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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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1] Marcus Tullius Cicero (기원전 106년 1월 3일 ~ 기원전 43년 12월 7일)

이탈리아어는 라틴어의 단수 탈격에서 유래된[2] 치체로네(Cicerone)라고 부르고 영어권에서는 시세로(Cicero)라고 부른다. '키케로'는 당시 기준으로 봐도 굉장히 특이한 이름이었다고 한다. 이 이름에 대해서 플루타르크는 키케로 집안 사람들의 코가 마치 병아리콩(chickpea)(라틴어로 cicer)처럼 생겼기 때문에 만들어진 이름이라고 설명했으나, 집안 사람들이 병아리콩 농사나 판매에 종사했을 가능성이 더 높다.

1 전반적인 생애

고대 로마 공화정 말기의 대표적 철학자이자 변호사였으며 원로원 의원을 역임하였고 집정관에도 선출된 적이 있는, 명실공히 로마 공화정을 대표하는 인물. 당대 최고의 문필가 중 한 명이었으며 라틴어를 공부하는 입장에서는 역사적 공적에 관계없이 반드시 이름을 아는 주적사람이기도 하다. 우리가 배우는 고전 라틴어 자체가 키케로의 저작을 기준으로 하고 있기 때문.[3][4] 또한 현대법의 근간이 되는 로마법을 공부하다보면 필연적으로 들어보는 이름이기도 하다. 안타깝게도 ROME이나 로마인 이야기같은 픽션에서는 잔머리나 굴리는 찌질이로 나오는 경우가 은근히 많다

또한 위 사진에 나오는 석재 흉상은 석고상으로 복제되어 한 때 한국의 입시미술에 단골로 나오기도 했다. 요즘도 미술학원에 가면 꼭 있다.

2 청년기

비록 귀족 태생은 아니었지만 상당한 재력을 가진 평민 기사의 아들로 태어나서 남부러울 것 없이 유복하게 자랐다. 학생이었을때는 누구나 예상하듯 매우 총명한 학생이였으며 당시 로마 귀족이 받을 수 있는 가장 훌륭한 교육을 받은 사람이었다. 다만 평민 출신이라서 또래의 유망한 귀족 청년보다 정계 진출 및 출세에는 상당한 애로사항을 겪었다고 한다.

그리고 술라 밑에서 조금 일해본 적도 있었는데 그가 워낙 군인 생활에 흥미가 없었으므로[5] 곧 그만두고 변호사로서 활동을 시작했다. 기원전 80년, 아직 신출내기 변호사일 때 섹스투스 로스키우스의 아버지 살해 혐의를 변호하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당시 권력의 정점에 있던 술라를 간접적으로 비판하기도 했다. 그 이후에는 잠시 변호사 활동을 접고 아테네, 로도스 등지로 가 당대 최고의 학자들 밑에서 공부를 계속한다.[6]

3 장년기

3.1 정계 진출

그 뒤 기원전 75년, 31세의 나이로 재무관으로 선출되어 시칠리아에서 일했는데 그가 워낙 일을 잘 처리해 시칠리아 속주민들의 마음을 산다. 그래서 시칠리아 사람들은 당시 부정축재로 유명한 총독 가이우스 베레스를 키케로에게 고발해 줄 것을 의뢰하였고 키케로는 이 의뢰를 맡은 변호사가 되어 이것을 로마 재판에 고발한 뒤 훌륭한 변론으로 베레스의 유죄판결을 이끌어 낸다.

이렇게 탄핵을 성공적으로 해내어 인지도를 높였는데, 그 방법이 당시로선 특이했다. 보통 로마의 법정에선 길고 긴 서두를 끝낸 뒤에야 본론에 들어갔는데 키케로는 그런 거 다 무시하고 곧장 본론으로 들어갔다. 베레스가 고용한 변호사는 로마에서 유명한 변호사로 길고 긴 웅변에 능해 베레스와 친한 정치인들이 임기가 될 때까지 재판을 질질 끌 생각이었는데, 키케로는 이를 간파하고 그냥 처음부터 강공을 한 것이다. 결국 상대방의 변호사는 대답도 거부하고 찌질거린 끝에 베레스는 야반도주 해버린다. 웃긴 건 키케로를 죽게 만든 안토니우스에게 찍혔기에 베레스도 재산을 몰수 당하고 비참하게 죽어버린다(...).

키케로는 이로써 변호사로 유명해졌는데 이런 유명세 뿐만 아니라 본인의 뛰어난 능력도 있어서 로마인의 "명예로운 경력"을 순조롭게 밟아나간다. 그는 31세에 재무관이, 37세에 안찰관이, 40세에 법무관이 된 것이었다. 그 뒤 마침내 43세에 집정관으로 선출된다. 동시대의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31세에 재무관이 35세에 안찰관이 38세에 법무관이 41세에 집정관으로 선출된 것에 2년 늦긴하지만 키케로 역시 대단히 순조로운 출세를 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3.2 카틸리나 탄핵

집정관이었을 때인 기원전 63년에 카틸리나의 반란을 진압한 것으로 유명하다. 이때 그는 '문으로 무를 제압했다'며 자화자찬한다. 그런데 이러한 반란의 진압은 다소 무리한 것으로 카틸리나가 반란을 계획하고 있었으나 이것을 입증할 명확한 증거가 없었다. 게다가 카틸리나가 반란을 일으킬 D-데이가 다가오고 있다는 소문만으로 키케로는 서둘러 그를 재판없이 처형하였는데 이것은 '로마 시민을 재판없이 처벌할 수 없다'는 규정을 어긴 것이었다. 그러나 당시엔 카틸리나에 대한 미움과 위기 의식이 팽배했으므로 키케로가 이렇게 한 것을 '구국을 위한 결단'이라며 칭송하는 분위기가 대부분이었으며 이것을 부당함을 공개적으로 지적한 뒤 '카틸리나를 재판이 끝날 때까지 군단병의 감시에 둘 것'을 제안한 카이사르는 이런 취지의 연설이 끝난 뒤 성난 군중에게 몰매 맞아 죽을 뻔 하였다.

3.3 추방

하지만 카틸리나를 재판없이 처형하고 그의 추종자를 몰살한 뒤 냉정을 되찾은 로마 군중들은 자신들이 무리하게 법을 어기면서 그렇게까지 할 수 있나라는 생각으로 후회를 하게 되었고 이 때문에 키케로는 물러난 뒤 이렇게 로마법을 어긴 죄를 묻게 된다. 카이사르가 삼두정치를 구성한 뒤 집정관으로 선출된 해에 키케로는 이에 대한 재판을 받게 되고 다음해에 재산 몰수와 추방이라는 매우 강력한 처벌을 받게 되는데 이때 키케로는 아티쿠스에게 보낸 편지에서 '자살을 하려 했으나 자네의 청원으로 간신히 단념했네...그러나 내 미래에 무슨 희망이 있는가'라고 쓸 정도로 크게 낙담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키케로가 끝장이라고 절망한 것에 비해 의외로 별것 아니어서 키케로는 단 일년 만에 사면되어 로마로 복귀하고 몰수된 재산도 모두 돌려받는다. 키케로는 카이사르, 폼페이우스로 구성된 삼두 정치파와 원로원의 수구파인 옵티무스파와 두루두루 친했는데 이러한 인맥이 빛을 발한 셈.

키케로가 이렇게 양대 파벌에 적대심을 사지 않은 이유는 그가 철저한 헌법주의자였기 때문이었다. 당시 로마 헌법은 민중들의 권리를 지키는 것과 오랜 귀족의 기득권을 유지하는 것이 섞인 상태였는데 따라서 키케로의 로마헌법을 중시하겠다는 태도는 로마 민중들의 권리를 중시하겠다는 삼두 정치파와 전통 귀족의 기득권을 보장하는 낡은 체제를 고수하는 옵티무스파 양쪽 모두에 통하는 바가 있었다. 또한 키케로 역시 자신의 신념을 고수하는 쪽이라 양쪽 파벌에 적극적으로 가담하지는 않았다.

이러한 점 때문에 많은 이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카이사르는 폼페이우스, 크라수스 이외에 키케로를 다른 한명의 삼두정치로 끌어들이려고 하였다. 만일 키케로가 이에 응했다면 삼두 정치가 아닌 사두 정치가 되었을 뻔 하였는데 키케로가 거부함으로써 실현되지는 않는다. 키케로가 거부한 이유는 삼두 정치가 실력자들끼리 야합한 뒤 로마를 좌지우지 하겠다는 소수에 의한 독재였으므로 헌법주의의 공화국 성격에 맞지 않았기 때문.

3.4 정계 복귀

키케로는 복귀한 이후 정치를 적극적으로 해볼까 하였으나 삼두 정치파와 옵티무스파 간의 치열한 헐뜯기로 인해 키케로의 이상적인 공화정(즉, 원로원끼리 사심없이 단결하여 나라를 위해 일하는)의 실현을 위한 노력은 소용없어 보였고 이 때문에 낙담한 키케로는 저술 활동에만 전념한다.

이러한 중립적인 성향으로 인해 카이사르가 루비콘 강을 넘어 쳐들어와 폼페이우스와 내전을 시작하자 키케로는 잠깐 어느 쪽에 붙을지 공황에 빠지기도 하였다. 그는 심정적으로 폼페이우스 파에 기울어지긴 하였는데 비록 이들이 그들의 사욕을 채우기 위해서이긴 하였으나 어찌되었건 이들 옵티무스 파는 기존의 체제를 고수하는 입장이었기 때문. 그러나 적극적으로 가담하지는 않다가 스페인에서 카이사르가 고전한다는 말을 듣고는 옵티무스 편에 서기로 하고 그들이 있는 그리스를 향해 떠난다. 이때 키케로가 가장 사랑하는 딸 툴리아의 남편은 카이사르 편에 섰는데, 이를 두고 폼페이우스가 "당신 사위는 어디 있소?"라고 비꼬자 "당신 장인과 함께 있소."라고 맞받아쳤다고 한다.[7]

그리스에서 카이사르가 이들을 격파하고 승리자가 되자 키케로는 자신이 옵티무스 편에 선 것에 대해 대단히 후회하며 친구인 아티쿠스에게 '내가 당시 저지른 일에 대해 내 자신도 믿을 수 없네. 내 정신이 잠깐 이상해졌던 모양이야'라는 편지를 쓰며 심하게 자신을 질책한다. 그 뒤 키케로는 이탈리아로 돌아와 개선장군인 카이사르가 귀국했을때 멀리서 지켜보았으나 그를 엄청나게 많은 관중 속에서 발견한 카이사르는 그를 자신의 곁으로 부른 뒤 그와 함께 나란히 말머리를 하여 로마로 귀환하였다고 한다.

카이사르는 대인배였기 때문에 자신과 대립한 인물을 처벌하지 않았고[8][9] 키케로가 옵티무스 편에 선 것에 대해 아무런 책임을 묻지도 않았다. 그 때문에 카이사르가 독재했을 때에도 키케로는 원로원 의원으로써 지속적인 정치활동을 할 수 있었다. 키케로는 카이사르가 공화정을 지속해 주길 바랐으므로 많은 활동을 공화정 옹호와 관련되어 했으며 이런 입장을 보이는 많은 저서를 쓰기도 하였다.

카이사르는 내전에서 승리한 이후 독재관이 되었으나 그가 제정으로 갈 것을 공식적으로 천명한 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아직 공화정에 대한 희망은 남아있는 상태였었다. 카이사르가 종신 독재관이 되면서 제정으로 가려는 행보가 짙어지긴 하였으나 술라 역시 종신 독재관이 되었던 선례가 있었으므로 이것이 그다지 놀랍게 받아들여지지는 않았다. 게다가 카이사르는 옵티무스와의 대결에서 그들의 헌법을 지키지 않는 태도를 여러차례 지적하면서 어느 정도의 헌법주의자의 모습을 보여오기도 하였다. 키케로는 카이사르의 이러한 점 때문에 카이사르도 술라처럼 종신 독재관을 하다가 최종적으로 공화정으로 복귀시켜 줄 것에 대한 기대를 어느 정도는 품고 있었다.

4 노년기

4.1 카이사르 암살 이후

카이사르가 독재로 가는 행보에 실망을 품은 젊은 공화주의자들(브루투스, 카시우스 등)은 카이사르를 암살한 뒤 공화주의자로 유명했던 키케로에 연락을 하였다. 키케로는 암살에는 가담하지는 않았으나 이들을 연락을 받은 후엔 이들 브루투스 파의 실질적인 리더 역할을 하게 되었는데 그 이유는 키케로만이 이러한 공화주의자들의 입장을 대변해 줄 수 있는 정치적인 영향력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키케로와 카이사르를 암살한 공화주의자에겐 이들을 뒷받침해줄 수 있는 군사력도 없었으며 또한 비겁하게 암살을 한 점 때문에 명분도 그다지 강력하지 않았다. 또한 내부적으로는 민중들의 생활을 개선하기 위해 오랫동안 민중파로 활동하고[10] 대외적으로 엄청난 군사적 업적을 쌓은 카이사르는 민중들에게 엄청난 인기를 누리고 있었기 때문에 그를 암살한 공화주의자들에 대해 민중의 지지도 높지 않았다. 군사력도, 명분도, 그리고 민중의 지지도 약한 상황에서 키케로와 공화주의자들이 로마 원로원을 장악할 가능성은 희박하였다.

그러나 카이사르 측에서 키케로와 필적할 정치가가 존재하지 않았고 그나마 상대할 수 있었던 안토니우스 정도였으나 키케로와 비교했을때 정치가로서는 능력도 경력도 도저히 따라올 수 없을 정도로 차이가 났기 때문에 키케로는 카이사르 암살 이후 어느 정도의 영향력을 발휘할 수는 있었다. 따라서 키케로는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 및 그 지지자들간 갈등 및 자신의 지위와 안토니우스와의 친분을 이용해(이때까지 키케로와 안토니우스의 사이는 좋은 편이었다.) 카이사르를 암살한 젊은 공화주의자들의 사면을 이끌어 내고 이들에게 총독의 지위를 주어 군사력을 갖추게까지 하는데 성공한다.

4.2 필리피카이

키케로는 이렇게 하여 자기 진영의 사람들을 보호한 뒤 원로원을 움직여 카이사르의 남은 군대와 세력을 이끌고 있었던 안토니우스를 '국가의 적'으로 선포하는데 성공한다.

이때 키케로는 원로원에게 안토니우스를 국가의 적으로 선포하게 해달라고 요청하는 과정에서 그를 "저 검투사의 육체에 두뇌라고는 없는" 운운하며 신랄하게 깠다. 이 연설문은 카틸리나 탄핵에 버금가는 명문장[11]이라고 하지만 그걸 듣고 있는 안토니우스의 심정이 어떠했을지는...

그렇게 하여 명분을 확보한 다음 카이사르의 군사력의 남은 절반을 이끌고 있었던 19세의 젊은 애송이인 옥타비아누스에게 안토니우스를 소탕하는 임무를 부여한다. 그런데 이것은 대실수였고 옥타비아누스는 안토니우스와 소탕하러 떠나 안토니우스의 군대와 맞서긴 하였으나 서로 싸우는 대신 그와 연합한 뒤 같이 로마로 돌아와 군사력으로 장악하였기 때문이었다. 키케로는 설마 19세에 불과했던 옥타비아누스가 양아버지 못잖은 정치적인 야심과 능력을 갖고 있었을 줄은 꿈에도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다.

키케로가 안토니우스를 국가의 적으로 선포한 시점에서 다른 친 공화주의자인 장군에게 안토니우스를 진압하게 하였다면 키케로가 승리할 수도 있었을지도 모른다. 예를 들어 키케로의 수완으로 많은 카이사르의 암살범들이 총독으로써 군사력을 보유하게 되었는데 이들을 이탈리아로 군대와 함께 불러들여 안토니우스를 소탕하는 임무를 맡길 수도 있었다. 키케로는 옥타비아누스가 젊다는 것 때문에 그가 그저 원로원이 시키는 대로 할 것이라고 예상했고 때문에 그가 배신하고 원로원에 칼을 들이대자 속수무책으로 당했던 것이었다.

하지만 내막을 들여다보면 이상할 일도 아니다. 키케로는 옥타비아누스가 10대 소년에 불과하였으므로 이러한 점을 생각할 능력도 없을 것이라고 과소평가했을 것이다. 또한 옥타비아누스가 키케로를 평소 아버지라 부르며 고분고분하고 정치적 야심이 없는 10대 젊은이인 것처럼 쇼를 한 것도 이러한 오판을 하는데 영향을 주었다. 그리고 안토니우스가 반란을 성공시키기 위해서는 카이사르의 이름을 내세우게 될 텐데 이에 맞설 수 있는 대항마는 역시 카이사르가 자신의 후계자로 지명한 옥타비아누스밖에 없다. 당시 로마군은 사실상 카이사르의 사병이나 다름없었을 테니 안토니우스의 선동질에 넘어가지 말라는 보장이 없고, 다른 암살자들은 총독 직위에 있긴 했지만 당연히 그 총독으로서 자리를 비울 수는 없었을 것이고 배신자라는 낙인 때문에 함부로 사령관 자리에 앉았다가는 암살당할 가능성도 있다. 그렇다보니 당시 키케로의 입장에서는 옥타비아누스를 컨트롤해서 안토니우스만 격퇴할 수 있다면 이후에는 어린 옥타비아누스의 실권을 뺏기만 하면 되니 안심했다고 해도 무리는 아니다.

문제는 옥타비아누스가 아버지 카이사르 못잖은 능력자였다는 점이었다. 이미 옥타비아누스는 이 원정의 의미와 득실관계를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었고 이를 완벽하게 실행하였던 것. 한마디로 옥타비아누스가 키케로에 반기를 든 이유는 옥타비아누스의 군사력과 정치력 모두 카이사르의 이름을 물려받은 것 때문이었으므로 친 카이사르파의 수장이었던 안토니우스와 싸우는 것은 자신의 기반을 약화시키는 최악의 수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또한 로마엔 군사력이 없었으므로 안토니우스와 연합한 뒤 로마를 점령하면 단숨에 안토니우스와 함께 로마의 최고 권력자가 될 수 있었다. 즉 키케로에 항명하면 자신의 기반이 깎이는 것도 막고 단숨에 권력의 정점에 설 수 있는 일석이조의 상황인 셈. 키케로가 이러한 상황에 있는 자에게 안토니우스의 토벌을 맡긴 점은 대단히 이해가 안가며 또한 이 점을 정치판에 오래 굴렀던 키케로가 예측 못한 것은 상당히 의아한 일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치명적인 실수였다.[12]


이들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가 로마를 장악한 뒤 안토니우스는 키케로를 암살 1순위에 올린다. 안토니우스는 키케로가 그를 표적으로 삼아 탄핵한 것도 있고 하여 그를 미워했다. 그리고 키케로는 공화주의자 중 가장 거물이라 그를 제거하면 더 이상 그들을 대적할 만한 인물은 없었다. 이때 옥타비아누스는 평소 아버지라고 부르던 키케로의 처형에 찬성했다(...).

4.3 최후

플루타르쿠스가 쓴 키케로의 열전에 따르면 키케로의 최후는 이렇다. 키케로를 체포하러온 호민관 포필리우스, 백부장 헤렌니우스와 병사들이 그의 자택에 쳐들어오자 집 안에 있던사람들은 그가 어디에 있는지 모른다고 대답했다. 그 때, 퀸투스 키케로[13]의 해방 노예인 필롤로구스가 키케로의 가마가 오솔길을 따라 바다를 향해 갔다고 말했다. 포필리우스는 우회하여 달려갔고, 헤렌니우스는 숲길을 따라갔다. 추격당한다는 것을 안 키케로는 그 자리에 가마를 멈추도록 했다. 키케로는 왼손으로 턱을 만진채 그를 죽일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키케로가 가마 밖으로 머리를 내밀자 헤렌니우스는 그 목을 치고 손도 또한 잘랐다. 헤렌니우스가 그를 죽이는 동안 주위의 사람들 대부분은 자신의 얼굴을 가렸다. 플루타르쿠스 말고도 키케로에 대한 다른 기록이 있어서 키케로의 최후는 조금씩 차이가 있다.

살생부에 올랐던 인물들은 목을 광장에 전시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는데 키케로의 경우는 안토니우스를 깠던 글을 쓴 손까지 잘려서 전시되었다고.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훗날 옥타비아누스의 손자가 키케로의 책을 읽다가 옥타비아누스에게 들켜 벌벌 떨때 옥타비아누스는 키케로의 책을 그 자리에서 주욱 읽은 뒤 손자에게 "그는 교양있는 웅변가이자 진정으로 나라를 사랑한 애국자였단다."라고 말했다. 옥타비아누스도 키케로의 지성과 애국심은 높게 산 모양이다.

5 평가

공화주의자로써 공화정을 지키려고 애썼지만 결국 그 뜻을 실현하지 못했다. 하지만 정치적으로는 실패했으나 문학, 철학면에서는 많은 업적을 남겨 로마를 대표하는 철학자, 문학가로 아직도 그 이름을 떨치고 있다. 내용 자체는 그리스에 비해 아주 얕고 천박하다는 혹평도 있으나, 키케로는 로마인으로서는 '그리스나 동방(이집트 포함)에서 수입한 학문'이 아닌 로마인으로서 로마의 철학과 문학을 하려고 시도한 최초의 인물로서 높게 평가되고 있다. 또한 플라톤의 계보를 잇는 이상주의적 스토익 철학과 그 반대로 매우 현실적인 정치학 및 수사학을 결합하는 어려운 일을 해냈으며, 그 결과 공익을 추구하는 공화정 로마만의 철학을 보여주었다. 그에 그치지 않고 실제로 자신의 철학에 맞게 활발한 정치적 활동을 벌였는데, 위인 중에도 키케로처럼 덕업일치와 출세와 재산과 화목한 가정까지 전부 이루어낸 경우는 정말 드물다. 또한 자신의 철학을 설명하는 글 자체도 엄청나게 잘 썼다... 비슷한 인물로 카토가 있으나, 그는 저술을 많이 남기지 않은 편이다.

변호사답게 길고 화려한 문장을 자주 썼으며 그의 문장은 훌륭한 라틴어의 표본으로 쓰인다. 특히 카틸리나의 반란사건 때 한 연설인 "카틸리나 탄핵"은 키케로 문장의 걸작으로 꼽히며 오늘날 라틴어를 배우는 유럽의 고등학생들의 머리를 아프게 하는 문장이기도 하다. 그러나 연설 말고 철학적 저술을 읽어보면 논리정연하기 그지없으며 수사학에 정통한 변호사답게 풍부한 예를 제공하여 비교적 머리를 덜 쥐어뜯게 되는 편이다. 또한 변증법적 구조를 주로 사용하여 철학적 결론을 제시하는데, 그 과정이 논리적이라서 따라가다 보면 플라톤 왈 아리스토텔레스 왈이 그다지 어렵지 않게 느껴진다. 시오노 나나미가 최고로 치는 카이사르의 글은 비록 훌륭한 간결체와 흡입력 덕에 술술 읽히는 편이긴 해도, 정치가 내지는 군인으로서 쓴 글이라 키케로처럼 깊이있는 주제를 쉽게 전달해주는 그런 내공은 좀 부족하다.

또한 자뻑이 굉장히 심했다.(…) '신참자'로써 기사계급에서 출발해 원로원 의원은 물론이고, 공화국의 집정관까지 지냈기에 이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히 강했으며 평소에도 자신의 출신 때문에 남들과 비교되는 것을 두려워했다. 또한 키케로의 정치적 숙원은 자신의 출신인 기사계급과 원로원 주류인 귀족계급 사이의 갈등을 해소하는 것으로 공화정에 안정을 찾아오는 것이였는데, 이는 결국 공화정이 무너지면서 실현되지 못한다.

시오노 나나미율리우스 카이사르를 높이려고 키케로를 내리깎아서 좀 문제가 되었다. 로마인 이야기에서 묘사가 된 키케로는 우유부단하고 항상 친구에게 편지보내 신세한탄이나 하는 찌질이고, 카이사르나 아우구스투스에 비할 수도 없는 소인배다. 역시 공인은 SNS를 조심해야 합니다 철학자들이나 스토익계 신학자들, 공화정 로마사 학자, 라틴어 학자들 및 공리주의 정치학자들이 들으면 기절해 쓰러질 일이고 시오노 나나미를 학계에서 혐오하는 이유에는 이 점이 포함된다.

키케로가 어느 정도 성격적인 약점을 보이긴 하였으나, 오히려 편지에 나타나는 정이 많고 고민하는 모습에서 인간미가 느껴진다고도 할 수 있다. 또한 그의 수많은 다른 장점에 비하면 이러한 약점들은 사소한 것이었으며, 사적인 서간에서는 우는 소리를 하긴 하였으나 그러면서도 실제로 할건 다했다. 특히 카이사르 사후 군사력도 없고 민중의 지지도 약한 상황에서 자신의 정치력을 바탕으로 안토니우스를 멸망 직전까지 몰아붙인 수완은 대단한 능력이었다. 만일 옥타비아누스에 대해서 오판만 하지 않았더라면 키케로가 로마를 공화정으로 복귀시킬 가능성도 있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자신의 이상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현실주의자였고 옵티무스와 카이사르와 대결하던 시절엔 옵티무스의 능력에 대해 회의를 느끼고 그들에게 적극적으로 가담하지 않을 정도로 정치적 식견도 나쁘지 않은 편이었다.

즉 카이사르 사후 망할 운명인 로마 공화정을 혼자의 힘으로 거의 복구 일보 직전까지 만들어 놓은 것은 키케로가 일개 찌질한 정치가였다면 절대 불가능한 일이었다. 때문에 키케로를 학계에선 대 정치가의 한 명으로 인식하고 있다. 다만 수중의 군사력이 없는 정치가로서의 한계를 보여주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키케로를 '위대한 시저 각하에게 대항한 입만 산 키보드 워리어, 찌질이'로 묘사 한 것은 시오노 나나미의 주관적인 견해뿐만은 아니며, 시오노 나나미보다 200년도 전 독일에 서 이미 등장한 해석이다. 여기 참조. 그러나 이를 역설적으로 보자면, 시오노 나나미의 역사관이 200년 전 사관에서 발전이 없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중세 시대에는 '이교도였지만 위대한 스토익 철학자 키케로' vs '악의 축 시저' 구도였다는 사실을 보면 역사적 해석은 시대와 개인의 관점에 따라 엎치락뒤치락하는 법이다...

드라마 ROME에도 키케로가 이상은 높으나 그것을 실현할 수 없는 문약한 정치인으로 나 오는 것은 위에 언급된 사관의 영향이다. 근데 이 배우가 작전명 발키리에서는 히틀러로 나온다

콜린 맥컬로마스터스 오브 로마(Masters of Rome) 시리즈에서는 시대의 변화를 느끼지만 마지막으로 공화정을 지키려고 애쓰는 지사로 나온다. 마지막에 안토니우스의 부하들이 시체의 혀를 뽑고 왼손과 오른손을 헷갈려서 두 손을 다 잘라버리는 장면이 압권.[14]

로버트 해리스의 로마사 3부작에선 주인공이다. 그래서 키케로 시리즈라고도 부른다. 단 화자는 키케로의 노예이자 친구였던 티로. 젊어서 변호사 겸 의원일 시절부터 시작하는데 자신의 지위를 향상시키려 노력하는 야심있는 정치가인 동시에 불의를 두고 보지 못하는 면도 잘 표현되어 있다.

남아있는 서간과 행적을 보면 개인적으로도 성격이 괜찮은 사람이었다. 정적인 카이사르와도 개인적으로는 친구로 지낼 정도였고, 형제간 우애도 좋았으며 여자 문제 없이 아내에게 충실했고 자식들을 몹시 아꼈다. 티로를 비롯한 노예들과도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 비록 공문서등에선 노예의 버릇을 바로잡기 위해선 잔혹해야 된다고도 얘기했지만, 아들에게 남겨주기 위해 집필한 'De officiis(의무에 관하여)'에서는 노예에게 잘 대해주는 것이 인간으로서의 미덕이며 '그 불운하고 가난한 자들에게 일을 시킬 때에는 반드시 예의바르게 권할 것이며, 상응하는 보상을 반드시 주어야 한다'고 일렀다. [15] 또한 티로가 몸이 아프자 걱정해서 의사도 보내주는등 아랫사람에게 매우 친절했다. 이는 공화정 말기~제국 초기의 귀족들 사이의 특징이기도 했는데, 당시 그들은 자신의 노예들에게 잘 대해주는 것이 교양과 명예를 잘 보여주는 행동이라 생각했다. 티로의 경우는 단순히 키케로의 노예일뿐 아니라 친구이자 비서이기도 했는데 키케로가 말하는걸 뒤쳐지지 않고 적을수 있었을뿐 아니라 키케로가 연설문을 작성하는데에도 도움을 주기도 했다[16]. 티로가 해방된뒤에 토지를 사자 키케로는 그에 대해 축하하는 편지를 썼고 티로도 꾸준히 키케로와 그의 가족을 도왔다. 티로가 과로로 쓰러지자 키케로는 이에 의사도 보내고 하루에 편지를 3통이나 쓸 정도로 그를 걱정했다. 티로는 키케로 사후 그의 열전을 작성했다고 하고 100세까지 살았다고 한다.

개인적으로 클레오파트라를 매우 싫어했다고 한다. 그 계기는 클레오파트라가 선물을 보내주겠다고 하고 안 보내주었기 때문이라고.(...)

그의 저작인 최고선악론은 20세기에 약간의 마개조를 거쳐서 Lorem Ipsum이라는 샘플 텍스트로 쓰이고 있다.

6 기타 매체에서

사극 ROME에서는 로마인 이야기마냥 찌질하게 나온다. 정확히는 대부분의 업적이 날아가버렸고 하는 일 마저도 역사상 저질렀단 오판은 그대로 드러내는 다소 무능한 인물처럼 묘사되었다. 폼페이우스와 비슷한 연배인데 좀 심하게 동안으로 나와서 오히려 카이사르보다도 어려보이는건 덤. 다만 최후는 상당히 멋지게 각색되었는데 자신을 죽이러 온 티투스 풀로에게 그 유명한 풀로가 오다니 영광이라고 말하면서 풀로를 막아서려는 노예를 타이르고는 자유민으로 만들어주고 의연히 죽음을 받아들이는 모습을 보여준다. 다만 죽기 직전 급하게 브루투스에게 서신[17]을 보냈는데 이를 가지고 가던 전령이 루키우스 보레누스의 가족들과 엮이다가 이를 흘리는 바람에 루키우스[18]의 장난감(...)이 되어버리는 결말을 맞는 굴욕을 당하기도 했다.

7 한국에서 번역된 책 목록

  • 노년에 관하여, 우정에 관하여(천병희 역)
  • 국가론(김창성 역) De Re Publica
  • 키케로의 의무론(허승일 역) De Officiis
  • 수사학(안재원 편역) Partitione Oratoria
  • 법률론(성염 역) De Legibus
  • 키케로의 최고선악론(김창성 역) De finibus bonorum et malorum
  • 신들의 본성에 관하여(강대진 역) De Natura Deorum
  • 연설가에 대하여(전영우 역) De Oratore
  • 키케로의 노년에 대하여(정윤희 역)
  • 설득의 정치(김남우 외 역) - 주요 변호연설들, 탄핵연설들의 발췌역이다.
  • 투스쿨룸 대화(김남우 역) DISPUTATIONES TUSCULANAE
  1. 세속 라틴어로는 '치체로'라고 읽는다.
  2. 라틴어에서 유래된 이탈리아어 단어 대다수가 그 라틴어 단어의 단수 탈격이다.
  3. 거기다가 보통 키케로를 상고 라틴어와 고전 라틴어를 나누는 기준으로 친다. 희한하게도 여기에 대한 반론은 존재하지 않는다.
  4. 타이포그래피 쪽에도 좀 이상한 족적을 남겼다. Lorem ipsum이 그의 최고선악론 본문을 마개조(...)한 물건이기 때문.
  5. 당시 로마 젊은이의 명예로운 경력의 최초 과정은 바로 군사 호민관이었는데 키케로는 술라 밑에서 이 일을 하였다. 군사 호민관은 코호르스의 지휘관으로, 6개의 백인대를 지휘하는 요즘으로 치자면 대대장 비슷한 직위고, 1 코호르스의 지휘관은 군단장 부재시 군단 지휘를 맡는 부군단장급 직위다. 공화정 시절에는 시민들이 선거로 뽑았으며, 주로 공직에 첫발을 내딛은 20 대의 젊은 귀족이나 유력자등의 차세대 유망주들이였다. 그리고 제정 시절에는 황제가 임명하는 것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6. 이는 술라로부터의 정치적 보복이 두려워서 그랬을 가능성이 높다.
  7. 폼페이우스는 카이사르의 사위이기도 했다.
  8. 실제로 카이사르는 관용(클레멘티아)이란 말을 집권 시 구호로 삼고 화폐에 새기기도 했다. 이에 비해 아우구스투스가 황제에 취임하면서 내건 구호는 평화(팍스)였다. 미묘한 차이.
  9. 이 관용에 대해 키케로는 당신의 관용이 많은 생명을 구한다(clementia tua multas vitas conservat)라고 칭찬했는데, 드라마 추노의 오프닝 곡 '바꿔'의 첫 가사로도 쓰였다.
  10. 포에니 전쟁에서 얻은 과실들을 대부분 원로원파 귀족들이 독점하고 이 전쟁에 참가했던 군인(=평민)들은 전쟁 참가 때문에 자신의 토지는 황폐화되었고 또, 해외에서 수입한 식량으로 인해 파산하여 도시 빈민이 되다시피 하였다. 이런 현실의 부조리 때문에 로마의 평민들은 민중파 정치인들을 호민관으로 밀어서 토지를 분배하는 법을 만들게 하였으나 대부분은 원로원파에게 박살났다. 하지만 현실을 보지않고 이익만 탐하던 원로원파의 만행은 카이사르를 낳았도 결국 카이사르가 민중파로서 최후의 승자가 되었다. 당시 카이사르가 높은 인기를 차지했던 데에는 이런 이유도 있었다.
  11. 아테네 연설가 데모스테네스가 마케도니아의 필리포스 2세를 탄핵한 연설의 이름을 따'필리피카이(필리포스 탄핵)'이라고 부른다. 이는 안토니우스가 필리포스와 같은 독재자임을 의미한다.
  12. 물론 위에서도 나왔듯이 옥타비아누스를 사령관으로 세우지 않았으면 군대 자체가 소멸되거나 대신 세운 사령관이 암살될 우려도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리고 키케로도 옥타비아누스를 감시하기 위해 자기 편 사람들을 보내지 않은 것은 아니나 이들은 전원 전투 중 사망하였고 옥타비아누스를 제지할 수단이 남지 않게 되었다. 물론 이들이 사망한 이유는...
  13. Quintus Tullius Cicero(기원전 102 – 기원전 43). 키케로의 남동생으로 군인이자 정치가.
  14. 1부가 로마의 일인자, 2부가 풀잎관으로 번역되었다. 원래는 7부작 완결.
  15. 무리도 아닌 것이, 애초에 키케로는 '인간과 동물의 차이점은 인간이 친절과 연민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라고 쓴 이상주의자였다. 다른 저작도 읽어보면 대체로 도입부에 큰 이상을 세운 후 본론에서는 이걸 어떻게 현실로 구현할 수 있을지 현실현실하게 전략을 세우는 모습이 많이 보인다. (...)
  16. 사람이 말하는 속도로 글을 썼다는 이야기. 이런 이유로 오늘날 키케로의 저작이라고 전해지는 작품들은 사실 키케로의 것이 아니라 티로의 것이라는, 농담 섞인 주장도 있다.
  17.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가 동맹을 맺었으니 대비해야 한다는 서신. 이 서신을 못받은 브루투스는 결국 대폭 불어난 연합군에게 대패하고 자결한다.
  18. 보레누스의 아내가 불륜으로 낳은 아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