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미나가 교지

일본군 삼대오물
무타구치 렌야스기야마 하지메도미나가 교지


계속 보면 정든다. 하루 빨리 대한을 독립시킬 마음에 부푼 저 얼굴을 보라. 가자미[1]
제2차 세계대전 당시 구 일본 육군장군이자 탈영의 새 역사를 쓴 잉간. 헌데 무능하지만 타국 민간인 보호라는 당연한 개념을 보여준 드문 일본 장군이기도 하다....

도미나가 교지(富永恭次, とみながきょうじ)
(1892.01.02 ~ 1960.01.14)

1 개요

무타구치 렌야능가하는 전설은 아니고 레전드 급의 무능한 인물. 일본에서는 무타구치 렌야, 스기야마 하지메와 함께 삼대오물이라 부르고 태평양 전쟁 얘기만 나오면 70년 가까이 지난 지금까지도 까이고 까이고 또 까여서 가루가 되는 인물. 일본 패망을 앞당긴 오물중 셋째. 병신력만큼은 다른 둘을 압도한다!

다만 무타구치 렌야 같은 뻔뻔함은 없었고 하나야 타다시처럼 부하들을 직접적으로 괴롭히지도 않았다. 또한 다른 일본군의 혹장들처럼 인간을 때려치운 인간 쓰레기는 아니였으며, 오히려 학살을 반대하고 전쟁범죄에는 전혀 참여하지 않은 사람이였다. 그냥 '무능하고 비겁한 인간'과 '사람이기를 포기한 인간 쓰레기'는 인류 사회에서 대우 자체가 완전히 다르다. 때문에 한국에서의 인지도는 낮다. 아무래도 '무능하고 비겁한 인간' 이미지는 무타구치가 다 가져가서 그런지...


2 신이 내린 줄타기 능력과 낙하산 인사

그의 군사적 역량은 전혀 뛰어나지 않았으나 그에겐 신이 내린 줄타기 능력이 있었다.

육군대학을 졸업[2]한 후 도조 히데키 라인을 탄 그는 정계와 군부, 재벌을 잇는 뇌물 셔틀 역할을 하면서 도조의 돈주머니라는 별명을 얻었다. 라인을 잘 잡은 덕분에 참모본부 참모와 관동군 보병사단 참모를 차례로 역임했고 요직인 육군성 인사국장을 거쳐 육군 차관까지 오른다. 그러나 패색이 짙어진 1944년 8월, 그의 보스 도조가 실각하면서 자리를 내놓았다.

그런데 도미나가의 다음 자리가 문제였다. 같은 삼대오물로 불리는 스기야마 하지메마저도 도미나가가 무능하다는 사실은 익히 알았지만 뒤를 봐주는 세력이 워낙 든든했기에 '이놈을 대체 어디에 배치하나?' 하며 상당히 고민했다고. 도미나가는 사실 베트남에 가서 전투를 벌인 적이 있지만 18,000명 중에서 400명만 남기고 전멸시킨 화려한(?) 전적도 있었다. 황당하게도 진군 시각을 알리는 전단이 새어나간 바람에 프랑스 육군이 미리 매복해서 기습했다. 더 어이없게도 그 당시 도미나가는 지휘는 고사하고 사단 본부에서 기생과 놀았다니 답이 없다. 게다가 교환비로 따지면 더 충격적이니, 5,000명인 프랑스 육군의 피해는 60여 명 전사에 180명 중경상이 다였다. 윙드후사르의 교환비마저 능가한 도미나가 찡

그러다가 스기야마는 1944년 당시에 가장 안전한 남방 전선을 생각해냈다. 참고로 일본 육군 제4항공군 사령관에 이 잉간을 보내라고 조언한 사람은 다름아닌 친목질임팔 작전을 승인했던 카와베 마사카즈였다. 숨겨진 독립유공자 오오 그리하여 1944년 9월, 도미나가는 필리핀에 주둔한 일본 육군 제4항공군 사령관으로 부임한다. 이때 스기야마 하지메가 한 말이 걸작이다.

드디어 그 딱따구리를 내 눈앞에서 치웠다.

3 닥치고 카미카제

그런데 위에서 보면 알겠지만 도미나가는 항공군을 지휘한 경력이 전혀 없었다. 기본적인 항공전 전략전술조차 하나도 몰랐다. 차라리 무능하면 가만히라도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항공기를 출격시킬 때마다 중2병마냥 군도를 휘두르며 '발진!' 을 외쳤다. 전후 참모들이 회상하기를 어차피 파일럿들에게는 보이지도 않았으며 쓸데없이 활주로 바로 옆에 나가서 군도를 휘둘러서 이륙에 큰 방해였다고. 도미나가의 이러한 행동은 이후 일본 애니메이션이나 게임에서 오퍼레이터들이 자신감 있게 '발진!' 을 외치는 행동의 유래라고 한다(...) 시대를 앞서나간 선각자. 그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쓸모있던 순간이었다.

무엇보다 그가 저지른 최악의 병크카미카제로 말아먹은 귀중한 육군 항공대 전력이다. 1944년 9월 카미카제 허가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토미나가는 줄기차게 특공을 지시했으며, 총 62차례 특공을 시도하여 전투기 400여 기를 내버렸다. 심지어 기체가 고장나서 돌아오거나 간신히 산 대원마저도 충성심이 모자라다며 훈시(...) 하고는 다시 전투기에 태워 특공을 보냈다. 당장 카미카제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이는 비인간적인 전술일 뿐더러, 귀중한 항공기와 더 귀중한 조종사를 1회용 폭탄으로 삼아도 10회 중 1회 성공할까 말까 한 전술적/전략적으로 손해인 뻘짓이다. 더군다나 400여 대를 62차례로 나누어 순차적으로 투입했으니, 피해를 입히기는 커녕 날 잡아줍쇼 하는 꼴이었다.

이러한 도미나가의 특공 명령 덕분에, 레이테 만 해전 이후 서진하는 미군에게 충분한 위협이 되었을 육군 제4항공군의 항공 전력은 절반 이하로 떨어졌다. 이오지마 전투오키나와 전투에서 희생된 미군의 수를 생각한다면, 제4항공군이 전력을 보존한 채 일본 본토나 필리핀 탈환전 방위에 나섰으면 미군은 더 심한 피해를 입었을 것이다. 이를 예방했다는 점에서 도미나가가 얼마나 멍청하게 병력을 굴렸는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특공하는 항공대원들 앞에서 술을 마시며 자주 이렇게 훈시했다.

"제군들은 이미 신이다. 제군들만 보내지 않는다. 본관 역시 마지막 일전에서 특공혼을 불살라 제군들을 따라갈 것이다."

그러나 그는 특공혼을 불사르기는커녕 평생 전투기를 한번도 안 탔다. 더욱 더 황당한 건 이미 몸이 아프다는 핑계로 2번이나 사임서를 냈었다. 특공훈은 어디로...


4 전설적전도주 (敵前逃走)

1945년 1월, 일본의 패색이 더욱 짙어졌다. 가장 안전했던 남방전선은 임팔 작전의 대실패로 영국, 인도군이 인도차이나 반도로 진공해 미얀마까지 탈환했으며, 태평양의 미 해군은 레이테 만 해전 이후 필리핀까지 밀고 들어왔다. 이들은 해가 바뀌자마자 이미 마닐라 코 앞까지 와서 해병대의 상륙을 위한 함포사격을 개시했다.

그리고 1945년 1월 16일, 도미나가는 위궤양이 악화했다면서 수송기를 타고 타이완타이베이 기지로 이동한다. 그 와중에도 총애하는 기생들을 잊지 않았으며, 수송기의 남은 공간에는 위스키를 실었다. 위궤양이라며?[3] 즉, 남방전선 전역의 제공권을 책임지는 총사령관이 적전도주했다. 게다가, 레이테 섬을 잃자 제 14방면군 사령관 야마시타 도모유키 장군은 마닐라를 포기하고 루손 섬으로 후퇴하기로 결정했지만 "사령관님, 이미 많은 특공을 보내고 있습니다. 마닐라를 포기할 여유는 없으니 여기서 옥쇄를 각오하겠습니다" 라는 웃기지도 않는 허세를 부렸다.

그의 도주로 제4항공군은 지휘체계가 완전히 무너졌고, 2월 13일부로 완전히 해체해 육군 보병 부대에 편입되었다. 필리핀 탈환전은 지상 병력이 서로 비슷하고 기동에 필요한 공간이 충분해서 일본군의 전투능력을 확인할 좋은 사례인데, 여기서 40만vs40만 전투를 벌여 전사자가 미군 1만여 명, 일본군 39만여 명인 사실을 보면 사령관이 도망간 제4항공군의 대부분이 필리핀에서 뼈를 묻었다고 봐도 무방하다. 방어자가 원래 공격자보다 유리하다는 사실은 잠시 잊자.

그나마 인원은 육군이 거두어서 전투병으로 써먹었지만, 육군의 주력 전투기 Ki-43 하야부사의 상당수는 조직적인 반격도 한 번 못하고 카미카제에 축차적으로 들어가 미군 전투기 조종사들을 위해 에이스 칭호를 달기 위한 제물로 쓰였고(…) 그마나 카미카제에 안 쓴 전투기 500여대는 고스란히 필리핀을 탈환한 미군 손에 넘어갔다.

그나마, 말레이 반도에서 기동전으로 대활약을 펼쳐 '말레이의 호랑이' 라고도 불린 필리핀방면군 총사령관 야마시타 도모유키 장군은 여타 일본군 지휘관들과 달리 군사적 능력이 있어 7개월 가까이 지연전을 해냈다.

그런데 도미나가는 적전에서 도망쳐 온 주제에 대낮에 군용차에 기생을 데리고 다닌 데다 위궤양이 심하다며 온천을 갔다. 찾아간 곳은 타이베이에 있는 베이터우 온천이 가장 유력하다. 당시 이 지역에 일본군 부상병을 위한 요양소가 있었고 기생 관광으로 유명했다. 이런 개념 없는 행동으로 순식간에 대본영 전체에 도미나가의 소문이 쫙 퍼지자 어떤 병사도 그에게는 경례를 안 했다. 주위에서는 군인으로서 명예로운 최후를 맞으라며 할복을 권유했으나 그는 끝내 거부했다. 애국심 운운하며 자살특공대 만든사람이... 네가 하면 애국 내가 하면 자살

사실 카미카제 부대의 지휘관들 대부분은 전후에도 살아남았다. 도미나가는 아예 대놓고 적전도주를 해서 더 까일 뿐이다. 카미카제 부대 지휘관 중 해군 제1항공함대 사령관이었고 전후 할복 자살한 해군중장 오니시 다카지로 제독을 빼면 부대원들과 함께 한 사람은 해군 제5항공함대 사령관 해군중장 우가키 마토메 제독 뿐이다. 그나마도 오자와 지사부로 제독에게 "뒈질거면 지 혼자 뒈지지 왜 죄없는 부하들을 특공한답시고 끌고 갔나?"면서 까였다

1945년 2월 초, 그는 위궤양 진단서를 떼서, 직속상관인 육군 제14방면군 사령관 야마시타 도모유키에게 자기 행동이 적전도주가 아니었다는 인증을 받으러 갔다. 당연히 야마시타 장군은 빡쳐서 '부하를 버리고 도주하는 놈 따위와는 만나고 싶지도 않다'며 문전에서 박대해 그의 승인을 각하시켰다. 하지만 당시 필리핀의 상당 부분이 미군의 손에 들어가며 영인군이 인도차이나로 밀고 들어오니, 일본 육군은 찌질이 중장 1명에게 신경 쓸 틈이 없어 군법회의도 어영부영한 끝에 예비역으로 편입했다. 게다가 이미 이놈 상관인 인간 쓰레기 기무라 헤이타로가 한 행적 탓에 형평성을 고려해서라도 처벌이 힘들었다.

그러나 일본 육군 본부는 "적이 무서워 적전도주한 놈에게 본토에서 예비역으로 편하게 살라는 건 말도 안 된다"는 이유로 1945년 7월에 그를 현역으로 전격 복귀시켜 만주에 주둔한 관동군 육군 139사단장에 임명했다. 사실상 소련군과 싸우다 잡혀 죽거나 포로 생활을 하면서 고생 좀 해보라는 소리였다. 개념 없기로 소문났고 도미나가의 뇌물을 받아먹고 비호하던 군부에서조차 이런 결정을 내렸다는 건 도미나가의 행동이 일본군의 관점에서도 도를 넘어도 한참 넘어서였다.

그리고 도미나가는 만주 작전을 편 소련군이 만주로 밀고 내려오자 전투에 나섰으나 그냥 겁이 나서 싸우지도 않은 채 항복해 소련 육군에 체포되었다. 소련군과 일본군의 전력 차이를 생각하면 차라리 이게 옳은 행동이다. 이 인간은 겁나니까 무작정 항복한 거였지만, 그만큼 그의 부하들도 살아서 고향으로 돌아갈 가능성이 올랐다. 물론 소 뒷걸음 치다 쥐 잡은 격이니 크게 칭찬할 거리는 못된다.

이후 전범으로서 재판받아 소련의 수용소에 억류받았고, 하바롭스크굴라그에서 10년 가까이 수용소 생활을 했다. 그 뒤 소련-일본 간 국교 정상화로 포로 송환을 통해 1955년 일본으로 돌아왔고, 1960년 노환과 포로 수용소 생활의 후유증이 겹쳐 사망했다.

그런데 유일하게 항복한 장군이라서 대접이 좋았고 좋아하는 위스키를 실컷 마시다 그 후유증인 위궤양에 걸려 사망했다는 설도 있다. 이게 사실이면 정말 답이 없다. 하지만 소련 수용소에 갇힌 일본군 포로들은 별다른 원한이 없어서 [소련도 뜻밖에 (일본 군인들이 각오했던 것보다는) 괜찮은 대접을 했다]고. 해당 그림일기를 쓴 주인공도 139사단 출신이다. 소련인 배신자들 대우가 그야말로 지옥보다 조금 나은 수준이며 독일군 포로들도 사망자가 수십만에 이를 만큼 혹독한 대접을 받은 것과 달리 일본군 포로들은 초기 물자가 극히 모자라던 시절 등을 빼면 그래도 좀 나은 생활을 했다. 그렇지만 소련군도 나름 사람이라서 세균전에 가담한 인간 쓰레기들에겐 독일군 포로보다 더 혹독한 대우를 했는데, 731부대 실험 대상으로 러시아인들도 쓰였던 전례가 있어서였다. 그래서 그런 놈들은 대부분 수용소에서 뒈졌다

5 후대의 평가

일본에서는 무타구치 렌야, 스기야마 하지메와 묶여 삼대오물이라 부르고 태평양 전쟁을 패전으로 이끈 천하의 개쌍놈들 취급을 받는다. 한국에선 독립유공자 그 가운데서도 도미나가는 카미카제로 멀쩡한 항공 전력을 말아먹었고, 무엇보다 군 사령관이 적을 눈 앞에 두고 도망쳐서 남방전선 항공군을 완전히 무너뜨렸다. 옹호해줄 곳이 하나도 없는 점에서 무타구치 렌야와 함께 끊임없이 까인다. 엄밀히 따지자면 무타구치 렌야는 그보다도 병맛 쩌는 망언들과 전후에 자기 잘못이 아니라고 말한 뻔뻔함 때문에 까이는 게 더 많다. 그나마 이 인간은 상부에서 내려온 포로 학살 명령을 씹기도 했고, 멋대로 영국군 포로를 풀어 준 부하를 문책하지 않은 전례라도 있다.

결정적으로 이 인간은 할 줄 아는 게 하나도 없었다. 기본적인 업무소양이나마 있었던 두 사람과는 달리 정말 아무 것도 못했다. 무타구치 렌야의 경우 임팔 작전시 기생집을 차리고 놀았어도 초반에는 정해진 업무 시간에는 그런 대로 일했다지만 도미나가는 그런 거 없다. 오죽했으면 스기야마 하지메마저도 이 인간을 어디다가 둘까 고민했을 정도. 차라리 도미나가에 비하면 무타구치 렌야스기야마 하지메개념인으로 보인다.

최후의 순간에 옥쇄나 다름없는 명령을 받아 만주에서 싸우다 잡혔고 죽을 고생을 했다는 식으로 어이 없는 실드를 치는 사람도 있지만, 이 인간은 싸우긴커녕 소련군 온다는 소식에 바로 항복해 만주 전선을 순식간에 붕괴시켰다. 싸우지도않고 이긴 소련의 위엄 게다가 애초에 무타구치 렌야는 임팔 작전 수행 도중 도주했다지만 차라리 전선시찰을 명분이라도 삼은 데다가 부하가 멋대로 철수한 전력도 있다. 사실 엄밀히 따지고 보면 이것 역시 적전 도주였어도[4] 전후관계를 고려하면 사실상 후퇴나 철수에 가까웠다. 애초에 상부도 사실상 실패한 작전 취급했으나 본인이나 직속 상관이나 체면상 철수에 관해 언급만 안했지 어느 정도는 묵인도 했다. 물론 예비역에 편입하는 징계를 먹고 일본육군사관학교 교장으로 영전되기는 했지만...

그러나 이 인간은 일본군 입장에서 싸울 만한 상황임에도 대놓고 적전 도주를 하여 대본영의 심기를 거슬렸다. 필리핀 탈환전에서는 미군과 일본군의 병력만큼은 서로 대등했으나 질적인 고려는 빼더라도 전차는 3:1(1944년도 당시 미 육군 보병사단에는 최소 60대 이상의 셔먼 전차가 있었다.), 야포는 2:1 수준으로 미군이 우세했다. 항공기의 경우 육군끼리 비교하면 서로 비슷한 상황이나 필리핀 주위의 항공모함에 배치된 해군 항공대 전력을 고려하면 일본군이 상당히 불리하다. 그나마 이것이 일본군 입장에서는 있는 것 없는 것 모두 투입해서 끌어올린 전력이었고 방어전임을 고려하면 지더라도 적에게 큰 피해를 줄 수도 있었다. 위궤양이 명분이라지만 위스키기생을 챙겨 도주했다는 점에서 설득력이 매우 떨어지니 대본영어그로를 끌 만하다.

죄값 운운하는 것도 미국과 달리 소련은 적에게 포로로 잡힌 아군이라도 배신자 취급을 한 지라 이거 가지고 죄값을 치렀네 운운하기도 웃기다. 만일 미군에게 잡혔다면 무타구치 렌야가 불기소 처분인 정황상 그보다 더 나은 조치였을 가능성이 높다. 반대로 무타구치 렌야가 소련군에게 잡혔다면 그도 수용소 생활이었을 것이다. 게다가 싸우지도 않고 항복하는 바람에 전쟁이 더 쉬웠다는 공로로 매우 편하게 수용소에서 살았다. 오죽하면 일본어 위키도 수용소에 감금이란 용어 대신 투숙이라 했을까? 독립유공자님에게는 특별히 하바롭스크 굴라그 호텔을 선사합니다


5.1 또다른 모습

극도로 무능하고 뻔뻔한 데다 겁까지 많았지만, 적어도 최후의 일선을 넘지는 않았다.
때문에 사람 껍데기를 뒤집어 쓴 악귀들인 무카이 토시아키, 노다 츠요시, 다나카 군키치, 이시이 시로, 다치바나 요시오, 기무라 헤이타로 보다는 그래도 나은 대접을 받는다.

놀랍게도 참모본부 제2부장 시절에 중국 저장(절강)성 닝보(영파)를 방문하여 세균전을 놓고 이시이 시로와 그 부하들과 토의했을 때, "야, 이 미친 놈들아! 아무리 그래도 그건 아니지! 만약 그러면 민간인들은? 걔들은 사람 아니냐?"라고 호통쳤던 일화도 있다. 이는 필리핀에 주둔하던 제4항공군 사령관 시절에도 마찬가지였는데, 모든 일본군이 주민들에게 만행을 저지를 때 그의 부대만은 학살이나 약탈이 없었다. 멍청한 데다 부하들은 다 특공 보내고 도망칠 만큼 겁쟁이였지만 기본적인 선은 지켰다. 삼광작전 같은 개판 교리를 당당하게 내세워 민간인에게 폐를 끼쳐도 잘했다고 배짱 튕기고, 툭하면 민간인 살인, 강간, 약탈 등을 저질러댔던 조직이 구 일본군임을 생각하면 아주 이례적인 행동이다. 도미나가 말고도 민간인을 배려했던 군인은 있었지만, 이런 사람들은 소수이거나 직급이 낮았던 만큼 뭘 바꿔보려고 노력해도 이미 일본군 전체가 미쳐돌아가는 상황이었던지라... 도미나가처럼 자신이 할 수 있는 한도 내에서 움직이는 수 뿐이었다. 무책임함과 무능함 때문에 수많은 부하들을 사지로 몰아넣었지만, 적어도 민간인 학살은 막았으니 그 점에서는 훌륭하다.당연한 일을 한것일 뿐인데 훌륭하다는 표현이 나온다는게 일본군의 정체성을 알려준다.

더불어 마닐라 대학살 때도 기겁하면서 휘하 부대인 제4항공군이 맡던 지역의 학살을 강력하게 막고 다른 부대가 필리핀 사람들을 죽이러 오자 "우리랑 싸우자는 거냐?"라고 엄포를 놓아 못 건드리게도 했다. 그래서 필리핀에서도 좋게 평가하는 의견이 많다.

모두가 YES를 외칠 때 홀로 NO를 외치려면 엄청난 용기가 필요하다.
당시의 일본군은 악질 전쟁범죄들(강간, 포로학대, 학살 등)이 만연했고 대본영도 이를 묵인하거나 오히려 권장하는(...) 등 아주 막나가는 막장이었다. 이러한 전쟁범죄 금지 행적들을 보면 이 인간이 정말 앞서 설명한 겁쟁이 초특급 졸장과 동일인물인지 의구심이 갈 정도. 그만큼 일본군이 미쳐 돌아갔다는 이야기지만...


6 자식

장남 도미나가 야스시는 삼대오물인 아버지와는 완전히 반대로 모범적이고 훌륭한 군인이라 평가받는다. 그는 게이오기주쿠대학을 졸업한 엘리트라서 징집이 없었으나 태평양 전쟁의 패색이 짙자 본토를 지키러 육군 항공대에 자원 입대했다. 전쟁 발발의 원인이 어쨌든 자기네들 입장에선 본토인 그의 조국을 지키기 위한 전쟁이니, 자기가 일으킨 전쟁도 아니고 본국을 지키기 위한 참전이라 동기 자체는 군인으로서 훌륭했다. 그리고 1945년 5월에 아버지가 준 일장기를 들고 오키나와 전투에 출격했으나, 전세가 기울자 특공으로 22세의 짧은 삶을 마감한다.[5] 카미카제가 잘하는 짓은 절대로 아니지만 사령관인데도 충성심과 책임감을 쌈싸먹고 적의 앞에서 도주한 아버지와는 군인으로서의 자세가 하늘과 땅 차이였다. 그러나 그 책임감 가진(?) 일본군이 벌이던 학살과 약탈을 생각하면 우습게도 군인으로 실격인 그가 민간인 학살을 막던 개념인이라서 뭐라 할 말은 없다…


아버지와는 정반대인 인품의 도미나가 야스시를 보여주는 일화가 있다. 그가 특공을 나가기 직전에 101항공단의 한 참모에게 격려를 받았는데 무서워하는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혼자서만 당당한 모습을 보이며 출격했다. 그가 특공으로 산화한 뒤 그 참모가 "그 용감한 청년은 대체 누구였는가?"하고 물어보니 "그 도미나가 장군의 아들입니다"라는 전혀 예상 못한 대답을 듣자 놀라며 이 청년의 죽음을 아까워했다고. 하지만 카미카제도 뻘짓이었어
  1. 잘보면 눈이 사시다.
  2. 졸업하긴 했는데, 육사 시절과 육군대학 시절 성적이 형편없었다고 한다. 미야자키 시게사부로의 성적보다도 낮았었다. 문제는 능력은 하늘과 땅차이
  3. 쉽게 말하면 위가 헐어버리는 병이다. 당연히 술 먹으면 안 된다!다 나으면 먹으려고 했다면 아주 그나마 쉴드인데 전후사정을 보아하니 아무리 봐도 위궤양은 핑계다.
  4. 이걸 걸고 넘어질 수도 있지만 그러면 사토 역시 적전 도주를 적용받는다.
  5. 아버지인 도미나가 교지가 수많은 젊은이들을 특공으로 산화시켰던 걸 생각하면 이건 운명의 장난이라 해도 무방하다. 도미나가가 특공으로 수많은 이들을 하늘나라로 신속하게 내보냈는데, 정작 그의 아들도 특공 때문에 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