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리히 호네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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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rich Honecker(1912년 8월 25일 ~ 1994년 5월 29일)

1 개요

독일공산주의자이자 독일민주공화국(동독)의 전 서기장. 독일 사회주의통일당 정치인으로, 동독의 서기장 중 가장 장기 집권[1]하였으며, 동독 역사상 가장 인지도가 높은 인물.

2 생애

2.1 출생과 성장

1912년 8월 25일, 독일 노인키르헨(Neunkirchen)에서 광부이자 공산주의자인 빌헬름 호네커(Wilhelm Honecker)의 4번째 자녀로 태어났다. 그의 6남매 중 첫째인 카타리나(Katharina, 1906–1925), 둘째인 빌헬름(Wilhelm, 1907–1944), 막내인 카를 로베르트(Karl-Robert, 1923–1947)는 다들 10~30대에 요절했고, 셋째인 프리다(Frieda, 1909–1974)와 다섯째 게르트루트(Gertrud, 1917–2010)만이 에리히와 함께 오래 살아남았다.

공산주의자인 아버지의 영향으로, 호네커는 10살 생일 직후 스파르타쿠스단의 비벨스키르헨(Wiebelskirchen) 지구 소년단에 들어갔다. 14살 때는 독일공산당(KPD)의 청소년 단체에 가입했으며, 1929년에 정식 공산당원이 되었다. 당시 그의 정식 직업은 슬레이트공이었다고 한다. 그가 공산주의에 경도된 또 하나의 이유가, 그가 제1차 세계대전 직후 거주하던 자르 지방이 프랑스군정 지구가 되어 프랑스군의 주둔을 경험한 탓이라는 설도 있다.

2.2 제3제국 시절의 행보

1933년, 아돌프 히틀러나치당은 정권을 장악한 뒤 공산당 등 다른 정당들을 탄압하기 시작했다. 자연히 불법화된 공산당 활동을 호네커는 이 시기에 도리어 열성적으로 시작했고, 곧 독일 나치정부로부터 요주의 인물로 찍혀, 1933년에는 경찰에 의해 체포되었다가 금방 풀려나기도 했다.1935년, 결국 게슈타포에 의해 다시 체포된 뒤, 반란 모의 혐의로 유죄를 선고받아 10년 간의 강제 노동형에 처해졌다. 공산당원 중에는 제법 인지도가 있는 인물이었으므로 독일 정부로부터 호네커는 수 차례의 전향 요구를 제의받았지만 모두 거절했다.

제2차 세계대전 중 수감되어 있던 수용소가 연합군폭격으로 파괴되던 찰나에 아슬아슬하게 이감되어 살아남는 등 여러 차례 생명의 위협을 느끼기도 하고, 전쟁 말기의 혼란을 틈타 탈출을 시도하기도 했다. 최종적으로 1945년 4월 27일에, 수용소를 점령 후 해방시킨 소련군의 도움으로 베를린으로 빠져나왔다.

2.3 전후 장기 집권과 몰락

석방된 그는 곧 소련군에 소속된 독일 공산주의자들과 합류했는데, 당시 소련군에 소속된 독일 공산주의자들은 소련이 그들의 점령 지역에 공산주의 정부를 세우기 위해 소련 국내에서 훈련시킨 사람들이었다. 그는 자유독일청년단(Freie Deutsche Jugend; FDJ)의 발기인 중 한 사람이 되어, 1946년부터 1955년까지 의장을 지냈다.


▲ FDJ 시절의 호네커. 1946년에 찍힌 사진이다.

1946년, 독일공산당 중앙위원회 위원이 되었으며, 동독의 공산당과 사회민주당을 소련의 압력으로 통합, 신 정당인 독일사회주의통일당(Sozialistische Einheitspartei Deutschlands, SED)을 결성하도록 막후에서 힘썼다. SED에서의 그의 영향력은 급속히 성장했고, 1967년에는 동독의 지도자 발터 울브리히트의 후계자로서 주목받았다. 1971년 SED 당수와 국가평의회 의장직을 겸임하게 됨으로써 그는 당과 정부를 모두 통제할 수 있게 되었다.


▲ 1958년, 제5회 SED 전당대회 당시 호네커의 모습. 뒤에 있는 사람이 그의 후견인이라 할 수 있는 서기장 발터 울브리히트다. 영 못마땅하다는 눈빛이다.

1976년 10월 29일, 발터 울브리히트의 후임자였던 빌리 슈토프가 집권 3년만에 물러나면서 뒤를 이어 서기장에 취임했다.

호네커의 통치 기간 동독은 상대적으로 억압적인 국가 중 하나였으나 다른 한편으로는 중앙유럽소련 위성국들 중 경제적으로 가장 번영을 누렸다. 그는 서독과의 무역 및 관광 교류를 증진시켰고[2], 그 대가로 서독의 경제 원조를 받았다. 레오니드 브레즈네프소련 지도자들과의 관계는 대체로 원만한 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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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에서의 김일성과 호네커. (명목상)통일을 지향하는 나라와 지향하지 않는 나라의 차이가 여기서 보인다. 조선 인민과 독일 인민도 아니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인민독일민주공화국 인민도 아니고, 조선인민과 독일민주주의공화국인민.. 그냥 간단하게 깃발안에 글자가 다 들어가지 않으니까 줄인 거 아닐까? 강제개행하긴 싫었나 보다

이후 1980년대 말, 유럽 공산 국가들이 차례로 몰락하자 호네커는 나름대로 위기 의식을 갖기 시작했으나, 공산주의 체제를 더는 유지할 수 없다는 사실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1989년, 호네커는 매년 10월 7일에 이뤄지던 독일민주공화국 수립 기념 행사(당시에는 40주년)를 역대 가장 성대한 행사로 개최하여, 공산주의 체제가 건재함을 과시하였다. 어디서 본 수순 같다?


▲ 40주년 기념 행사 당시 국가인민군을 사열하는 호네커. 동독 육군 장군 왼쪽에서 경례 중인 중절모 쓴 사람이다.

그러나, 이틀 뒤인 10월 9일 라이프치히에서 시작된 정권 반대 시위가 끊이지 않은 데다, 퍼레이드 참석차 방문했던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련 서기장이 호네커와 회동한 자리에서 페레스트로이카 대열에 동참을 호소했다 거부당한 데에 대한 반격으로 호네커 축출에 힘을 실어 줌으로써, 10월 18일 호네커는 젊은 나이의 에곤 크렌츠에게 당 서기장 및 총리 자리를 물려주고 사임했다. 9일만 더 버텼으면 집권 13년 채우는 건데 아깝다.

2.4 말년

독일 통일 후 일단 베를린의 소련 육군 주둔군 기지로 도피했는데, 독일은 호네커의 신병 인도를 요구했으나 소련 정부는 이를 거부, 호네커를 자국으로 망명시켰다. 그러나 불과 2년도 되지 않아 소련이 붕괴된 후, 이듬해 1992년 독일로 송환되었다. 이후 호네커는 동독에서 집권하던 시절 서독으로 탈출하려던 동독 시민 192명을 즉결 처분한 혐의로 재판에 회부되었다. 하지만 이 재판 자체가 법률적으로 매우 부당한 것이고 전례에 없는 것이라서 큰 논란이 되었다. 이때 호네커는 1991년에 북한 망명을 타진하기도 했는데 김일성은 즉각 무슨 수를 써서라도 호네커를 북한에 데려와 편한 여생을 보내게 하라고 지시했지만 끝내 실패하여 크게 안타까움을 표하기도 했다.

재판을 받으며 수감 생활을 하던 1993년, 으로 인한 병 보석 처리된 뒤 반년 후에 칠레로 망명하여 회고록을 집필하다가 이듬해 5월 29일 수도 산티아고에서 사망했다. 호네커의 사망에 북한에선 유족에게 "조선의 통일 정책을 적극 지지 성원해 주었는데 말년에 불행하게도 타국에서 서거한 데 대해 애석한 마음을 금할 길 없다."라는 내용의 조전을 보냈다. 사후에 그 회고록은 독일의 거대 출판사에서 출간을 거절해서 어느 듣보잡 출판사가 출판하게 되었는데, 한창 통일 후유증으로 흉흉했을 때라 구 동독 지역에선 꽤 팔렸다고..

실각 이후 그는 민주사회당(SED 의 후신)에서 제명되었고, 그와 그의 부인은 1990년에 새로 결성된 독일 공산당에 입당하여 94년 죽을 때 까지 당원으로 머물렀다.

3 평가

비록 호네커 개인의 실책 탓만은 아니지만, 일단 동독을 망하게 만든 인지도에서 밀리는 발터 울브리히트 대신 원흉 1호로 많이 언급되는 인물이다. 그래도 공산주의 국가의 독재자긴 하나 유머 소재로 쓰일지언정 니콜라에 차우셰스쿠 같은 인간 말종 취급은 받지 않으며, 그 역시 최소한 인간이기를 포기한 적은 없었다. 동독을 공산 국가 중 가장 잘 살고 자유가 보장되는 나라로 만든 것도 이 사람이다. 일단 공산당 지도자 중엔 성군은 아닐지언정 악평이 적은 편에 속하는 것은 확실하다. 물론 위에서 언급한 베를린 장벽을 넘다 죽은 동독 시민들과 유가족들에겐 천하의 개쌍놈일진 몰라도 이를 두고 호네커를 비판할 순 없다. 당장 대한민국에서 비무장지대월경하려는 사람들을 어떻게 하는지를 생각해 보자. [3]

게다가 북쪽의 김씨 왕조 같은 막장 사례와 비교하면 비교적 검소하게 생활한 편이었다.[4] 호네커 일가의 생활 수준은 당시 서독의 중산층 정도에 가까웠다는 평가가 많다.[5] 물론 살 돈이 있어도 소비할 물품이 부족해서 오랫동안 대기만 타고 있던 대다수 동독 시민들에겐 이 정도도 엄청난 특권으로 보였겠지만 말이다.

4 이야깃거리

  • 1987년 서독 방문시 고향 노인키르헨을 방문해 40년 만에 여동생 게르트루드와 상봉하기도 했다. 노인키르헨은 그 이전에도 동독 학생들의 수학여행 코스 가운데 하나로, 이 곳에 한해서는 서기장 고향 견학 목적이라면 서독 방문 허가가 상대적으로 쉽게 나온 편이다.
호네커가 모스크바에 방문했을 때, 고르바초프는 당시 소비에트 연방의 일치 단결된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 호네커와 함께 군사 퍼레이드를 참관한 뒤 고르바초프는 옆에 있던 어린 공산당원에게 물었다.

"너의 어머니가 누구지?"
"조국입니다."

"너의 아버지는 누구고?"
"바로 고르바초프 서기장님이시죠."

"너는 커서 무엇이 되고 싶으니?"
"훌륭한 공산당원이 되고 싶습니다!"

이러한 소련의 모습에 호네커는 깊은 감명을 받았다. 더불어 동독에서도 그러한 단결된 모습을 보여 주고 싶었다. 그리고 기회가 찾아왔다. 고르바초프가 동독에 방문한 것이다. 호네커는 고르바초프와 함께하는 공식 행사를 마친 뒤 옆에 있던 어린 공산당원에게 질문을 했다.

"너의 어머니가 누구지?"
"조국입니다."

"너의 아버지는 누구고?"
"바로 호네커 서기장님이시죠."

호네커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마지막 질문을 이었다.

"그럼 너는 커서 어떤 어른이 되고 싶으니?"
"고아가 되고 싶습니다!"[6]

호네커가 아침 일찍 집무실로 출근하였다.

창문을 열며 태양을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좋은 아침이야, 친애하는 태양아!"
그러자 태양이 대답하길
"좋은 아침이에요, 친애하는 에리히!"

점심때 호네커가 다시 창문을 열고 태양에게 말하길,
"좋은 오후야, 친애하는 태양아!"
그러자 태양도
" 좋은 오후에요, 친애하는 에리히!"

일과 후 저녁에 호네커가 다시 창문쪽으로 가서 말하길,
"좋은 저녁이야, 친애하는 태양아!"
그런데 태양은 대답이 없었다.
그래서 다시
"좋은 저녁이야, 친애하는 태양아... 도대체 뭐가 문제니?"
그러자 태양이 대답하길
"날 좀 내버려 둬! 난 지금 서쪽에 있다고!"[7]

호네커가 트라반트자동차를 타고 LPG[8]로 가고 있었다. 그러다 갑자기 길에서 돼지가 한 마리 튀어나왔고, 운전수가 미처 속도를 줄이지 못해 돼지를 치어 죽이고 말았다. 화가 난 호네커는 돼지 주인에게 사과하라고 운전수를 농장으로 보냈다.

한 시간 뒤, 운전수는 잔뜩 취해 술냄새를 풍기며 돌아왔다. 호네커가 물었다.

"어떻게 된 거야?"

운전수의 대답.

"저는 그냥 가서 '나 호네커 서기장 운전수인데, 아까 그 돼지 쳐죽였소!'라고 했어요."[9]

호네커가 슈타지 국장인 에리히 밀케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호네커가 말했다.

"밀케 동무. 요즘 유행하는 유머를 들어보셨소? 나에 관한 유머들인데, 요즘은 그걸 모으는 게 취미라오."

밀케가 답했다.

"그렇습니까, 서기장 동무. 저와 취미가 비슷하시군요. 저는 그 유머를 퍼트리고 다니는 사람을 모으는 게 취미입니다."

이런 농담이 돌아다니는 거 보면 뭔가 독재자라지만 좀 불쌍하다.

  • 유난히 인지도가 없는 편인 동독 사람들 중 한국인들에게는 그나마 가장 많이 알려진 사람이다. 동독을 배경으로 하는 여러 영화들에서도 단골로 등장하고, 먼나라 이웃나라에서도 평소엔 거의 입은 적 없는 인민복 차림으로 등장하는 데다가, 결정적으로 격동의 시기였던 독일의 통일 직전까지 집권했던 사람인 만큼 적어도 동독의 지도자 중에서는 가장 인지도 높은 사람이었지만, 별의별 듣보 독재자들까지 다 작성되는 위키에서도 독보적으로 늦게 항목이 작성되었다(…).

5 관련 항목

  1. 2대 정부 수반이었던 발터 울브리히트의 집권 기간(1960년 9월 12일 ~ 1973년 8월 1일)보다 불과 40일 정도 더 집권일수가 길다(호네커의 집권 기간은 1976년 10월 29일 ~ 1989년 10월 18일이다.). 둘 다 13년에서 며칠 못 미치는 기간 동안 집권했다.
  2. 아래에서 보듯 호네커도 이산가족이었던 게 컸다.
  3. 박노자가 DMZ를 월경한 자를 죽인 것을 비판했다가 괜히 까인 것이 아니다.
  4. 사실 동구권에서도 루마니아를 제외하면 대부분의 지도자들은 호화 생활과는 거리가 멀었다. 헝가리의 지도자 카다르 야노시는 공산 정권 붕괴시 하야 후 월세집으로 갔을 정도다.
  5. NDR의 2009년도 다큐멘터리 Erich Honecker. Ein deutscher Politiker; ZDF의 2014년도 다큐멘터리 Geheimakte Honecker
  6. 다만 이 유머 같은 경우에는 온갖 바리에이션이 존재해서 뭐가 원조인지를 알 수가 없다.
  7. 구 동독 시절 슈타지의 반체제 인사 감시를 다루었던 독일 영화 <타인의 삶>에도 이 유머가 등장한다.
  8. 동독의 국영 농업 기업인 '농업생산협동조합(Landwirtschaftliche Produktionsgenossenschaft)'
  9. 돼지 주인은 운전수가 호네커를 쳐죽였다는 뜻으로 알아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