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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孟達 (? ~ 228)

1 개요

후한 말과 삼국시대의 인물. 후한의 양주자사 맹타의 아들. 자는 자경(子敬)이었는데 유비의 숙부 이름이 유경(劉敬)이었기 때문에, 피휘하여 자도(子度)로 바꾸었다.

2 생애

2.1 초기

맹달은 우부풍(右扶風) 사람으로 건안(建安; 196년 ~ 220년) 초기, 동향 사람 법정과 함께 기근을 피해 으로 들어가 익주(益州) 자사(刺史) 유장을 섬겼다. 별가(別駕) 장송이 유장에게 조조와 관계를 끊고 유비와 결탁하여 한중을 뺏을 것을 권하자, 유장은 법정과 맹달에게 각각 2천 명의 병졸을 주어 유비를 지원하도록 했다. 하지만 법정과 맹달은 유비가 입촉(入蜀), 즉 익주를 정복하는 것을 도와줬고, 유비가 유장을 항복시킨 후 맹달은 의도군(宜都郡) 태수(太守)에 임명되었다.[1]

2.2 관우를 사지로 내몰다

서기 219년, 유비는 조조를 몰아내고 한중을 손에 넣고 맹달과 유봉에게 상용군(上庸郡)을 공격하게 했다. 그래서 맹달은 자귀현(秭歸縣)에서 출정하여 방릉군(房陵郡)을 쳤고 방릉군 태수 괴기(蒯祺)[2]를 죽였다. 그리고 나서 한중에서 출정한 유비의 양아들 유봉과 함께 상용군을 공격하여 상용 태수 신탐의 항복을 받아냈다. 이 과정에서 신탐 형제를 휘하에 거느리게 된다.

그 해에 관우(關羽)가 번성과 양양을 포위하고 지원을 요청하였다. 하지만 이제 막 복속시킨 군들을 동요시킬 수 없다며 거절하였다. 그런데 관우가 패사하는 바람에 유비가 이 일을 원망하였다. 더구나 유봉과 화합하지 못해 군악대를 뺏기기도 하였다.[3]

2.3 위나라에 투항

맹달은 관우를 죽음에 이르게 했고, 조정에서 그 책임을 물을 것이 두려웠다. 여기에다 유봉의 행위에 부아도 치밀어 유비에게 작별 편지 하나 남긴 채 위나라로 귀순하였다.

조비는 맹달에 대한 높은 평가를 익히 들었던 터라 매우 기뻐하였다. 그 등을 어루만지며 유비의 자객은 아닐 것이라는 농담과 함께 자신의 수레에 태워 환영하였다. 위나라의 안목 있는 여러 고관들도 맹달을 악의에 비견하며 장수의 재목이라거나 재상의 그릇이라고 평하였다. 산기상시(散骑常侍), 건무장군(建武將軍)에 임명되고, 평양정후(平陽亭侯)에 봉해졌다. 또 상용군, 방릉군, 서성군(西城郡) 3군을 합병하여 새로 만들어진 신성군(新城郡)의 태수까지 겸하여 위나라 서남방의 일을 맡게 됐다. 오직 유엽사마의만이 맹달을 믿을 수 없다며 중용해서는 안된다고 간했는데 조비는 아무 문제도 없을 것이라 장담하였다.[4]

조비가 황제에 오른 후 하후상, 서황과 함께 상용 일대를 공격하여 유봉을 성도로 쫓아냈다.

2.4 위나라를 배반

226년 맹달을 총애하던 조비가 죽었다. 친하게 지내던 환계와 하후상도 이미 세상을 떠났었다. 항복한 장수 출신인데다가, 이미 국경 지방에 오랫 동안 머무르고 있던 맹달로서는 자신이 처한 상황이 매우 불안할 수 밖에 없었다. 이를 들은 촉의 제갈량이엄이 접근해왔다. 오나라 역시 마찬가지였다.

227년(태화 원년) 한중에서 북벌을 시작하려던 제갈량은 거사를 벌이기로 한 맹달이 그동안 거듭한 배신, 변심(反覆)행위를 할까 우려해[5] 곽모를 위흥태수 신의에게 위장 귀순시켜 그간의 모의를 흘렸다. 맹달과의 관계가 좋지 않았던 신의는 표를 올려 이 사실을 보고하였고, 누설을 알게 된 맹달은 서둘러 거병하려 하였다. 그러나 조예는 맹달이 은밀하게 촉과 밀통하고 있다는 표를 믿지 않았다. 이에 남양군 완현(宛縣)에서 정무를 보던 독형예이주제군사(督荊豫二州諸軍事) 사마의는 맹달이 빠르게 행동에 나설까 걱정해 서신을 써 안심시키고는 은밀히 토벌 준비를 하였다. 얼마 후 사마의가 참군 양기(梁幾)를 파견해 실상을 조사하는 한편 맹달에게 입조를 권하였다. 사마의의 편지로 인해 거병을 망설이던 맹달은 놀라서 비로소 난을 일으켰다.

맹달이 바로 사마의가 직접 오진 않을테니 걱정없다고 방심하는 사이 사마의는 주태(州泰)를 선봉에 세우고 바로 출진한 데다 1,200여 리 길을 강행군하여 8일만에 신성군 상용현에 도달했다. 사마의의 신속한 공격에 상용은 쉽게 무너졌고, 맹달의 진영에서는 이보, 생질 등현 등의 배신자가 발생했다.[6] 촉나라와 오나라의 원군은 상용에 다다르지 못해 맹달을 구할 수 없었다.[7] 보름만에 사로잡혀 참수되었으며, 그 머리는 낙양으로 보내져 불태워졌다. 228년 정월이었다.

"宛去洛八百,去此千二百里,聞吾?事,當表上天子。比相反覆,一月閒也;則吾城已固,諸軍足辨。吾所在深險,司馬公必不自來。諸將來,吾無患矣。"

("남양군[8]은 낙양과 800리 떨어져 있고, 이 곳 상용군과는 1,200리나 떨어져 있습니다. 제가 거병을 했다는 소식을 들어도 먼저 천자께 아뢰어야 합니다. 말이 오고가다 보면 한 달은 걸릴겁니다. 그러는 사이에 제 성의 방비도 강화되고, 군사 준비도 끝마쳤을 것입니다. 제가 있는 곳은 외지고 험한 지형이니, 사마의는 분명히 직접 오지 않을 겁니다. 여러 장수가 와도 저는 걱정이 없습니다." - 제갈량에게[9])

"吾起事八日,而兵至城下,何其神速也!"
("제가 거병한지 8일 밖에 안됐는데, 벌써 적군이 성 밑에 와있습니다. 어떻게 이렇게나 빠를 수가 있나요 !" - 사마의의 군대가 쳐들어오자, 제갈량에게)
- ≪화양국지(華陽國志)≫ 권 2ㆍ<한중지(漢中志)>제 9[10]

맹달이 죽은 후에 반역의 고장 신성군은 신성군, 상용군, 석군으로 3분할되었다. 한편 촉에 남기고 온 아들 맹흥(孟興)은 의독군(議督軍)으로 있다가 촉이 멸망한 후 264년(함희(咸熙) 원년) 부풍군으로 이주하였다. 이때 유봉의 아들 유림(劉林)은 하동군(河東郡)으로 이사갔다. 위나라에서의 가족 기록은 없다.

3 평가

오늘날에는 배신아이콘으로 꼽히는 인물이긴 하지만, 그의 능력은 제법 뛰어나서 형주, 익주, 사례(司隸) 3주가 연결되는 요충지인 한중군 동부 일대를 얻어냈다. 위에 투항한 뒤에도 중앙으로 완전히 편입되지 않고, 이 일대에서 세력을 어느 정도 유지하였다. 다만 호족 세력들에 의해 옹립된 반쯤 독립한 세력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해당 호족은 원래부터 이곳에서 세력을 키웠던 신탐, 신의 형제이며 신의는 바로 이웃인 위흥군(옛 서성군)의 태수로 있으면서 맹달과 반목했다.

맹달은 자신의 실력과 명성에 항복한 장수로서의 공적까지 겹쳐 조비에게도 총애받았다. 맹달의 명성은 촉나라에 있을 때부터 위나라에 알려졌으며 하후상, 환계 등의 고관은 맹달을 매우 높게 평가하였다. 한중군 동부 일대는 오지로써 오고가기도 매우 힘든 곳이었다. 유비 역시 유봉을 질책할 때 관우의 죽음뿐만이 아니라 맹달을 핍박한 것까지 포함되어 있었다. 물론 잘 생겼다는 이유도 있었지만 그의 명성 역시 조비가 맹달을 신용하게 만든 요인이었다.

한편으론 그렇다해도 조비의 총애나 신용이 과도했다고 볼 수도 있다. 측근인 유엽사마의 등은 맹달은 믿을 수 없다며 큰 권한을 주어선 안된다고 간했었다. 명제기 주석 위략에 따르면 신하들 중 어떤 사람은 그가 지나치게 분수를 넘는 대접을 받는다고 여겼고, 또 그에게 한 지방의 임무를 맡겨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후일의 일을 생각한다면 결국 후환을 남긴 인선이 되어버렸음도 사실이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맹달과 친했었던 환계, 하후상, 조비의 사후에 터진 일이었다. 조비 사후 맹달은 비빌 구석들이 사라져버렸고 특히 이상할 정도로 지속적으로 맹달에게 적대적이었던 사마의는 아예 독형예이주제군사로서 맹달의 직속상관이었다. 맹달은 자신을 믿어주던 조비 시절엔 일을 저지르지 않았고, 자신을 믿어주지 않던 사마의가 직속 상관일 때 일을 저질렀다. 즉 맹달의 반역을 부른것은 결국 사마의 때문이라고도 볼 수 있는데 연의 속에서 반골의 상이라며 제갈량에게 무시당했던 위연의 실제판이라고 볼 수도 있다.만일 누군가 널 처음봤을 때 반골의 상이라고 싫어하면 그 좆같은 반역을 꼭 해줘라

코에이의 삼국지 시리즈에서의 묘사와는 달리 상당한 미남이었을지도 모른다. 다른 건 몰라도 심미적인 측면에선 뛰어난 자질과 세련된 안목을 갖췄던 '시인'이자 '문학가'인 조비의 취향에 부합했다는 점, 그런 조비에게서 전례없이 대단한 총애를 받았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맹달은 당시 기준으로는 엄청난 미남이었을지도...

4 미디어 믹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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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 9,10,11
삼국지 12,13

삼국지 시리즈에서의 일러스트는 시류에 영합하는 기회주의자적인 모습이 잘 반영되었다.

삼국지 시리즈에서는 그저 일개 장수로 나오지만 위와 같은 이유로 공손연이나 사섭과 마찬가지로 어느 정도 독립 세력으로 볼 수도 있다. 고증을 따지자면 유비 휘하에 있을 때는 단순히 태수, 조비 휘하에 있을 때는 위나라에 '종속'된 세력으로 나오는 것이 적절할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이렇게 나온다면 삼국이 완전히 정립된 가운데 그 한 가운데서 태수 1명 영토 1성[11]으로 플레이 하는 엄백호를 능가하는 하드코어 난이도 군주가 될 것이다. 그나마 재야 인재라도 좀 있는 엄백호보다 심한 것은 상용에는 재야 인재가 없어[12] 인재를 육성할 방법이 없다는 것이다. 게다가 위나라와 촉나라 중간에 끼어있기 때문에 오직 방랑만이 살 길이 된다.

삼국지 12까지 독립세력으로 나온 적은 없고 유장군이나 유비군, 조비군(삼12기준)으로 하면 일반무장이다. 능력치도 60대인 정치를 제외하면 대부분 70대라서 충분히 쓸 만한 무장이다. 상성은 대대로 45로 촉과 위의 중간 정도로 나오며, 의리가 낮고 야망이 높아 대단히 배신하기 쉽다.

참고로 미남이었다는 평가와는 달리 매력은 삼국지 10까지만 해도 참으로 낮게 나왔었다. 특히 삼국지 6의 매력 16이 그 안습의 절정. 물론 삼국지 시리즈의 매력은 외모보다는 인품으로 측정되는 능력치이기는 하나,[13] 그 외모나 재능으로 조비 등의 마음을 샀을 정도인데도 저렇게 낮게 나온 건 다소 적절치 못하다고 할 수 있겠다. 그러다가 삼국지 11에서는 매력이 72로 평균 이상 가는 수준으로 재평가되었다. 사실 매력 수치는 둘째치고 일러스트부터가 그닥 미남이라는 고증을 안 살린 걸 보면 코에이 측에서는 딱히 미남으로 설정하지 않은 것일지도.

삼국지 3에서는 장군이 될 수 있고 비록 못생겼지만 고유 얼굴도 있는 등 별로 유명하지 않은 장수들 치고는 대우가 상당히 좋다. 육지71 수지70 무력73 지력70 정치58 매력67에 야망7, 운7, 냉정7, 용맹7으로 후방태수를 시켜주면 아주 좋은 능력치를 갖고 있다.

삼국지 9의 능력치는 72/74/77/64. 연사와 혼란 등의 특기를 가지고 있어서 꽤 유용하다.

삼국지 10에서의 능력치는 75/74/79/69/48로 그럭저럭 쓸 만 한 무장. 다만 정치가 69로 낮은편인데 내정 특기 하나라고 준게 상업인건 조금 아쉽다. 통솔 75에 지력 79라는 무난한 능력치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반목, 화시는 전장에서 도움이 꽤 될 만한 특기. 상용을 탈취한 이후부턴 상용 태수로 나온다.

삼국지 11에서는 75/73/74/66/72로 전작에 비해 매력이 50%나 상승했지만 안타깝게도 특기가 없다. 적성은 노병과 병기가 A이다. 다행히 친애무장은 하후상, 환계, 장송, 법정, 이엄 이렇게 5명이나 있고 그 외에도 곽준과 조비의 친애무장에 맹달이 들어있기 때문에 비교적 높은 노병 적성을 살려 지원 공격으로 활약할 수 있는 길은 있다. 문제는 의리수치가 최저로 책정되었다는 점, 배신을 조심하자. 혐오무장은 신탐, 신의, 유봉으로 적절하게 나온다. 덤으로 의리가 최저치인 무장 중에서는 능력 총합 최고 타이틀도 거머쥐고 있다. (2위는 11에서 능력이 크게 상향된 옹개)

삼국지 12에서는 75/73/75/66의 고른 능력치로 등장. 그러나 본작에서 특기가 딸랑 상재 하나밖에 없다. 병종은 궁병. 삼국지연의에서 서황을 활로 쏴 죽였는다는 행적이 있는데 원사 특기가 없다. 아무래도 특기가 하나밖에 없어 활용도가 떨어지지만 상재 특기를 활용하여 시장에 배속시켜 놓으면 좋다. 내정용으로 보나 전투용으로 보나 매우 뛰어나다 할 수 없으나 그래도 밥값은 한다. 전법은 매복지독이라 쓸만한 편.

삼국지 13에서는 특기도 매우 부실하고, 병종 능력치도 궁병 A 하나 뿐에, 전법도 무의미해서 쓸모가 없어졌다. 어떻게든 쓰라면 쓸 수는 있었던 전작들과는 달리 더욱 대우가 좋지 않아졌다. 정 쓰려면 부장으로나 써야 하는데 그나마도 전투 특기가 별로 없어서...

삼국지 영걸전에서는 그나마 가장 대접이 좋은 시리즈인데, 일러스트도 중후하게 나왔고, 능력치도 전부 70대 이상으로 입촉 당시까지 장수들을 별로 키워놓지 않았다면 대체자원으로 충분히 키울 만 하기 때문이다. 마초와 마대를 맞아들인 후 유장을 마초에게 항복권고시키지 않고 전투로 끝을 보겠다를 선택했을 시 발생하는 성도 침공전에서 법정이 친구인 맹달을 살려달라는 부탁을 하게 되고, 유비로 맹달에게 접촉하면 항복한다. 또한 맹달을 얻지 않는 분기도 있기 때문인지 맥성 전투에서 배반하는 장면이 없기 때문에 끝까지 따라온다. 이 점은 같이 상용에 있었던 유봉도 동일하다.

삼국지 공명전에서는 아군으로 쓸 기회는 없고 역사대로 관우를 배신하고 위로 넘어가게 되며, 이후 양평관 전투에서 제일 오른쪽 아래 부대의 대장으로 출진하는데, 친구였던 이엄을 붙여 설득시키면 물러난다.그 뒤로는 등장하지 않고, 역사에서의 모반을 했다가 사마의에게 진압되는 장면도 나오지 않는다. 신탐과 신의는 출연하는데, 가정전투에 등장하여 아군을 괴롭힌다. 왕평을 붙여 빨리 처리하는 것이 답.

삼국지 조조전에서는 보병 클래스로 등장한다. 일러스트만 봐도 퉁명스럽게 생겼으며 대사 하나하나가 불평불만 투성이다. 능력치도 전반적으로 좋지 않으며 특히 사기가 매우 낮아 회심의 일격을 잘 처맞기에 보병임에도 방어력이 형편없는 편이다. 하지만 어쨌든 장수인 만큼 레벨은 잡병들보다 높기 때문에 아군의 좋은 경험치 제물.

삼국전투기에서는 배신의 아이콘이라 그런지 쿠루루기 스자쿠로 나왔다. 참고로 이 작품에서 를르슈 람페르지사마의. 둘은 급수가 다른데? 능력적인 부분보다는 나라를 등진 배신자이자 사마의와 대립하게 되는 포지션을 감안해서 패러디 된듯 하다. 스자쿠를 패러디로 쓴 만큼 외모는 고증에 맞게 꽤 준수하게 나온다. 장비가 그렇게 곱상하게 생겨서 잘 싸울 수 있겠냐고 의문을 표했을 정도. 다만 소개컷에서도 능력은 있다고 되어있고, 스자쿠만큼 사기캐는 아니라도 웬만큼 싸움은 하는 듯 하다. 장비와 마초가 일기토를 벌일 때 마초를 저격하려하며 본인의 활 솜씨를 과시하는 모습이 나오기도 했다. 사실 연의에서 서황을 활로 저격하여 죽인 적이 있기에 이 장면은 일종의 복선일거라 여겨졌으나, 정작 서황은 정사대로 병사해버려서 별 의미없게 되어버렸다. 후에 유페미아조비가 사망하고 본인의 입지가 곤란해지자 제갈양의 설득에 넘어가 촉으로 돌아가려고 하지만 사마의에게 수를 읽혀 포위당한 채 고군분투하다가 결국 패한다. 여기서는 난전 중에 문흠에게 죽는다.

배한성, 배칠수의 고전열전에서는 유비가 입촉할 때 친유비파로 잠깐 언급되고, 관우요화를 보내 유봉에게 구원요청 할 때도 잠깐 언급되다가 공명이 북벌을 하기 위해 회유할 때 등장한다. 여기서 그의 과거사를 통째로 정리하는데, 처음 유장을 버리고 유비에게 갈 때, 두번째로 관우의 지원군을 보내지 않아 유비의 노여움을 사서 위나라로 투항할 때, 세번째로 제갈량의 회유에 응할 때 모두 천사와 악마의 음성을 듣고 악마의 말을 따랐다.그러다가 제갈량사마의가 병력을 그쪽으로 보내기 전에 빨리 오라고 했는데 이번에도 '승상이 떠나라면 지금 당장 떠나야지'라는 천사의 목소리와 '천천히 가도 늦지 않습니다.'라는 악마의 목소리를 듣고 악마의 말을 따랐다가 사마의의 기습을 받아 죽고만다.


일기당천에서는 도서위원회 소속으로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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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노답 삼형제불편한 삼국지에서는 배신왕으로 등극했다. 이리저리 줄타기를 반복해서 살아보려고 발버둥치는 배신왕의 모습이 역력하다.
  1. 연의 : 법정과 맹달이 애초부터 장송과 함께 행동하며 촉을 유비에게 넘겨줄 생각을 하고 있었다는 식으로 서술하고 있다. 확실히 법정은 친유비 세력이긴 했다.
  2. 괴기는 일찍이 제갈량의 큰 누나와 결혼하였으므로 제갈량의 자형인 셈이다.
  3. 연의 : 맹달이 유봉에게 "그대(유봉)는 관우를 작은아버지로 생각할지 몰라도 관우가 그대를 조카로 생각할지는 의문이다. 지금껏 관우는 유선을 지지해왔다" 라고 하며 원군을 보내주지 않는다.
  4. ≪위략≫ ; 배송지 주석, ≪삼국지≫ㆍ<魏書>ㆍ<明帝紀>
  5. 당장 촉에서도 맹달에 대해 우려하는 반응이 있었다. 비시는 맹달은 이미 여러번 배반한 자이며 관성(款誠)이 없으므로 믿어선 안 된다고 했다.
  6. 연의 : 서황을 화살로 쏴 맞히는 등 나름 분전한 것으로 각색되었다. (정사에서는 병사)
  7. ≪삼국지≫41권 <비시전>과 ≪화양국지≫에서는 제갈량이 맹달을 믿지 못해 구하지 않았다고 했지만 ≪진서≫<선제기> 와 ≪수경주(水經注)≫, ≪자치통감≫등의 사서와 지리서는 촉과 오에서 지원군을 파견했다고 한다. 수경주, 자치통감 등의 기록에는 촉과 오가 목란새까지 갔다고 하고 유봉전에 인용된 ≪위략≫에선 신의가 촉길을 끊고 구원하지 못하게 하였다니 촉의 군대가 목란새 서쪽 서성을 관할하던 위흥태수 신의를 목란새까지 밀어 붙였으나 그 전에 상용이 함락되었던지 아니면 신의가 요지에서 막고 있는 것을 보고 구원을 포기했던지 둘 중 하나일 것이다. 오의 군대는 위치상 목란새까지 가지는 않았을 것이니 일단 촉군이 목란새까지 돌파했을 가능성은 있다.
  8. 사마의는 당시 남양 땅에 있었다.
  9. 후에 제갈량은 북벌에서 '전장에선 굳이 명을 받지 않는데 사마의가 조예에게 명을 받으려 함은 제장들을 진정시키는 것'이라고 평했는데 제갈량이 사마의를 그렇게 평가했다면 이 편지를 받고 일을 그르쳤다고 판단했을수도 있다.
  10. 출처
  11. 보통 상용은 한 성으로 나오는데 신성에 편입된 걸 모두 합친다면 3성까지 키울 수는 있다.
  12. 상용의 재야 인재는 신탐, 신의 정도가 있는데 맹달이 상용을 차지하고 있을 시기에는 이미 다른 세력이 임관하고 있을 시기다.
  13. 이에 대한 반론으로 초선이나 견희 등의 여성무장을 예로 드는 경우가 있는데, 이들의 능력치는 그냥 여성 무장 보정으로 봐야 한다. 기껏 등장해도 능력치 낮으면 안 쓰니까 그렇지 않다면 견희가 웬만한 문관 수준의 지력인 71로 나온 것이 설명이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