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크라이나어: Сидір Артемович Ковпак (시디르 아르테모비치 코브파크)
러시아어: Сидор Артемьевич Ковпак (시도르 아르테몌비치 코브파크)
1887.6.7 (율리우스력으로는 5월 26일)~1967.12.11
1차대전과 적백내전, 2차대전에서 활약한 군인이자 공무원. 특히 독소전쟁 시기의 빨치산 활동으로 유명하다.
1 생애
러시아 제국 시절 러시아령이었던 하리코프 주의 코텔바에서 빈농의 아들로 태어났다. 이후 평범한 농부로 농사를 짓고 근근이 살아가다가 1차대전이 터지자 러시아 제국군에 기병으로 입대했고, 알렉세이 브루실로프가 지휘한 브루실로프 공세에서 큰 공훈을 쌓아 니콜라이 2세로부터 직접 성 게오르기 십자 훈장 3급과 4급을 수훈받았다. 이후 제정 붕괴 후 수립된 임시정부의 총리 알렉산드르 케렌스키가 명령한 케렌스키 공세에도 참여했지만, 공세 자체가 실패하면서 별 성과를 얻지 못했다. 케렌스키 내각이 볼셰비키 혁명으로 붕괴하자 코브파크도 볼셰비키당에 입당했고,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으로 독일과 휴전이 성립된 뒤에는 적위대원으로 적백내전에 참전해 바실리 차파예프의 기병 사단에 배치되어 백군과 여러 차례 전투를 벌였다.
적백내전 종결 후에는 퇴역해 우크라이나 북부의 작은 마을인 푸티블에서 촌장으로 일했다. 대숙청 기간에는 숙청 대상에 올랐지만 NKVD에 있던 옛 전우들이 이 사실을 몰래 코브파크에게 알렸고, 코브파크는 체포를 피해 한 동안 숲속에서 은거 생활을 해야 했다. 이 은거 생활때 얻은 경험은 이후 빨치산 전투 때 요긴하게 써먹게 되었다. 대숙청 풍파가 어느 정도 사그라든 뒤 독소전쟁이 터지자, 코브파크는 54세의 나이로 다시 무기를 들고 빨치산으로 참전했다. 초기에는 독일군의 세가 강했고 휘하 병력이 불과 10여 명의 분대 정도밖에 되지 않아서 푸티블이 속한 수미 주와 브랸스크 주에서 소규모 게릴라전을 벌이는 수준이었지만, 나치 독일이 점령지에서 학살과 약탈을 저지르자 분노한 농민들과 노동자들이 빨치산에 가담하면서 북부 우크라이나를 포괄하는 대규모 빨치산 세력을 형성해 독일군의 골칫거리가 되었다. 코브파크는 1차대전/적백내전 참전과 대숙청 기간의 전투/은신 경험을 살려 소부대 전술로 적의 후방을 쉴새 없이 교란하며 독일군의 진격을 방해했다. 소련 정부도 코브파크의 빨치산 전투 성과에 관심을 가지면서 1942년에는 소비에트연방영웅 칭호를 수여하고 1943년에는 소장 계급을 부여하며 전투를 독려했다.
코브파크는 독일군이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대패하고 수세에 몰리게 되자 우크라이나 공산당 지하 위원회와 협력해 우크라이나 전역의 빨치산 조직을 통합하고 자신의 휘하에 두었고, 1944년에는 서부로 진격하던 소련군을 지원해 독일군과 우크라이나 반소 게릴라를 상대로 파상적인 공세를 벌여 이들을 벨라루스와 루마니아 국경까지 밀어내며 상당한 피해를 주었다. 코브파크는 이 공로로 두 번째 소비에트연방영웅 칭호를 받았고, 이후에도 종전까지 잔존 추축군 병력과 반소 세력을 상대로 토벌전을 벌였다.
종전 후에는 우크라이나 최고 법원 부의장을 맡아 추축군과 반소 게릴라들의 전범 재판에 참가했고, 빨치산 전투 경험에 대한 구술 회고록을 작성했다. 만년에는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의원과 소련 최고회의 의원직을 역임했고, 1967년에 키예프에서 향년 80세로 세상을 떠났다. 유해는 바이코베 묘지에 묻혔다. 사후 1971년에는 우크라이나 북부 흘루히우에 코브파크 기념관이 건립되었고, 1973~76년에는 3부작 전쟁 영화 '코브파크의 시'가 제작되었다. 소련 붕괴 후에도 우크라이나의 전쟁 영웅으로 추앙받고 있고, 고향인 코텔바에는 청동제 흉상이, 촌장을 역임한 푸티블과 숨을 거둔 키예프에는 기념비가 있다. 2012년에는 우크라이나 국립 은행에서 코브파크의 초상을 새겨넣은 2흐리브냐 기념 주화가 발행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