뮌헨 올림픽 참사

주의. 사건·사고 관련 내용이 있습니다.

이 문서에는 실제로 발생한 사건·사고에 대한 자세한 내용과 설명을 포함합니다. 불법적이거나 따라하면 위험한 내용도 포함할 수 있으며, 일부 이용자들이 불쾌할 수 있으니 열람에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또한, 실제 사건·사고를 설명하므로 충분히 검토 후 사실에 맞게 수정하시기 바랍니다.

또한, 이 틀을 적용하시려면 적용한 문서의 최하단에 해당 사건·사고에 맞는 분류도 함께 달아주시기 바랍니다. 분류 목록은 분류:사건사고 문서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600px
희생자들의 명단이 새겨진 위령비.

파일:Attachment/19720002.jpg
이 사건의 범인 중 하나인 칼리드 자와드(Khalid Jawad).

Geiselnahme von München (독일어)

Munich massacre (영어)

1 개요

올림픽 역사상 최악의 테러 사건

1972 뮌헨 올림픽 기간에 팔레스타인 테러단체인 '검은 9월단'이 이스라엘 선수촌에 난입해 이스라엘 올림픽 대표팀 11명[1]을 인질로 잡아 이스라엘에 구금된 팔레스타인 포로 234명의 석방을 요구했지만 서독 경찰의 대응 실패로 인질 전원이 사망한 사건.

2 내용

1972 뮌헨 올림픽이 한창 열리고 있던 9월 5일 새벽 4시, 운동복을 입은 8명의 무장괴한들이 올림픽 선수촌 담장을 넘어 이스라엘 선수들이 묵고 있던 숙소로 침입했다. 이때 바로 옆이 대한민국 선수단 숙소였으나 이들은 불행 중 다행히 전원이 무사히 피했다. 이스라엘 선수들은 괴한들을 피해 도망치는데 성공했지만 이때 이미 2명이 사망하고 9명이 인질로 붙잡힌 상태였다.

괴한들은 자신들이 팔레스타인 무장 저항단체인 '검은 9월단' 이라고 밝히면서 이스라엘이 억류하고 있던 팔레스타인 포로들의 석방을 요구하였고 서독 경찰에서는 협상을 시도했으나 실패. 올림픽 주최측에서는 사람들이 죽었단 소식을 들은 후 에도 경기를 지속해서 세계적으로 비난을 받은 뒤에야 모든 경기를 중단했다. 경찰이 무력 진압을 시도하려고 했으나 문제는 당시 서독 경찰에는 현대의 SWAT와 같은 전문 대테러부대가 없었다는 것. 그렇다고 서독 정규군의 특수부대를 투입할 수도 없던게 독일 헌법에 의거해 독일 정규군이 독일 국내에서 작전을 수행하는 것이 매우 까다롭기 때문이다.

그나마 이것도 방송카메라가 생중계하는 바람에 테러범들에게 들켜서 역시 실패했는데, 보도 통제 개념의 부재도 원인이지만 작전 자체가 워낙 어설펐기 때문. 작전이란게 운동선수로 위장한 경찰들이 스포츠 가방에 무기를 숨겨서 옥상으로 올라가 인질들을 구출한다는 내용이었지만 속에 방탄복 입은 게 뻔히 보이고 자기 몸집보다 뭔가 이상하게 빵빵한 체육복을 걸친 남자 몇이 총들고 지붕 위로 올라왔는데, 이게 하필 TV 카메라가 생중계를 위해 맞춰 놓은 곳에 그대로 잡힌 것이다. TV를 보던 테러리스트가 자기 머리 위 지붕에 거수자들이 얼쩡거리는 걸 보자마자 바로 테라스 너머에서 "쟤들 안 꺼지게 하면 인질 죽인다!"고 외쳤고 서독은 그 위장 경찰관들을 결국 철수시켜야 했다.

테러리스트들은 상부에서 이스라엘 정부가 24시간 안에 요구를 들어주지 않는다면 비행기를 요구해서 인질들과 함께 비행기로 중동에 있는 나라로 가기로 명령 받았었기에 헬기를 요구했다. 그러나 서독 당국은 테러범들을 보내줄 마음이 없었기에 서독 경찰 당국은 테러범들의 요구를 들어주는 척 하면서 기습하기로 결정을 내렸다. 일단 헬기로 공항까지 이동시킨 다음 목적지까지 이동할 비행기 안에 경찰들을 승무원으로 위장해 태워놓고 저격수와 협동으로 사살하려고 했으나 이 위장 경찰들이 헬기가 공항에 도착하기 불과 몇초전에 자기들끼리 작전을 취소하고 철수해 버렸다.[2]

헬기가 착륙한 후 테러리스트들이 빈 비행기임을 알자 남은 경찰들과 총격전이 벌어졌고 결국에는 테러범들을 사살하거나 생포하는데 성공하였지만 이 와중에 테러범들이 한 헬기에는 수류탄을 던져 넣어서 헬기가 폭발하고 다른 헬기에는 총기를 난사해서 인질 9명 전부가 사망하는 참사가 벌어졌다. 진압 와중엔 나중에 온 경찰들이 헬기에서 가까운 곳에 있던 저격수와 도망쳐온 헬기 조종사를 오인사격해서 중상을 입힌 일도 있었다(...).

사건 발생 직후 모든 경기가 중지되었다. 인질 사망 이후 주경기장에서 추도식이 거행된 후 34시간만에 재개되었다. 하지만 이스라엘 선수단은 동료의 주검을 가지고 전원 귀국하였다. 대회 포기 의견도 나왔지만 수 년간의 노력을 물거품으로 만들 수 없단 이유로 인해 IOC와 독일정부는 재개를 결정하였다.

검은 9월단 사건 때문에 서독의 노력은 한순간에 물거품이 되었고 가장 화려한 대회가 될 것이라는 서독의 관계자들도 그대로 얼굴이 굳어버리고 말았다. 올림픽에서 조기가 게양된 최초의 올림픽 대회이기도 하다.

한편 테러범 8명 중에 5명은 총격전 와중에 사살되었고, 남은 3명은 도주하다가 체포되었다. 그러나 이후 이들은 루프트한자 항공기 공중 납치 사건으로 인해 석방되었다가, 그 중 2명은 모처에서 의문사했다고 전해진다. 이들의 죽음 역시 이스라엘 정보기관 모사드가 연루되어 있을 것이라는 의견이 매우 유력하다. 나머지 한 명은 이스라엘의 보복공격을 피해 지하생활을 하고 있다고 한다.

2.1 당시 희생당한 이스라엘 선수단의 명단

선수 : 다비드 베르게르, 제브 프리드만, 요세프 로마노(이상 역도), 엘리에제르 할핀, 마르크 슬라빈(이상 레슬링)
심판 : 요세프 구트프레운드(레슬링), 야코브 스프링게르(역도)
코치 : 아미추르 샤피라(육상), 케하르 쇼르(사격), 안드레 스피체르(펜싱), 모셰 바인베르그(레슬링)

이 중 요세프 로마노와 모셰 바인베르그는 범인들이 난입했을 당시에 바로 살해당했고, 나머지는 구출 과정에서 목숨을 잃었다.

2.2 비극의 원인

사태가 이렇게 커진 데에는 정보가 부족하기도 했고[3] 당시에는 대테러의 개념이 잘 정립되어 있지 않아 독일 경찰에는 대테러부대도 없던 것도 이유였다. 계획대로라면 저격수들이 공항에서 제거하려고 했으나 이 저격수들은 전문 훈련을 받은 저격수가 아니라 그냥 사격이 취미였던 보통의 경찰들(...). 결정적으로 이들에게 지급된 G3 소총에는 스코프도 없었다.

게다가 이들이 장거리 사격을 해야 했던 시각은 어두운 한밤중이었는데, 장갑차량 등의 지원도 없었으며[4] 인질들이 죽어나갔던 것은 사건을 이따구로 크게 키운 독일의 잘못 때문이었다. 결국 이 사건의 여파로 독일대테러부대GSG-9을 창설하며 이 분야의 선구자가 된다.

하지만 서독만의 잘못이 아니라는 분석도 많은데 굳이 독일이 아니라도 미국조차도 이런 일이 당시 터졌다면 상당수 비슷한 상황이라는 분석도 많다. 되려 이 참사가 벌어지지 않았더라면 세계적으로 테러 대응에 시간이나 경험이나 조치가 오래 걸렸을 것이라는 의견이 많다. 인류 역사에서 당하기 전에 사건사고를 대응한 것보다 당하고 큰 피해를 입고나서야 고치거나 대응한 게 더 많듯이. 사실 당시만 해도 올림픽이라는 국제 행사에 이런 유혈 인질극과 같은 테러가 벌어지리라고 생각한 사람들은 별로 없었다. 그래서 그런지 몇몇 국제정치학자들 중에서는 뮌헨 참사를 현대의 테러리즘이 본격적으로 대두된 사건으로 평가하기도 한다.[5] 아닌게 아니라 PLO[6]의 한 관계자는 이 사건과 관련하여 익명으로 진행된 인터뷰에서 "이 사건은 전 세계인들이 볼 수 있는 높이 솟은 산 위에 '팔레스타인'이라고 커다랗게 써붙인 것과 같다..." 라고 의미를 부여하기도 했다.

3 여담

  • 이 일이 일어난 뒤에 이스라엘은 '신의 분노' 라는 보복작전을 개시하였고 이것이 결국 지금까지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 간의 갈등 심화로까지 이어지게 되었다. 이후 스티븐 스필버그는 이 내용을 각색해 뮌헨이라는 영화를 제작하기도 했다.
  • 게다가 이 참사를 지원해준 네오 나치 세력중에서 구드룬 부르비츠의 개입까지 존재했다는 설이 있었다. 히믈러의 외동딸인 구드룬 부르비츠는 이미 51년부터 징역을 살고 있거나 도주 중인 SS 단원들을 구원하는 '슈틸레 힐페'의 일원으로 활동하고 52년에 나치의 유겐트를 모방한 비킹 유겐트(Wiking-Jugend)를 설립하는데 일조했으며 전후 네오 나치 활동의 주축인 '블랙 위도우' 플로렌틴 로스트 반 퇴닝엔(Florentine Rost van Tonningen)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을 정도로 열성적으로 나치 옹호를 했을 만큼 이 설이 신빙성을 얻고있다.
  • 이 당시 이스라엘의 육상 선수로 출전했던 샤울 라다니는 동료 선수들에게 재빠르게 상황을 알려 더 큰 참사를 막은 공로를 인정받아, 체육인에게 주어지는 가장 큰 영광 중 하나인 피에르 드 쿠베르탱 메달을 수여받았다.
  1. 정확하게는 선수 5명, 심판 2명, 코칭스태프 4명. 명단은 하단에 후술.
  2. 자살임무라고 생각해서 그랬었다고 나중에 밝힌다.
  3. 테러범들의 정확한 인원도 파악을 하지 못하고 테러범들과 교섭을 하러 테러범들의 거처를 방문한 협상팀의 증언만을 통해 4-5명 정도로만 추정을 했다. 진압작전 때 가서야 '왜 저렇게 테러범이 많지' 라며 당황했고 진압작전 실패 요인 중 하나가 되었다.
  4. 장갑차를 보내긴 했는데, 공항까지 가는 길에 교통 체증으로 제 시간에 도착하지 못했다.
  5. 당시 대테러 부대의 필요성을 느낀 나라는 이스라엘(팔레스타인과 아랍국가의 테러)과 프랑스(알제리의 테러)밖에 없었고, 이들 나라들도 조차도 뮌헨 참사 이전이 아닌 이후에 대테러 부대를 결성했다.
  6. Palestine Liberation Organization. 팔레스타인 해방기구로, 64년에 조직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