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설공주와 일곱 난쟁이

(백설공주(애니메이션)에서 넘어옴)
《백설공주와 일곱 난쟁이》
Snow White and the Seven Dwarfs
장르가족, 판타지
국내등급전체관람가

물가 상승률 적용 전세계에서 가장 흥행한 애니메이션
미국 영화 연구소 선정 100대 명화[1]
2008년 미국 영화 연구소(AFI) 10대 애니메이션 영화 1위
애니메이션계의 오파츠

1 개요

월트 디즈니 사에서 제작한 첫 번째 장편 애니메이션이자, 역사상 최초의 완전 풀 컬러 극장용 장편 애니메이션[2][3] 오파츠이다. 1937년 12월 21일 개봉. 러닝타임은 83분. 2015년 기준으로 이 글을 보는 대부분의 젊은이들은 할아버지가 태어날 때 쯤에 이 애니메이션이 완성되었다고 보면 된다. 즉 이 애니메이션이 만들어졌을때 한국은 일제강점기였다(...)


영화 배급은 RKO 라디오 픽쳐스( (RKO Radio Pictures))에서 맡았다. 지금은 사라진 이름이지만 당시만 해도 디즈니는 영세업체나 다를 거 없었고 RKO측이 더 메이저였던 시절이다. 아니, 1940년대만 해도 할리우드 8대 스튜디오 및 5대 메이저 스튜디오에 속할 정도로 대기업급이었다. 하지만 1950년대 재정문제로 무너지면서 사라졌고 이후 1980년대에 부활했지만 (영화 햄버거 힐 제작사이다.) 마이너 업체로 겨우 유지되고 있는 형편이다.

감독은 데이비드 핸드, 윌리엄 컨트릴, 윌프레드 잭슨, 래리 모리, 벤 샤프틴,퍼스 피스

2 제작 비화

1934년 6월에 월트 디즈니 프로덕션에서 처음으로 제작될 장편 영화에 대한 발표가 뉴욕 타임즈에 게재되었고, 월트 디즈니는 같은 해에 스튜디오의 직원들을 불러 이번에 제작될 백설공주와 일곱 난쟁이는 장편 영화로 발표할 것임을 밝힌 바 있다.

같은해에 월트 디즈니를 비롯해 여러 스태프들이 모여서 영화의 스토리에 대한 회의가 진행되었으며, 이 과정이 몇 차례 진행된 것 덕분에 스토리 개발 과정은 몇 개월이나 지속되었다.

자세한 과정은 위키피디아 항목 참조바람.

3 의의

3.1 미국 장편 애니메이션 영화의 출발점

여러모로 대단한 작품인데, 디즈니의 극장용 장편 애니메이션의 시초이자, 애니메이션 한편을 영화 분량으로 제작해 극장에 건다는 개념의 시초이다. 이전의 극장용 애니메이션은 짧은 분량의 단편을 막간 상영 하는 정도로나 사용 되었으나, 이 작품 이후로 애니메이션 자체가 한편의 영화로 취급을 받게 된다.

1937년 당시 미국 극장가를 강타한 이유 중 하나론 당시에 극장에서조차 컬러 스크린으로 다양한 색상과 선명한 화질을 보기 힘들었던 것이다. 미국 영화에 컬러 기술이 활용된 연도는 1917년으로 거슬러 올라가며, 이 이후로 2색 테크니컬러 기법을 활용한 컬러 영화들이 속속 개봉된다.


예를 들면 1935년에 개봉한 영화 베키 샤프는 3색 테크니컬러로 제작되었으나 기술의 한계로 인해 색상과 화질의 수준은 이정도다. 당시 평론가들 중 하나의 평으로는 '마요네즈에 담가놓은 연어 같다'고.

SnowWhite8.gif
그런데 1937년에 극장에 이런 색상과 화질을 가진 캐릭터들이 갑자기 툭 튀어나와 살아있는 듯이 돌아다닌거다. 그래서 이는 당시 엄청난 문화충격이었다.

사실 위 배경엔 숨겨진 뒷이야기가 있는데, 월트 디즈니는 1932년 테크니 사에서 개발한 3색 테크니컬러 프로세스 활용에 대해 1935년까지 독점으로 사용할 수 있는 계약을 체결한 바 있었다. 그 영향으로 인해 워너 브라더스와 유니버셜 픽쳐스 등의 타 영화사들은 몇년간 2색 테크니컬러나 시네컬러 기술을 애니메이션에 사용해야 했다.[4]

3.2 화려한 특수기법

역사상 최초로 제작된 풀 컬러 장편 애니메이션임에도 애니메이션 동작에도 굉장한 노력을 기울여서 캐릭터의 움직임이 지금 봐도 매우 부드럽다. 로토스코핑하고 비교를 하는 경우도 있는데, 정확히 기법은 다르더라도 거기 비교될 정도로 잘 만든 것은 사실.

컬러 영화의 특징을 최대한 살리고, 특수효과라고 할만한 요소들[5]이 들어간 오즈의 마법사 같은 영화가 나온 것도 1939년이었으니, 당대의 전세계의 수많은 애니메이션 제작자들이 여기에 큰 충격을 받았음은 말할 필요도 없다. 당시 백설공주가 끼친 영향은 2009년아바타 이상이었다고 봐도 된다. 애니메이션과 영화의 역사를 살펴볼 때 꼭 한 번 짚고 넘어가야 할 작품. 픽사드림웍스 같은 현대의 대형 애니메이션 제작사의 애니메이터들조차 이 작품을 연구용으로 보곤 한다.

3.3 평론가들의 반응

당시까지 인기있던 애니메이션들은 짧은 시간안에 웃기는 내용으로 흥미를 끄는 단편 애니가 대부분이었기에 백설공주를 보러 간 평론가들은 영 기대를 하지 않고 극장에 들어갔다. 당시 언론에선 백설공주와 일곱 난쟁이를 공공연하게 '디즈니의 밑빠진 독'이라 부르며 그가 파산하고 싶어 작정한 미친놈이라 비웃었고 디즈니의 지인들도 아무도 만화를 90분동안 보지 않을 것이라고 만류했다.

심지어 1시간 반 동안 웃으며 추태를 보이라는 거냐라고 뭐 씹은 얼굴로 백설공주를 보러 갔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러나 영어 위키피디아에 기록된 정보는 앞 문장과 반대되는 부분이 있는데, 1937년 12월 초연했을 당시 디즈니가 어리석다고 격렬한 반응을 보인 관객들이 나중에 영화의 상영이 종료되었을 때 많은 기립박수를 받았단 기록이 있다. 또한 백설공주 메이킹 다큐멘터리에 따르면, 그 평론가들은 난쟁이들이 백설공주의 시신 앞에서 무릎을 꿇으며 꽃을 바치는 장면에서 대성통곡을 했고 온 극장이 울음바다가 되었다고 한다.

4 미칠듯한 제작비

한편, 워낙에 혁신적인 시도였던 까닭에 제작비를 많이 까먹어서 월트 디즈니는 이 작품을 만드는 동안 몇 번 파산(...)해서 직원들 월급도 못 줄 정도였는데 디즈니가 설득하자 이 작품의 제작에 애착이 컸던 직원들도 자진해서 월급일을 미뤄가며 완성했다는 눈물겨운 전설이 있기도 하다.애니메이션 업계가 괜히 3D가 아니다 요즘의 제작 방법으로는 이렇게 무식하게 돈 졸라 많이 드는 방법으로 애니메이션을 만들지 않는다. 그래서 이 애니가 오파츠인 거다. 제작비는 149만 9천 달러로 엄청난 거액이었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가 600만 달러(하지만 위키피디어에서는 385만 달러로 나옴)로 만들고 미쳤다는 소리를 듣었던 걸 생각하면... 어렵게 만든 보람이 있게 흥행도 대박이라서 6659만 달러나 벌어들였고[6], 재개봉도 여러 번 해서 1억 8492만 달러라는 극장 수익 흥행을 거둬들였다. 그리고 이 수익을 2010년대 물가로 환산하면 자그마치 21억 달러 가까이 된다. 가장 흥행한 애니메이션인 겨울왕국과 8억 달러 이상 차이가 난다. 그래서 백설공주와 일곱 난쟁이는 물가 상승률을 고려하면 역사상 가장 흥행한 애니메이션이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디즈니의 수완이 빛난 것이, 그는 그가 들인 막대한 제작기간과 비용, 그리고 노동력을 이슈화하여 오히려 홍보의 기회로 삼았다. 1937년 5월 초에 뉴욕 타임즈 지에서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보다도 훨 오래 전부터 느릿느릿 만들어 나가는 작품'이라고 비교까지 할 정도였으니...시사회 즈음에 이르러서는 신문은 물론이고 라디오[7], 백화점[8]을 통해 홍보에 총력을 다했다.

5 캐릭터 목록

5.1 백설공주

주인공이라서 단일문서로 옮겼다.

자세한것은 백설공주(디즈니 캐릭터)

5.2 일곱 난쟁이

제목에 '일곱 난쟁이'가 들어가는 것에서 알 수 있다시피, 본래 동화에서는 별다른 개성 없이 한 묶음의 클론 같던 일곱 난쟁이가 애니메이션에서는 제각기 개성있는 성격을 가진 재미있는 캐릭터로 재창조 돼서 만들어졌다. 2015년 시점에서 보면 오히려 백설공주와 왕자는 매우 전형적인 캐릭터라서 좀 심심한 느낌.(...) 실제로 애니메이터들은 백설공주의 최고 매력과 성공 이유로 일곱 난쟁이를 꼽는다. 일곱 난쟁이는 실사 영화와 차별화되는 애니메이션만의 화법 정립에 큰 영향을 끼쳤는데, 바로 받아들이는 사람의 거부감을 완화할 수 있다는 점이다. 실사 영화로 일곱 난쟁이를 왜소증 배우들을 고용해 재현한다고 해보자. 그리고 그 사람들이 경쾌한 노래를 부르고, 바보같은 슬랩스틱을 보여준다면 사람들은 어떤 감정을 느낄까? 마치 프릭쇼를 보는 듯한 기괴함과 불쾌감을 느끼는 사람이나 '어떻게 왜소증 환자를 저렇게 희화화 할 수 있냐' 며 화를 내는 사람 등 거부감을 나타내는 사람들이 많이 등장할 거라는 점은 어렵지 않게 예상할 수 있다. 하지만 애니메이션이라면? 작품에 등장하는 난쟁이는 실제 사람이 아닌 그림이기 때문에 그에 따른 거부감이 조금 완화된다. 물론 이러한 화법이 백설공주를 통해서 최초로 정립된 것은 아니지만 애니메이션을 꾸준히 제작하던 디즈니의 단편들을 통해 가능성만 보여주던 화법이 장편을 통해 성공적으로 발휘된 최초의 케이스라 할 수 있다. 첨언하자면 난장이들이 부르는 노래는 레전설로 여겨져서 현재도 북미권에서 난장이관련 드립을 칠때 하이호 거리는 장면이 가끔 보인다.

여담으로 설정상 이들중 가장 젊은 "멍청이"라는 난쟁이는 말을 아예 못하는데, 마땅한 성우를 못찾아서, 감독인 월트 디즈니는 화가 나서 얜 그냥 말 못하는걸로해라라고 못박아버렸다. 그리고 이들의 이름은 서로 각각의 성격과 개인에 특징을 따서 박사(난쟁이들에 리더), 심술이, 행복이, 졸음이, 부끄럼, 재채기, 멍청이라고 한다. 하는 짓도 참 이름다운데 다른 난쟁이들은 몰라도 심술이, 멍청이를 기억하는 이들도 찾아볼 수 있다. 여담으로 이들은 수염들이 하얀걸로 봐서 겉으론 늙었지만 속은 완전 어린애같다.

5.2.1 The 7D

2014년에는 일곱 난쟁이를 재해석해 만든 TV 애니메이션인 the 7D가 나왔다. 디즈니 채널 및 디즈니 주니어를 통해 방영. 한국에서는 7D라는 명칭을 쓰다가 2016년 하반기부터는 하이호!일곱난장이 라는 이름으로 방영. 일곱난장이의 이름이나 성격, 하이호를 외치는 것까지 모두 기존의 캐릭터들을 계승했다.
졸리우드 왕국에서 글룸들과 맞서 기쁨 여왕(queen delightful)을 돕는 이야기로 특히 부끄럼은 기쁨여왕을 매우 좋아한다.백설공주를 사랑한 난장이
여담으로 졸리우드 잼 이라는 에피소드에서는 강남스타일의 말춤을 추는 장면도 등장한다!

5.3 왕비

왕비그림하일드 항목 참조. 안나가 새로운 공주로 초대받을때, 엘사는 새로운 디즈니 여왕으로 초대 시켰다 카더라

5.4 거울

우리가 알고 있는 그대로 누가 이쁜지 결정을 내리는 거울. 근데 이 거울은 상당히 매너가 없는데, cctv역할 하는 건지,도망친 백설공주의 위치를 노출시킨다. 그리고 출연은 없어졌다. 캐안습. 성우는 설영범

5.5 그외

또한 이전까지 대부분 애니메이션은 동물을 인물화한 캐릭터 내지는 캐릭터화한 동물들이 등장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사람과 동물의 사실적인 움직임은 구현하기가 너무 힘들었기 때문이다. 이는 백설공주에서 사람의 움직임을 구현하기 위해 프로토타입처럼 제작해 본 단편 애니메이션 '피리 부는 사나이'를 보면 알 수 있다. 이 애니메이션은 디즈니 단편 중 최초로 사람들이 등장한 애니메이션인데 작중 사람들은 걷거나 뛸 때 마치 달에서 뛰어다니는 듯 중력의 영향을 받지 않는 움직임을 보여줘서 어색하다. 리얼 문워크

6 기타

화면비가 요즘 영화와는 달리 11:8(1.375:1)이다. 근래의 TV까지 전통적으로 쓰였던 4:3(1.33:1) 보다 가로가 약간 더 긴 정도. 영화 화면비가 가로가 월등히 길어진 와이드스크린으로 바뀐 것은 1950년대 들어서였고, 이 때는 아직 1.375:1이 표준이었다.

사실 컬러로 제작한 최초의 디즈니 애니메이션은 이보다 5년 앞선 단편 시리즈 silly symphony(실리 심포니)의 'flowers and trees'(꽃들과 나무들) 편이 먼저였다. 물론 디즈니 최초의 '장편' 컬러 애니메이션은 이 작품이 맞다.

이 애니메이션으로 인해 월트 디즈니는 11회 아카데미 공로상(Honorary Awards)을 수상했다.[9] 당시 찰리 채플린과 세르게이 에이젠슈테인은 백설공주와 일곱 난쟁이를 매우 호평하였으며, 메이저 애니메이터인 맥스 플라이셔는 이 영화에 자극을 받아 걸리버 여행기를 제작하기로 마음먹는다. 워너 브라더스의 애니메이터인 밥 크렘펫 또한 백설공주를 패러디해 1943년 메리 멜로디즈 단편 Coal Black and de Sebben Dwarfs[10]를 감독하기도 했다.

여러모로 디즈니의 인지도를 알리게 한 업적 덕분인지 백설공주와 일곱 난쟁이는 이후 여러 차례 재개봉된다. 각각 1944년, 1952년, 1958년, 1967년, 1975년, 1983년, 1987년, 1993년에 극장에서 다시 상영되었다.

후대의 디즈니 작품에 여러모로 영향을 주었다. 일단 이 애니메이션부터 뮤지컬적인 요소가 꽤 많이 들어가 있다. 주요 장면은 노래로 이루어져 있다. 물론 초창기에 나온 영화이기에 요즘 영화와 비교해 보면 여러모로 떨어지는 것이 사실이지만, 이 때는 세계2차대전이 일어나기도 전인 1937년인것을 기억하자. 그때 당시는 영화 자체에서 소리가 나오는 것도 10년 정도밖에 안 된 시점이었다. 당시 기준으로는 사운드도 전혀 뒤떨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디즈니의 뮤지컬 형식을 차용한 애니메이션은 백설공주부터 시작된 셈이다. 음악에 신경쓴 애니답게 10회 아카데미에 음악상 후보로 노미네이트 되었지만, 뮤지컬 코믹 영화인 "One Hundred Men and a Girl"에 밀려서 수상하지는 못했다. 또한 왕비가 절벽에서 떨어져 죽는 최후를 맞는데 "악당은 추락해서 최후를 맞는다"라는 디즈니 애니메이션의 클리셰도 여기서 시작된 셈.

여담으로 영문판 한정으로 난쟁이들이 자기집에 불에 켜져있는 것을 보고 화들짝 놀라며 수풀에 숨는데 그때 외치는 말이 지미니 크리켓!!!

디즈니가 백설공주의 동생 로즈 레드(Rose Red)의 실사영화를 제작한다. 그림형제의 ‘백설공주와 레드 로즈’를 바탕으로 제작된되며 백설공주가 독사과를 먹고 깊은 잠에 빠지자, 동생 레드 로즈와 난장이들이 저주를 풀기 위해 모험을 떠나는 이야기다.
각본은 저스틴 머즈가 맡았으며, 스노우 화이트 앤 더 헌츠맨의 에번 도허티가 수정작업을 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1. 1998년 49위 , 2007년 34위
  2. 장편 애니메이션들은 이미 이전에 유럽 각지에서 먼저 나왔지만 흑백이었다.
  3. 특히 아르헨티나에서는 이 작품보다 무려 20년 전에 세계 최초의 장편 애니메이션이 제작되었으나 필름이 유실되었다.
  4. 당시 루니 툰의 메리 멜로디즈는 1934년 초에 컬러화되었지만 디즈니의 편법 같은 행위로 인해 상대적으로 질이 좋은 3색 테크니컬러 기법을 제작진 측에서 쓸려고 해도 그럴 수가 없었다.
  5. 참고로 초반부에 흑백영화로 진행되다가, 도로시가 오즈의 문을 열자 총천연색의 새로운 세계가 나오는 부분은 지금도 회자되는 명장면 중 하나.
  6. 개봉 당시 뉴욕 극장가에 무려 5주간이나 걸려 있었다고 한다.
  7. 디즈니는 홍보 매체로써 라디오를 신문보다 더 선호했다고 한다.
  8. 어린이 장난감 코너에서 백설공주를 소재로 한 인형극을 선보인다든가.
  9. 실제 스태프 명단을 살펴보면 월트 디즈니는 생산자일 뿐이지 실질적인 감독은 아니다. 이런 배경은 월트 디즈니가 자신을 영상 매체에 자주 드러냄으로써 대중에게 인지도를 쌓고 있었으며, 실제 감독들을 비롯한 다른 애니메이터들이 자신과 동일하게 메이저로 데뷔하지 못하도록 한 훼방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10. 이 단편은 1968년 이후 작가연합에서 금지된 11편으로 분류되어 텔레비전 방송이 금지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