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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0년 11월 13일 ~ 1953년 9월 13일
1 소개
生きべくんば民衆とともに、死すべくんば民衆のために살아야 한다면 민중과 함께, 죽어야 한다면 민중을 위해[2]
조선 문제는 결코 조선에만 한정된 문제가 아니다. 조선 문제는 동양의 발칸 문제이다. 조선은 세계 평화와 혼란을 좌우하는 열쇠이다. 전세계의 문제이자 전 인류의 문제다.[3]
일본 양심(良心) 세력의 시조
민중의 권리 투쟁 옹호에 힘쓴 일본의 인권 변호사이자 사회 운동가.
그리고 대한민국에서 유일한 일본인 대한민국 독립유공자.
일본인임에도 불구하고 한국 독립을 위해 노력한 사람들 중 하나.[4]
농담으로 비꼬기 위해 독립 유공자로 불리우는 무다구치 렌야, 도미나가 교지, 츠지 마사노부 같은 자들과는 달리 정말로 한국의 독립을 위해 스스로 힘썼으며 대한민국 정부가 건국 훈장을 추서해 준 독립 유공자이다. 인간을 포기한 츠지 따위와 비교하는 것 자체가 이 분에 대한 큰 결례이자 모욕이다. '일본의 오스카 쉰들러’라는 별명까지 붙었을 정도.
2 생애
이 영상을 참고하는 것도 괜찮을 것이다.
2.1 출생
1880년 11월 13일 일본 미야기 현의 이시노마키 시에서 태어났다.[5] 메이지 대학 법학과를 졸업하고 우쓰노미야 지검 검사로 부임했다. 하지만 검사로 활동하던 중, 생활고로 동반 자살을 시도하다 아들만 죽고 어머니는 살아나는 사건이 일어났는데, 그녀를 살인미수로 기소하는 법률의 미비점과 적용에 대한 문제점에 회의를 느끼고 검사직에서 물러나 변호사가 되었다.
2.2 인권 변호사 활동
1911년에 그는 「조선의 독립 운동에 경의를 표함」이라는 글을 통해 일본의 한반도 병합이 침략임을 규정하고 한국의 독립 운동을 지지하였다. 그리고 이 글을 쓴 것 때문에 일본 경찰에게 조사받는다.
이후 그는 주로 항일 독립 운동가들의 변호를 맡았다. 1919년에는 2.8 독립 선언의 주체였던 최팔용, 송계백 등을 변호하여 내란죄 혐의에 대한 무죄를 주장하였으며 1923년에 밀정의 실존인물 김시현과 황옥의 # 변호, 1924년에는 도쿄 궁성에 폭탄을 던진 의열단원인 김지섭의 변호를 맡았다. 한편 1923년에 발생했던 관동 대지진의 여파로 발생한 조선인 학살 사건에 대해 해당 사건이 일본 정부와 일본 경찰, 군부에 의해 조작된 유언비어로 인한 사건임을 강력하게 비판하였고, 조선일보에 이를 사죄하는 문서를 보내기도 했다.
그의 변호 행적 중 가장 유명한 예는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에 대한 변호이다. 두 사람은 덴노를 폭살할 계획을 세우다가 검거되어서 덴노 폭살을 기획한 혐의로 법정에 섰다. 이 재판은 박열 대역 사건으로 불리며 일본 전역에서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이때 후세 다쓰지는 두 사람의 무죄를 주장하며 변호하였을 뿐만 아니라 옥중 결혼 수속을 대신 해 주었다. 또한 후미코가 자살하자[6] 그녀의 유골을 수습해 박열의 고향인 경상북도 문경에 매장을 해 줄 정도로 노력하였다.
이후 1932년 공산당 세력에 대한 탄압이 거세던 도중에 법정에서 공산당 탄압을 강력하게 비판했다가 법정 모독이라는 근거로 징계를 받아 변호사 자격을 박탈당했고, 이후에도 두 번이나 더 회복과 박탈을 반복하였으며 신문지법과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형을 두 차례 선고받아 복역하기도 하였다.
2.3 광복 이후
1945년, 일본의 패전 이후 변호사 자격을 회복한 뒤엔, 한신 교육투쟁(한신교육사건)이나 도쿄 조선 고등학교 사건 등등, 재일 한국인 사건 및 노동 운동에 대한 변호를 맡았다. 1946년에는 한국을 위한 조선 건국 헌법 초안을 작성하기도 하였다. 이후 1953년 9월 13일, 72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2.4 사후
평생을 한국의 독립 운동의 변호에 힘써 온 것에 대한 공로로, 2004년 일본인 최초로 건국 훈장인 애국장을 수여받았다. 후세 다쓰지 본인이 자연사한 관계로 훈장 자체는 그의 외손자인 오이시 스스무 씨가 대신 수상하였다. 이는 2016년 현재 시점에서도 유일한 일본 국적의 대한민국 독립 유공자이다.
사실 이전까진 독립 운동이라는 것 자체가 일본 제국에 항거하는 것인데 “아무리 조선을 도왔다 해도 우리의 원수였던 일본의 국민을 독립 유공자로, 건국 기여자로 볼 수 있겠냐”라는 반대와 우려는 많았으나, 어찌되었든 이 사람의 행적은 워낙 엄청났고, 자국에서 탄압과 핍박을 받아가면서까지 이런 헌신을 한 점이 매우 높게 인정받았다. 이 사람의 업적 자체에는 누구도 의심을 품지 않았으나, 일본인이었다는 점과 사회주의 운동을 한 적 있다는 점 때문에 독립 유공자로 지정되는 데에 어려움을 주는 요인이 되었다. 서훈 추진 자체는 2001년부터 논의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3 인지도
이런 업적을 보면 역사 교과서에도 나올 법하지만, 후세 다쓰지를 교과서에서 접한 사람이 없는데다 지금은 아니지만 한동안 나무위키의 묘비명 문서나 유명인들의 어록 문서에서도 후세 다쓰지의 이름이 없었던 걸 보면 아쉽기는 하다. 가네코 후미코는 물론 이봉창이나 윤봉길같은 중요한 인물마저 짤막하게 나오는데….[7]
다행히 2014년 10월 30일, EBS의 《역사 채널 e》에서 방송된 〈조선 민중과 함께, 후세 다츠지〉 편 덕분에, 국내에도 그의 업적이 조금이나마 알려질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어째 표기가 애매하다. 국립국어원식 표기와 통용 표기의 퓨전!
모 사 고등학교 동아시아사 교과서에, 후세 다쓰지에 대해 간략하게 소개되어 있다.
4 이야깃거리
미야기현 이시노마키 시에는 후세 선생의 생가가 있으며, 이시노마키 시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센다이역에서 열차를 타는 것을 추천. 현재 생가는 평범한 가정집이다. 생가의 맞은 편에는 후세 포목점이 있다. 이시노마키 시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센다이역에서 열차를 탈 수도 있고 직통 버스편도 있다.
이시노마키의 あけぼの南公園(아케보노미나미코엔)에는 후세 선생께서 남기신 "살아있다면 민중과 함께, 죽어야 한다면 민중을 위해"라고 적힌 커다란 비석이 있다. 일본인들은 이 분이 누군지도 잘 모르기 때문에 다소 쓸쓸한 모습. 동일본대지진 이후 아케보노미나미공원이 지진 피해자 분들의 임시 대피소 역할을 하고 있어 가건물들과 어지럽게 섞여있기도 했다.[8]
일련정종 신도이다. 원래 기독교에 심취해있었으나 결혼하면서 아내의 종교인 일련정종으로 개종. 사후에는 일련정종 사찰인 常在寺에 안치되었다. 사찰이라고는 하나, 그냥 주택가 한 가운데 있다. JR이나 도쿄 메트로 이케부쿠로 역에서 도보 10분 이내에 도착 가능. 常在寺에 방문하면 후세家의 묘소를 참배할 수 있고, 일어가 통하지 않더라도 경내에 한국인 스님이 있어 도움을 받을 수 있다.[9]- ↑ 로마자 표기는 Fuse Tatsuji이다. 통용 표기법이나 백괴사전식 표기법을 따르면 ‘후세 타츠지’.
- ↑ 그의 신념을 응축한 문구라 할 만 하다. 평생을 일제의 잘못된 정책과 일제의 한국, 타이완 통치를 반대한 몇 안 되는 반전주의자이자, 평화주의자였다. 이전 버전에 묘비문이라고 써있었으나, 이것은 잘못된 정보이다. 그의 묘는 이케부쿠로 상재사 소재로, 가족묘이기 때문에 '후세 가의 묘'라고 적혀있다. 대신 상재사에 후세 다츠지를 기리는 '후세 다츠지의 비'가 있으며, 이 문구가 적혀있다. 또한 후세 선생의 고향인 미야기현 이시노마키 시의 아케보노 미나미 공원에 이 문구를 적은 대형 기념비가 있다.
- ↑ 20세기에 발발했던 6.25 전쟁이 제3차 세계 대전으로 번질 뻔했으며, 21세기에도 세계 대전을 일으킬 만한 강한 국력을 가진 4강의 이해 관계가 부딪치는 한반도의 지정학적 중요성을 생각해보면, 한반도의 중요성을 이 정도로 정확하게 통찰했다는 사실이 놀랍다.
- ↑ 참고로 이 문서에는 딱히 자세히 설명되어 있지 않지만, 대만 독립을 위해서도 노력했다. 물론, 이 분 말고도 다른 분들도 여럿 계신다.
- ↑ 가수 엔도 마사아키의 고향이기도 하다.
- ↑ 1차 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항소심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으나, 그녀는 감형을 거부하고 이듬해 스스로 자살하였다.
- ↑ 지학사 교과서에는 박열, 후미코와 함께 소개 되어 있다.
- ↑ 2012년 말 기준
- ↑ 2016년 초 기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