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카모토 츠츠미 살인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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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카모토 츠츠미 殺人事件,
(일본어)坂本堤弁護士一家殺害事件, (영어)Sakamoto Family Murder

파일:Attachment/사카모토 츠츠미 살인사건/sakamoto.jpg
피해자 사카모토 츠츠미 일가족. 좌측이 사카모토 츠츠미, 이 사람이 안고 있는 가운데 아기가 장남 사카모토 타츠히코, 우측의 여성이 아내 사카모토 사토코.[1]

1 개요

1989년에 옴진리교가 자신들에게 위협이 되던 변호사 사카모토 츠츠미와 그 일가족을 살해한 사건. 언론 매체가 저널리즘을 엿과 바꿔 먹으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를 보여주는 사건이자, 옴진리교 내부에서만 저질러진 살인행각이 밖으로도 저질러져 발생한 첫 사건이기도 하다. 이렇게 저질러진 살인행각의 첫 희생자가 바로 사카모토 츠츠미(坂本堤)와 사카모토 사토코(坂本都子)와 사카모토 타츠히코(坂本竜彦) 3인 가족이다. 상단의 '坂本堤弁護士一家殺害事件' 일본어 문구와 'Sakamoto Family Murder' 영어 문구에서 표현하고 있는 대로 사카모토 츠츠미 변호사 일가족 몰살사건인 것이다.

2 옴진리교와 사카모토

1980년대 그 악명 높은 옴진리교에 젊은이들이 하나씩 빠져들기 시작해 소재는커녕 생사도 불분명해지자 그 가족들의 가슴은 타들어가고 있었다. 이때 나타난 사람이 도쿄대 법학부를 졸업하고 인권변호사로 활동하던 사카모토 츠츠미였다. 사카모토는 예전에 세계기독교통일신령협회[2] 사건을 맡은 경험이 있는 변호사였다. 옴진리교 신자의 친지들로 부터 의뢰를 접수한 사카모토는 옴진리교를 압박하기 시작했고, 옴진리교는 수세에 몰리기 시작했다. 그는 옴진리교 피해자 모임을 세우고 각종 인터뷰에 출연하며 옴진리교를 공격했다. 옴진리교는 대응책이랍시고 사카모토가 소속된 법률사무소인 '요코하마 법률사무소(横浜法律事務所)'에 항의 전화와 항의문을 보내자는 운동을 하고 삐라를 뿌렸지만, 당연히 사카모토 변호사의 평판만 더 높여줄 뿐이었다. 그러니까 옴진리교는 사카모토를 견제하려 했지만, 역으로 그게 사카모토에게는 변호사로서 자신의 평판만 더 높여주는 병크로 작용하고 있었으니, 옴진리교가 얼마나 허술했는가를 알 수 있다.

그런 시점에서 TBS 테레비는 1989년 10월 27일에 방영할 옴진리교 특집 방송을 위해 특집 방송 취재반(사회정보국, 이하 취재반)은 26일 오전에 옴진리교를 가루로 만들고있었던 사카모토 츠츠미 변호사를 인터뷰했다. 같은 날 낮에 취재반은 다시 '보도국 사회부' 기자들과 함께 후지산의 옴진리교 도장을 방문해 교주 아사하라 쇼코초능력(?) 시연을 취재하였다. 보도국의 인터뷰를 마치고 취재반에서도 인터뷰를 하려고 하자 옴진리교측에서는 이를 거부했다. 이에 취재반측은 묻지도 않았는데 사카모토 변호사의 인터뷰를 교주의 초능력 시연 장면과 함께 방영한다는 것을 먼저 밝혀 버렸고, 촬영한 영상을 옴진리교측에 우선 보여주겠다고 제안하며 인터뷰를 진행하기 위한 회유를 시도했다. 당일 밤 늦은 시각에 옴진리교 간부 3명이 TBS로 찾아와 방영 전에 변호사의 인터뷰를 보여주지 않는 이상 방송을 불허하겠다며 고집을 부렸고, 결국 TBS측은 옴진리교에 인터뷰 내용을 보여주게 된다. 이때 방문자 중 하나인 하야카와 키요히데(早川紀代秀)는 비디오의 내용을 상세히 메모하였다. 보여주고 나서도 교단 측의 강한 항의 때문에 결국 옴진리교 특집 방송은 결방됐다. 당연히, 사카모토 변호사의 인터뷰도 묻히고 말았다.

1989년 10월 31일, 옴진리교의 간부 하야카와와 고문변호사 아오야마 요시노부(青山吉伸)는 사카모토의 법률사무소를 방문해 소송을 회피할 목적으로 사카모토와 교섭하려 했으나, 옴진리교의 병크로 평판이 높아질대로 높아진 사카모토 변호사는 옴진리교 측의 논리적 허점을 하나하나 반박하고, 옴진리교 교단 전체에 고소크리를 먹이겠다고 본격적으로 총칼을 빼들었다. 말 그대로 관광당해 자승자박을 자초한 꼴이 된 옴진리교는 어쩔 줄을 몰랐고, 교주 아사하라 쇼코는 사카모토를 어떻게 처리할지 고심하고 있었다. 논의 끝에 결국 사카모토를 살해하자는 쪽으로 의견이 모아졌다. 옴진리교 신자인 한 변호사를 통해 사카모토의 주소도 손에 넣었다. 사카모토 츠츠미 변호사 가족 몰살사건은 이렇게 해서 터진 것이다. 이때 사카모토와 그의 가족, 주위의 변호사들, 옴진리교 피해대책 관계자들, 시민들이 TBS가 저지른 병크를 빨리 파악할 수만 있었더라면 사카모토 변호사 일가가 잔인하게 살해당하는 피해는 면했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남는 대목이다. 사카모토 이후 옴진리교 피해자 대책 변호인단의 중심 인물로서 활약한 타키모토 타로(滝本太郎) 변호사도 사카모토 처럼 독극물 테러를 당했는데, 타키모토 변호사가 피해를 당한 이후로는 그의 가족들과 친척들 그리고 그와 관계를 맺고있었던 모든 사람들이 경찰 등 사법기관과, 중앙정부, 지방정부 전체의 도움으로 일본 전국 각지로 분산 대피해서 사카모토 변호사 때 처럼 일가가 몰살 당하는 일은 막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3]

3 살해

1989년 11월 3일, 하시모토 사토루(端本悟), 의사였던 나카가와 토모마사(中川智正), 옴진리교단의 수석 과학자 무라이 히데오(村井秀夫)[4], 오카사키 카즈아키(岡崎一明)[5] 등 옴진리교 간부 6명은 요코하마의 한 전철역에서 사카모토가 귀가할 때 납치해 염화칼륨을 주사해 죽이려 했지만, 이 날은 일본의 공휴일로 사카모토의 사무소도 당연히 휴일이었다. 결국 교주 아사하라의 지시에 따라 11월 4일 새벽 3시 경 사카모토의 집에 침입했다. 그들은 사카모토와 그의 아내를 구타한 뒤 염화칼륨을 주사하였다. 그의 아내는 주사로 사망했으나 사카모토는 곧바로 죽지 않아 결국 목졸라 죽였다. 한 살배기 아들역시 염화칼륨 주사한 뒤 천으로 얼굴을 덮어 질식사시켰다. 범인들은 3명의 시신을 드럼통에 집어 넣은 뒤 세 곳의 외딴 시골 지역에 분산해서 암매장하였다. 사카모토 츠츠미는 니가타현에, 아내 사토코는 토야마현에, 타츠히코는 나가노현에 묻었다. 만일 시신이 발견되더라도 경찰이 이 3건의 암매장을 서로 연관짓지 못하게 하려는 계획이었다.

4 사건 수사, 결과

사카모토가 실종되자 이 사건을 명백히 조사해야 한다는 운동이 일어났다. 동료 변호사들과 사카모토의 부모 모두, 옴진리교에 의한 살해 가능성을 강력히 주장했지만, 사명감 같은 건 다 갖다버린 일본 경찰은 이런 주장을 무시하고, 형식적인 조사만 행한 뒤 시체가 발견되지 않자 곧 수사를 종결해버리고는, 이후 시체가 발견될 때까지 단 한 번도 재수색 같은 건 하지 않았다. 게다가 당시 현장에서 옴진리교 간부만 착용하는 배지가 발견되었는데도 경찰은 이를 무시했다. 옴진리교도 이 사실이 보도되자 갑자기 이 배지를 대량 생산하고는, 그것은 옴진리교의 신도 모두가 다는 배지이며, 교단에서는 엄청난 수의 배지를 만들어 퍼트렸는데 그 중 하나가 어쩌다 사카모토의 집에 있던 것이라고 하는 웃기지도 않는 발뺌을 했다. 그러나 상식 있는 사람에게는 그런 주장이 먹힐 리가 없었다.

사실 사카모토가 소속된 요코하마 법률사무소가 自由法曹団(자유법조단)[6] 소속이었던 것이 일본 경찰이 사건을 형식적으로만 수사한 가장 큰 이유 중 하나였다. 언더그라운드 책\[출처 필요\] 223-224페이지에 사카모토 변호사의 동료인 나카무라 유지 변호사는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사카모토의 법률 사무소에는 좌파 자유주의적 성향의 변호사들이 많았고, 노동사건 이외 사건도 많이 처리하는 지금과 달리 과거에는 노동사건 등을 많이 처리했던 터라 '특수한' 법률사무소라는 이미지가 널리 퍼졌는데 경찰 관계자들은 "그 사무소는 원래 그런곳이다." 라고 하면서 일본 공산당 계열로 간주했다는 것이다. 반공주의가 강한 일본 경찰 조직으로서 일본 공산당과 관계된 변호사는 달갑지 않은 존재였다. 한마디로 좌익 계열 법률사무소 소속 변호사가 당한 살인사건이니 신경쓰지 않았다는 뜻이다. 특히 요코하마 법률사무소는 1986년 11월에 도쿄 마치다 시(町田市)에서 발각된 일본 공산당 간부 도청사건, 1986년 12월에 발생한 国労横浜人活弾圧事件(일본 국철 노동조합 요코하마 '인재센터' 탄압 사건)[7]으로 카나가와 현 지방경찰청과 정면으로 충돌한 이력이 있었으며, 그 중에서도 일본 국철 노동조합 요코하마 '인재센터' 탄압 사건은 사카모토가 직접 맡은 사건이었다. 이 알력이 가라앉은지 얼마 되지 않아 사카모토 변호사 가족 몰살사건이 터진것이다.

일본 경찰은 결국 도쿄 지하철 사린가스 살포사건 이후 이 살인사건에도 연루된 간부들이 체포되고 이들 중 오카사키가 범행을 자백한 뒤에야 재수사에 착수했다. 사건 발생으로 부터 6년이 지난 후의 일이었다. 1995년 9월, 각각 나가노 현과 니가타 현과 토야마 현의 암매장지에서 사카모토 일가의 시체를 찾아냈다. 한국어 위키백과에 따르면 사카모토 츠츠미는 니가타 현 나다치마치(현재의 조에츠 시)의 산 속에, 아내 사카모토 사토코는 토야마 현 우오즈 시 베츠마타의 베츠마타소가타케선(別又僧ヶ岳線, Betsumata-Sogatake Line) 옆의 산길에, 장남 사카모토 타츠히코는 나가노 현 오마치 시의 히나타야마 산속에 암매장돼 있었다고 한다.[8][9] 이후 재판을 거쳐 나카가와 등 실행범들과 사건을 지시한 장본인인 아사하라 쇼쿄 등 6명은전원 사형 선고를 받고 현재 일본 구치소에 수감 중이다. 다만 이 사건만으로 사형이 내려진 것은 아니고, 이들 대부분이 다른 살인 행각에도 연루되어 있었다. 이걸 다 고려해서 사형을 선고한 것이다. 당장 주동자급인 나카가와만 해도 무려 25명을 죽였다. 범인 중 한 사람인 무라이는 1995년 4월 23일, 언론 취재진 앞에서 재일 한국인 폭력단원에게 살해당해 재판에 서는 일은 없었다.[10]

도쿄 지하철 사린가스 살포사건과 함께 옴진리교의 악행을 얘기할 때 절대 빠지지 않는 엄청난 사건이다. 애초에 1995년 3월의 사린가스 살포 사건은 메구로공증인사무소 사무장 납치 감금 치사 사건, 사카모토 살인사건 등으로 경찰의 의혹이 옴진리교에 집중되자, 테러를 일으키면 수사망을 회피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해 벌인 일이지만 오히려 테러 사건을 계기로 감춰둔 살인 사건들까지 모조리 드러나는 꼴이 되었다.

5 의혹

일각에서는 사건 수사가 제대로 된 게 맞는지 의혹을 제기하기도 한다. 사카모토 변호사의 집 아래층에 살던 사람이 우연히 사건 직전인 새벽에 깨어나 "사카모토상"이라고 말하는 여성의 목소리와 그 후 욕실에서 물소리가 나는 것을 들었는데, 정작 사건이 일어났다고 하는 시간에는 아무 소리도 듣지 못했다고 진술했다는 점, 새벽임에도 불구하고 사카모토 변호사의 집 대문이 열려있었다는 점, 나중에 확인해보니 집에서 밥공기 3개가 사라진 것 등의 의혹이 남았다.

이 때문에 사카모토의 아버지는 경찰이 발표한 범행 시간이 아닌 다른 시간에 살해된 게 아닌가 하는 의혹을 제기하기도 했고, 옴진리교 교인 외에 다른 숨겨진 협력자가 있는데 경찰이 밝혀내지 못한 게 아니냐는 의혹도 제기되었으나 명확하지는 않다.

6 그 외

사카모토의 법률 사무소는 좌파 자유주의적 성향의 변호사들이 많은 自由法曹団(자유법조단) 소속이었고, 이들은 일본 공산당과 함께 사형폐지론을 지지하는 사람들이었다. 사카모토도 사형제 폐지론자였다고 한다. 그러나 이 사건 이후 사카모토의 동료 변호사였던 타키모토 변호사는 사형제를 찬성하는 쪽으로 생각이 바뀌었다고 한다. 위에 밝혔듯이 그 또한 옴진리교에 맞서다가 테러를 당한 경험이 있었다.

자신의 만화에서 이 사건과 관련한 추리를 실었던 만화작가 고바야시 요시노리가 살해 위협에 시달린 일이 있었다.[11]

이 사건은 이후 일본의 여러 창작매체에서 "사이비 종교 집단의 출현 → 그에 대항하는 민완 변호사 → 변호사와 가족에 대한 교단의 테러"로 이어지는 일종의 클리셰가 자리잡게 하는 데에 영향을 미치기도 하였다. 대한민국번역된 작품으로는 원한 해결 사무소20세기 소년이 대표적이다. "20세기 소년"에서는 유키지의 변호사 친구 세츠코인데, 친구 집단에 대해 피해자들과 대응하다가 테러 수준까지는 아니어도 꽤 고생하는 걸로 나온다. 또 위의 배지 관련 에피소드는 야쿠시지 료코의 괴기 사건부에서도 잠깐 언급되었다. 교단의 이름은 밝히지 않았지만.
  1. 출처
  2. 문선명이 교주로 있는 그 통일교가 맞다.
  3. 참고, 일본어 위키백과
  4. 최종 학력은 이학 석사.
  5. 岡﨑 一明(おかさき かずあき)출처
  6. 창립 멤버 중 한명이 후세 다쓰지이다.
  7. 일본 국철에서 요코하마 시의 다카시마 역(高島駅)에 이른바 '요코하마 인재 활용 센터'라는 것을 두고 국철 노동조합원들을 이곳으로 이동 발령내렸는데, 이에 저항하는 운동을 펼치던 노조원 5명을 대상으로 폭력사건을 날조해서 면직, 정직 등의 징계 처분을 내린 사건이다. 2004년 2월 24일, 징계가 위법, 무효임을 인정 받고 전원 복직되었다.참고 링크
  8. 한국어 위키백과 사카모토 츠츠미 변호사 일가족 살해사건 문서
  9. 이 일본방송 동영상은 아들 타츠히코의 사체를 나가노 현 오마치 시의 히나타야마 산 속에서 찾았다는 뉴스속보다.
  10. [1]
  11. 일본어 위키백과, 한국어 위키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