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 독일 총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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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무트 슈미트 | ← | 헬무트 콜 | → | 게르하르트 슈뢰더 |
풀네임 | Helmut Josef Michael Kohl(헬무트 요제프 미하엘 콜) |
출신 정당 | 기민당 |
생년월일 | 1930년 4월 5일 |
재임기간 | 1982년 10월 1일 ~ 1998년 10월 27일 (만 16년 26일) |
목차
1 개요
서독의 6대 총리이자 통일된 독일의 초대 총리로, 오토 폰 비스마르크 이후로 가장 오래 재임한 독일 총리이기도 하다. 게다가 비스마르크는 권위주의 체제 하에서 황제에 의해 임명된 총리였지만 이 분은 선거를 바탕으로 16년을 버티셨다. 흠좀무 탁월한 국제정치감각을 바탕으로 냉전의 종식과 함께 다가온 통일의 기회를 놓치지 않고 분단의 역사에 마침표를 찍은 총리. 역사책에는 절대 빠질수 없게 됐다.
2 생애
2.1 초기
1930년 4월 5일 바이에른의 루트비히스하펜(Ludwigshafen)[1]에서 경찰관의 삼남으로 태어난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던 그의 집안은 1933년이후에도 나치에 대하여 반대하고 가톨릭 중앙당[2]의 열렬한 지지자로 남아있었다. 그의 형 중 한 명은 2차 대전 당시 소년병으로 징집되어 서부전선에서 미군과 싸우다 전사했으며, 헬무트 콜 본인 역시도 징집되어 군사훈련을 받았으나 다행히도 전쟁이 끝나면서 어떠한 전투에도 참가하지 않은 채로 군 경력을 마감하게 됐다.
2.2 정치 입문
1946년 기민당의 설립 시기부터 청년 당원으로 열렬히 활동했던[3] 콜은 연방하원과 같은 중앙 정치 무대에서 주로 근무하면서 경험을 쌓은 전임 총리들과는 달리, 고향인 라인란트팔츠의 주정부에서 근무하면서 자신의 입지를 쌓기 시작한다. 특히나 1969년에는 39세의 나이로 라인란트 팔츠의 주지사로 당선되는데, 이는 2015년 현재까지도 독일내에서 역대 최연소 주지사 당선 기록이다. 1973년에는 기민당의 총재 자리에도 오른 콜은 야심만만하게 1976년의 총선에서 당시 총리 헬무트 슈미트에게 도전장을 내밀었고, 실제 선거에서도 전체 정원에서 49%에 가까운 의석을 차지하는 기염을 토해내며 원내 제 1당 자리를 되찾았지만 사민당과 자민당이 연정을 연장하는데 합의하면서 총리에 오르는 데는 실패하고 만다. 이 직후 콜에게는 정치 인생상 최초의 고난이 닥친다. 바로 원내 라이벌이었던 프란츠 요제프 슈트라우스에게 당 총재 자리를 뺏기고 만 것.
2.3 총리로의 길
하지만 고난이 기회로 바뀌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1980년의 총선에서 슈미트에게 도전했던 슈트라우스는 1976년 콜이 얻었던 의석수에서 무려 20석을 잃는 대패를 당하면서 중앙 정계에서 은퇴한다.[4] 이제 기민당 내에서 라이벌은 사라지게 된 것. 그리고 1982년이 되자 부자증세와 노동시장에 대한 정책을 놓고 연정파트너였던 사민당과 자민당이 격하게 충돌했던 것. 정치 인생 내내 기회를 잡아채는 타이밍 감각에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했던 콜은 자민당에게 러브콜을 보냈고, 자민당 역시 기민당과의 새 연정 정부 구성 협상에 진지하게 임한다. 자민당의 총재이자 외무장관이었던 겐쇼는 이 시기 대놓고 슈미트를 디스하면서 콜과 만남을 가지면서 협상을 했지. 헬무트 슈미트 지못미 자민당의 후원을 손에 얻은 기민당은 1982년 10월 1일의 불신임 선거에서 여유롭게 헬무트 슈미트 내각을 붕괴시키고 사흘 뒤 새 기민-자민당 연정 내각의 총리로 콜을 선출한다. 기민당은 1969년 이후 13년만에 여당으로 복귀하게 된 것. 여담이지만 이렇게 불신임을 통해 상대방을 낙마시키고 자기가 총리 자리에 오른 것은 2015년 현재까지도 독일내에서 유일무이한 사례이다. 게다가 자세히 말하자면, 자민당은 불과 한 달 전의 신임선거에서는 슈미트에게 지지를 던졌다가 한 달만에 배신을 때린 거였고 이로 인해서 독일 내에서는 이러한 집권 과정이 합법적인 것인지에 대하여 엄청난 논란이 있었다. 사민당 일부에서는 헌법 재판소에 이러한 행위가 위헌이라고 제소까지 하기도...[5]
2.4 서독의 총리로서 (1982~1990)
아데나워의 정치적 양자를 자처했던 만큼 그는 당연히 아데나워의 외교노선을 선호했고, 이는 그가 미국과 영국보다는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 위주의 외교정책을 선호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전임 슈미트가 지스카르 데스탱과 평생에 걸쳐 우정관계를 맺었던 것처럼 콜은 프랑수아 미테랑과 정치적으로 동반자 관계였다. 특히나 1984년 베르됭에서 베르됭 전투의 전몰자들을 기리면서 미테랑과 콜이 오랫동안 손을 맞잡고 있던 모습은 단순히 독일과 프랑스의 화해만이 아니라 유럽 연합의 초석을 닦은 장면으로까지도 평가받고 있다.
그렇다고 콘라트 아데나워의 외교노선만을 따랐던 것은 아니어서 1987년에는 동독의 수상 에리히 호네커와 정상회담을 갖으며 빌리 브란트의 동방 정책을 계승하려는 모습도 보여주었다. 다만 이 시기 콜은 두고두고 논란이 되는 발언을 하는데 바로 늦게 태어난 자의 은혜(Gnade der späten Geburt)가 그것이다. 대충 설명하자면 자신과 자신보다 어린 세대(1930년대 이후 출생자)들이 반유대주의와 나치에 대해 비판적일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그 시대를 겪어보지 않았거나 아니면 그 시대가 끝날 무렵에 태어나 상대적으로 영향을 덜 받았기 덕분이라는 요지의 이 발언. 당연히(...) 제3제국시기 반나치활동을 펼쳤던 사람들에게 미친듯이 까였고(...) 서독 내부에서 총리가 올바른 역사적 인식을 갖고 있는지에 대한 논란이 불을 뿜었었다. 이 발언을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개개인들의 판단이지만, 콜에게는 일종의 흑역사.
어쨌든 콜은 무난무난하게 1983년의 선거와 1987년의 선거에서 승리하면서 3선 총리가 됐지만 5년 뒤 미국의 어느 섹통령의 선거문구가 보여주었듯이 대중들은 화려한 외교적 행보보다는 자신들의 지갑에 더 관심이 있는 법이었고, 대중적으로나 당내에서나 콜의 인기는 점점 시들시들해지기 시작한다. 자매정당인 기사연과 연정 파트너 자민당도 콜을 까기 시작했고, 급기야 1989년에는 당 내의 반대파들이 콜 대신에 새로운 인물을 총리 후보로 내세우려는 움직임까지 있었다. 이 시기 콜이 무력하게 당 내 헤게모니 싸움에서 패배했다면 그는 그저그런 총리로 역사속에 남았겠지만, 하늘은 콜의 편이었던지 거대한 역사적인 태풍이 다가오고 있었다. 바로 독일통일(Wiedervereinigung)!
2.5 통일 독일의 첫 총리(1990~1998)
- 자세한 내용은 독일통일#s-3 항목 참조
1990년 3월에 동독에서 자유선거가[6] 치러지게 되었다. 선거운동 기간 중에는 예상 외로 사민당이 압승을 거둘 것으로 예측되었지만 천천한 통일을 이룰 것을 주장한 사민당에 비해 조속한 통일과 화폐통합을 내세운 콜의 공약에 결국엔 판세를 뒤엎어버리는데 성공, 기민당과 자민당이 압승을 거둔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여러가지 이유로 인해[7] 통일에 대한 불안감이 엄습해왔고 그 영향으로 5월에 치러진 동독 지방선거에서는 기민당이 부진했었다. 그러나 콜 총리는 이에 굴하지 않고 동서독 1:1 마르크 교환정책을 펼치면서[8] 동독 지역주민들의 재산을 보전시킴과 동시에 [9] 외교적으로도 강대한 독일이 나타나지 않기를 바라는 영국과 프랑스 등[10]은 물론이고, 2차 세계대전에서 독일에게 엄청난 피해를 입은 소련과 폴란드를 구 영토에 대한 영유권 완전 포기선언으로 설득에 성공하면서 통일에 장애물들을 차근차근 정리해나간다. 마침내 10월 3일에 동독과 서독은 다시 하나의 국가가 된다. 그리고 2개월 뒤 통일후 첫 총선에서 기민당은 과반수를 훌쩍 넘는 압승을 거두었다.
2.6 통일 후유증으로 인한 인기 하락과 정계 은퇴
그러나 급진적으로 통일을 추진한 만큼 후유증도 만만치 않아서 콜 총리는 빠른 속도로 동독과 서독 양 측에서 인기를 잃어나가기 시작했다.
동구권이 체제 전환 후에 인플레이션이 발생하자 이를 해결하기 위한 대대적인 긴축정책으로 복지정책이 후퇴하는 상황이 겹치고[11] 구매력이 이전보다 더욱 더 떨어지면서 동독 물건이 잘 팔려나가지 않는 상황이 발생했다. 게다가 소련마저도 붕괴되는 바람에 동독 물건을 팔 만한 수출시장 자체가 꽉 막히다시피한 상황이 되었다. 그렇다고 동독에서 만들어진 물건이 서독이나 타 서유럽 국가에서 잘 팔리지도 않았고, 거기에다 동서간 인건비 격차도 줄어나가는 바람에 동독이 가지고 있던 값싼 인건비라는 장점도 급속히 상실되어버리면서 버터기 힘들어졌다. 결국 동독지역 기업들은 줄이어 파산하고 서독정부에서 경쟁력이 떨어진 동독지역 기업들을 대거 민영화하거나 구조조정하는 과정을 거치며 동독지역 실업률은 거의 30%대에 이를 정도가 되어버렸다. 또한 통일 직후 공공요금 현실화라는 명목아래 공공요금이 서독 수준으로 폭증하는 사태가 겹치던 참이었다.
그런 상황이 되면서 동독인들은 동독인대로 통일이 되면 잘살게 될 것이라는 환상이 처절하게 깨지며 분노했고, 서독인들은 서독인대로 통일에 대한 혜택을 피부로 느끼지 못한채 세금만 올라가면서 불만에 가득찬 상황이 되어버리며 동서간의 심리적 거리는 통일 전보다도 훨씬 벌어졌고 헬무트 콜의 지지율도 급속히 하향세를 타게 된다. 그럼에도 1994년 총선에서 간신히 4선에는 간신히 성공했지만 사민당이 연방상원에서 다수를 차지하면서 콜의 정치적 운신에는 엄청난 제약이 걸리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도 도무지 알 수 없는 패기로 5선에 도전한 1998년 총선에서 결국 콜은 게르하르트 슈뢰더가 이끄는 사민당에게 참패, 16년이라는 기나긴 세월끝에 총리직에서 내려오게 된다. [12]
2.7 이후의 삶
2002년 공식적으로 정계를 은퇴한 콜은 현재 뇌졸중으로 투병중이다. 2015년 11월 10일 전임자인 헬무트 슈미트가 타계하면서 생존한 전임 독일 총리로는 최고령자가 되었다. 그래봐야 후임자인 게르하르트 슈뢰더랑 둘 뿐이지만
3 여담
- 여러모로 가정사가 불행하다. 상술했듯이 그의 형은 2차대전 시기에 소년병으로 참전하여 미군과의 전투에서 전사했고, 그의 첫 번째 부인이었던[13] 한네로레는 소련군에게 강간당한다.[14] 이후로 평생 러시아어와 러시아인에 대한 노이로제에 시달렸다고. 퍼스트 레이디로서의 삶을 싫어했던 그녀는 항생제 복용 후유증으로 심한 햇빛 알레르기를 앓다가 결국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더불어 콜은 현재 두 아들과도 사실상 의절상태라고 한다.
- 대학교에서 역사학을 전공했고, 이와 관련해 박사학위까지 받았다.
그런데 농담인지 진실인지는 모르겠지만 그의 이름으로 나온 역사학 논문은 한 편도 찾아볼 수가 없다고 한다.하이델베르크 대학에서 발터 페터 푹스 교수의 지도로 "1945년 이후 팔츠에서의 정치적 전개와 정당의 재성립(Die politische Entwicklung in der Pfalz und das Wiedererstehen der Parteien nach 1945)"라는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 193cm의 신장에 120kg의 몸무게로 상당한 거구이다. 공식적인 몸무게가 120이고 아마 실제로는 더 나갈 것으로 추정된다. 총리 재임시절부터 본인이 "나의 몸무게는 국가기밀이다."라고 셀프디스를 시전하기도 했다.
- 거구의 덩치와는 별개로 상당히 어눌한 말투여서, 독일 내에서의 이미지는 좀 모자란 할아버지이다. 그래서인지 그의 멍청함을 디스하는 유머들이 꽤 유행하여 유머집까지 나왔는데, 한국에는 '콜 수상의 웃음'(유재식 편역, 우석출판사, 1985)으로 번역되어 출판되었다. 몇 가지만 소개해보자면.....
콜이 부인과 함께 정원을 치우다 수류탄 3개를 주웠다. 이걸 경찰에 갖고 가던 중 부인이 걱정스레 물었다. "하나가 터지면 어떡하죠?" 잠시 생각하던 콜은 "2개만 주웠다고 하지 뭐"라고 천연덕스레 말했다.
아프리카의 어느 흑인국가를 방문한 콜이 학생을 보고 뭘 배우고 있느냐고 물었다."프랑스어, 독일어, 대수를 배우고 있습니다"라고 학생은 대답했다."그럼 대수어(語)로는 수상을 뭐라고 하지?"하고 콜은 묻는 것이었다.
콜이 박사 과정을 위한 대학원 입학 시험을 치를 때의 일화이다. 교수가 그에게 물었다."프랑스 혁명 이후 군사적 성공을 바탕으로 대중의 지지를 얻어 쿠데타를 감행, 프랑스의 종신통령이자 나중에는 황제가 된 인물은?" 콜은 묵묵부답이었고, 답답해진 교수가 이렇게 소리를 질렀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그러자 갑자기 콜이 의자에서 일어나서 시험실 밖으로 나갔다. 놀란 교수가 콜에게 왜 나가냐고 묻자 콜의 대답은... "제 뒤에서 대기하는 학생 이름을 부른 것이 아니었나요 교수님?"[15]아무리 봐도 독일인 이름은 아닌데? 유학생이 있었던 것 같다
콜이 아내 한네로네와 함께 오페라를 보러 갔는데 매표소에서 앞 줄에 선 사람이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티켓을 주세요"라고 했다. 그 사람이 가고난 뒤 헬무트의 차례가 오자 그가 말했다. "헬무트와 한네로네의 티켓을 주시오."
- ↑ 오늘날에는 행정 구역상 라인란트-팔츠에 편입되어 있다.
- ↑ 2차 대전 이전 기민당의 전신격 정당
- ↑ 당의 설립시기부터 헌신했던데다가, 고향과 종교 등 여러 면에서 통하는 면이 있던 아데나워 초대 수상이 콜을 무척이나 예뻐했다. 대놓고 정치적 후원자를 자처할 정도... 콜도 스스로를 아데나워의 정치적 양자 정도로 여기기도 했고..
- ↑ 어디까지나 '중앙', 즉 총리 직에 다한 야망을 버린 것이다. 이후로도 자신이 맡고 있었던 바이에른 주지사 자리는 유지한다.
- ↑ 독일 헌재는 이 집권과정에 위헌요소가 없다고 판결했다. 다만 이러한 과정이 추후에도 반복되어 정치적 혼란이 생길 것을 우려하여 앞으로는 제약을 두게 했다.
- ↑ 동독주민들에게는 1933년 나치집권 이후 거의 60년 만에 경험해보는 자유선거였다!
- ↑ 대표적인 예로는 낙태 문제를 들수있다.
- ↑ 사실 당초 시뮬레이션에서는 3:1로 교환해야한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었지만 콜이 자신의 인기문제와 동독지역의 경제 공동화 문제같은 정치적 사안까지 고려하면서 밀어붙인다. 애초당초 1:1 화폐통합이 1990년 의회 선거에서 내걸었던 공약이었던지라 콜 총리 입장에서 미루면 미룰수록 손해보는 장사라 밀어붙었던 것
- ↑ 사실 타 동구권 국가들 주민들의 예금이 체제전환 후에 인플레이션으로 인해 대당수가 휴지조각이 되었다는점을 고려하면 어느정도 현명한 조치라고 볼수도 있다. 당장 러시아만 해도 체제전환 과정에서 에금이 쓰레기가 되는 참사가 발생하여 구매력이 처절할정도로 폭락하는 참사가 벌어졌는데 동독은 1:1 교환으로 예금이 쓰레기가 되는 참사는 면했기 때문이다. 단지 동독지역의 산업경쟁력이 서독에 비해 월등히 밀린게 문제였지...
- ↑ 프랑수아 미테랑과 마거릿 대처 모두 처음에는 독일 통일에 엄청난 거부감을 보였다. 2차 대전을 젊었을 때 경험한 당사자들이니 무리도 아니다.
- ↑ 당장 러시아만 해도 소련 붕괴직후인 1992년 물가상승률이 2000%에 달하는 상황이었고, 당시 루마니아나 불가리아, 유고슬라비아, 폴란드도 상황이 별반 다르지않았다. 사정이 나아진 건 1990년대 중반-2000년대의 일.
- ↑ 여담으로 통일과정에서 기민당이 막대한 정치자금을 불법으로 조달했다는 스캔들이 터진 것도 이 시기 헬무트 콜의 추락을 부채질했다.
- ↑ 물론 이 시절은 아직 콜을 만나기 전의 이야기이다.
- ↑ 어머니와 함께 강간당한걸로 알려져있다.
- ↑ 1990년대 중반까지 쓰였던 국내의 모 고교영어 교과서에도 비슷한 바리에이션이 있다. 여기서는 대답이 '조지 워싱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