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정(삼국지)

촉서 「방통법정전(龐統法正傳)」
방통법정

法正
(176년 ~ 220년)

1 개요

후한 말의 인물. 유장, 유비 휘하의 책사. 자는 효직(孝直). 사례 부풍군 미현 사람.

후한서 법웅전에 따르면 증조부는 전국시대 제나라 양왕(襄王)의 후손인 법웅, 삼복결록주에 따르면 조부는 법진, 아버지는 법연.

2 생애

2.1 유장 휘하

196년, 천하에 기근이 들자 법정은 같은 군 사람인 맹달과 함께 촉으로 들어가 유장에게 의탁했다. 오랜 뒤에 광한군 신도현의 현령이 되고 그 뒤 군의교위에 임명되었다. 중하게 임용되지 못한데다 또한 그의 주읍 사람으로 함께 타향에서 손님 노릇하는 자들에 의해 바른 품행이 없다고 비방 받으니 그 뜻을 펼치지 못했다.

익주별가 장송이 법정과 서로 친했는데 유장이 함께 큰일을 하기에 부족하다 하며 늘 남몰래 탄식했다.

2.2 유비의 입촉

장송이 형주에서 조조을 만나고 돌아온 뒤 유장에게 조조과 관계를 끊고 유비와 결탁하도록 권했다. 유장이 말했다.

누가 사자로 갈 만하오?

이에 장송이 법정을 천거했는데 법정이 사양했으나 부득이하게 가게 되었다.

유봉전에 따르면 당초 유장은 부풍의 맹달을 법정의 부장으로 파견하고, 각기 병사 2천 명을 인솔하게 하고 강릉에 남아 주둔하도록 했다.

화양국지 유선주지에 따르면 손부인은 재주있고 호탕한 인물로 오라비들의 풍모가 있었다. 백명의 시비는 모두 검을 쥐고 도열하여 유비는 수레에서 내릴 때 겁을 먹었다. 이에 법정은 유비에게 손부인을 오로 돌려보내도록 권하였다.

법정이 돌아온 뒤 장송에게 유비가 웅대한 계략을 갖추었다고 칭찬하여 말하고 은밀히 협력하며 유비를 추대하여 받들길 원했으나 기회가 없었다.

그 뒤 유장은 조조가 장수를 보내 장로를 치려 한다는 것을 듣고 두려운 마음을 품게 되었다. 이를 틈타 장송이 유장을 설득하길 유비를 맞아들여 그로 하여금 장로를 치게 하고, 다시 법정에게 명을 받들게 했다. 법정은 유장의 뜻을 전한 뒤 은밀히 유비에게 계책을 올렸다.

명장군(明將軍)의 영명한 재주로 유목(유장)의 유약함을 틈타십시오. 장송은 주(州)의 신임 받는 중신으로 내부에서 호응할 것입니다. 그 연후에 익주의 풍성함을 기반으로 하고 험조함에 기대면 쉬운 일입니다.

유비가 이를 옳게 여기고 장강을 거슬러 올라가 서쪽으로 가서 광한군 부현에서 유장과 만났다. 북쪽으로 광한군 가맹현으로 갔다가 남쪽으로 돌아와 유장을 공격했다.

팽양전에 따르면 마침 유비가 촉나라로 진입하여 장강을 따라 거슬러 북쪽으로 가고 있었다. 팽양은 유비가 자신을 받아들이도록 유세하기 위해 곧바로 방통에게 가서 만났다. 방통은 그를 높이 평가했고 법정은 이전부터 팽양의 재능을 알고 있었으므로 그와 함께 유비가 있는 곳으로 갔다.

정도가 유장을 설득했다.

파서와 재동의 백성들을 내수와 부수 서쪽으로 모두 내몰고 그곳의 창고와 들의 곡식을 모두 불태운 뒤 보루를 높이고 해자를 깊게 판 채 조용히 그들을 기다리는 것 만한 것이 없습니다. 저들이 당도하여 싸움을 청해도 들어주지 않으면 오래도록 군량을 얻을 곳이 없으니 백일이 되기 전에 필시 스스로 달아날 것입니다. 달아날 때 공격하면 틀림없이 사로잡을 수 있습니다.

유비가 이를 듣고 증오하여 법정에게 물었다. 법정이 말했다.

끝내 이 계책을 쓰지 않을 것이니 걱정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과연 법정의 말과 같았으니 유장이 그 수하들에게 말했다.

나는 적에 맞서 백성을 편안케 한다는 말은 들어 보았으나 백성들을 움직여 적을 피한다는 말은 들어보지 못했소.

그리고는 정도를 내치고 그 계책을 쓰지 않았다.

군(軍)이 낙성을 포위하게 되자 법정이 유장에게 항복을 권하는 서신을 보냈다.

214년, 진격하여 성도를 포위했는데, 유장의 촉군태수 허정이 성을 넘어 항복하려 했으나 일이 발각되어 성사되지 못했다. 유장은 위태로워 망하려 함이 가까이 닥쳤으므로 허정을 죽이지 않았다. 유장이 머리를 조아리고 항복한 뒤 유비는 이 일 때문에 허정을 박대하며 임용하지 않았다. 법정이 설득했다.

천하에 헛된 명예를 얻었으나 그 내실이 없는 자가 있으니 허정이 그렇습니다. 그러나 지금 주공께서 천하인들에게 일일이 설명할 수도 없는데, 허정의 허명이 널리 퍼져있으니 만약 그를 예우하지 않으면 천하인들은 이를 들어 주공께서 어진 이를 천대한다고 말할 것입니다.

이에 유비가 허정을 후대했다.

장비전에 따르면 익주가 평정된 후 제갈량, 법정, 장비와 관우에게 각각 금 5백 근, 은 천 근, 전 5천만, 비단 천 필을 하사하고, 그 밖의 사람들에게는 각기 차이를 두어 포상했다.

2.3 유비 휘하

목황후전에 따르면 유비가 익주를 평정한 후, 손부인은 오나라로 돌아갔으므로, 신하들은 유비에게 목황후를 맞이하도록 권유했다. 유비는 유모와 동족이라는 점이 마음에 걸렸으므로 결정을 내리지 못하였는데, 법정이 진언하여 말했다.

만일 관계의 친함과 소원함을 논한다면, 어찌 춘추시대 진문공과 자어에 비교하겠습니까?

그래서 목황후를 맞이하여 부인으로 삼았다.

과거 진문공은 진회공 자어와 가까운 종실 관계였음에도 불구하고 자어가 죽자 아무런 거리낌 없이 자어의 아내인 회영과 결혼했다. 그러니까 목황후의 전 남편인 유모가 유비와 동족이라고 해도 진문공의 사례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라는 뜻이다.

법정을 촉군태수 양무장군으로 삼으니, 밖으로 도읍과 그 주변를 통솔하고 안으로 주요한 모사가 되었다. 밥 한 그릇 얻어먹은 은혜나 눈 흘긴 사소한 원한을 되갚지 않는 법이 없었고, 자신을 헐어 상하게한 자 몇 사람을 함부로 죽였다. 어떤 이가 제갈량에게 말했다.

법정이 촉군에서 지나치게 거침없이 마구 오가니 장군께서 의당 주공께 여쭈어 그의 위엄과 은혜를 내리는 권한을 억누르십시오.

제갈량이 대답했다.

주공께서 공안에 계실 때 북쪽으로는 조조의 강성함을 두려워하고 동쪽으로는 손권이 핍박함을 꺼렸으며, 가까이는 손부인이 곁에서 변고를 일으킬까 겁내시었소. 그러다 법효직이 주공을 다시 남의 제약을 받지 않게 했으니, 어찌 법정을 금지해 자기 뜻대로 하지 못하게 하겠소!

제갈량전 주석 촉기에 따르면 제갈량의 형법이 엄하고 급해 백성을 가혹하게 다루자 군자부터 소인에 이르기까지 모두 원망하고 한탄했다. 법정이 간언했다.

지금 그대는 위력(威力)을 빌려 한 주(州)를 걸터앉아 점거하고 처음 그 나라를 소유했으나 은혜를 베풀어 위무하지 않았소. 형벌을 느슨하게 하고 금령을 늦추어 그들의 원망을 달래십시오.

제갈량이 대답했다.

유장은 어리석고 나약해 법령이 제대로 시행되지 못하고 서로 아첨하니, 어질고 바른 정치가 이루어지지도 못하면서 위엄과 형벌도 엄숙하지 못했소. 촉 땅 인사들이 권력을 마음대로 휘두르며 스스로 방자하게 되자 군신의 도가 점차 쇠퇴했소. 이제 내가 법으로 위엄을 세울 것이고, 작위에 한도를 둘 것이오.

제갈량과 법정은 비록 좋아하고 숭상하는 바가 서로 같지 않았으나 공적인 도의로 서로 따랐고 제갈량은 늘 법정의 지모와 권술을 높게 여겼다.

이적전에 따르면 이적이 제갈량, 법정, 유파, 이엄과 같이 촉과(蜀科)를 만드니, 촉과의 제도는 이 다섯 사람에게서 유래된 것이다.

2.4 한중 공방전

217년, 법정이 유비를 설득하며 말했다.

조조가 일거에 장로를 항복시켜 한중을 평정하고도 이 기세를 틈타 파촉을 도모하지 않고 하후연, 장합을 남겨 자신은 황급히 북쪽으로 돌아갔으니, 이는 그의 지모나 역량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필시 내부에 우환이 닥쳤기 때문일 것입니다. 지금 하후연과 장합의 재략을 헤아려보면 우리의 장수들보다 낫지 못하니 공격하면 반드시 이길 수 있습니다. 이는 하늘이 우리에게 준 기회이니 이때를 놓쳐서는 안 됩니다.

유비가 그 계책을 좋게 여기고 이에 제장들을 이끌고 한중으로 진병했고 법정 또한 수행했다.

양홍전에 따르면 그 당시 촉군태수 법정은 유비를 수행하여 북쪽으로 갔었다. 제갈량은 이 때문에 표를 올려 양홍에게 촉군태수를 겸임하도록 했다.

219년, 유비가 양평으로부터 남쪽으로 면수를 건너 산을 따라 점차 전진하여 정군, 흥세에 영채를 세우니 하후연이 군사를 이끌고 와서 그 땅을 다투었다. 법정이 말했다.

가히 공격할 만합니다.

유비가 황충에 명해 높은 곳에 올라 북을 울리고 함성을 지르며 이를 공격하게 하여 하후연군을 대파했고 하후연 등은 참수 당했다. 조조가 서쪽을 정벌하며 법정의 계책임을 듣고 말했다.

나는 예전부터 현덕(유비)이 이 같은 일을 할 수 없음을 잘 알고 있었으니 필시 남의 가르침을 받았을 줄 알았다.

화양국지 유선주지에 따르면 또한 말했다.

나는 간웅이라고 할만한 자들은 거의 다 수하에 두었으나, 법정만은 손에 넣지 못했구나.

유비가 조조와 함께 다툴 때 형세가 불리했다. 의당 퇴각해야 했으나 유비가 크게 화를 내며 퇴각하려 하지 않으니 감히 간언하는 자가 없었다. 화살이 비 오듯 쏟아지고 있는데 법정이 유비의 앞으로 나아가려 하자 유비가 말했다.

효직은 화살을 피하시오.

법정이 말했다.

명공께서 친히 화살과 돌을 당해내시는데 하물며 소인이겠습니까?

이에 유비가 말했다.

효직, 내가 그대와 함께 물러나겠소.

그리고는 퇴각했다.

유비가 한중왕에 오르자 법정을 상서령, 호군장군으로 삼았다.

2.5 죽음

계한보신찬에 따르면 익후(법정)은 훌륭한 책략을 사용하고, 세상의 흥함과 쇠함을 예측했다. 주상에게 몸을 던져 의탁하고, 의견을 서술하고 자문했다. 잠깐 생각하고도 바른 평가를 내리며, 사태를 보고 변화의 징조를 알았다.

유비가 한중왕에 오르고 1년 후인 220년, 법정은 45세로 죽었다. 유비가 그를 위해 며칠 동안 눈물을 흘렸다. 시호를 내려 익후(翼侯)라 했다. 아들 법막이 후사를 이었다.

조운전에 따르면 당초 선주(유비) 때에는 오직 법정만이 시호를 받았다. 공신들인 관우, 장비, 조운 등이 죽고 수십 년에 지나고 나서야 시호를 받았던 것에 비하면 대접이 남달랐다.

유비가 황제에 오른 뒤 장차 동쪽으로 손권을 정벌해 관우의 치욕을 되갚으려 하니 뭇 신하들이 여럿 간언했으나 하나같이 따르지 않았고, 이릉대전에서 크게 패하고 백제(白帝)로 돌아와 머물게 되었다. 제갈량이 탄식하며 말했다.

법효직이 살아 있었다면 능히 주상(유비)을 제지해 동쪽으로 가시게 하지 않았을 것이다. 설령 동쪽으로 가셨다 하더라도 필시 형세가 위태로워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3 미디어 믹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