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 제2공화국

스페인의 역사
Historia de España

고대 - 레콘키스타 - 스페인 제국 - 현대
레콘키스타스페인 제국현대
아스투리아스갈리시아 왕국카스티야 연합왕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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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레온 왕국
카스티야 왕국
우마이야나바라 왕국
아라곤 왕국아라곤 연합왕국
바르셀로나 백작령
후우마이야무라비트무와히드나스르
718년 ~ 1492년1492년 ~ 1931년1931년~
스페인 공화국
República Española
국기국장
1931년 ~ 1939년
국가리에고의 노래(El Himno de Riego)
위치오늘날의 스페인
아프리카 식민지
수도마드리드 (1931년~1936년)
발렌시아 (1936년~1937년)
바르셀로나 (1937년~1939년)
정치체제공화정
국가원수대통령
언어스페인어[1]
주요사건1936년 스페인 내전
통화에스파냐 페세타
성립 이전스페인 왕정 복고
멸망 이후스페인국

1 개요

부르봉 왕가스페인 왕정 복고를 무너뜨리고 1931년 탄생한 스페인 역사상 두 번째 공화정. 알폰소 13세가 해외로 망명한 이후, 공화주의자들이 총선에서 대승을 거두고 공화정을 선포하면서 탄생하였다. 새로 탄생한 공화정은 토지 개혁과 같은 일련의 사회 개혁 작업을 시도하였지만 기득권을 지녔던 지주층과 가톨릭 세력에 의해 거센 저항에 부딪혔으며, 이러한 불만세력을 등에 업고 1936년 프란시스코 프랑코가 반란을 일으켜 스페인 내전이 발발하고 만다. 3년의 걸친 치열한 내전 끝에 스페인 제2공화국은 프랑코의 반란군에게 붕괴된다. 이후 스페인 전역을 접수한 프랑코는 총통(Caudillo)직에 올라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으며, 내전에서 살아남은 잔존 공화파 세력은 멕시코로 망명을 떠나 그곳에 망명 정부를 수립한다. 스페인 제2공화국을 계승한 스페인 망명정부는 프랑코가 사망하고 즉위한 후안 카를로스 1세에 의해 스페인이 민주화가 이루어짐에 따라 1976년 자발적으로 해체한다.

2 역사

2.1 설립

스페인은 노동자들의 공화국이다 - 스페인 제2공화국의 헌법 1조 1항.

1923년 쿠데타를 통해 집권한 미겔 프리모 데 리베라 정권은 1929년 전세계를 휩쓴 대공황을 이겨내지 못하고 결국 붕괴되고 만다. 이후 새로 정부를 수립하기 위해 1931년 4월 12일 스페인 전역에서 지방 자치 단체 선거가 열렸는데, 여기서 공화주의 세력이 대승을 거둔다. 국왕 알폰소 13세는 망명을 떠났고 선거 이틀후인 4월 14일 스페인 제2공화정이 공식적으로 선포된다. 가톨릭 신자이면서 중산층을 대표하는 중도세력 니세토 알칼라 사모라가 총리직에 올랐고, 일련의 토론을 거쳐 같은 해 12월 헌법이 개정된다.

새로운 헌법을 통하여 표현의 자유결사의 자유가 인정됐으며, 귀족들이 지니고 있던 각종 봉건적 특권은 철폐되었고 여성들에게 참정권이 주어졌다.[2] 또한 새로운 헌법은 중세 이후로 스페인의 발전을 계속 저해해왔던, 수구꼴통 가톨릭 교회를 개혁하는 것에도 초점을 맞췄다. 정교분리라는 목표하에 교회의 재산은 정부의 감시 하에 놓였으며, 가톨릭 사제들이 교육을 맡는 것 역시 엄격히 금지됐다. 심지어 가톨릭 사제들에게는 스페인의 시민권을 행사하는 것조차도 제한(...)[3]되는 조치가 명시되어 교황 비오 11세가 격렬하게 비난할 정도였다. 그리고 스페인 개혁을 위한 결정적인 움직임으로, 새로운 헌법은 공공재, 토지, 은행 등을 국유화하는 절차를 마련할 것을 명시했다.

2.2 이념 충돌

당연히, 이러한 개혁의 움직임에 수백년동안이나 기득권을 지니고 있었던 지주층과 가톨릭 세력이 가만히 있을 리가 없었다. 가톨릭 수장들은 공공연히 국가의 정교분리 움직임에 반항했고, 지주층은 조세피난처, 탈세 등의 방식으로 자신의 재산을 지키고자 했다. 한편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마르크스주의자 나름대로 새로운 헌법과 공화국 정부가 지나치게 보수적(...)이라고 불만을 한가득 품고 있었다. 이러한 비타협적인 태도는 사회 전반에 걸쳐 잦은 충돌을 빚어냈고 1932년부터 1934년에 걸쳐 스페인 전국의 성당이 방화에 노출되기도 한다.

이런 상황에서 정부 측은 토지개혁이라는 초대형 폭탄을 터뜨리는 무리수를 저지르고 만다. 농민과 지주 모두의 눈치를 봐야했던 정부 측은 지주들에게 일정액의 보상금을 지불하고 농민들에게 토지를 분배하는 절충안을 선택했지만 으레 그러하듯이 이런 절충안은 그 어느쪽도 전혀 만족시키지 못한 채 불만만 더 크게 만들었을 뿐이었다. 토지 개혁을 놓고 정국이 극도로 혼란스러운 와중이었던 1933년 총선이 시행되었고 여기서 우파 세력들이 승리를 거둔다. 정권을 잡은 우파 세력은 일련의 토지 개혁을 모두 보류했고, 이러한 움직임에 반발하여 아스투리아스 지역의 아나키즘 노동자들이 반란을 일으킨다. 그러나 반란은 결국 진압됐고[4] 우파 정부는 교회에 특권 부여, 지방 자치 폐지, 토지 개혁 중단과 같은 반동적인 정책을 펼쳐나간다.

2.3 파국, 스페인 내란

이러한 반동적인 정책에 이를 갈던 좌파세력들은 다음 선거였던 '인민전선'이라는 이름 하에 1936년 총선에서 대단결[5]을 이룬다. 그리고 이 단결이 결실을 이루어 인민전선은 집권을 이루어낸다. 인민전선 내각은 정치범 석방, 농민 보호(토지 개혁, 조세 개혁, 지대 인하 등등), 노동자 권리 증진(임금 인상, 노조 설립 등등)과 같은 정책을 다시 펼치면서 개혁에 시동을 건다.

하지만 의지의 가톨릭/지주/군부가 주축이 된 보수 세력들은 좌파 정부의 정책을 방해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6] 노조를 향한 백색테러가 난무했고 군부에서는 공공연하게 쿠데타 음모가 튀어나왔으며[7] 지주와 가톨릭 교회는 정부의 개혁에 대놓고 '배째라'는 태도로 일관했다. 이런 상황에서 왕당파 지도자였던 호세 칼보 소텔로를 무정부주의자들이 암살하는 사태가 발생한다. 그리고 이것이 기폭제로 작용[8]하여 1936년 7월 17일 모로코에서 군부가 반란을 일으킨다. 마침내 스페인 내란이 일어난 것. 3년의 걸친 피비린내나는 내란 끝에 결국 1939년 바르셀로나마드리드프란시스코 프랑코팔랑헤당이 이끄는 반란군에게 함락되면서 스페인 제2공화국은 붕괴된다.
  1. 이외에도 바스크어, 카탈루냐어 등 각 언어가 해당지역에서 통용.
  2. 당시 스페인에서 여성에게 참정권이 주어진다는 생각은 말그대로 충격과 공포 그 자체였다고 한다.
  3. 과장 좀 섞자면 가톨릭 사제는 스페인 국민으로 인정안하겠다는 것이다. 흠좀무.
  4. 여담으로 이 때 반란을 진압한 인물이 바로 프란시스코 프랑코였다. 프랑코는 이 반란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빨갱이들이 모스크바로부터 사주를 받고 있다'라고 확신하고 '조국을 빨갱이들로부터 구해야겠구나'라고 생각을 갖기 시작했다고...
  5. 원래 이 당시 스페인 좌파들은 무정부주의, 공산주의, 사민주의, 중도세력 등으로 사분오열하여 서로를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었다. 그렇지만 더 큰 눈앞의 적인 우파정부를 붕괴시키고 정권을 재탈환하기 위해 기존까지의 앙금을 씻고 통합을 이뤘던 것.
  6. 사실 인민 전선 내부에서도 36년 총선에서 우파가 재집권에 성공하면 볼셰비키식 쿠데타를 일으켜 스페인에 사회주의 정권을 불법적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한 라르고 까바예로 등 민주주의와 전혀 거리가 먼 인간들도 충분히 많았다. 하지만 인민 전선 정부는 그 태생적 한계 때문에 다양한 정파의 합의를 이끌어내야 뭔가 정책을 결정하고 집행할 수 있었고, 이 다양한 정파 중에서는 공화국 대통령 마누엘 아싸냐, 사회주의노동당 당수로서 민주적 과정에 대한 존중을 주장하며 까바예로의 파벌과 대립한 인달레씨오 쁘리에또 같은 진실성 있는 민주주의자들도 충분히 있었기에 아예 민주주의 자체를 프랑스산 유대-볼셰비키-프리메이슨의 음모로 취급하며 이를 무너뜨리는 것에는 전혀 이견이 없었던 우파 국민 진영과 쎔쎔이라는 식의 양비론은 불합리한 주장이다.
  7. 인민전선 정부 역시 멍청이는 아니라서 군부의 쿠데타를 우려해 쿠데타를 일으킬 거 같은 성향의 장군들가령 프랑코라던가 프랑코라던가 프랑코라던가...을 모두 오지로 좌천시켜버렸다. 사실 이때만 해도 프랑코는 산후르호, 고데드, 호세 안토니오 리베라 등 스페인 군부와 우익의 지도자 중 하나에 불과했고, 오히려 이 전에는 공공연하게 극우적 분위기가 팽배했던 스페인 군부 내에서 그나마 정치적인 발언을 안 하고 자기 하는 일만 묵묵히 하는 사람으로 통했기 때문에 놀란것도 무리는 아니다.
  8. 정확히 말하자면 이 암살 사건은 어디까지나 핑계거리이다. 이 암살 사건이 아니었더라도 결국 내란이 일어났을 것은 기정사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