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무로 테츠야

小室哲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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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M NETWORK 시기(왼쪽)[1]2000년
2014년 TM NETWORK 결성 30주년 당시[2]회춘

1990년대 일본 가요계의 끝판왕.
한 시대를 풍미했던 일본 팝 키보디스트계의 아이돌[3] 그리고 엄친아[4]
신스서스와 최첨단 키보디스트의 끝판왕.[5]
걸어다니는 스튜디오[6]

트위터

1 개요

"코무로 테츠야 군은 일본인의 귀를 교육시켰다."

(「小室哲哉君は日本人の耳を教育した」)
- 사카모토 류이치[7]

1958년 11월 27일 생. 음악 프로듀서, 작사가, 작곡가, 편집자, 키보디스트, DJ 등 수많은 이력을 가진 음악가.

일본 대중음악계의 거물이자, 1990년대J-POP을 사실상 거의 구축하다시피 한 인물이다. 애칭은 텟쨩, 테츠, 코무로, TK 등. 통칭하여 TK라고 부르는 경우가 많다.

스스로 레이블을 세우면서 여러가지 음악 장르를 두루 섭렵하고 일본 음악계 자체 트렌드를 주도했던 전설적인 프로듀서이다.

잘 나가던 시절에는 페라리 마니아로, 색만 다른 페라리 여러 대를 소유하고 있었을 정도로 화려하고 사치스러운 생활을 한 것으로 유명하였고 수많은 여자 연예인들과 염문설을 뿌리기도 했다. 애니메이션과 SF에도 조예가 깊어 최근엔 케로로의 팬이라고 밝히기도 하였다.

2 약력

2.1 학생 시절


학생 시절부터 음악에 커다란 재능을 가졌으며 집에서 가지고 있던 기타, 바이올린을 맘대로 팔아서 당시 16만엔 이상의 고가였던 신디사이저를 구입했다는 것으로 보면, 집안도 웬만큼 음악에 뜻을 둔 부유한 가정이었던 걸로 예상된다. 1974년 16세[8]의 나이에 아마추어 밴드에서 활동을 시작으로 다음 해 프로 뮤지션으로 데뷔하여 하쿠류[9], 하라다 신지 등의 백밴드를 경험하였다.

와세다대학 사회과학부에 5년 정도 재적(중퇴) 후 본격적으로 음악 활동을 시작.

2.2 TM NETWORK∼TMN 시대

그의 전성기 사진.(가운데 사진은 아사쿠라 다이스케다.)

아이돌 붐이 성행한 1980년대에는 오카다 유키코, 미야자와 리에, 나카모리 아키나, 마츠다 세이코 등 다수의 아이돌에게 곡을 제공했으며 1986년 와타나베 미사토의 'My Revolution'으로 일본 레코드 대상 작곡상을 수상하며 작곡가로써 크게 활약하였다.

여러 밴드를 결성하고 해산하다가, SPEEDWAY라는 밴드의 멤버였던 우츠노미야 타카시(보컬), 키네 나오토(기타)와 함께 1984년 TM NETWORK를 결성. 초창기에는 옐로우 매직 오케스트라의 아류라는 평을 받기도 했지만 점차 전자음악을 결합한 자신들만의 스타일을 구축하였다. 1987년에는 시티헌터의 주제가 'Get Wild'을 히트시키며 인기 그룹으로 발돋움한다. 이후로도 'Self Control'[10], 'SEVEN DAYS WAR', 'Still Love Her' 등 명곡을 쏟아내면서 TMN은 존재감을 굳건히 한다. 물론 TMN의 성공에는 우츠노미야와 키네의 공헌도 상당히 컸고, 당시에는 코무로만이 주목을 받는 모양새는 아니었다.

TM NETWORK 최후 라이브인 '5.18 Last Groove'에 현 B'z기타리스트 마츠모토 타카히로를 출연시킨 적도 있다. 한때 마츠모토 타카히로는 TM NETWORK의 세션 기타리스트로 활동한 전력이 있다. 이 때의 인연 때문에 TMN 멤버들과는 친분을 유지하고 있으며, 1994년 최후 라이브 뿐만 아니라 2004년에 가졌던 TM NETWORK 더블 디케이드 투어 때도 우정출연했다.

1988년 기동전사 건담 역습의 샤아의 엔딩 곡인 BEYOND THE TIME ~뫼비우스의 우주를 넘어서(メビウスの宇宙を越えて)~는 당시 애니메이션 관련 음반 순위를 석권하였으며, 명곡으로 현재까지 회자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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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1989년 말 자신이 리드 보컬을 맡은 솔로작 'RUNNING TO HORIZON', 'GRAVITY OF LOVE'[12]오리콘차트 1위를 기록한 것을 시작으로 점차 개인 활동을 늘려나간다.[13]

1991년 연말~92년 초에는 X JAPAN드러머 Yoshiki와의 합작 유닛 V2로도 활동했었다. 포지션은 신디사이저&피아노&보컬.

2.3 코무로 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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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 'TM NETWORK'를 해산. 90년대 초부터 trf, globe, 카하라 토모미, 아무로 나미에, 스즈키 아미 등의 프로듀스 및 작곡을 맡으며 수많은 밀리언 셀러 및 히트를 시켜 '코무로 사운드'라는 단어를 탄생시켰고 90년대 전반에 '코무로 붐'을 일으켜 어린 시절부터 꿈이었다는 사회 현상을 만들어내었다. 코무로가 프로듀스하는 아티스트들은 '코무로(속칭 TK) 패밀리'라고 불리기도 했다.

95년에는 4년 연속 프로듀서한 곡이 레코드 대상을 수상하고 96년 오리콘 싱글 차트에 프로듀스 곡이 톱5을 독점, 96년에는 globe의 앨범이 당시 오리콘 차트 기록을 갱신하는 400만장 이상을 기록. 아무로 나미에의 곡도 300만장을 뛰어넘는 등 코무로 패밀리는 폭발적으로 리즈 시절을 맞게 되었다. 이로 하여 97년엔 세금만 11억 7천만엔을 내고 고액 납세자 전국 4위에 이르렀으며 코무로 테츠야가 프로듀스한 음반의 총 판매량은 1억 7천만 장에 이른다.

이 시기의 코무로는 스스로 "당시엔 주로 80점~90점의 곡을 만들어야한다는 생각으로 계속 쫓기고 있는 기분이었다. 그래서 빨리 이것이 끝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부정적인 의미가 아니라 자신이 하고싶은 것과 일본 시장이 차이가 났었기 때문에 이 시기가 끝나서 자신이 정말로 좋아하는 음악을 만들고 싶었다"고 자신의 시대를 하나의 붐으로 인식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 붐이 끝난 댓가는 스스로를 나락으로 떨어뜨릴 정도로 너무 컸다.

그러나 90년대 말부터 코무로 패밀리의 가수들이 활동을 축소함에 따라서 2000년대로 넘어가는 시점에서는 코무로의 프로듀스 곡 수가 줄어들었고, 전반적으로 활동이 잦아들었다. 이 시기 약혼 관계에 있던 카하라 토모미와도 헤어지고, 코무로가 프로듀스한 가수 중 마지막으로 대중적 인기를 얻었던 스즈키 아미마저 소속사 문제로 활동을 중단하였다. 또한 GLAY, 우타다 히카루, MISIA, SMAP, 시이나 링고, 하마사키 아유미 등이 떠오르면서 복합적 요인에 따라 코무로 붐은 종말을 맞게 되었다.

2.4 새로운 시도

코무로 붐을 이뤄낸 코무로는 9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 초반에 들어서 팝 아티스트에서 일렉트로니카로 노선을 전환하여 트랜스, 프로그레시브 록 등 다양한 시도를 하였다. 그러나 이 시기 그가 프로듀스한 곡은 큰 반향을 얻지 못했다. 거의 자신의 컬러라고 할 수 있는 작품들을 1년에만 서너곡 이상 내는 혹사에 가까운 90년대의 행보 이후 TK의 프로듀싱은 "인간이 무슨 컴퓨터도 아니고 한계가 있겠지…" 수준으로 코무로 테츠야 자신의 팬들에게 옹호를 받지만 퀄리티가 따라주지 않아 대중적으로 점점 혹평 내지 외면을 받게 된다. globeLights 2연작이 40만 장의 판매고를 올리는 등 성과가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코무로 테츠야는 점점 대중과 멀어지고 있었다.

2000년 초반에는 globe에 X JAPAN의 드러머 Yoshiki가 가입.[14] 각종 음악 활동에 몰두하였으나 2003년에는 신종 인플루엔자의 유행에 따라 우리나라에서 예정 중이었던 자선 라이브가 중지, Yoshiki 가입 이후 처음으로 가지는 라이브가 중지되는 등 불행이 계속되었다.

잘생긴 외모 때문인지 여성 편력도 심했던 코무로는 2001년 아티스트 ASAMI와 결혼하였으나 결혼 10개월 만에 이혼. 그리고 몇 개월 뒤 globe의 멤버였던 KEIKO와 결혼하여 세간의 화제가 되었다. ASAMI와 이혼 뒤 합의한 위자료 7억엔을 한번에 내지는 못하여 분납해서 지불하기로 했으나 그 돈도 자금 악화로 2004년까지 밀려있었다고 한다. 이 시기부터 자금난이 시작된 그는 소유하고 있던 고급 승용차와 크루저, 별장 등을 팔게되었고 약 70억 원의 손실을 낸 Rojam Entertainment도 철수하기에 이르렀다.

2.5 몰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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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당시 저작권 사기 혐의로 자택에서 연행당하는 장면.

그러다 2008년 11월에 저작권을 이용한 사기 혐의로 체포된다. 자신의 명의로 JASRAC에 등록되어 있는 곡들의 저작권을 10억엔에 양도하기로 하여 피해자로부터 5억엔을 선금으로 받았는데 이 곡들의 실제 저작권은 이미 양도되어 있어[15] 코무로가 저작권을 양도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 사건에 일본은 뉴스의 톱으로 속속히 방송되었고 우리나라에서도 기사가 날 만큼 큰 사건이 되었다. 2009년 5월 11일, 오사카 재판부로부터 징역 5년 집행유예 5년의 판결을 선고받았다. 꽤나 부담스러운 액수의 추징금이 남아 있었으나 현 AVEX의 사장인 마츠우라 마사토(MAX 마츠우라)가 꽤나 많은 액수를 지원해줬기에[16] 큰 문제 없이 다시 활동할 수는 있었다.

그러나 코무로의 신뢰와 명성은 곤두박질쳤고 80~90년대 코무로의 음악을 듣고 자라오던 일본인들에게는 커다란 충격을 주게 되었다. 체포 소식이 들린 후 그의 모든 곡을 TV라디오에서 금지당하게 되었고 CD 판매까지 금지당해 그야말로 개발살이 났으며 매스컴과 음악계에서도 코무로를 강력하게 비판하였다.

사건이 일어나고 바로 모 잡지와의 인터뷰에서는 아내인 KEIKO와 함께 쓸쓸하게 은둔생활을 하고있는 코무로의 안습한 모습이 비춰서 과거의 화려했던 명성도 빚 앞에선 부질없다는 생각을 하게 해주었다. 과거 돈을 펑펑 쓰던 화려한 생활으로 유명했던 그의 통장엔 돈이 6259엔 밖에 들어있지 않았다고 하여 사람들에게 더더욱 충격과 공포를 안겨주었다.

2.6 활동 재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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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지속적인 팬들의 염원이 있었기 때문에 다시 활동을 재개할 수 있었다. 2009년 'a-nation09'에 globe의 멤버로써 출연, 팬들에게 사죄와 함께 감사하는 마음을 간접적으로 내비치며 활동을 재개하게 되었다.

2010년 5월부터 프로듀서를 맡게 된 혼성그룹 AAA의 'Dream After Dream ~꿈으로부터 깨어난 꿈~/만나고 싶은 이유'를 시작으로 작곡가로서의 활동도 재개하였다. 복귀 후에는 작곡만 하고 있으며 편곡은 거의 다른 사람이 맡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망해가다가 일본 진출한 초신성의 작곡도 맡고 있어서 트위터에 한국어나 한류 연예인에 관한 얘기를 자주 언급하기도 한다.

2011년에도 하마사키 아유미, AAA, 키타노 키이, DiVA 등 다양한 가수들에게 곡을 공급하고, 10여년 만의 솔로 앨범인 'Digitalian is eating breakfast 2'를 발표하는 등 활동을 꾸준히 했지만, 아내이자 동료인 글로브의 보컬 케이코가 급성지주막하출혈로 쓰러지는 아픔을 겪었다.

2012년 3월에는 VOCALOID를 사용한 커버앨범 '코무로 테츠야 meets VOCALOID'를 출시. 1~10번 트랙은 유명 보컬로이드P들이 코무로 테츠야의 과거 곡들을 커버했으며, 11번 트랙인 LOVE IS ALL MUSIC은 코무로 테츠야가 직접 하츠네 미쿠를 사용해서 셀프커버했다.

그 후 trf의 프로듀스, 신인 이키오 아야카 발굴 등 여러 면에서 활동을 하고 있다. 2013년 2월 25일 trf의 신작 미니앨범 'PUSH YOUR BACK', 3월 6일 'Digitalian is eating breakfast 3', 3월 27일 globe의 셀프 커버 앨범 'globe EDM SESSION' 등 다양한 앨범을 발매하며 활동하고 있다. 그러나 복귀 후 뚜렷한 성과는 AAA의 오리콘 1위를 제외하면 없다.

3 음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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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land의 고성능 신디사이저 JUPTER 80이다.[17]

일반인에게는 90년대 J-POP 댄스 뮤직의 1인자로 알려져있지만, 사실 댄스 음악만을 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테크노, 펑크, 유로비트, 하우스, 트랜스, 힙합, R&B, 얼터너티브 록, 월드 뮤직, 엔카 등 여러 폭넓은 장르의 곡조를 만들어내며 복수의 장르를 융합하여 음악을 만들어낸다는 특징을 가지고있다.

코무로 사운드의 커다란 특징은 '갑작스런 곡조'에 있는데 이것을 자주 사용하게 된 계기는 TMN의 퍼스트 앨범 레코딩 때 소프트웨어에 오류가 작동하여 음이 변한 것을 듣고 '의외로 괜찮다'고 생각한 것이 계기가 되어 그러한 멜로디가 정착되었다. 그가 작곡한 음악에는 공통된 특유의 코드가 들어가기 때문에 웬만한 사람들은 한번만 들어도 이것이 코무로의 곡임을 알게 해준다.

작사에선 아무로 나미에에게 준 곡 'CAN YOU CELEBRATE?'의 영어 표현이나 가사의 의미가 이상하다는 지적을 받았는데 코무로는 "사운드에 맞는 표현을 선택했다"고 얘기했다. 카지우라어(語)? 작사에서 크게 영향받은 것은 와타나베 미사토와의 일이 시작이라고. TRF의 명곡 '寒い夜だから…(추운 밤이니까…)'는 스튜디오에서 나오니 날씨가 너무 추워서 만들어진 곡이라고 한다(…).

1990년대에 마이클 잭슨으로부터 작곡 의뢰를 받지만 채택된 곡은 없었으며, 헐리우드에 진출하여 영화 산드라 블록의 'SPEED 2'의 메인테마와 뮤직비디오 주인공으로 채택되었다.

코무로는 90년대를 회상하며 "4일에 1곡을 작곡했었다", "수많은 기록들이 기쁘지 않은건 아니었으나 전혀 실감되지 않았다", "돈을 스스로가 얼마만큼이나 썼는지 몰랐었다. 완전히 벌거벗은 임금님이었다"고 얘기했다.

코무로 붐의 종막에 대해서는 "그건 자연스레 왔었죠. 제 안에선 우타다 히카루씨가 나왔을 때 '새로운 시대가 왔구나'라고 느꼈습니다"라고 얘기하였다.

일본 음악계의 신(神)으로 평가되는 뮤지션 사카모토 류이치

"코무로 테츠야 군은 일본인의 귀를 교육시켰다.

(「小室哲哉君は日本人の耳を教育した」)"

고 평가하였다. 좋은 의미로나 나쁜 의미로나 일리가 있는 말이다.

까놓고 말해서 작곡 능력에 비해 가창력이 썩 좋은 편은 아니다.[18](노래부를 때 음색이 특이한 것도 있지만) 물론 코무로가 음치라는 건 아니다. 예를 들어 오리콘차트 1위까지 먹은 솔로 활동 곡 'RUNNING TO HORIZON'(1989)의 경우 가수를 모른 상태에서 처음 들어보면 나온다.[19] '이딴 걸 노래라고 부르냐?'라는 생각이 든다. 네~무↑레↑ 나↑이↓ 고↓제↓~ 니~찌~[20] 그리고 1992년 Yoshiki와의 합작 유닛 V2의 타이틀 곡 '背徳の瞳〜Eyes of Venus〜' 역시 보컬이 썩 좋진 않다…[21][22]그러니까 대부분 작곡만 하는 거겠지!

4 기타

1998년 프랑스에 신디사이저 연주자 "장 미셸 자르"와 함께 프랑스 월드컵을 기념해 "Together Now"라는 곡을 공동으로 작곡한바가 있다. 이후 패막식을 기념하는 콘서트를 자르와 함께 에펠 탑에서 열어 나중에 "Electronic Night"라는 이름으로 실황음반과 DVD가 나온다.

신디사이저 개발에 참여한 적 있는데 전성기 당시 야마하 신디사이저를 애용한 그는 초보자여성들에게 맞게 설계한 신디사이저인 EOS시리즈를 제작한 적 있다.[23]

게임 제작에도 손댄 적이 있다. 그가 디자인하고 시스템 사콤에서 개발한 가볼 스크린(ガボール スクリーン)이라는 게임. 가볼(GABALL)이란 코무로가 2001년 무렵 세웠던 유닛 프로젝트인데, 한국에서도 활동했던 가수 故 '조앤'이 이 유닛의 싱글 '幸せの表現'에 참가한 적이 있다.

플레이스테이션 1로 발매된 어드벤처인데, 한때 일본 대중음악계에서 유명했던 그답지 않게 일단 외견만 보면 스크린샷에서 보이는 포스LSD 맞먹기 짝이 없다. 다만 일단 명확한 게임의 목표가 있고, 코무로 테츠야의 팬이라면 OST 같은 감각으로 즐길 수도 있는 게임이기 때문에 LSD와 비교하기는 좀 힘들다. 하드코어게이밍 101의 리뷰

이후 2013년 어과초 2기 2쿨 오프닝인 fripSide의 eternal reality를 야기누마 사토시와 공동 작곡. 후반부 코러스에도 참여했다.

코무로는 61건반을 메인으로 사용하고 있다.[24]

코무로가 라이브에서 사용했던 신디사이저 및 장비들이 알고 싶다면 이 사이트이 사이트를 참고해볼 것.

그리고 코무로가 소속된 밴드나 Gball을 재외한 프로젝트 그룹을 보면 나머지는 다 잘하는데 하나가 무언가 나사가 빠지 부분이 있는 징크스가 있다. T.M.Network는 코무로의 최첨단과 천재적인 실력이 있고 30년이 넘어도 역량이 뒤쳐지지 않은 보컬을 보여주는 우츠노미야 있지만 뭐... 이 부분은 갑자기 바뀐 사례지만 음악적으로 어느정도 역량을 소화했지만 이둘에 묻혀 존재감과 연주실력이 뒤쳐지는 키네 나오토가 있고[25] V2같은 경우는 요시키와 코무로가 뛰어난 연주실력을 보여줬지만 코무로가 보컬이 안좋다거나(...) Globe에서는 케이코의 뛰어난 성량과 코무로의 연주력이 있긴하지만 마크 펜서는 음악적으로 실력적으로 역량을 잘 보여주지도 못했다.[26]

5 코무로 패밀리

코무로 테츠야가 프로듀스하거나, 코무로의 곡으로 히트를 친 가수들을 코무로 패밀리라고 불렀다. 이들이 단체로 잘 나갔던 시절을 코무로 붐이라고 부른다. 코무로 붐은 99년부터 차차 꺼지기 시작해서, 2000년 스즈키 아미의 활동 종료를 끝으로 완전히 사그라들었다. 그래도 이들 코무로 패밀리가 판매한 CD 판매량이 3천만 장을 넘어서 기념으로 3장짜리 베스트 앨범이 나오기도 했다.현재는 절판.

  • TRF: 코무로 붐의 시작. 98년부터 코무로 테츠야 프로듀스에서 벗어났지만, 최근 코무로 테츠야 부활을 기념해서 코무로가 프로듀스한 미니 앨범을 한 장 냈다.
  • 시노하라 료코: 恋しさと せつなさと 心強さと가 일약 더블 밀리언. 코무로의 프로듀스 기간은 짧았고 현재는 배우로 활동중이다.
  • globe: 코무로 패밀리의 장자격.
  • 아무로 나미에: 코무로 프로듀스를 벗어나 한동안 인기가 떨어졌지만 2008년 화려하게 부활.
  • 카하라 토모미: 코무로의 한때 연인이자 아무로의 라이벌로 통하기도 했다.
  • hitomi: 코무로로부터 독립한 후에도 한동안 잘 나갔다.
  • 스즈키 아미: 오디션 프로 ASAYAN을 통해 데뷔. 코무로의 마지막 신데렐라지만 소속사 문제로 인해 활동을 잠시 중단했었다.
  • 하마다 마사토시: 'H jungle with t'라는 유닛으로 싱글을 냈는데 더블 밀리언을 기록.
  • dos: 스즈키 아미처럼 ASAYAN을 통해 데뷔한 유닛인데 코무로가 R&B를 시도한 그룹이나 성과는 그리 좋지 못했다.
  • Kiss Destination(TRUE KiSS DESTiNATION): 코무로와 요시다 아사미의 유닛으로 주로 R&B를 하는 유닛이었는데 한때 둘은 결혼까지 했었다. 이혼으로 인해 해산.
  • tohko
  • 미쿠 레이카(未来玲可) : 데뷔 싱글이 30만 장 넘게 팔려나갔는데 처음 나간 방송에서 반도의 누군가처럼 라이브를 망치는 바람에 상심하고 활동을 접었다는 이야기가 전설처럼 전해진다. 무려 아다치 미츠루 원작인 게츠쿠 진베의 테마곡으로 드라마 내내 나오는 푸쉬를 받았는데도… 링크 내 거친 음정과 불안한 눈빛과 그걸 지켜보는 너 그건 아마도…

6 대표작

  • 1989년
    • RUNNING TO HORIZON
    • DIVE INTO YOUR BODY / TM NETWORK
  • 1990년
    • THE POINT OF LOVERS' NIGHT / TM NETWORK
    • TIME TO COUNTDOWN / TM NETWORK
  • 1991년
    • WILD HEAVEN / TM NETWORK
    • Love Train / TM NETWORK
  • 1993년
    • EZ DO DANCE / trf
    • 寒い夜だから… / trf
  • 1998년
    • love the island / 스즈키 아미
    • wanna Be A Dreammaker / globe
  • 2001년
    • genesis of next / globe
  • 2002년
    • Many Classic Moments / globe
  1. 가운데는 TMN의 보컬 우츠노미야 타카시, 오른쪽은 TMN의 기타리스트 키네 나오토.
  2. 밑에 있는 사진은 Roland의 TB-303을 리메이크한 AIRA TB-3이다.
  3. 코무로가 대중들에게도 영향을 줬지만 그 중에서 제일 영향을 많이 준 분야는 팝&일렉트로니카계열의 일본 키보디스트들이다. 전(前) 세대 키보디스트인 사카모토 류이치도 있긴 하지만, 사카모토는 키보디스트로써는 높이 평가받지 않는 인물이고(물론 음악적 커리어는 코무로보다 더 하지만), 코무로는 키보디스트로써 높이 평가받는 인물이다. 일본의 키보디스트들이 기본적으로 존경하는 인물이다. 그가 없었더라면 아사쿠라 다이스케는 지금의 access가 없었을것이고 게임 음악 제작자 혹은 프로듀서가 되었을 것이고 니코동이나 그 외에서 활동하는 키보디스트들은(한국까지는 아니더라도) 연주할 곡이 없을 것이고 신디사이저를 연주하는 영상이 거의 없었을 것이다.
  4. 취소선이 그어졌지만 진짜 스펙을 보면 엄친아라 불러도 손색이 없다. 얼굴 잘 생겼지, 명문대 와세다대학 출신에, 게다가 천재적인 능력까지 갖췄다. 하지만 운동능력은 딱히 없어 보인다
  5. 개인마다 취향이 다르긴 하지만 T.M.NETWORK나 globe의 라이브를 보면 최첨단 장비는 물론 라이브 즉석에서 작곡 프로그렘에 내장되어 있는 소프트웨어 신디사이저를 다루거나 DJ과 동시에 서포터하고 게다가 항목을 보다시피 장르가 광범위하게 다루는 능력자다.
  6. 무대에 배치된 장비나 신디사이저를 보면 DAW,소프트웨어 신디사이저,레코딩에 주로사용하는 고가의 믹서등등 여러가지 사용하며 스탠드도 주로 스튜디오에 많이 사용하는 QS-303을 사용하고있다.(TMN 프로젝트 끝나기 직전이나 재결합할때는 AX-48B를 사용한적있다.)
  7. 골든글로브와 그래미상을 수상한 인물이자 아시아 최초 아카데미 시상식 음악상 수상자로 유명하며 일본 음악계의 최고 권위자 중 한 명이다. 참고로 코무로 테츠야가 가장 존경하는 인물이다.
  8. TMN의 데뷔 앨범인 'RAINBOW RAINBOW'의 타이틀 곡인 '1974(16광년의 방문자)'가 이 시절을 소재로 한 것으로 추정된다.
  9. 한국 이름은 전정일. 재일교포 2세인 뮤지션 겸 배우.
  10. 사실 Get Wild 바로 이전에 발표된 곡이다.
  11. 1989년 솔로 데뷔 앨범인 'Digitalian is eating breakfast' 앨범의 자켓.
  12. 이 싱글이 오리콘차트 1위를 기록하면서 코무로가 곡을 줬었던 모 레전드 아이돌의 연속 1위 달성 기록이 24곡에서 끝나버렸다.(이건 당시 마츠다의 싱글이 전작과 크게 음악적으로 달라졌던 것도 한 몫 했다.)
  13. 그때 당시에 access의 키보디스트 아사쿠라 다이스케가 서포트 멤버로 활약한 적이 있다.
  14. 상술했지만 두 사람은 이미 1992년에 V2라는 유닛으로 같이 활동한 적 있었다.
  15. 현재 코무로의 곡들은 전부 일본 연예계 만악의 근원 바닝프로덕션의 소유로 되어 있다. 천하의 개쌍놈들.
  16. 코무로와 마츠우라는 AVEX 창립 초기부터 공, 사적으로 파트너로써 함께 활동한 사이다.
  17. 뒤에 있는 빨간것은 건담(…)이다.
  18. 이건 몇몇 작곡가들(싱어송라이터 제외)도 그러니 코무로만의 문제는 아니다. 예를 들면 유희열, 정재형.
  19. 녹음한 버전은 그래도 들어줄 만 하다! 문제는 충격과 공포의라이브(…)이지만…
  20. 해석하면 '잠들지 못하는 오전(새벽) 2시'
  21. 리그베다 위키 시절에 Yoshiki 항목이 대대적으로 수정되기 전요시키 항목에서 요시키 존나 까대던 시절에는 이에 대해 코무로가 직접 부른 극악의 보컬이라 쓰고 취소선이 그어져 있었다(…). 안습.
  22. 보컬과는 별개로 요시키의 미친듯한 드럼과 코무로의 광란의 키보드 합주는 엄청나다.둘 다 전성기 시절이라 기량이 무시무시 했었을 적.
  23. 아사쿠라 다이스케도 같이 참여했다. 그리고 이 신디사이저가 유명해지면서 90년부터 94년까지 EOS 콘테스트를 열었다.
  24. 코무로의 무대를 배치하는 신디사이저를 봐도 라이브 내내 대다수가 61건반으로 배치가 되어있고 아예 61건반으로만 배치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아니면 Nordlead, Virus등의 가상 아날로그 신디사이저를 같이 사용하거나 또는 소프트웨어 신디사이저(!)의 컨트롤러 역할도 한다(…)역시 최첨단의 끝판왕 대표적인 모델이 롤랜드의 Fantom G6,Fantom S, DX7이나 DX7IIFD등의 신디사이저, EOS시리즈, JD-800
  25. 원래 신스 베이스지만 갑자스럽게 기타로 포지션이 변경되었지만 어쿠스틱 기타만 재외한다면 기타를 잘치지 못하기 때문에 어려운 파트에서는 세션의 의존하고 있으며 get wild 2014때 어쿠스틱을 친 부분도 에어기타 즉 치는척만 했다. 심지어 30년 넘게 이러고 있다.
  26. 음악적 역량은 2010년대야 들어서야 EDM이 유행해지기 시작하면서 코무로랑 같이 공동 DJ가 되긴 했지만 분위기를 내는것을 재외하면 딱히 보여준것 없다.글로브의 분위기&외국인 담당...
  27. 코무로의 음악 중에서 명곡 중에 명곡이다. 그리고 코무로 본인이 작곡한 곡중에서 제일 좋아하는 노래이며 제일 신경쓰는 노래이며 T.M.N을 스타덤에 오르게 한 곡이다. 오죽하면 라이브에서(T.M.N한정) 필수요소로 떠오르고 재결합 할 때도 역시 이 곡으로 발매했다.
  28. 하마다 마사토시와의 프로젝트 그룹.
  29. T.M.NETWORK의 BE TOGETHER를 리메이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