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터 울브리히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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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lter Ulbricht(1893.6.30 ~ 1973.8.1)

1 개요

독일민주공화국의 2대 서기장이자 독재자

2 생애

라이프치히 출생. 1910년 독일 목공노동조합에 가입, 이후 노동운동을 하였다. 1912년 독일 사회민주당(SPD)에 입당하였다가 1914년 1차대전의 발발로 인하여 징집되어[1] 동부전선에서 종군하다가 1918년 탈영한다. 탈영 직후인 1919년 텔만과 함께 독일 공산당(KPD)을 조직하고, 중부독일지구[2] 지도부의 요원이 되었다. 1928∼1933년 연방의회 하원의원으로 있었으나 나치 독일 정권이 수립됨에 따라 소련으로 망명하였다. 망명모스크바에서 독일인민전선 설립위원회의 발기인이 되고, 독일사회민주당과의 통일전선을 꾀하였다.

1945년 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귀국, 1946년 O.그로테볼과 함께 사회민주당과 공산당을 통합하여 독일 사회주의통일당(SED)을 결성하고, 그 부위원장이 되었다. 국내적으로는 사회민주당 ·공산당의 합동공작, 대외적으로는 친소정책에 의하여 전후 동독 부흥의 길을 열었다.

1949년 동독정권 수립과 함께 부수상이 되고, 1950년 당 중앙위원회 서기장, 1953년 제1서기가 되었다. 1960년부터 1971년까지 국가평의회 의장을 역임하였으나 1960년대부터 국내외적으로 울브리히트의 몰락은 시작되고 있었다. 그의 몰락의 가장 큰 원인 중 하나는 바로 1961년 베를린 장벽의 건설을 지시한 것이었다. 1949년 동독 수립 이후 1961년 베를린 장벽 건설 당시의 상황에서 서방측으로 탈출한 이가 100만을 훨씬 넘겼으며, 이 탈출자들 가운데 상당수가 고학력 인텔리였기 때문에 울브리히트 본인은 울며 겨자먹기 식으로 장벽 건설을 지시했지만, 이는 서방측에서나 동구권측에서나 신나게 까이는 여지를 제공할 뿐이었다.[3] 여기에 그가 실시한 경제정책은 죄다 망했어요로 판명나면서 서독과의 경제 격차는 시간이 지날수록 벌어지면서 당내에서조차 울브리히트는 고립되기 시작한다. 여기에 마지막 결정타로 작용한 것이 공산주의 종주국 소련과의 관계 악화였다. 이 시기 서독빌리 브란트 정권의 소위 동방정책 하에 소련을 비롯한 동구권 국가와 외교 관계를 활발히 개선해나가고 있었는데 이것이 심히 못마땅했던 울브리히트가 사사건건 태클을 걸면서 크렘린높으신 분의 심기를 몹시 불편하게 했던 것. 거기다 울브리히트는 동독 지도자 중에서도 상대적으로 민족주의 성향이 강한 편이었어서 소련에게 반항하는 것도 주저하지 않았는데, 하필 시점이 프라하의 봄 직후였던지라 소련의 인내심이 별로 강하지가 않은 상황이었다.

결국 이런 요인들이 연쇄적으로 겹치면서 1971년 5월 울브리히트는 건강상의 이유로 사임'당'하였다. 사임당하였다는 표현에서 알 수 있듯이 공산당 내부 정적들의 강요로 인한 사임이었으며 그보다 더 배후에는 소련이 있었다. 그의 후계자가 바로 여러모로 국내에선 듣보잡인 동독 인물들 중 그나마 유명한 에리히 호네커이다. 사임 이후 명예직으로 SED의 총재직을 지내다가 1973년 뇌졸중으로 인해 사망한다. 그의 장례는 국장으로 치뤄졌다.

비록 말년에 심하게 구질구질하긴 했지만 울브리히트 체제는 국내의 정치통제와 친소정책을 바탕으로 기술관료들을 양성하여 1950년대 동독2차 대전의 폐허를 딛고 경제수준을 향상시키는데 기여하였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하지만 서독라인강의 기적에는 한참 못 미치는게 함정 저서로는《독일노동운동사》(1953∼1958)가 있다.

3 여담

  • 정치적 성향은 공산주의 계열 가운데서도 레닌주의자이자 스탈린주의자였다. 그것도 단호한 레닌주의자 겸 스탈린주의자여서 이것에 어긋나는 다른 정치적 견해는 철저히 배격했다. 뭐 그 덕에 스탈린의 이쁨을 받아 동독의 지도자 자리에 오를 수 있기는 했지만, 반대급부로 동독 내부에서조차 '어휴 저 진성 빨갱이'라고 까이면서 대중적인 인기는 별로 없었다고 한다.
  • 동독의 얼굴과 같은 인물이었던만큼 각종 훈장들을 꽤 많이 받았는데 그 중에는 소비에트 영웅 훈장과 같이 대단히 유명한 것들도 많다. 한편 1956년에는 스페인 내전에 참가한 의용군들을 위한 훈장을 스페인 제2공화국의 임시정부로부터 수여받기도 했는데, 스페인 내전에 참가하지도 않았던 타라 실제 의용군 출신들로부터 대차게 까이기도 했다.
  • 영화 스파이 브릿지에서 포겔 변호사의 집에 걸려있는 그의 초상화를 확인할 수 있다. 역사적 지식이 없는 사람이라면 놓칠 수 있는 부분.
  1. 징집되어서 억지로 참전하기는 했지만, 그것과 상관없이 1914년 전쟁 발발 당시부터 울브리히트 본인은 전쟁에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2. 이 당시 독일은 슐레지엔동프로이센을 상실하기 전이었기 때문에 중부독일지구는 베를린브란덴부르크 일대였다.
  3. 서방 측에서야 당연히 인권탄압, 독재정권의 억압 등으로 베를린 장벽을 비판했고 동구권측에서는 대외적으로는 반파시스트 장벽이라며 칭찬해줬지만 '저딴 장벽 세워봤자 우리가 체제 경쟁에서 지고 있다는 걸 만천하에 드러내는거 밖에 더됨? 너님 미침?' 정도의 반응이었다. 사실 울브리히트 본인도 장벽 건설을 지시해놓고는 '이건 우리가 체제경쟁에서 밀린 걸 자인하는 꼴밖에 안되는데'라고 우울해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