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돈

1 삼국시대 오나라의 인물

王惇
(?~256)

219년에 손권관우를 처형해 조조로부터 표기장군, 남창후, 형주목의 직위를 받을 때 손권은 교위 양우에게 여러 헌상물을 황제에게 바치게 하면서 포로 주방을 석방했는데, 이때 손권이 왕돈에게 따로 말을 구입하게 했다.

256년에 손준의 당제 손려제갈각을 주살하는 것에 가담해 손준에게서 후한 대우를 받았는데, 손침이 집권해 스스로의 존귀함에 의지해 매우 오만하게 행동하면서 매우 무례한 행동을 했다. 손침에게서 받은 대우가 나쁘자 불만을 품고 왕돈에게 손침을 주살하자는 제안을 했는데, 이 일이 들켜 왕돈은 죽고 손려는 약을 먹고 자살한다.

삼국지연의에서는 손침에게 살해당한 인물 중 하나로 등장한다.

1.1 미디어 믹스

258-Wang-Dun.jpg
삼국지 11
삼국지 12,13

삼국지 시리즈에도 등장하며 일러스트가 묘하게 전위를 닮았다. 물론 인지도만 보면 능력치는 천지차일 듯 싶으나 전위의 능력치는 무력에 편중되어있으나 왕돈의 능력치는 상대적으로 고르기때문에 총합만 보면 오히려 전위보다 높다! 물론 고른 쓰레기라 효용도는 전위에 비할 바 못된다.

삼국지 9에서의 능력치는 70/63/44/53. 누선, 고무를 가지고 있으며 분전, 제사도 가지고 있다.

삼국지 10에서의 능력치는 60/65/41/62/53로 총합281로 역시 전위보다 총합은 높으나 70넘는 능력치가 하나도 없고 특기라곤 고무, 유인밖에 없는지라 그저 안습.

삼국지 11에서는 혐오무장으로 손침이 설정되어 있다.

2 동진의 인물

王敦
(266~324)

King Pig

동진 때 인물로 낭야군 임기현 사람이다. 승상 왕도사촌으로 는 처중(処仲)이다. 팔왕의 난을 피하려고 했던 낭야왕 사마예에게 왕도는 건업으로 피하라고 했고 이 때 왕돈은 사마예, 왕도와 함께 강동으로 갔다. 315년에는 도독이 되었으며 강주, 양주, 형주, 상주, 교주, 광주 6주 제군사 및 강주 자사[1]가 되었고 한안후에 임명되었다. 이윽고 서진의 민제 사마업전조유요에 의해 생포되면서 진왕이 사마예의 의해 대장군의 자리를 수여받아 군권을 장악했다.

그러나 322년, 동진에 반란을 일으켜 무창에서 거병했는데 대의명분은 원제 사마예의 측근이었던 유외(劉隗)[2]와 조협(刁協)[3]을 죽인다는 것이었다. 사마예가 이들을 중용하며 왕도, 왕돈을 멀리했기 때문으로 석두성을 수비하던 군대를 손아귀에 넣었다. 조카 왕윤은 왕돈의 반란의 이야기를 우연히 듣게 되었고 입에 손가락을 넣고 일부러 구토를 했고 병자를 가장해 난을 피해 목숨을 건졌다. 왕돈은 유외와 조협을 추격했는데 조협은 나이가 많아 말을 타지 못해 결국 따라잡혀 죽임을 당해 수급이 왕돈에게 전달되어 저자에 효수되었다. 유외는 후조석륵에게로 달아났는데 사태를 심각하게 본 사마예는 왕돈에게 실권을 넘기고 승상에 임명했다. 그러나 왕돈은 마음대로 사람들을 살육했으며 옛 무덤을 도굴하는 등 전횡을 부렸다. 이에 사마예는 분사했으며 명제 사마소가 즉위했다.

원래 왕돈은 사마소를 꺼려 모함을 했으나, 실패했다. 323년, 사마소가 왕돈을 정벌하라고 조칙을 내렸다. 이에 왕돈은 제위 찬탈을 노리고 다시 반란을 일으키려 했지만 거병 직전에 병으로 쓰러졌다. 이 때 왕돈은 점쟁이 곽박[4]에게 길흉을 점치게 했다.

곽박 : 이번 거사는 절대 성공할 수 없을 겁니다.

왕돈 : 나의 수명은 어떠한가?
곽박 : 거사를 벌이신다면 곧 화를 당하시겠지만 움직이지 않으시면 장수하실 겁니다.
왕돈 : 너의 수명은 어떠한가?
곽박 : 오늘이 마지막입니다.

이에 화가 난 왕돈은 곽박을 죽였다. 예언돋네 왕돈은 병이 든 자신 대신에 형 왕함을 대장으로 세워 출병시켰으나, 왕돈은 324년 7월 건강 인근까지 진격했다가 월성에서 대패했다. 패전 소식을 들은 왕돈은 우리 형은 늙어빠진 하녀처럼 쓸모없구나!라고 말하며 스스로 선두에 나서려고 했으나, 힘을 다하고 쓰러져 그대로 죽었다. 이 후 왕함을 포함한 잔당들은 왕도가 이끄는 진압군에 모두 소탕되고 왕돈의 무덤은 부관참시되었다. 그리고 왕도는 이 공으로 승상으로 복귀해 도간, 유량, 치감과 함께 실력자로 부상했다.

참고로 왕돈이 죽인 조협의 아들 조이(刁彝)는 왕돈토벌전에 참가해 아버지의 원수를 갚았는데 조정에서는 감탄하며 벼슬을 내렸고 조이는 입신양명했고 서주자사까지 올랐다. 그러나 조이의 아들 조달(刁逵), 조창(刁暢) 형제는 동진 말기 환현의 측근으로 지냈다가 유유에게 404년 피살되었다. 조창의 아들 조옹(刁雍)은 북위로 망명하여 청주자사를 지냈고 484년 95세의 나이로 사망했으며 자손들은 번창했다.

한편 달아난 유외는 333년 승상좌장사로 석호와 함께 전조의 잔당 유희를 토벌하러 장안을 공략하다가 전사한다. 유협의 아들 유수(劉綏)는 젊은 시절에 수재로 올랐고 부마도위까지 올랐으나, 아버지와 함께 함께 장안에서 전사했다. 그런데 유수의 아들 유파(劉波)[5]석호의 정책에 불만을 품고 동진으로 돌아와 왕흡(王洽)[6]의 참군이 되어 관군장군, 남군상을 거쳐 산기상시가 되었다. 유파의 아들이자 유외의 증손자 유염(劉淡)은 여강태수가 되어 환온과 교류가 있었다.

위에서 보듯 성질머리가 상당히 막장인데 이런 일화가 있다.

사촌동생 왕도와 함께 석숭의 연회에 참가했다. 석숭의 집안에서는 기녀가 권한 술을 손님이 거절하면 제대로 대접을 못했다며 기녀를 죽였다. 왕도는 술을 잘 못함에도 기녀들을 위해 열심히 술을 마셨지만 왕돈은 주당임에도 불구하고 일부러 술을 안 마셨고 결국 기녀가 셋이 죽었다. 보다 못한 왕도가 "술 좀 마셔. 형 때문에 기녀들 다 죽게 생겼어." 라고 하자 왕돈은 "자기 집 기녀들 죽이는데 나랑 뭔 상관?" 이러면서 대답했다.

석숭이 화장실을 침실처럼 화려하게 꾸몄기에 손님들은 석숭네 집 화장실을 침실로 알았고, 시녀를 시켜 손님들의 손을 씻겨주고 옷을 갈아입게 해줬기 때문에 손님들은 부담스러워 이를 꺼렸는데 왕돈은 이 서비스를 당당하게 받았다.

세설신어》 비루편에 있는 에피소드에도 왕돈의 일화가 있다. 왕돈은 사마염의 딸 양성공주와 결혼한 부마였다. 그는 양성공주와 결혼한 지 얼마 안되어 뒷간에 갔다가 옻칠한 작은 상자에 든 마른 대추들을 보았다. 사실 그 대추는 뒷간에서 일을 볼 때 냄새를 막기 위해서 콧구멍을 막기 위한 용도였으나, 왕돈은 이를 몰랐기에 그냥 먹었다. 그리고 뒷간에서 일을 보고 나오자 시녀가 물이 든 금대야와 콩가루가 든 유리대야를 내왔다. 이는 콩가루를 물에 타서 손을 씻기 위한 용도였으나, 왕돈은 이것도 알지 못하고 콩가루를 물에 탄 다음 이것을 마셔버렸다. 이에 시녀들은 모두 몰래 비웃었다.

승상 왕도가 곽박으로부터 벼락맞고 죽는다는 점괘를 듣자 해결책으로 자기 키만한 잣나무를 대신 세워 벼락을 맞게 했다. 그런데 왕돈이 "승상께서는 잣나무에 죄를 뒤집어씌우셨소."라고 비꼬았다. 다시 말하지만 왕돈은 왕도의 사촌 형이었다!

사마염이 당시의 명사들을 초청하여 예술적인 재주에 대해 말하면서 왕돈에게 잘 하는 재주를 물으니 못내 떨떠름한 표정으로 북을 칠 줄 안다고 대답했다. 사마염이 북을 가지고 오라하여 그에게 주었더니, 그는 자리에서 소매를 떨치고 일어나 북채를 들고 격정적으로 연주하였다. 음절이 조화롭고 경쾌하였으며, 기상이 호쾌하고 고매하여, 방약무인의 경지였다. 온 좌중이 그의 웅혼함과 경쾌함에 감탄했다.

  1. 동진의 영토 거의 대부분이다.
  2. 자는 대연(大連)으로 전한 초원왕 유교(劉交)의 후손이다. 후한 초기 학자 유무(劉茂)의 6세손으로 아버지는 동광현령 유지(劉砥)이다.
  3. 자는 현량(玄亮)으로 할아버지는 조위 제군태수를 지낸 조공(刁恭)、아버지는 서진 무제 사마염 때 어사중승을 지낸 조유(刁攸)이다.
  4. 郭璞. 하지만 다른 기록에선 점쟁이가 아니라 학자로서 산해경을 정리한 인물로 기록했고 왕돈에게 죽은 것도 반란을 막으려다가 못 막자 "이 망할 반역자야, 네놈 목이 잘려나가고 사지가 찢겨질 짓을 스스로 하는구나!"라고 탓해 죽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 말대로 왕돈은 시체가 능지저참되었다. 고우영 십팔사략 컬러판에서도 주석으로 점쟁이가 아닌 학자로 왕돈을 막으려다가 죽었다고 달았다.
  5. 자는 도칙(道則)이다.
  6. 왕도의 삼남으로 서예가로 유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