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드집을 출판한 시기 의 미야자와 리에. | 최근의 리에. 40이 넘은 나이지만 미모는 여전하다. |
宮沢 り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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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
1973년 4월 6일 도쿄 도 네리마 구 출생. 아버지는 네덜란드인이고, 어머니는 일본인[1]인 혼혈이지만 임신 중에 이혼했기 때문에 아버지의 얼굴은 본적도 없었다고 한다. 한참 뒤에 TV 프로그램을 통해서 아버지의 당시 모습과 자신도 몰랐던 이복동생들의 존재를 알게 된다. 여튼 그러한 이유로 이모 밑에서 사촌들과 함께 자랐다.
1985년 11살의 나이로 광고 모델로 연예계에 데뷔, 13세에 1대 미츠이 리하우스걸이 되면서 유명세를 얻게된다. 그리고 1988년에는 '우리들의 7일 전쟁'[2]에서 첫 주연을 하면서 배우 생활을 시작했다. 이 영화의 대흥행으로 코무로 테츠야에게[3] 곡을 받아서 'DREAM RUSH'라는 앨범을 내면서 가수로 데뷔해서 1990년에는 만 17세의 나이로 홍백가합전에 출연할 정도로 유명세를 떨치게 된다. 당연히 드라마와 영화, CF 출연이 연이어졌다.
하지만 역시 미야자와 리에를 한국에서까지 유명하게 만든 것은 1991년 미성년의 나이인 18세[4]의 나이로 전라 사진집 "산타페"를 출간했다. 누드집은 은퇴할 때가 다 된 여배우들이 노후(?) 여흥삼아서 찍던 시기에, 인기 최정상의 여배우가 당대 최고급의 카메라맨과 만나서 만들어낸 누드사진집은 폭발적 반응을 일으켰다.
누드집이 금기시되던 한국에서도 이례적으로 모 대형출판사에서 정식 출간했을 정도로 인기를 누려 신문광고까지 했을 정도이다. 당시 초창기 PC통신 자료실에서는 이 사진집에서 발췌한 사진이 올라왔고, 전화선을 이용하던 모뎀의 속도가 2400bps이던 시절이다. 현재 웬만한 케이블 모뎀이 10,000,000 Bps니까 사진 하나 받으려면 얼마나 시간을 잡아 먹어야 하는지 짐작이 갈 것이다. 그런 느린 속도의 PC통신도 거의 보급되지 않을 시기라서 현재 같으면 중.고생들도 쿨한 표정으로 컴퓨터로 보겠지만 그 당시엔 청계천이나 용산구 및 어둠의 경로로 몰래 사서 봐야했다. 요즘같은 시절 중고등학생들도 거들떠 보지않을 정도로 자극이 적지만, 당시 청소년들에게는 상당한 보물과도 같았다. 당연히 부모님이나 선생에게 걸리면 죽도 밥도 안됐다. 이 정도로 상당한 유명세를 타서 한국내 인지도도 자연스레 높이 올라간다(...). 미즈노 슌페이도 자신의 책에서 저 산타페 열풍을 지적하기도 했다. 이후 한국내에서도 누드사진집 열풍이 불어서 가수 유연실[5]과 민해경이 연이어서 누드사진집을 내기도 하였으나, 그 답이 없는 완성도에 당시 한국내의 보수적 시선이 더해지면서 자신들의 커리어를 완전히 마감하는 계기가 되었다. 한국내 누드 사진 열풍은 약 10년 후에 이승희로 다시 시작되었으나, 그 다음부터는 중견 여자 연예인들의 여흥(?) 내지는 B급 이하 여배우들의 전유물로 전락했다.
그리고 1992년 11월 27일 스모선수이자, 훗날 65대 요코즈나로 승격된 오제키 리키쉬인 다카노하나(貴乃花光司)[6]와 19세의 나이로 약혼을 발표할 때까지가 미야자와 리에의 첫 리즈 시절.
문제는 바로 그 다음에 터져서 한국에게까지 널리 파혼 스캔들이다. 완전한 파혼이 발표된 것이 1993년 1월 27일로, 약혼발표가 있고 불과 2개월 정도 만의 일이었다.
그런데 이 파혼의 이유가 바로 산타페였다. 원래 미야자와 리에와 다카노하나 코우지는 산타페가 발표된 후에 약혼을 하였는데, 약혼한지 3개월만에 다카노하나의 집안과 일본 스모계가 일치단결하여 누드사진 찍은 여자를 며느리로 받을 수 없다고 해서 미야자와 리에가 파혼당한 것이었다. 이에 다카노하나는 후에 이 파혼은 자신의 의사는 전혀 포함되지 않은 집안의 반대로 인한 것이었다고 주장했다. 사실은 요코즈나로 승격하는데 지장 없으려고 그렇게 말한 듯 하지만 참고로 이에 대해서 쌍방 합의에 의한 파혼이라는 이야기도 있는데, 이 경우에도 미야지와 리에 본인보다는 어머니의 의사가 크게 반영된 것이라는 것이 정설이다.
그러나 이 산타페는 리에 본인이 찍고 싶어서 찍은 것도 아니고, 매니저를 겸했던 미야자와 리에의 어머니가 딸이 가장 아름다운 시기를 누드로 남겨야 한다라고 주장해서 찍은 것이라고 한다. 저 말은 원래 유명사진작가인 누드사진가인 시노야마 기신의 제안하는 말이었다고는 하는데, 크게 의미를 두지 않고 한 말이었던 것을 미야자와 리에의 어머니가 덥썩 물은 것이 사진집이 나온 계기라는 것이 현재의 일반적 통설인듯 하다.
여튼 파혼기자 회견장에서 나타난 미야자와 리에는 '다카노하나를 사랑한 것을 후회하지는 않지만 다시는 결혼같은 것 안하겠다'고 선언하는 나름대로 의연한 모습을 보였으나...
그건 말만 그랬던 모양으로, 파혼의 충격이 심했는지 거식증 이야기까지 나오면서 체중이 30kg 대로 줄어들어서 뼈만 앙상한 시기를 보낸다. 미야자와 리에의 키는 일본 여배우치고는 상당한 167cm이다. 키와 체중을 고려하면 건강이 완전히 엉망이 되었을 것이라는 말할 것도 없다. 당연히 한동안 인기가 수그러들 수 밖에 없었는데[7], 일본은 없다라는 책으로 돈 엄청 벌어낸 누군가는 오키나와 출신이라고 차별받는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했지만, 이 시기 미야자와 리에의 상황은 그 정도가 아니었다. 자살소동만 2번[8]이나 언론 보도를 탔고, 불륜설까지 돌았다. 1996년에는 연예계 무기한 활동정지를 선언하고 미국으로 이주한 적도 있었으니 할 말 다했다. 허나 미국에 건너가서 거식증 치료를 했던 것으로 보는 견해가 많다. 그래도 일본으로 복귀해서 자잘하게 방송에 출연은 하다가 드라마 '협주곡' 정도를 제외하면 그리 흥행을 못하는 시기를 보내면서 '한때의 반짝스타'의 전형으로 완전히 커리어가 끝나는 듯 하였으나...
홍콩영화 "유원경몽(2001)"[9]으로 모스크바 국제 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수상을 한 것을 기점으로 겨우 재기하게 된다. 이후 미야자와 리에의 이미지는 '한 때의 반짝스타'에서 '해외에서 인정받은 연기파 여배우'로 일대 변신을 하였고, 2003년에 찍은 『황혼의 세이베이(たそがれ清兵衛)』로 일본아카데미상 최우수여우주연상, 닛칸스포츠영화대상 여우조연상, 키네마준보 여우주연상, 마이니치영화콩쿨, 블루리본상 여우조연상 등 당대의 영화제를 휩쓸면서 완전한 부활을 선언하게 된다. 2004년에는 드라마로 하시다상, 2005년에는 영화 『아빠와 산다면(父と暮せば,2005)』으로 블루리본상-여우주연상과 야마지후미코영화상 여배우상을 수상하였다. 연극에서도 『투명인간의 증기(透明人間の蒸気,2004)』로 요미우리연극대상 우수여우상을 수상하는 등 배우의 길을 걷고 있다.
- ↑ 미야자와 리츠코, 일명 '리에 마마'로 알려져있다.
- ↑ 일본 청춘영화계의 대박으로 떠올라 인지도가 상당해져 '우리들과 경찰 아저씨의 700일 전쟁'으로도 패러디될만큼 유명해진 영화이다. 내용은 청소년들과 어른들의 갈등이 엄청난 스케일로 번진다는 내용이다.
- ↑ 영화 엔딩곡을 코무로 테츠야의 유닛 TM NETWORK가 불렀던 것이 계기가 되었다.
- ↑ 일본에서는 만 20세로 성년이 된다.
- ↑ 유연실은 가장 아름다운 순간을 남기고 싶었다는 표현까지 따라해서 완전히 미투상품이라는 것을 공공연히 하였다.
- ↑ 한국씨름으로 빗대어보면 이만기, 강호동에 견줄 수 있을 정도로 스모 역사에 길이 남을만한 선수였다.
- ↑ 거식증에서 회복되는 도중에도 술자리 스캔들 사진이 떠돌아서 또 한 번 논란이 일었다.
- ↑ 첫번째는 파혼한 바로 그 해 8월에 호텔에서 유리를 깨서 손목을 그은 사건이고, 다른 하나는 그로부터 몇년 후에 스캔들이 연이어 터진 이후였다. 일단 미야자와 리에는 첫번쨰 사건은 말 그대로 사고라고 하고 있고, 두번째는 사건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다.
- ↑ 이 영화가 무서운 영화이다. 이 영화의 주연은 왕조현으로 영화발표회에서 '은퇴예정을 발표'했으며 실제로 2002년에 영화 한 편을 더 찍고는 은퇴했다. 그리고 본문의 미야자와 리에가 공동주연에 가깝게 나왔고, 영화의 나레이션으로는 유원경몽의 감독인 양범과 친분이 있는 임청하이다. 남자 주연이 매기 큐의 한 때 연인으로 알려졌던 오언조인데, 유명한 여자배우들에 휩싸여서 눈에 들어오지도 않을 정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