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송의 역대 황제 | |||||||||
북송 9대 흠종 현황제 조환 | ← | 10대 고종 헌황제 조구 | → | 임시황제 원의태자 조부 | |||||
임시황제 원의태자 조부 | ← | (복위) 10대 고종 헌황제 조구 | → | 11대 효종 성황제 조신 |
묘호 | 고종(高宗) | |
시호 | 수명중흥전공지덕성신무문소인헌효황제 (受命中興全功至德聖神武文昭仁憲孝皇帝) | |
연호 | 건염(建炎, 1127년 5월 ~ 1130년) 소흥(紹興, 1131년 ~ 1162년) | |
성 | 조(趙) | |
휘 | 구(構) | |
자 | 덕기(德基) | |
생몰기간 | 1107년 6월 12일 ~ 1187년 11월 9일 | |
재위기간 | 1127년 6월 12일 ~ 1130년 (1차) | |
1130년 ~ 1162년 7월 4일 (2차) |
1 개요
송의 제10대 황제. (생몰 1107~1187,재위 1127∼1162) 시호는 수명중흥전공지덕성신무문소인헌효황제(受命中興全功至德聖神武文昭仁憲孝皇帝). 전 버전에서는 남송의 1대 황제라고 하였으나 본질적으로 두 송은 같은 왕조이므로 여기서는 10대로 표기한다.
1138년, 항주(항저우)를 수도로 정하고 임안부라 했다.
송휘종의 아홉번째 아들이자 송흠종의 이복 동생으로 황제가 되기 이전에는 강왕에 책봉됐었다. 그러나 1127년 정강의 변이 발생하여 송휘종과 송흠종이 금의 침입으로 끌려가는 등 나라 꼴이 영 좋지 않게 돌아가자, 이미 인질의 쓴맛을 알고 있던 고종은 급히 즉위하고는 장강 이남으로 도망쳐 즉위했다. 이전에 휘종이 금나라와 강화협상을 할 때 인질로 그를 보냈는데 워낙 담대하고 떳떳해서 금나라가 이 사람을 궁중에서 곱게 자란 황자라고 믿지 않고 다른 황족을 보내달라고 하는 바람에 돌아올 수 있었다. 그리하여 돌아온 뒤에는...
그 담대했던 기상을 잃고 겁쟁이와 찌질이로 전락하기 시작한다.(...)
아버지처럼 서화에 능했지만 동시에 정치력과 지도력이 부족했던 것도 닮았다. 간신 진회를 무척 총애하고 악비를 싫어했던 전형적인 화평론자로 1142년 자신을 신하라고 칭하는 등 굴욕적인 화평정책을 맺었다. 하지만 금과 오랜 평화시대를 보낼 수 있었으며 송이 어마어마한 공물을 바치고도 매우 번영할 정도로 부강한 상업국가였다는 것을 기억한다면 진회와 고종은 현실적인 생각을 했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진회의 20여년 독재정치와 공포정치를 방관한 것은 비판받아 마땅하다.
양자 송효종에게 양위한 뒤로 25년 동안 상황(上皇)으로서 유유자적한 생활을 즐겼다. 서화 감상에 능하였으며 특히 서예에 뛰어났다고 한다. 그래도 다른 고종 시호를 받은 쪽보다는 나은 편이다. 또한 1187년까지 황제를 해먹지 않고 빨리 물려줌으로써 자기가 망친 나라를 재건할 기회라도 준 점에서 그나마 실드칠 구석이 조금이라도 있는 것도 사실.[1]
더군다나 효종은 금나라의 대대적인 공격을 당했지만 금나라의 원정이 대실패하여 '군신관계'[2]를 '숙질관계'[3]로 완화시키고 조공품을 줄이고 국가 재정을 팽창시켜 북송때보다 더 융성한 국가를 만들었다.
사실 원래 고종도 자손이 있었고 1남 5녀가 있었다. 무엇보다 아버지 휘종 못지않게 후비가 많았으나, [4] 정비였던 현절황후 형씨는 원래 아이를 임신하고 있었다. 하지만 1127년 정강의 변으로 형씨가 끌려갈 때 말에서 떨어져 유산하고 말았다. 형씨는 금나라 세의원[5]에 있다가 나중에 귀환했지만 다시는 자손을 보지 못했다.
그래도 현비 반씨가 낳은 외아들 원의태자 조부가 남아 있었다. 하지만 뜻하지 않은 일로 잃고 말았다. 1130년, 묘부와 유언정 등이 고종을 협박하여 강제 퇴위시키고 어린 조부를 황제로 옹립했는데 재상 장준이 이들을 제거하고 고종을 복위시켰다. 조부는 위국공으로 강등되었으나, 불과 3세의 나이로 요절하고 말았다. 하지만 고종은 이전에 고자가 되었기 때문에 결국 다시는 자손을 보지 못하고 엄청 먼 친척 중에서 양자를 들여서 황태자로 삼았다.[6] 태조의 아들 조덕방의 6세손 조백종(趙伯琮)을 조신으로 개명시키고 양자로 삼고 결국에는 황태자로 세웠는데 그가 바로 효종이다. 그 외에도 태조의 자손 조백구(趙伯玖)도 양자로 삼고 조거로 개명시켰다. 효종과 조거는 고종과 헌성자열왕후 오씨의 양자로 입적되었으며 고종은 원덕태자 이외의 친자식으로 다섯 명의 공주들도 있었다. 그러나 이 공주들은 금나라로 끌려가다가 죽거나 끌려가서 세의원으로 끌려갔다.
고자가 된 이후가 좀 거시기한데 일찍이 양주의 행궁에서 후궁들과 즐기다가 금나라 군대가 쳐들어왔다는 소식을 듣고 너무 놀라서 신하들과 후궁들도 내버려두고 혼자서 장강을 건너 도망쳤다. 그런데 이 때 어찌나 놀랐는지 그 후로 생식 능력을 잃어버려... 그때부터 자녀를 낳을 수 없었다고 한다. 내가 고자라니. 물론 이런 사건은 그 사건뿐이 아니라서 일시적인 사건이지만 금나라의 정예군이 장강을 넘어와 항주를 함락시키자 혈혈단신으로 남중국해로 도망쳐서 망망대해를 떠도는 일도 있었다. 한 마디로 말해서 송고종이 아닌 다른 사람도 뭔가 몸에 이상이 생길 가능성이 높았다고 보면 된다. 의학적으로 정확하게 보자면 이는 심인성 발기부전에 해당하는 사례라고 볼 수 있다. 성행위와 관련된 경험이 트라우마가 되어 발기를 방해하는 경우#가 이 경우다.
고종은 이외에도 상당히 찌질한 모습을 보이는데 황위 자리때문에 친아버지 휘종과 이복형 흠종은 버려두고 심지어 친어머니 현인황후 위씨도 처음에는 송환을 반가워하지 않았다.[7] 고종이 즉위하자 포로로 이용가치가 떨어진 휘종과 흠종을 금나라는 조용히 송환시킬려고 했으나, 고종은 거절했다. 사실 휘종이 살아있었을 때 엄격한 적장자상속제인 송나라에서는 휘종이야 자기가 알아서 때려쳤으니 그렇다 쳐도 형인 데다 별다른 결격사유가 없는 흠종에게는 늦게라도 황위를 돌려줘야 하고 무엇보다 함부로 황제 자리에 오른 것을 문책당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일단 강화를 한 뒤에 아버지와 어머니는 모셔왔다. 단 아버지가 형을 구하지 않고 버렸다고 혼낼 것이 무서웠는지 휘종은 이미 고인이 되어 시신이 관에 실려 돌아왔으며 위씨는 돌아와 20여년동안 아들과 호화롭게 살았다. 위씨는 원래 휘종의 후비로 금나라 오국성에 있을 때 휘종의 다른 후비였던 귀비 교씨와 의자매 관계였는데 송환이 결정되자 전날 밤 교씨는 위씨를 축하해 주었다.
교씨는 울면서 자기는 돌아가진 못해도 위씨가 돌아가도 이곳에서의 생활과 자신을 잊지말라고 간곡히 말했다. 위씨는 잊지 않겠다고 말했고 다음날 아침에 금나라 군대의 호위를 받아 송나라로 가는 마차에 올랐다. 이 때 흠종은 서모 위씨에게 송나라로 돌아가면 자신도 송환시켜 달라고 졸랐다. 흠종은 자신은 황제 자리 따윈 필요없고 그냥 평범하게 살아도 좋으니 제발 고향땅에 돌아가게만 해달라고 울면서 졸랐다. 이 때 위씨도 그러겠다고 말했고 마침내 귀향길에 올랐다. 그런데 당시는 한여름이라 무척 더웠는데 짜증이 난 금나라 군사들은 그냥 다 때려치우고 그대로 돌아가려고 했다. 위씨는 이대로 돌아가면 다시는 기회가 없을거라고 보고 송나라로 돌아가면 은상을 베풀겠다고 약속하고 사자를 보내 장준에게 재물을 빌려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장준은 함부로 나라의 재산을 쓸 수 없다면서 거절했고 결국 위씨는 간신히 송나라로 돌아와서 약속한 은상을 겨우 베풀고 돌아올 수 있었다. 그리고 마중나온 고종에게 이 사실을 고자질했다. 분노한 고종은 장준을 죽이려고 했지만 좌우의 만류로 포기했는데 융통성없는 장준도 문제지만 고종 모자도 결코 잘한 게 없었다. 위씨는 돌아와서 매일 호화판 잔치를 열었는데 차츰 고달프고 힘들었던 금나라에서의 연금생활과 교씨, 흠종 그런 걸 모두 잊어버렸다. 그래도 처음에는 흠종 송환을 몇 번 건성으로 얘기했다가 나중에는 그냥 덮어버렸다. 결국 흠종은 영원히 돌아오지 못했으며 결국 오국성에 생을 마감했다.[8] 한편 관에 실려 돌아온 휘종은 영우릉에 안장되었다. 위씨는 아들 고종과 호화판 잔치를 열면서 남편 휘종이 어쩌다가 나라를 잃었는지를 생각하지도 않았고 죽은 후에도 호화로운 장례로 영우릉에 합장되었다.
고종은 1162년에 양위했으며 1187년에 죽을 때까지 25년 동안 상황으로 지내며 사치생활을 즐겼다. 죽은 후에는 영사릉에 안장되었는데 다른 남송의 황릉들처럼 남송이 망하고 1285년 양련진가에 의해 도굴당했다. 이 때 황제와 후비들의 유해는 당연히 황야에 버려졌는데 휘종과 위씨가 합장된 영우릉도 예외가 아니었다. 결국 아버지도 형도 남편도 버리고 오직 자신들의 권력과 쾌락을 위해 도리를 저버린 이들 패륜 모자의 비참한 최후라고 할 수 있겠다. 그렇다 해도 송효종은 무슨 죄가 있다고[9]
2 대중문화 속의 송고종
만화 소녀침경(화타위전)에서 백성들에게서 떠도는 소문에 처형당한 악비가 살아있다고 불안해하는 모습을 보이며, 진회가 금나라에 화친을 한다면서 바칠 공물에 대해 이야기하자 1년은 고사하고 당장에 준비하기 힘들다고 했다. 또한 산하의 예를 갖추어 금나라 황제 앞에 예를 갖추어 금나라가 송나라의 주인임을 공표해야 한다고 하자 치욕적이라면서 악비의 말을 듣고 같이 싸워야 한다고 후회하는 모습을 보였으며, 진회에게 책임을 물려고 했다가 진회가 자신의 무능함을 탓하자 파직을 선언한다.
그러나 그 순간 송고종의 몸이 썩고 눈알이 튀어나오는 것을 통해 송고종은 이미 죽은 사람이었음이 드러나며, 진회가 송고종에게 허수아비라면서 그냥 그 자리에 앉아있기만 하면 된다면서 부하들에게 시켜서 금황구침을 통해 송고종을 다시 살려놓게 한다.- ↑ 물론 청고종인 건륭제는 송고종과는 격이 다른 뛰어난 인물이므로 논외로 쳐야 된다. 건륭제가 청나라가 망하는 단초를 제공했다고 비판받고 있지만 송고종보다야 백배는 뛰어난 인물이다.
- ↑ 임금과 신하 관계
- ↑ 숙부와 조카 관계
- ↑ 그래도 아버지에 비하면 정말 평범한 수준이다.
- ↑ 관에서 운영하는 기생방으로 정강의 변때 끌려간 많은 송나라 여자 황족들이 여기서 기생, 창녀 혹은 누군가의 첩으로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 ↑ 왠일인지 송태종의 자손은 귀했다. 요절한 경우가 많았고 무엇보다 정강의 변 등으로 많이 금으로 끌려갔기 때문이었다. 결국 송태종의 형 송태조의 자손에게 황위를 돌려주기로 하고 태조의 차남 조덕방의 6세손 조신을 양자로 세웠다.
- ↑ 덕분에 휘종의 정비 현숙황후 정씨는 죽어서도 송나라로 돌아오지 못했다.
- ↑ 현재 휘종이 금나라에서 죽었을 때 묻혔던 무덤과 흠종이 죽어서 묻힌 무덤은 대한민국 북쪽에 있는 북한의 고령진역 근처에 있다. 정확히는 고령진역 근처에 있는 게 휘종의 원래 무덤, 두만강 건너 중국 쪽에 있는게 흠종의 무덤이다.
- ↑ 다만 이건 원에서도 문제가 되었고, 양련진가는 결국 처형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