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시이 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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石井四郎(いしい しろう)
1892년 6월 25일 ~ 1959년 10월 9일

731 부대에서 10,000명이 넘는 무고한 민간인들을 상대로 잔학한 가혹행위[1]와 학살을 저지른, 인류 역사상 유사사례를 찾기도 힘든 학살자이자 악인.

1 개요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극악무도한 생체실험을 자행해서 "죽음의 천사"로 악명높은 요제프 멩겔레, 터스키기 매독 임상실험과 과테말라 인 대상으로 매독 임상실험한 존 커틀러와 더불어 세계에서 엄청나게 유명한 매드 사이언티스트 인간 폐기물 개X끼. 그리고 일본, 세계 의학계의 최대 흑역사이며 731부대의 부대원들과 더불어 스스로 학도(學徒)의 칭호를 내다 버린 자.

이시이 시로는 구 일본군 군의(軍醫)중장[2][3]으로 악명 높은 731 부대 사령관으로 유명하며, 그 부대를 이끌고 세계 전쟁사에서 전무후무한 수준의 생체실험을 행한 자이다.

후손이 있었는지는 불명. 있다면 추가바람

미국히스토리 채널에서 방영해준 731부대 다큐멘터리 장면이다. 이 다큐멘터리에서 이시이 시로는 독일의 나치의사 멩겔레조차 한수 배워야 할 정도로 악랄한 인물로 평가되었다.

2 초기의 활동

일본의 치바 현에서 태어나 교토제국대학 의학부를 수석으로 졸업했다.

규슈대학 의학부에서 미군 포로에 대한 생체실험을 자행했다는 말이 있는데[4] 아이카와 사건으로 불리기도 하는 이 사건은 큐슈대 의학부 인체해부 사건에선 자그마치 실험을 명령한 해군 장교들이 산 채로 해부된 미군 병사들의 간을 먹었다는 혐의로 기소되기까지 했다. 참고로 이 학교와 관련해 윤동주 시인의 사망이 일어났단 설이 있다. 피 대용으로 바닷물을 주입하는 대체실험을 당했다는 것.[5][6]

그 후 1921년 육군병원과 육군군의학교에서 군의로 근무, 대학원 과정으로 교토제국대학에 복학해 세균학, 위생학, 병리학을 연구한다.

참고로 이곳 터에서는 89년, 100여구의 정체불명 인골 더미가 발견되었고 그 상당수에 드릴, 톱 등의 흔적이 남은 상태였다. 이시이는 나중에 이곳에서 교관으로도 근무했다. 일본 측의 해명은 전시 사상자의 부상 상태 연구를 위해 메이지 시대부터 수집한 견본들이라고 하는데, 그렇다고 보기에는 미묘한 점이 많아서 일본 국내에서도 의문을 표하는 목소리가 적지 않다. 실제로 구미 각국에서도 유명인이나 여러 식민지 인종의 유골 견본을 보관하는 경우도 많아서 논란의 여지가 있다.

성격은 지극히 이기적이며 권력욕, 명예욕에 가득 찬 인간상이었다. 군에 입신한 후에도 군의관 계급이 중장까지로 제한된 것에 자주 불만을 터뜨렸다. 부대 예산을 착복하여 궁궐 같은 대저택을 짓기도 했다.[7] 그냥 볼 수 있는 부정에 찌든 군바리의 모습이지만 나쁜 놈은 더 나쁜 놈으로 만들어야 하기 때문에 이시이 시로가 나체로 기생들과 술래잡기를 하고 운행중인 비행기에서 검열삭제하는 인물로 과장되게 그렸다는 이야기가 있다.

1928년에 2년간의 해외 유학 길에 올랐고 거기서 1차 세계대전의 화학무기/세균무기에 대해 엄청나게 연구하였다. 그 덕택에 육군 대신인 아라키 사다오의 후원을 받을 수 있었다. 이 결과 일본 군부 내에서 생물학전 및 화학전을 집중적으로 연구하는 전문 연구소가 다수 수립되었다. 그리고 그 부대 중에 그 유명한 "관동군 방역급수부", 일명 "731부대" 가 있다.

여기까지만 요약하면 구 일본군 중에선 그나마 상대적으로 평범한(?) 작자라 할 수도 있을지 모른다. 어디까지나 그 이후의 행적을 빼면.

3 본격적인 만행 내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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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자는 나치 독일의 '죽음의 천사' 요제프 멩겔레와 함께 1, 2위를 다투는 말 그대로의 인간말종이라 해도 손색없는 인간. 아우슈비츠에 멩겔레가 있다면 731부대에는 이시이 시로가 있다고 볼 수 있다. 실험이라고 한 게 사람이라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미친 짓이라는 점도 비슷하다. 둘 다 의사라는 직업에 가장 기본적인 본분인 인명을 살리는 행위 따위와는 아예 거리가 멀다.

이시이 시로가 처음 사령관으로 부임한 1930년대 후반까지만 해도 731부대, 즉 관동군 방역급수부는 평범한 방역 및 급수 전문 부대였다. 사실 전쟁에서 급수 문제는 절대 간단한 것이 아니며 특히 일본군처럼 병참이 아주 부실한 군대가 중국처럼 물이 좋지 않은 곳에서 싸울 때는 매우 끔찍한 문제다. 이 문제로 일본군이 잃은 병사는 역대 일본군이 치른 모든 전쟁에서 전사자보다도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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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이시이가 군의관으로서 올린 최초의 업적은 바로 1920~30년대 기준으로 대형의 설비가 필요하던 정수기를 대형과 동일한 성능을 지니면서도 야전에서도 간단히 운용할 수 있는 소형의 정수기를 일본 내 기술수준으로 만든 것이었다. 심지어 성능을 증명하기 위해서 장군들이 보는 앞에서 자신의 소변을 정수해서 직접 마시기까지 했다고. 영어 아시는 분은 여길 참조.

사실 일본군의 방역급수부 자체가 다른 지역에 설치된 모든 방역급수부를 포함해서 생물학 및 화학전 연구 기능을 포함하고 있었으나 관동군 방역급수부는 전장이 전장이라 현장에 물 공급하는 것만으로도 바빠서 그쪽 실험을 제대로 할 정신머리도 없는 상태였던 곳이다. 그러던 곳이 1941년 이후엔 바뀌었으니... 일부 학자들은 노몬한 연간에 이미 세균전이 자행되었다고 하는데 신빙성은 없다.

살아있는 사람 상대로 본격적인 생체실험을 자행한 것이 확인된 거의 유일한 방역급수부다. 실전 테스트 임무를 받은 방역급수부는 몇 곳 더 있으나 실질적으로 개발 및 야외임상실험(즉 실전 테스트) 이전 기초 실험장으로 활용된 곳은 이곳 뿐이다.

당시 연구원들은 실험 대상을 마루타라고 명명했으며 들이 지르는 일체의 비명이나 신음은 깡그리 무시하라고 세뇌를 받았다 한다. 세뇌 과정 중 가장 엽기적인 것은 마루타로 잡혀온 이들 중 가장 반항이 심한 사람을 1명 골라서 무조건 때려죽이도록 강요했다는 것. 참고로 한자로 쓰인 마루타(丸太)라는 단어를 731부대는 사용하지 않았다. 그들이 사용한 마루타란 말은 가타가나로 쓰인 마루타(マルタ), 즉 '재료' 의 의미를 가진 것이었다. 통나무라는 의미로 쓰였다는 말은 하바로프스크 군사재판 공판서류를 일본어로 번역하는 과정 중에 빚어진 오해이다.

731부대를 통해 희생된 무고한 민간인의 수는 약 10,000여 명 이상으로 추정되는데 주로 한국인, 중국인, 몽골인, 러시아인, 드물게 미군영국군 포로도 섞여있었다고 알려져 있다.[8] 참고로 생물무기도 만들었는데 이것까지 합치면 무려 50~60만명이 넘는 이들이 희생당했다.

보통 70%의 포로가 한국, 중국, 만주, 내몽골 출신의 황인이었고 소련군 포로이거나 만주국하얼빈 등에 살던 러시아인도 30%나 되었다.

그러나 이 부분은 논란의 여지가 있다. KBS에서도 나온 묵덴 실험의 경우 수용소 자체가 중립국에 보여주는 선전 수용소라는 점, 또한 묵덴에서 했던 의학적인 조사에 연합군 포로 군의관이 참가했다는 점에서 통상적인 가검물 검사를 생체실험으로 오해했다는 설이 있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후쿠오카 등에서 벌어진 실제 실험의 죄를 묵인할 수는 없다.

상세한 내역은 731 부대 참고.

<731부대는 살아있다> 2번째 방영분에 15분 즈음에 등장하는 인물인 전직 이시이 시로의 운전병이었다는 코시 사다오(1998년 당시 80세)는, "영하 50도에서 몇분이 지나면 죽는가 관찰하는 실험을 했는데 그 가운데 독가스 실험은 제가 직접 카메라로 찍었는데 독가스를 터트리고 몇분 후에 죽는가를 실험했고, 마루타들의 몸에 전기코드를 연결한 다음 독가스를 터트려 몸의 변화 관찰, 페스트균 터트려 어떤 상황이 벌어지는가를 관찰했다. "라고 증언하여 시청자들에게 큰 충격을 줬다.

4 전후의 행적

도저히 눈 뜨고 볼 수 없는 짓을 족족 해댄 탓에 비록 731부대는 아니지만 다른 곳에서 행해진 미군 포로 대상 인체실험 사실이 전범재판정에 보고되자 검사들이 처음에는 뻥일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했을 정도다. 왜냐하면 많은 경우 생체실험이라 해도 그렇게 잔인한 식으로 하면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기 때문. 의학적 상식을 가진 인간들이라면 그런 식으로 실험하려 들지 않는다는 게 일반적인 인식이었던 탓이다. 물론 해군의 경우엔 물로 석유를 만든다는 사기꾼 말에 속기도 했다니 별로 놀랄 일은 아니다.[9]

그러나 이들에 대한 학살도 나중에는 의미가 사실상 없어졌다. 731부대는 겉으로는 전쟁터에서의 대규모 질병 발생에 대한 예방과 치료를 목적으로 하고 있었으나 공격무기, 특히 일단 무기부터 개발하고 보는 이상한 패턴이 자리잡는 바람에 백신이나 치료제의 연구 따위 제대로 이뤄지지 않아서 태평양 전쟁 내내 일본군생물학전이 안 벌어진 상태였는데도 병사자가 전사자와 맞먹는 수를 기록하는 병크를 터뜨렸다. 이들은 생물학 무기연구에 주력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 백신, 치료제 연구가 무슨 X-COM 과학연구도 아니고 돈, 인력, 시간을 쏟아 넣는다고 무조건 나오는 것은 아니다.

또한 애써 준비만 해둔 생물학병기는 소련군의 침공에 대비한 것이었음에도 실제로 침공해올 때가 되어선 관동군 자체가 지리멸렬하여 생물학전을 감행할 상태가 아니었다. 생물학병기로 준비된 차량만 신품 포드 차량으로 80대가 넘었다고... 결국 퇴각 과정에서 전부 자폭 처리되었다.

이쯤 되면 병사한 일본군 병사들 입장에서도 이시이 시로는 제정신이 아닌 놈이다. 일본군이 실제로 세균전을 실험한 것으로 생각되는 전투를 보면 일본군 역시 전염병에 희생된 사례가 적지 않았고 그걸 빼고도 일단 이시이 시로의 임무는 그들이 병에 걸리지 않도록 지원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애초에 731부대 자체가 방역급수부대였고 이시이 시로는 관동군 방역급수총책임자. 다시 말하자면 관동군이 사용할 물을 제공하고 부대 내 전염병 확산 방지를 총 지휘하는 역할을 해야 하는 인물이였다. 이게 간단할 것 같아도 전혀 간단해 보이지 않는데 이런 임무를 수행하는 부대가 있어야 하는 이유가 뭐였냐 하면 당시 만주의 물 상태는 꽤 심각해서 뻑하면 관동군 병력들이 관련질병, 예를 들면 주혈흡충균 등에 시달렸다. 또한 이 때문에 실제로 병력의 인명피해가 심각했다. 원래 이를 극복해보려고 만든 부대가 731부대였는데 하필이면 이런 작자가 부대장으로 부임하는 바람에 생체실험 부대로 전락하고 만 것이다. 왜 상단에서 이시이의 최초이자 최고 업적이 야전에서 간단히 쓸 수 있는 소형 정수기 개발이라 언급했는지 다시 한번 읽어보자.

생물학전 및 화학전의 상식은 사실 무기가 아니라 보호수단부터 만드는 것인데 이런 법칙은 생각보다 잘 안 지켜져서 생물학전은 몰라도 적어도 화학전은 최초의 실행 사례였던 1915년 이프르 전투 당시 저지른 독일군도 보호수단은 만들 생각 않고 일단 뿌리기부터 하고 봤다. 사실상 2차 세계대전 시점에 있어서 독일이나 일본이나 생물학전화학전은 무기가 있는데도 보호수단이 없어서 보복에 대응하기 힘든 탓에 쓸 생각을 못한 것. 또한 만만한 민간인 대상 작전에선 두 나라 모두 거의 대놓고 생화학전을 벌였다는 공통점이 있다. 독일도 파르티잔 소탕 및 농성전 진압에서 신경가스 및 생물학병기 사용이 사실상 거의 사실로 밝혀져 가는 단계.

더구나 실제로 생물학전을 벌이려고 해도 제대로 생물학전을 수행하는 데 필요한 무기체계를 개발하는 데 성공하지도 못했다는 것이 더욱 안습이다. 저렇게 사람을 변태적으로 죽이는 데 열중해서 그런 것인지, 아니면 도무지 예방 및 치료법이 확실치 않은 병만 무기로 삼으려 들은 탓인지는 확실치 않지만 뭔가 시도는 했어도 실제로 만들어내는 영역에까지는 도달하지 못했던 것. 특히 731부대가 주요 연구대상으로 삼았던 페스트는 아직도 안전한 백신이 없다. 치료에 쓸 만한 약품조차 1950년대가 되어서야 미국에서 처음 개발됐으니 안습이라면 안습.

병원균을 전투기에 실어 떨구려고 했는데 처음에는 이걸 폭탄에 담았다가 폭발의 열이 살균 작용을 해서 그야말로 말짱 도루묵이 되는 일이 발생하자 도기에 세균을 담고 이걸 전투기로 폭격하는 발상을 했다. 다행히 실제로 쓰이지는 못했지만.

포로들에게만 이런 야만적인 짓을 자행한 것도 모자라, 만주에 거주하는 중국 민간인들을 상대로도 페스트균 살포 등을 저질러 수만 명이 희생되었다. 물론 이 과정에서 일본군도 꽤 죽었었다. 그리고 마루타는 포로들만 있지 않았다. 미성년 샘플이 필요해서 납치해오는 경우도 있었고 일거리를 구해 주겠다는 말에 속아서 온 사람도 많았다고 한다. 일본군이 그렇지 뭐

4.1 그간의 통설

귀국 후 전범 추적을 피해 자기 장례식까지 치르고 가명을 써가며 은신했고 기회가 닿자 미 점령군 당국에 부하를 보내 전범 면제의 대가로 자기가 가지고 있던 세균전 자료 일체를 미군에게 넘긴다. 이시이 시로는 미국에게 자신을 용서해주지 않으면 이 자료들을 소련에 준다고 협박했다. 여기까지는 꽤나 현명하게 처신하는 듯했다. 그리고 사실 이게 현명한 거다. 마루타 창시자이자 100부대 부대장인, 말하자면 이시이 시로 수준의 인간말종인 다카하시 다카아쓰는 소련군한테 잡혀서 죽도록 얻어터지고 혹사당하다 결국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기 때문에...

하지만 부하들도 정상은 아니였는지 이를 기회로 이시이를 따돌리고 자기들끼리 점령군과의 거래를 독점하고서는 일본 의학계의 중진으로 발돋움하여 일본 녹십자 (ミドリ十字) 사를 만들어 명예와 돈을 거머쥐고 고위층으로 떵떵거리며 살았다. 그러나 녹십자사도 시작부터 줄줄이 인체실험을 자행한 탓에 항상 잡음에 시달려왔고 결국 1980년대 후반 혈우병 치료제에 AIDS 환자의 혈액을 사용, 일본 내 혈우병 환자들 4,500여명 중 무려 2,000여명이 줄줄이 AIDS에 걸리는 사상 최악의 병크를 내지르고야 말았다.

1998년 일본 녹십자는 인수합병의 형태로 요시도미 제약이라는 회사에 합병되고 모든 기술은 요시도미 제약으로 넘어가게 된다. 이렇게 하여 탄생한 기업이 웰화이드라는 기업이며 또 이 웰화이드는 후에 미쓰비시 화학의 자회사인 미스비시 도쿄제약으로 합병되는데 이리하여 탄생된 기업이 미쓰비시 웰파마다. 이후에는 다나베 제약과 합병해 미쓰비시 다나베 제약(주)가 되었다. 참고로 이 기업은 한국 지사도 있다.

이런 일련의 과정을 통해 731부대는 명맥을 이어가고 또 돈을 벌어 지금은 엄청난 대기업으로 발전되어 있는 것이다. 한국 녹십자와는 혈액관련제재의 기술협력은 있었다고 한다. 다만 일본 녹십자가 망하자 협력했던 지분은 한국 녹십자가 다 챙겼다고.

그에 비해 이시이는 전쟁 전에 착복한 재산과 전후 고향에서 벌인 사업으로 번 돈으로 엽관과 매수에 공을 들여 어떻게든 옛날의 영화를 누리려 했다. 그가 했던 사업이란 매음굴을 겸하는 숙박업소와 실험용 흰쥐 농장이었다. 그런데 일본 쪽 위키피디아에서는 단순 매음굴이 아닌 '뭔가 다른 것을 했다'고 나와있다. 단순 음모론일 수도 있으나 1998년 KBS 일요스페셜 다큐멘터리[10]를 통해 알려진 사실[11]과 2014년 폭로된 사실[12]을 종합해 보면 이시이 시로가 운영했다던 실험용 쥐 농장도 그와 일본 의학계 사이의 눈에 띄지 않는 연결점 중 하나였을 수도 있다

일왕의 항복선언과 함께 전쟁이 끝난 후 이시이는 존재 자체가 일본 의학계의 흑역사였기에 옛 부하들에게 철저히 무시당했다. 이렇게 한 번 동료들에게 버림을 받고 나서는 회개를 했는지 개신교로 개종하고 윤락업소 경영과 병행해서 동네 주민들에게 무상 의료 행위를 하며 살았다고 한다. 그러나 이것도 위법으로 이시이의 의사 면허는 1945년에 박탈됐으므로 걸리면 감옥에 가게 되어 있었다. 그리고 개신교로 개종한 후 윤락업소 경영은 모순적 행동이다.

어찌되었든 그는 결국 실의에 빠진 채 미군을 상대하는 윤락업소를 겸하는 여관 주인 노릇을 하며 살다가 67세에 으로 뒈졌다. 옛 부하들에게도 대접받지 못 하고 뒈진 걸 보면 인과응보.

…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4.2 그러나 사실은!

그런데 2014년 1월 교토대 의학부 도서관에서 발견된 1960년 2월 콜레라균 연구를 주제로 한 박사 학위 논문에 지도교수로 이시이 자신의 이름이 등재되어 있어, 종전 이후 사망하기 직전까지 자국에서 의학계의 원로로 대접받으면서 731부대의 반인륜적인 행위로 얻어진 결과물을 지속적으로 학계에 적용시켰던 것으로 밝혀져 큰 충격을 주고 있다. 즉 위의 매음굴 운운은 이시이가 여전히 의학계에서 큰소리치는 것을 외부에 은폐시키기 위한 역정보였던 것이다.

참고로 731부대 관련자 중에 전범 처리된 사람도 거의 없고 그 극소수도 처벌은 극히 가벼웠다. 1945년 소련군만주 작전 때 이곳은 점령하고 731부대 관련자를 체포하였지만 이미 수뇌부는 일본으로 튀었고 일부 스탭만 소련군에 체포되어 하바로프스크 전범재판에 넘겨졌으나 이들은 강제노역형을 살다가 소련-일본 수교 협상 때 모두 풀려나서 일본으로 돌아온다. 일본으로 도피한 이들은 미국에 실험 데이터를 넘기는 조건으로 사면을 받았다는 설이 있다.

일본으로 도망친 731부대 고위 관계자들은 승승장구했다. 물론 당연히 모두가 그러지는 못했고 이시이의 함구하는 명령을 따라서 군인연금을 신청하지 못한 경우도 있었고 소년병 같은 경우는 학력도 인정 못 받았다. 그런데 특히 교토대학 의대 학장을 지낸 인물도 731부대 출신이라는 것은 충격과 공포. 그의 이름은 요시무라 히사토. 이시이의 대학 후배이자 동상 연구를 했으며[13] 이후 교토대학 의학부 학장을 지냈다.

더구나 731부대는 다른 지역보다 유난히 안전하게 귀국한 사람이 많은 만주 주둔 일본군 중에서도 인원 손실율이 특히 낮은 부대라는 점에서 더욱 사람의 공분을 자아내게 한다. 외국에서만이 아니라 관동군 출신자들 사이에서도 비난이 쏟아질 정도. 심지어 그들의 전범 혐의 노출을 막기 위해 안전 철수를 명령하고 직접 편의를 봐주었던 관동군 참모장교조차 전후에 "내가 도와주긴 했지만 지금 생각해도 치가 떨릴 만큼 자기네 안전만 챙긴 놈들" 이라며 비난해댔다.

여담으로 731부대와 한국은 인체실험 희생자 외에도 의외의 분야에서 인연을 가지고 있다. 바로 유행성 출혈열[14]의 매개와 감염 경로의 규명 과정으로 이는 731부대 관련자가 미군의 위탁을 받아 연구를 실시한 결과이다. 그러나 역시 치료법은 고사하고 병원체를 발견한 것도 아니었으므로 그저 기본적인 예방수칙 하나만 정리하는 데 성공한 정도이며 이 정도는 이미 미군 중 상당수는 이런 예방수칙이 나오기 전에 어느 정도 기본적인 대책을 수립하고 있었다.

당대에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한타바이러스에 의한 유행성 출혈열은 미국 본토, 특히 서부의 풍토병이기도 하며 많은 원주민 부족들이 이 병의 예방을 위해 쥐를 피하거나 보는 족족 죽이는 관습이 있었다. 한국전에서도 관련된 조치가 일선부대 병사들 사이에서 이루어졌다. 오히려 731부대 관련자가 미군에 협조했던 탓에 "중국과 북한 상대로 미국이 세균전을 벌였다!"는 공산권의 선전에 철저하게 말려들어 국제적으로 욕만 먹었고 지금도 계속 구설수에 오르고 있으니 득보다 실이 훨씬 많았다.

다만 부분적으로는 실험했다는 징후도 있으나 구두증언밖에 없었고 증언 당사자가 중국군의 포로심문 과정에서 진술한 것이 전부로 거의 전원이 송환 후 이를 부정했다고 전해진다. 이 후 2010년도에 명령 자료가 발견되었다는데 실제 시행했는지는 자세한 조사 전까진 불명이라 한다. 그리고 2015년 6월 니덤 보고서가 발견되어 세균전을 치렀다고 한다. 정말로 731 부대와 그 수장 이시이 시로는 21세기 현재까지 아직도 죽지 않고 버젓이 살아있는 것이다.

5 트리비아

전후 미군은 이시이 시로와 731부대가 넘겨준 자료를 처음에는 실제 사람을 대상으로 얻은 자료라고 매우 중요시했는데 그 이유는 당연히 '동물실험으로 얻을 수 없는 자료' 를 기대했기 때문. 그러면서 자기들 거랑 비교해 봤는데 대부분 동물실험으로 해도 충분히 실험 데이터를 얻을 수 있는 실험이라 미군이 가진 자료와 별로 다르지 않았다. 이는 앞에 언급되었다시피 백신이나 치료제의 연구 따위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기 때문. 여기에 대한 반응은 '뭐야 이 새키들!' 혹은 '속였구나!' 정도(출처 필요). 6.25 때 미국이 세균전을 했을지도 모른다는 증거가 발견되었는데 실제 세균전을 했더라도 쓰레기나 다름없는 데이터가 얼마나 도움이 되었는지는 미지수이다.

1998년 KBS 일요스페셜에서 <731부대는 살아있다>는 다큐멘터리를 방영해 시청자들의 큰 충격을 줬다.731부대는 살아있다 1731부대는 살아있다 2 KBS 다큐멘터리에서 731부대 다큐멘터리에서 밝혀진 사실은 731부대 부대장 이시이 시로한국전쟁 당시 미군의 요청으로 대한민국에 들어와 일본에서 싼값에 거둬들인 혈액을 한국전쟁에서 미군에게 비싸게 팔아서 많은 이득을 얻고 영향력을 행사했다는 것 731부대는 죽지 않았다 1998.5.17 한겨레 731부대는 살아있다 1998. 5 동아일보

그러나 이들이 연구한 데이터는 쓰레기일지라도 이들이 시도한 무기화는 어느 정도 도움이 되었을지 모른다. 731부대가 유행성 출열혈을 일으키는 한타바이러스의 무기화를 연구한 것은 사실이고 6.25 기간 중 사면된 731부대 관계자들이 미군의 의도로 수차례 한국을 방문했다는 것도 밝혀졌기 때문이다. # 또한 미군은 세균전 프로그램을 폐기하기 전까지 이 바이러스를 연구했다. #

그러나 이후 처벌하려고 해도 못했던 이유는 731부대 출신자들의 보호 사실이 한국전쟁 시점에서 공산권의 좋은 선전거리가 돼 있었던 탓이 크다. 미국으로서는 드러내놓고 그들을 처벌하기도 어렵고 그렇다고 적극적으로 부정하기도 미묘한 입장이었던 것이 이제 와서 처벌하면 그동안 뭘 했냐는 욕을 먹을 테고 부정하기엔 실제로 관련자들이 살아서 일본 의료계 중진으로 자리잡은 것이 문제였던 것이다. 알려진 것과 달리 731부대 관련으로 그들의 구명을 적극 추진한 일선 미군 간부들의 이름은 도쿄 재판을 전후한 시점에 이미 널리 알려져 있었고 그 추인 관련 문제도 잘 알려져 있었다. 이것 때문에 731부대의 존재와 그 임무 자체는 모든 것을 부정하기 바쁜 일본 우익들조차도 전혀 부정하지 못 하고 단지 생체실험만은 한 적이 없다는 강변에 그치고 있다.

슬레이어의 앨범 World Painted Blood에서 2번째 트랙 'Unit 731' 이 이 사람과 731부대를 까는 노래이다. 주목할 점은 Reign In Blood에 수록된 'Angel of Death' 와 묘사가 거의 비슷하다는 것.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에서 이시이 시로가 어째서 처벌을 받지 않았는가, 라는 주제의 방송을 했다.

헤로인 생산을 위해 만주에서 양귀비를 경작하던 현 미쓰이 사와 연계가 있었다는 설이 있다.

객관적으로 인선능력은 좀 있었던 듯하다. 731부대의 마루타 관리는 이시이 시로의 고향에서 데리고 왔는데 이시이가 죽은 후 수십 년 후에 작가가 증언을 요청하자 "이시이 시로 '각하'의 명예를 위해서 대답할 수 없다" 고 했다. '죄를 부인한 게 아니라'. 학살범들은 보통 자신의 죄를 부인하거나 기억이 안 난다고 대답한다는 것을 봤을 때, 그토록 많은 사람이 근무했지만 증언은 전부 손 꼽힐 정도라는 것도 인선능력의 결과라면 결과.

사생활이 조금 많이 더러워서 731부대원들 사이에서도 계집질한다고 말이 많았다는 말도 있다.

참모본부 참모와 세균전에 대한 토론을 하다 민간인들 다 죽일 셈이냐면서 한소리 들은 일화도 있다. 이 참모의 정체는 그 유명한 도미나가 교지다. 그 무능한 졸장 조차도 비판할 지경이니 이시이 시로가 얼마나 답없는 작자인지 알 수 있는 이야기.

731부대와 연관이 깊은 교토대학에서는 2014년 의학부 경지내에 완공된 의학부자료관에 731부대와 이곳에서 행해진 실험에 대한 판넬을 전시하고 있었으나, 이후 이 판넬은 소리소문 없이 철거되었다. 학교측은 단순히 통상적인 전시물 교체라고 설명했지만, 일본 의학계에서는 용기있는 행동이라고 칭찬하고 있었더니 뒤통수를 맞았다며 비판.

6 그 외 매체의 등장

전략인간병기 카쿠고에서는 주인공의 4대조인 하가쿠레 시로로 등장한다. 물론 작가가 작가니 만큼 스토리는 안드로지만 잔혹한 인간 생체실험을 했다는 것은 동일하게 나온다.

어떠한 의미로는 제츠 라아스 브라키오 같은[15] 자신의 욕망을 위해서라면 어떤 악랄한 짓도 태연히 하는 악마적인 매드 사이언티스트의 모델격인 인물이다.

대체역사물 일 베티사드에서는 일본이 안 미쳐돌아가서 계획을 지원 안 해주자 이쪽에서 군국주의로 미쳐돌아가던 중국으로 가 한국의 독립운동가(중국에게서)들과 반정부인사들에게 인간 생체실험을 한다. 거기다 피해자를 부르는 명칭도 중국어로 통나무라고 부른 걸 보면 지원국이 일본에서 중국으로 바뀐 것만 빼고 현실과 동일하다.

7 관련 항목

  1. 생체 '실험'이라 부르기도 힘들다. 문서 내용에 적혀있다시피 그 가혹한 '실험'의 결과에 '쓸모있는' 정보는 들어있지 않았다.
  2. 카를 게브하르트와 같은 계급이다.
  3. 그나마도 이시이 시로는 일본군 수뇌부에 군의 병과에 대장이 없다는 점에 대해 노골적으로 불만을 표시하기도 했다.
  4. 1945년 일본 규슈대학 생체해부 사건’ 목격자 도노 도시오의 인터뷰
  5. 다만 윤동주 시인의 최후는 여러가지 설이 있으니 단정지을 수는 없다. 윤동주 시인은 옥중 병사한 것이 현재까지 정설. 윤동주 생체실험설이 제기된 유일한 매체는 윤동주의 시체를 인수하러 간 친척의 증언이다. (이 친척이 가수 윤형주의 부친이라고 윤형주가 밝혔다.) 죄수들이 '이름모를 주사'를 맞았다고. 특이한 건 사망한 윤동주의 시신을 일반적인 생체실험 희생자처럼 화장하지 않고 유족이 잘 가져가게 방부 처리해서 넘겨주었다는 것이다.
  6. 윤동주 생체실험론에 대해서 회의적인 시각을 가진 사람이 연변 출신의 김학철 옹인데. 이 사람이 창작과 비평에서 나온 책에서 한 회고에 의하면 일제의 감옥은 고문과 굶주림, 질병에 의한 사망이 많아도 생체실험할 여력까지는 없었다고 한다. 생체실험이 아니라 어떻게든 처리해야 할 인물인 박열이나 일본 공산당 당수도 20년 넘게 살아남은게 제국 감옥이라는 이야기. 고작 4년형을 받은 조선인 죄수가 생체실험에 동원될 가치는 없다고 봤었다. 참고로 김학철은 태항산 전투에서 팔로군으로 참전했다가 생포되어서 종신형을 받고 일본본토에서 수감 중 해방을 맞는다. 육군 소장까지 오른 광복군 출신인 유해준 장군의 경우 나가사키 형무소에서 해방을 맞이했다.
  7. 물론 이 부분은 정현웅의 병크라는 이야기도 있다.
  8. 이시이 시로는 전후 도쿄 재판에서 마루타는 총 3,850명이며 조선인이 254명, 러시아인이 562명이고 나머지는 중국인이였다고 진술했다.
  9. 참고로 이 사기는 고노에 후미마로 총리대신이 "우리(집) 근처의 우물물은 대단한 것이라고 해요. 그 물이 가솔린이 된다고 합니다" 라고 말한 것을 해군의 높으신 분들이 "실험해 보자!" 라고 해서 발단이 되었단다.
  10. 731부대는 살아있다 1731부대는 살아있다 2
  11. 이시이 시로한국전쟁 당시 미군의 요청으로 대한민국에 들어와 미군에게 영향력을 행사했었다는 것.
  12. 사실은 전후에도 일본 의학계의 원로, 중진 대접을 받으며 살았었다.
  13. 추측일 뿐이지만, 어쩌면 이 인간의 동상 연구도 731 부대에서의 패륜적인 생체실험과 관련있을 지 모른다.
  14. 한타 바이러스 및 서울 바이러스. 둘 다 1970년대 이후에야 발견되었다
  15. 그의 마지막 마장기 갓초에는 사람의 뇌가 이식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