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란덴부르크 문

Brandenburger Tor (독일어)
Brandenburg Gate (영어)

1 개요

베를린, 나아가 독일이 세계에 자랑하는 랜드마크
배를린 함락때 제일 많이 찍히는 곳 중 하나

2차 세계 대전, 베를린 장벽, 독일 통일과 같은 격동의 독일사를 함께한 건축물로, 오늘날에는 유럽의 단결과 평화를 상징하는 건물로 인식되고 있다.

2 역사

2.1 건립

30년 전쟁 이후 작은 도시에서 프로이센 왕국의 수도로 격상된 베를린에는 18개에 달하는 많은 관문이 있었다. 이후 도시가 점점 성장해나감에 따라 새로운 관문이 필요했고 당시 국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는 평화의 상징으로 새로운 관문을 세울 계획을 세우는데, 그 결과물이 바로 브란덴부르크 문. 카를 고트하르트 랑한스(Carl Gotthard Langhans)가 그리스 아테네아크로폴리스를 참고하여 설계한 이 문은 1788년에 착공되어 3년만인 1791년에 완성되었다. 건설 당시에는 평화의 문(Fridenstor)이라는 이름이 붙었던 브란덴부르크 문 위에는 평화를 상징하는 그리스 여신 에이레네와 그녀를 이끄는 4두 마차가 조각됐다. 신고전주의의 대표적인 걸작이기도 한 이 건물은 12개의 도리스 식 기둥이 받치고 있었으며, 베를린으로 향하는 5개의 도로가 건립 당시부터 뻗어있었다[1].

2.2 19세기


하지만 브란덴부르크 문이 건립되기 직전에 발발한 프랑스 혁명의 물결이 곧 유럽을 휩쓸었고, 예나-아우어슈테트 전투에서 프로이센 군을 박살낸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베를린에 입성한다. 그리고 프로이센 입장에서는 굴욕적이기 짝이 없는 일이지만, 브란덴부르크 문을 통한 첫 개선식의 주인공이 바로 나폴레옹이었다. 더불어 개선문 위의 4두 마차 상까지 파리로 들고 갔다(...) 1814년 나폴레옹의 몰락 이후 프로이센 군이 역으로 파리를 점령하면서 조각상은 다시 베를린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브란덴부르크 문과 조각상은 이제 평화가 아니라 프로이센의 승리를 상징하게 됐고, 여신상 역시 평화의 여신이 아니라 승리의 여신 빅토리아로 바뀌었다. 이에 발맞춰 기존의 여신상에는 없었던 독수리와 참나무 잎으로 둘러싸인 철십자 깃발[2]이 추가된다. 이후로 브란덴부르크 문은 개선문의 역할을 맡아 전쟁에서 승리한 프로이센, 혹은 독일군이 반드시 지나가는 장소가 되었다.


보불전쟁에서 승리한 뒤 브란덴부르크에서 개선식을 하는 프로이센군

다만 여전히 평민들에게는 양 끝의 도로만을 이용하는 것이 허용됐으며 가운데 도로는 왕족만 사용할 수 있었다.[3] 이처럼 신분에 따라 각각 다른 도로를 이용해야만 하는 규정은 훗날 1차 세계대전이 종전될 무렵 독일 제국이 붕괴될 때까지 유지된다.

2.3 20세기

1차대전 종전 이후 독일군도 브란덴부르크 문에서 개선식을 열었으며[4] 1933년 집권한 나치는 자신들의 상징인 하켄크로이츠를 이 브란덴부르크 문에 덕지덕지 붙여놓는 만행(...)을 저지르기도 했다. 이후 2차 대전베를린 공방전을 거치면서 브란덴부르크 문은 심하게 파손된다. 기둥 곳곳이 총알과 포탄 파편으로 손상된 것은 물론 가장 중요한 부분인 4두 마차 상에서 한 마리를 제외한 세 마리의 말이 모두 머리가 날아간 것(...) 이러한 손상은 전쟁 이후로도 몇년간 그대로 유지된다.[5] 이후 세계는 냉전의 시기로 돌입하지만 브란덴부르크 문을 통해 양 측이 자유롭게 왕래할 수 있었다. 그런데 1961년 동독 측은 일방적으로 베를린 장벽을 세워서 통행을 막아버렸다. 물론 아예 막혀버린 것은 아니지만, 동베를린에서 서베를린으로 이 문을 통해 건너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게 됐다. 특히나 동독 측이 베를린 장벽 중간중간에 세운 8곳의 검문소 중 하나가 이 브란덴부르크 문이었는데, 그것으로 인해 이 문은 냉전과 독일 분단의 상징으로 자리잡는 불운을 겪는다. 하지만 1989년 독일이 재통일을 이루면서, 다시 통일의 상징으로 바뀌었다[6].

2.4 최근

통일 이후에는 냉전으로 인해 소홀했던 건물 관리에 몰두하고 있는데, 2000년 12월부터 2002년 10월까지 6백만 유로 이상의 엄청난 비용을 들여서 재단장을 하기도 했다. 2009 베를린 세계육상선수권대회에서는 마라톤경보 경기의 출발점과 결승점으로 사용되기도 했으며 2014년에서는 독일 축구 국가대표팀브라질 월드컵 우승 기념식을 이 곳에서 열었다.

낮이건 밤이건 관광객들이 엄청나게 많은 곳중 하나이다. 국회의사당은 사실상 바로 옆이고 베를린 중앙역이랑 포츠담 광장도 충분히 걸어갈만한 거리에 있다. 문 바로 앞엔 프랑스대사관이 있으며 근처에 미국대사관이 있다. 영화 언노운의 주요 무대인 아들론 호텔도 바로 앞에있다.
  1. 처음에는 평민들에게는 양 쪽 맨 끝의 두 도로만을 이용하는게 허가됐다고 한다.
  2. 독수리와 철십자는 게르만족의 상징으로 익히 알려져있고, 참나무 잎 역시 마르틴 루터종교 개혁 당시 교황의 파문서를 참나무 잎에서 불살라버린 것 때문에 독일인의 상징이 된다. 이 시기 서서히 대두되기 시작하는 민족주의를 확인할 수 있는 부분.
  3. 다만 프로이센 국왕을 알현하고자 하는 외국 외교관들과, 프랑스에게서 여신상을 되찾아 온 포일 장군의 후손들은 중앙 도로를 이용할 수 있었다고 한다.
  4. 1차 대전의 그 어정쩡한 종결과 정전 당시 독일이 한 치의 자국 영토도 빼앗기지 않았음을 감안한 일종의 정신승리였다.
  5. 물론 대충 복구를 하긴 했는데 그래도 숭숭 뚫린 구멍을 육안으로도 확인할 수 있을 정도였다고..
  6. 헬무트 콜 서독 수상이 한스 모드로우 동독 수상과 브란덴부르크 문에서 서로 만난 것이 대표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