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닐라 대학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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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어 : マニラ大虐殺
영어 : The Manila massacre

1 소개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군이 저지른 민간인 학살 사건이다. 난징 대학살 사건에 가려져 세상에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마닐라 대학살 역시 수많은 민간인이 죽은 끔찍한 사건이다. 단, 가장 많은 피해자를 낸 사건은 아니고,[1] 기무라 헤이타로라는 인간 쓰레기가 저지른 미얀마 대학살에서는 무려 수백만 명의 피해자가 나오기도 했다.

2 필리핀의 저항

미국은 자국의 식민지였던 필리핀에 대해, 필리핀의 독립법을 성립하여 앞으로 독립을 시켜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리하여 1935년 11월에 독립준비정부가 발족하여 마누엘 케손이 대통령으로 취임했지만, 그 후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자 일본군남방작전을 개시했고, 1941년 12월 필리핀에 주둔한 미군을 몰아내고 마닐라가 있는 본섬을 점령했다. 결국 1942년에 일본군이 필리핀을 침공하고 마닐라가 일본군에 의해 점령되자 필리핀 대통령 마뉴엘 케손은 미국으로 망명했다.

이에 필리핀 국민의 대다수가 더글러스 맥아더가 이끄는 미군과 함께 일본군에 저항했다. 필리핀인들은 미국 극동의 육군의 지휘하에 대부분 따라서 싸웠지만, 현지의 게릴라 조직도 다수 존재하여 일본군을 괴롭혔다. 그러다가 태평양 전쟁 말기인 1945년 1월에 마닐라가 있는 루손 섬에 연합군이 상륙하여 2월 3일에 미군 제1기병사단과 제37사단이 마닐라로 돌입했다. 일본육군 제14방면군 사령관이던 야마시타 도모유키 대장은 마닐라의 무방비 도시를 선언하는 방침을 세웠지만 제14 방면군과 함께 현지부대였던 해군의 제31 특별근거지대 사령관인 이와부치 산지(岩淵三次)소장과 대본영은 마닐라의 폐기에 반대하여 마닐라 사수를 고집했기에 마닐라 해군방위대를 중심으로 하는 이와부치 소장 지휘하의 육해군 혼성부대가 마닐라에 남겨져 미군과 3주 이상 격렬한 시가전을 벌였다.

여기까지야 군인의 임무 수행이니 문제가 될 건 없었다.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3 미군의 철수, 그리고 대학살

당시 마닐라 시내에는 약 70만명의 시민이 남아있었는데, 이들 대다수가 미군에 협조적이어서 미군에 입대해서 싸우거나 직접 게릴라로서 일본군과 전투를 벌이기도 했다. 3월 3일에 전투종결이 선언되었지만 그때까지 마닐라 시민의 희생자는 약 10만명을 웃도는 수준이였다.

마닐라 대학살로 살해된 약 10만명의 희생자들은 필리핀에서 일어난 많은 전투들 중에서도 비교가 불가능할 정도의 대규모 학살이다. 그리고 이들 대부분은 전쟁에서 폭격이나 피해를 당해서 사망한 것이 아니라 일본군에게 학살되었다. 한마디로 일본군은 미군에게 얻어터지고서 도망가는 와중에 마닐라 대학살을 벌였다는 이야기이다.

일본군은 미친 듯이 건물을 파괴하고 민간인을 살해하고 여성들은 강간하고서 살해하는 등 무시무시한 대학살을 벌였다. 남겨진 자료와 증언들을 보면 혀나 목을 잘라버리거나 사람들을 심지어 어린아이까지도 태워서 죽여버리는 미친 짓을 저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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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에게 살해된 필리핀 민간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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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은 살해할 때 다음과 같이 팔을 뒤로 묶어 놓고 살해했다.

마닐라 대학살 직후 미군이 촬영한 당시 마닐라의 참상이다.

게다가 일본군은 아프고 정신이 불안정한 여성과 아이들을 죽일 때 탄약을 낭비하기 싫다는 이유로 그냥 태워 죽여버렸다. 일본군은 살아있는 사람들이 건물을 떠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기관총을 가진 일본군들이 건물을 포위한 후에 문을 쇠사슬로 잠궈 버린 후 건물에 불을 질러버렸다, 물론 건물에서 탈출하는 사람이 있으면 기관총으로 쏴서 사람을 가구로 만들어버렸다.

거기에 일본군은 이른바 참수 파티를 벌였는데, 그들은 남성들에게 자신을 묻을 무덤을 파라고 명령한 후에 무릎을 꿇린 다음 참수해 살해해버렸다. 일본 우익들 일부에서는 마닐라 대학살극의 희생자 대부분이 미군의 무차별 공격때문에 발생했다고 주장하지만, 어떻게 그 수많은 희생자 중에서 많은 사람들이 대검에 찔린 상태로 한 곳에 몰려 있을 수 있는지는 설명하지 못하고 있다.

또한 일본군은 필리핀인들의 가슴을 칼로 절단하고 그들을 총검으로 찔러서 관통시켰다. 심지어 아이들의 성기를 잘라내는가 하면, 마구잡이로 사람들을 총검으로 찔러서 사망하게 했다. 증언에 의하면 불타는 집에서 자신의 소지품을 구하려고 집으로 돌아간 한 남자는, 일본군이 화염 방사기로 집에 불을 질러 버려서 살해했으며 다행히 몇몇 사람들은 살아서 탈출했다고 한다. 의료 책임자들에 의한 진술서를 보면 Amnesse이라는 여자아이의 양쪽 젖꼭지를 잘라버리고 가슴과 복부에 총검을 찔러서 상처를 냈으며, 10세 소녀는 팔이 절단되었으며 2세부터 10세까지로 이루어진 소년 다섯은 심한 화상을 입었고 화상의 후유증으로 고통받았다. 당시 증언 내용

"일본군들은 미쳐 날뛰었어요. 그들은 궁지에 몰리게 되자 정말 미친 사람들처럼 흥분을 해서 죽이고 파괴를 하는데 마치 정신병자들이었죠. 일본군들은 어린애들을 찔러 죽이고 길거리에 나와 있는 부녀자하고 노인들을 총으로 쏴 죽이고 또 집집마다 불을 지른 뒤 안에 있던 사람들이 뛰쳐나오면 그들에게 마구 총격을 퍼부어 대었죠. 그들은 또 엘리베이터에서 소녀들을 떼거리로 잡아서 메이거 호텔로 데려갔는데, 전 그 아이들이 강간당하는 날 비명소리를 들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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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물에 깔린 채로 사망한 어린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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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에 의해서 철저하게 파괴된 건물

또한 어떤 건물에는 불을 지르고 사람들을 대검으로 찔러대서 대략 50명의 사람들을 죽인 사건이 일어났는데, 이 정도 학살은 당시에 일본군마닐라에서 자주 벌인 만행이라 얼핏 봐서는 그닥 특별해 보이지 않을 것이다. 수십 명씩 칼로 찌르고 불태워 죽인게 특별해 보이지 않을 정도인 개막장 일본군 문제는 그 건물이 다름 아닌 스페인 영사관이었다는 것이다!!! 그것도 국기까지 당당하게 게양된 건물이였던 것!

비록 스페인이 중립국이라고는 하지만 엄연히 추축국에 친한 세력이었는데다, 당시 친일적 친독적이던 중립국들도 잇따라 연합국에 가담하던 상황에서 스페인은 일본이 가진 정말 몇 안되는 우호적인 국가 중 하나였다. 한마디로 외교적으로 보았을 때 스페인 영사관은 그 개막장인 학살극이 벌어지는 곳에서도 절대로 일본이 건드려서는 안될 곳이었다. 그러나 마닐라에 있던 일본군에게는 그딴 거 없다. 한마디로 학살은 우방국이든 적국이든 아주 공평하게 이루어져야 한다는 평등주의적인(?) 사상을 가졌던 것이다.

물론 스페인에서는 이 학살 소식을 알게 되자 노발대발했고[2][3] 결국 4월 11일에 벌어진 이 학살극은 스페인이 일본과의 외교관계를 단절하는 원인이 되었다. 그렇게 일본은 유럽에 몇 남지 않은 중요한 우호적인 외교 채널을 잃어버렸다.

결국 이러한 무자비하고 잔인한 대학살로 인해 마닐라에 있는 건물의 30%가 파괴되고 민간인 약 125,000명이 학살 당했다. 위의 사진들은 필리핀이 전후에 남아있는 기록 중 일부에 불과한 사진이다.

그런데 학살은커녕 오히려 대민 지원을 한[4] 부대가 있었다. 그게 놀랍게도 도미나가 교지가 이끄는 제4항공군.[5]

4 종전 이후

전후 마닐라에서 학살 혐의 책임자로서 야마시타 도모유키 대장은 마닐라 군사재판에서 교수형에 처해졌다. 하지만 그는 필리핀에서 시가전이 시작될 시점에는 사령부를 이미 철수했고, 학살을 주도한 건 해군 육전대를 중심으로 한 패잔병들이었다. 전범재판에서도 야마시타에게 적용된 죄는 학살 지시가 아니라 예하부대의 학살에 대한 상급자로서의 책임 소재로, 마쓰이 이와네와 동일한 혐의.

구체적으로 진행된 조사에서 파울로 대학에서는 어린이를 포함 994명을 살해, 북부 묘지에서는 2,000명을 처형, 산차고 감옥에서의 집단 살해 등이 극동군사재판에서 주장되었다. 그러나 일본 우익진영에선 마닐라 시민의 죽음은 미군과의 전투시 휘말려 사망한 것으로 미군의 폭격과 사살도 있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또, 야마시타 도모유키 대장은 죽기 전에 자신은 관련이 없다며 모르는 사실이라고 주장했고 실제로도 직접적인 연관성은 증명되지 않았다.[6] 일본 우익들은 미국이 마닐라 대학살이라는 것을 날조하여 일본에게 대학살의 책임을 뒤집어 씌웠다고 주장해대는 개소리를 지껄이며, 이 대학살 사건을 축소하고 은폐하려는 움직임만 보이고 있다.그냥 사과나 하면 되지 뭣하러 저리 부정을 하나[7] 당연하지만 미국은 가만히 안 있고 으르렁거린다. 하긴 학살에 대하여 서로 부정하는 게 일상사이거늘. 그걸 남 탓하는데 가만히 있을까? 물론 미국은 적반하장이라면서 더욱 화를 내고 피해국인 필리핀도 일본 탓이라고 비난하는데 뭔 헛소리야?라고 미국 네오콘도, 친일적인 정치인들도 개소리한다며 반발한다.

물론 필리핀에서는 당연히 개소리로 본다. 막사이사이 대통령을 비롯한 필리핀 정계인사나 장교들은 이 당시, 일본군에게 맞서싸웠고 이 학살로 가족을 잃고 증오에 차 항일 필리핀 독립군에 참전하는 이들도 많았다. 또한 이들은 미군과 손잡고 일본군에 맞서싸웠으니 일본 우익이 미국 탓이라고 외치는 걸 개짖는 소리로 듣을 뿐. 이들이 나중에 필리핀 정계, 군직에 몸담은 상황에서 저런 소리를 받아들일 리 없다. 다만 학살이 있었다는 걸 넘어 우발적이었는지, 계획적으로 진행되었는지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는 게 사실.
  1. 물론, 피해자의 숫자가 적다고 두 사건이 끔찍하지 않은게 아니다!
  2. 웃기는 건 이 사건을 접한 뒤에도 스페인에서는 '그래도 일본과의 외교 관계는 유지해야 하는것 아니냐'라는 논란이 있었다. 자국민 학살이 발생했는데도 이럴 정도로 당시 스페인에서는 일본을 우호적으로 대하고 있었다.
  3. 이 양반들 처지를 설명하자면 당시는 까우디요 프란시스코 프랑코 가카께서 전국민의 절반을 죽이면서까지 히틀러와 무솔리니의 비위를 맞춰줘서 스페인 내전에서 승리하고 나니 그 히틀러무솔리니2차대전을 터뜨렸고, 이들의 외교적 압력에 따라 좋던 싫던 간에 명예 추축국으로 분류 되며, 연합군은 이미 스페인을 반쯤 적성국가 취급하고, 이웃나라 프랑스에서 레지스탕스 활동을 하는 공화파 잔당을 지원하며 확 스페인도 나머지 추축국이랑 같이 갈아버릴까 말까 고민하던 외교적 고립 중에서도 최악의 고립 상태에 있었다. 이러니 아무리 이런 사건이 터져도 스페인 당국 입장에서는 몇 안되는, 특히 아시아권에서는 유일한 우방국이라 할만한 일본을 함부로 대하지 못 했던 것.
  4. 그러니까 학살 당시 주민을 보호했다는 얘기다. 실제로 다른 부대가 학살을 저지르려고 하자 전투도 불사하겠다고 엄포했다.
  5. 도미나가는 무능과 무책임이 하늘을 찔러서 그렇지 의외로 인간이길 포기한 쓰레기는 아니였다. 그 이시이 시로와 토의를 하곤 "세균전을 벌이겠다고? 그건 아니지!! 민간인은 사람도 아니냐!!"라고 일갈한 일화도 있다.
  6. 애시당초 사형 판결의 이유가 학살 지시가 아니라 학살을 저지른 부대에 대한 상급자 지휘책임이다.
  7. 사실 야마시타 본인은 학살과 관련이 없었을 것이라는 게 정설이긴 하다. 이미 내부적으로 철수를 결정하고 사령부를 북부로 빼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