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미 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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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前 다이빙 선수, 코치, 의사. 부친이 한국인으로 이민 2세이다.

미국 최초의 아시아계 올림픽 금메달리스트. 이 업적으로 미국 올림픽 명예의 전당에도 헌정되었다. 개인자격으로는 미국의 올림픽 참여 역사를 통틀어 96명만이 누린 영예.

1 어린 시절

새미 리의 부친 이순기는 하와이를 거쳐 캘리포니아에 정착한 미국이민 초기 세대였다. LA에 거주하던 새미 리는 12세였을 때 1932 LA 올림픽을 생생히 지켜보게 되고, 자기도 반드시 올림픽 금메달을 목에 걸겠다는 꿈을 갖게 된다.

그 후 다이빙을 시작하게 되는데, 157cm의 단신이라는 핸디캡이 비교적 덜한 종목으로 다이빙을 택한 것이다. 당시 유색인종들은 수영장 이용에 있어서도 많은 제약을 받았기 때문에 훈련에 애로를 겪는다. 일주일에 한 번 겨우 입장이 허용되었고, 수영장에 입장을 못하는 날엔 구덩이에 모래를 채워놓고 그 가운데로 뛰어내리는 식으로 연습했다고 한다. 훗날 인종차별 타파를 위해 여러 활동을 하게 된 데에는 이런 유년시절의 경험의 영향이 컸을 것으로 보인다.[1]

고등학교를 다닐 땐 학생회장 선거에 도전하기도 했다. 교사들은 이 학교에서 백인이 아닌 학생이 회장을 한 적이 없다며, 상처받기 말고 그냥 포기하라고 권했으나 새미 리는 선거를 완주했고 끝내 당선되기까지 했다. 훗날 새미 리가 금메달을 목에 걸자 모교에서는 이 날을 '새미 리의 날'로 정하는데, 이 때 기념식에 참석한 리는 학생들에게 "여러분의 꿈을 짓밟는 잘못된 관습에 굴복하지 마라"는 연설을 남긴다.

2 올림픽 영웅이 되다

1942년에 열린 전미 다이빙선수권에서 10m와 3m 두 종목에서 모두 우승하면서 이름을 날리기 시작했다. 유색인종이 미국 다이빙 챔피언이 된 것은 최초.

종전 후 열린 첫번째 올림픽인 1948 런던 올림픽에서 미국 챔피언 자격으로 참가하여 10m에서 금메달, 3m에서 동메달을 목에 걸었다. 10m 경기를 할 때 1차시기부터 입수를 잘못해 몸으로 입수하며 감점을 많이 받았고 많이 뒤처진 채로 시작했으나 나머지 시기에서 실수없이 기술을 선보여 극적으로 역전승을 거두었다. 아시아계 미국인 최초의 올림픽 금메달리스트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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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림픽 시상대 가장 높은 곳에 오른 새미 리의 모습. 왼쪽은 같은 미국 대표였던 브루스 할란(은메달)[2], 오른쪽은 멕시코의 호아킨 카피야(동메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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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년 후 1952 헬싱키 올림픽에서는 10m 한 종목만 참가하여 다시 금메달을 목에 걸며 올림픽 2연패의 위업을 달성했다. 이 역시 올림픽 다이빙 역사를 통틀어 최초. 당시 32세로 다이빙 선수로서는 전성기가 지난 나이임을 고려하면 이 자체로도 대단한 성적이다.



1952년 올림픽에서의 경기 영상. 새미 리의 경기장면은 42초부터 나온다. 유독 단신이기 때문에 금방 알아볼 수 있다. 4년 전 동메달을 목에 걸었던 카피야 선수가 이번에도 새미 리에게 밀려 은메달에 머무른 것을 볼 수 있다.

다음 해인 1953년에는 미국 체육계를 통틀어 가장 뛰어난 활약을 보인 아마추어 선수에게 수여하는 상인 제임스 설리번 상을 수상했다. 훗날 1990년에 새미 리는 미국 올림픽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여담으로 이 때 동시에 헌액된 인물 중에는 조지 포먼도 있었다.

3 은퇴 이후

운동을 하면서도 학업을 병행했던 새미 리는 이미 의대를 졸업하여 의학박사 학위를 갖고 있었다. 이는 인종차별을 생생히 겪은 부친이 아들로 하여금 의사 같은 사회적으로 존중받는 직업을 가지길 원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현역에서 은퇴한 후 군의관으로 자원입대하여, 1953년부터 1955년까지 주한미군에서 복무할 수 있었다. 이 때 이승만 대통령의 초청을 받아 경무대를 방문하기도 했다. 이승만은 과거 미국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시절 그의 부친 이순기와 쌓았던 친분을 회상했다고 한다.

새미 리의 명성은 국제적으로도 드높았기에 각국 다이빙 대표팀에서 거액을 약속하며 코치로 와달라는 제안이 많았으나 그는 딱 두 나라의 선수들만 지도했는데, 바로 미국와 한국이었다. 특히 1964 도쿄 올림픽을 준비하던 일본 대표팀에서 리에게 끈질기게 구애했으나 이를 단호히 뿌리치고, 혼자 자비로 일본으로 가서 한국 선수들을 찾아가 지도해 주기도 했다.

같은 소수민족이었던 사모아계인 그렉 루가니스를 지도한 것 역시 새미 리이다. 루가니스가 15살일 때부터 그의 재능을 알아본 리는 직접 한국음식을 해 먹이며 아들처럼 키웠고 루가니스는 리의 지도를 받은 지 1년만에 미국 최연소 국가대표로 뽑혔다. 이후 1984, 1988 두 번의 올림픽에서 연속으로 10m와 3m 두 종목에 걸린 금메달을 싹쓸이하는데, 특히 1988 서울 올림픽 당시 예선에서 연기를 펼치다 스프링보드에 머리를 부딪혀 피가 흐르는데도 마취제 없이 상처를 즉석에서 꿰맨 후 바로 결선 연기에 임해 금메달을 따는 모습은 아직도 회자되는 명장면이다.

1956, 1972, 1988 세 번의 올림픽에서는 미국 대통령이 임명한 특사 자격으로 올림픽에 참관하는데 이 때 국제 스포츠계에 두터운 인맥을 쌓았다. 이 인맥을 활용해 평창이 동계올림픽 개최에 도전할 때 적극적으로 나서 지원하기도 했다.

4 기타


사진 맨 왼쪽이 새미 리이고, 가운데에서 마이크를 잡고 있는 인물이 김영옥. 미국의 전쟁영웅 김영옥 대령과는 말 그대로 죽마고우이자 불알친구였다. 어렸을 때부터 일본군을 때려부수는 전쟁놀이를 하며 놀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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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기정과도 친분이 돈독했다. 둘은 1947년에 처음 만났다고 하는데 아마 손기정이 보스턴 마라톤에 코치로서 참가하기 위해 미국을 방문했을 때 만남을 가진 것으로 추측된다. 이후 1948 런던 올림픽에서도 각각 선수와 코치로서 런던을 찾아 친분을 다졌고 이후 올림픽이 개최될 때마다 만났다고 한다. 1984 LA 올림픽 당시 개막식 전날에 손기정은 성화봉송 주자로서 LA 한인타운을 달리는데, 이 때 손기정으로부터 성화를 넘겨받은 인물이 바로 새미 리였다.

군복무를 마친 후 LA로 돌아왔는데 오렌지 카운티에서 집을 사려고 해도 백인들이 하나같이 거래를 거부했다고 한다. 새미 리는 이를 기자 지인에게 털어놓았고 그 기자는 "올림픽 챔피언이 인종차별 때문에 집 한 채도 못사고 있다!"며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이는 미국에서 크게 논란이 되었고, 당시 미국 부통령이던 리처드 닉슨까지 나서서 리를 도와주겠다고 했을 정도였다. 집을 팔기를 거부했던 오렌지 카운티의 집주인들과 부동산업자들은 거하게 까였고, 결국 리는 원하는 집을 얻을 수 있었다.

한국계 미국인들 사이에선 아메리칸 드림을 상징하는 존재로 널리 존경받고 있다. LA 한인타운에는 새미 리의 이름을 따서 이름붙인 새미 리 광장(Sammy Lee Square)이 있고, 새미 리의 이름을 딴 초등학교도 있다.

아무래도 고령이다 보니 치매 증상을 앓고 있다고 한다.관련기사

천안에 있는 독립기념관에는 새미 리가 올림픽 출전 당시 착용했던 수영복과 트레이닝복이 소장되어 있다. 이 옷들은 등록문화재로 등재되어 있기도 하다.
  1. 참고로 새미 리의 부친은 당시 이민자로서는 드물게 영어에 유창했고, 대학에 입학하여 학위까지 받았음에도 아시아계라는 이유로 직장을 얻지 못하고 식료품점을 운영했다. 이런 부친을 지근거리에서 보면서 느낀 점도 많았을 것이다.
  2. 이 선수가 3m 종목에서 리를 제치고 금메달을 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