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리천 전투

1 개요

후삼국시대의 마지막 서기 936년 고려왕건후백제신검이 지금의 경상북도 구미시 선산읍 일대인 일리천에서 맞붙은 전투이며, 후삼국시대를 종결짓는 최후의 전투. 흔히 태조 왕건 때문에 황산벌에서 벌어진 리벤지 매치라고 아는 경우가 있는데 황산은 신검이 패전 후 붙잡힌 곳이다.

2 배경

930년 고창 전투, 934년 운주 전투를 계기로 후삼국의 주도권은 고려에게 돌아간다. 이후 고려는 전방향에서 후백제에 대한 공세를 강화하고 후백제의 판도는 급격히 축소된다. 또 934년 멸망한 발해의 태자 대광현이 무리를 이끌고 고려에 귀순한다. 그리고 935년 오랜 전란을 더이상 버티지 못한 천년왕조 신라가 마침내 고려에게 항복한다. 이리하여 고려는 후삼국의 2/3를 아우르는 영토들을 모두 평정하였고 이제 남은 것은 후백제 한 나라뿐인 상황이 된다.

하지만 비록 늙었다고는 하나 견훤은 후삼국 최강의 무장이었고 비옥한 한반도 남부 곡창지대를 근거지로 한 후백제의 군사력 역시 탄탄했다.[1] 이렇듯 후백제를 멸망시키기 위해서는 무언가 절호의 기회가 필요한 상황.

그러한 와중에 왕건에게 하늘이 내린 기회가 찾아온다. 후백제의 후계자 다툼 끝에 맏아들 신검이 이복동생 금강을 죽이고 아버지 견훤을 유폐한 것. 견훤은 금산사에 유폐되지만 기회를 틈타 탈출해서 고려로 귀부한다. 왕건은 평생 동안 싸워왔던 이 희대의 라이벌을 상보(尙父)라고 부르며 극진히 대접한다. 견훤은 자신을 배반한 아들을 벌할 수만 있다면 죽어도 상관없다고 하며 왕건에 대한 적극 협조를 약속한다.

3 진행

936년 마침내 왕건은 전군을 동원해서 후백제를 침공한다. 견훤은 아들을 벌하기 위해, 그리고 자신이 세운 나라를 자신이 멸망시키기 위해(...) 왕건에게 간곡히 요청해서 함께 출진한다. 왕건이 동원한 군세는 삼국사기에는 총 10만 7천 5백명, 고려사에는 8만 6천 8백명으로 기록되어 있다. 고려사에 따른 고려군의 총 병력 구성은 앞을 섰던 견훤과 박술희와 더불어 기병 1만명, 제2군은 보병 1만명, 홍유와 박수문이 거느린 제3군은 기병 1만명, 명주에서 올라온 왕순식의 기병 2만명, 유금필이 끌고온 북방 유목민족인 흑수말갈, 달고, 철륵등의 군사 9천 5백명, 그리고 왕건의 본군을 합쳐 총 동원 병력은 8~9만에 달해 후삼국 시대 최대 규모였다. 그것도 기병이 4만 7천 5백에 보병이 약 4만으로 기병이 더 많았다.

결전장은 지금의 경상북도 구미시 선산읍 일대인 일리천. 신검 역시 후백제의 모든 전력을 총동원해서 맞선다.[2] 왕건은 전군을 좌군 우군 중군 후군으로 편성했고, 신검 역시 유사한 진형으로 맞선다.

양측 모두 막대한 군사를 동원했지만 고려군의 좌군에는 견훤이 있었고, 건국 군주 견훤이 적진의 장수로 서 있는 모습을 본 후백제군 병사들은 사기를 잃어 애술 등의 선봉에 선 장수들을 포함해 그대로 무릎을 꿇고 투항해 버린다. 또한 우군을 이끌던 박영규는 견훤의 사위였고, 이미 고려군과 전투가 벌어지면 배반하기로 하여 내통하기로 약속을 해놓은 상태였다. 전투의 승패는 싸우기 전에 이미 확정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중군끼리는 나름대로 치열한 전투가 있었는데, 당시 고려 중군의 선봉은 인간흉기 유금필과 그가 이끌던 말갈기병 1만이었다.[3] 문제는 후백제군이 쳐발렸다.(...)후백제군 중군은 전사자만 6000, 사로잡히거나 도망친 자는 헤아릴 수 없었다고 한다. 후백제군 좌군에 대해서는 정확한 기록이 없으나 우익과 중앙이 박살난 상태에서 제대로 된 전투를 할 수 있었을리는 만무하다.

4 결말

결국 전투는 고려군의 대승으로 끝나고, 신검은 도망치다가 아이러니하게도 황산에서 고려의 추격대에 따라잡히고 결국 항복한다.[4] 신검의 반란에 참여한 백제의 장수들은 대부분 처형당하지만, 신검은 왕건의 용서를 받고 살아난다. 그리고 그걸 본 견훤은 울화통이 터져서 결국 얼마 안가 병사하고 만다.[5]

이로서 왕건은 50년 가까이 지속된 후삼국 시대의 종지부를 찍고 후삼국을 통일하였고(신라에 이은 재 삼한일통), 마침내 통일 왕조로서의 고려의 역사가 시작하게 된다.

5 창작물

태조 왕건에서도 이 전투가 극의 마지막을 장식하고 있는데, 여기서도 양측의 전력은 거의 비등한 편이었다. 후백제 영토가 물자가 풍부한 편인 경상남도, 전라도 쪽에 속해있다보니(나레이션이 199회에서 언급한다), 후백제군도 고려군 만큼이나 대규모 병력을 꾸릴 수 있던 것. 신검을 위시한 수뇌부의 의기도 드높았고, 병력 차이도 얼마 없으니 해볼만한 싸움이었으나, 정작 전투는 너무나 허망하게 끝나고말았다. 하필이면 고려군 선봉이 견훤이었기 때문.

원래 왕건은 노령인데다 등창까지 난 견훤을 전장터에 데려갈 생각조차 하지 않았는데, 자신이 세운 후백제를 거두고, 패륜아들을 처벌할려는 견훤이 전장터에 자신을 데리고 가달라고 계속 간청하여 견훤 역시 일리천 전투에 참전한다. 선봉을 정할때 견훤은 자신을 선봉으로 세워달라고 요청하는데, 당연히 직접 싸우겠다는건 아니고, 후백제인들의, 견훤에 대한 이미지를 이용해 단체 모랄빵을 유도하겠다는, 견훤의 계책이었다. 이전에 견훤이 호령하자 상귀의 병사들이 모랄빵이나 명령을 듣지 않은 것을 본 유금필은 견훤의 요청에 동의하였고, 왕건은 그 요청을 받아들인다.

견훤의 예상대로, 견훤을 본 후백제군은 단체로 모랄빵이나 와해되었고, 후백제는 제대로 된 싸움없이 전투에 패하고 만다. 오죽하면 양검이 아버지가 아니라 원수라 절규할 정도. 그래도 남은 병력으로 황산에서 군을 재정비하고 배수의 진을 쳐서 대응하려 했으나, 이마저도 남은 병사들의 사기가 바닥을 기어 마지못해 움직이는 판에 포로로 잡은 애술에게 미리 정보를 들은 고려군에 의해 포위당하는 상황에 처하고 만다. 결국 능환의 제안대로 항복함으로써 허망하게 종료된다.

태조 왕건 : 제국의 아침에서는 왕건, 견훤 캠페인의 마지막 미션으로 구현되었고 서로 다른 맵을 사용한다. 왕건 캠페인에서는 고려로 투항하는 견훤을 데려온 뒤 신검, 양검, 용검, 능환을 처치하고 후백제군을 전멸시켜야 한다. 견훤 캠페인에서는 견훤이 신검의 반란을 진압했다는 IF설정이 붙었으며 미션에서 고려군을 전멸시키면 된다.

천년의 신화의 대고려 건국 캠페인에서도 마지막 미션으로 나왔다.
  1. 고창 전투 이후 계속 밀리던 와중에도 견훤은 신하들에게 우리 백제의 군사력이 고려의 두배인데 왜 자꾸 밀리는거냐고 한탄한다.
  2. 당시 고려의 영토는 통일신라 9주 중 한주 삭주 명주 상주 양주 웅주의 반으로 5.5주. 후백제는 나머지 3.5주였다. 하지만 삭주나 명주 등은 곡식과 인구가 부족했으며, (물론 한주가 그만큼 커버했겠으나)후백제의 영토가 지금의 전라 경남 충남을 아우르는 곡창지대였고, 인구도 많았으며, 후백제군은 보병 중심 편제였다는 점을 감안하면, 5~6만 정도는 되었으리라 추정된다.
  3. 유금필은 북방의 말갈족을 토벌하고 그들에게 대추장이라는 칭호를 받은 바 있다.
  4. 백제가 멸망할 때의 그 황산벌 맞다.
  5. 신검이 결국 처형당했다는 설도 있고 사실은 견훤이 이후 암살당한 것이라는 설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