 신하로 오스만에 항복하여 카이로 정복에 공을 세운 대가로 시리아 총독에 임명되었던 잔비르디 알 가잘리라는 인물이, 오스만 제국의 지방관과 병사들을 숙청하고 주민들이 오스만 제국식의 의복을 입는 것도 금지하는 등 저항한 것. 하지만 당연히 반란에 협력해줄 것으로 기대했던 이집트가 아무런 동요도 일으키지 않았던데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셀림의 뒤를 이은 황제먼치킨이었기 때문에, 곧바로 진압됐다.
  3. 수단 북부에 존재하고 있었던 부족 연맹 국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