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설명
呂不韋 (? ~ BC 235)[1]
여불위는 중국 전국시대의 상인이자 정치가. 한(韓)의 거상이자 진(秦)의 상방이었다. 조나라에 볼모로 가있던 진나라 떨거지 왕족인 이인을 끌어내 끝내 진나라 왕으로 만들었으며, 진시황에게 권력을 빼앗기기 전까지 진나라의 실세로 군림했던 권신이었다. 중국 역사 뿐만 아니라, 세계 역사상으로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킹메이커.
2 일생
2.1 초기
여불위는 본래 위나라 복양 출생으로, 나이가 어려서부터 장사를 시작하였는데, 두뇌가 비상하고 수완이 뛰어나 거상으로 성장하였다. 이후에 장사를 하기 위해 조나라에 사업차 들렸다가 자신의 인생을 뒤바꿀 절호의 기회를 맞게 되었다.
당시 조나라의 수도 한단에는 중원 최고의 강대국이었던 진나라 소양왕의 아들이자 태자였던 안국군(安國君)[2]의 아들 영이인(異人)이 인질로 와있던 중이었는데, 여불위는 우연찮게 이인과 만날 기회를 얻게 되었다. 이인은 비록 태자 안국군의 아들이었다고는 하나, 한낱 서자 출생인데다가 서열이 높은 형제들이 워낙 많았으며 무엇보다 이인의 어머니인 하씨가 안국군의 사랑을 받지 못했으므로 그저 눈 밖에 난 처지였다.[3]
그러나, 이인을 한 번 만나본 여불위는 그의 잠재성을 꿰뚫어 보아 가히 왕재라 여기고는 그에게 대뜸 막대한 재물을 나누어 주면서[4] 이인의 후원자를 자청하고 나섰다. 이인 역시 여불위의 뜻에 응하여 자신을 왕으로 만들어 주거든 막대한 보상을 해주겠다고 약속하였다. 이후로부터 여불위는 이인을 왕으로 만들기 위해 자신의 엄청난 자산을 아낌없이 투자하는 한편, 자신의 첩이었던 미인 조희를 이인에게 바치는 등 갖은 정성으로 모셨다.[5]
2.2 왕을 만들다
안국군의 아들들은 모두 첩들에게서 얻은 서자였기 때문에, 안국군은 자신이 왕위에 오른 후 차기 태자가 될 이를 정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여불위는 안국군의 정실부인이었던 화양부인(華陽夫人)을 지지자로 끌어들이라고 이인에게 조언하였다. 이인은 화양부인의 환심을 사기 위해 5백금에(사기 여불위 열전에 기록된 바로는 五百金) 달하는 많은 재물을 보내어 비위를 맞추고, 그녀의 고향인 초나라를 위하는 것처럼 연극까지 하였다.[6]
화양부인은 비록 슬하에 자식은 없었으나, 태자인 안국군의 정실부인이었기 때문에 상당히 강력한 발언권을 가졌다. 화양부인은 자신에게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언젠가 안국군의 서자가 왕이 되면 모든 권력을 잃고 말 것을 두려워 하였다. 그 와중에 자신을 지극히 위해주는 이인은 화양부인에게 유일한 희망과 같았다. 화양부인은 곧 이인을 자신의 양자로 삼아 보호해주었고, 초나라의 자식이라는 뜻의 자초(子楚)라는 이름까지 지어 주었다.
기원전 257 년, 진나라 장수 왕흘이 조나라 수도 한단을 공격해 오자 장평대전때도 참아줬던 조왕은 인내심이 바닥났던지 자초를 해하고자 병졸들을 보냈다. 여불위는 이 병사들에게 무려 황금 6백근을[7][8] 뇌물로 뿌려 자초를 조나라에서 탈출시키고 그의 아내 조희와 아들 정은 잠적시켰다. 조왕은 자초의 처자식이라도 죽이려고 열심히 찾았지만 여불위가 잘 숨겨줘서 살아남았다고 한다. 이후에도 조희와 정은 조나라에서 지냈는데, 기원전 251년 소왕이 죽고 효문왕이 즉위하면서 자초가 태자의 지위에 오르자 진나라로 왔다. 여담으로 왕흘의 군대는 이목이 격파했다.
자초의 할아버지인 소양왕은 무려 50 년이나 왕위에 있던 중에 죽었다. 그 뒤를 이어 태자 안국군이 즉위하여 효문왕이 되었으나, 그 역시 이미 상당히 고령이었던 까닭에 왕위에 오른지 1년도 안 되어 급사하였다. 결국 효문왕의 태자였던 자초가 그 뒤를 이어 즉위하여 장양왕이 되었다.[9] 이리하여 여불위는 서자 출신인데다가 할아버지와 아버지에 의하여 조나라에 볼모로 보내졌던 떨거지 왕족[10]을 당시 중원 제일의 강국이었던 진의 왕으로 만드는 가히 기적적인 활약을 하였다.
장양왕은 자신이 왕위에 오르는데 가장 큰 공을 세웠던 여불위에게 하남과 남양 땅의 10만호를 하사하여 문신후로 봉했을 뿐 아니라, 진나라 승상으로 임명함으로써 보답하였다. 승상의 직위에 오른 여불위는 덕분에 진나라 정계의 실세로 떠오르게 되었으며, 한 순간에 중원의 정세를 좌지우지할만한 위치의 고관대작으로 거듭났다. 요약하면 당시 약소국이었던 위나라 상인으로 태어나서 왕이 되지 못할 가능성이 높았던 왕족의 일원을 진왕으로 옹립하였고 그에 대한 보답으로 재상이 되어 막대한 명예와 부를 거머쥐었다는 것이다. 이처럼 여불위는 비록 상인 출신이었으나 비범한 통찰력과 수완을 지닌 인물이었다.
2.3 상방에 오르다
진시황릉에서 발굴된 꺾창으로 상방 여불위라고 적혀있다 |
그러나, 장양왕은 즉위한지 약 3년만에 죽었고, 후대왕으로 여불위가 선물하였던 여인 조태후와 장양왕 사이에서 태어난 외아들이 13세의 나이로 왕위에 올라 그 뒤를 이었는데 이 아이가 바로 훗날에 중국 전국시대를 종식시키고 천하를 통일하고 진시황이 되는 영정이다.
이를 두고 여불위가 나이가 어린 정을 빨리 왕으로 세워 권력을 차지하기 위해서 두 왕을 독살했다는 설도 나돌았다. 하지만 효문왕이라면 몰라도 장양왕은 죽일 이유가 없다. 장양왕에게 있어 여불위는 그야말로 그가 오로지 의지할 인물이었다. 생명의 은인이자 진에 아무런 정치적 기반이 없었던 그가 왕위에 오를 수 있게 전폭적인 지원을 해주었던 인물이 여불위였는데, 굳이 장양왕을 살해하는 모험을 할 연유가 없다. 물론 야사에서는 영정이 실제로는 여불위의 아이라서 그랬다는 설이 있지만 이는 그저 가설일 뿐이다.
아직 영정이 어렸기에 여불위는 어린 왕을 보필한다는 명분으로 승상보다도 높은 상방(相邦)의 자리에 올라 진나라의 실세를 거머쥐었으며, 그 칭호 또한 왕의 아버지와 같다는 중보(仲父)라 하였다. 이렇게 막강한 힘을 쥐게 된 여불위는 섭정을 하며 엄청난 위세를 떨치며 국정전반에 대한 그의 영향력을 강화하였다.
한편, 남편인 장양왕을 잃은 진시황의 어머니인 조태후는 본래 여불위의 첩이었기에 홀몸이 된 이후로 자주 여불위를 찾았다. 여불위는 자주 조태후와 만나다가는 선왕의 태후와 간통했다는 혐의를 받을까 두려워서 자기 대신에 조태후를 만나줄 사람을 구했는데, 마침내 노애를 환관으로 위장시켜 조희에게 보냈다.[11][12] 노애는 양물이 컸고 정력이 대단하였기 때문에 조태후의 총애를 받았으며, 이후 조희와 노애는 사실상 연인 관계가 되었다.
한편 진나라의 실권을 손에 쥔 여불위는 많은 신하들을 포섭하여 자신의 편으로 만드는 한편, 여러 학자들과 도인들을 아낌없이 후원해주었다. 덕분에 여불위는 당대의 석학들과 대신들로부터 높은 평판을 얻어 그의 권력을 더욱 공고히 다질 수 있었다.
2.4 몰락과 최후
노애는 조태후와의 간통 끝에 아이를 둘이나 얻었는데, 그는 자신이 낳은 자식들을 진나라의 왕으로 세우려는 음모를 꾸몄다. 그러나 어른이 된 진시황에게 이러한 사실을 곧 발각되었는데, 노애는 사병들을 동원하여 수도 한복판에서 난을 일으켜 항거하였다. 그러나 진시황은 이에 침착히 대응하여 곧 반란은 어렵지 않게 진압되었다. 진시황은 노애를 비롯한 그의 3족을 죽였으며, 노애의 가신들 또한 가산을 몰수당하고 촉땅으로 쫓겨났다. 조태후가 노애와 간통하여 낳았던 아이들도 모두 살해당했다. 분노가 극에 달한 진시황은 자신의 친어머니였던 조태후마저 옹에 유폐시켜버렸다.[13]
진시황은 노애의 반란 사건에 대한 책임을 물어 여불위도 죽이고자 하였다. 비록 직접적으로 역모를 꾀한 것은 아니었지만, 노애를 조태후 옆에 붙여 결국 반란이 일어날 여지를 제공했다는 것이 모든 사건의 시초였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게다가 왕을 속이고 태후를 간통하게 부추겼다는 점에서 죄를 면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이전부터 여불위에게 포섭된 많은 학자들과 빈객들이 선왕을 모신 공이 크다며 여불위를 변호해준 덕분에 결국 법대로 처벌받지는 않았다. 그 대신에 상방 직위에서 해임당하고 문신후 작위를 받을 때에 하사받은 봉국인 하남으로 쫓겨나면서 중앙 정계에서는 완전히 축출되고 말았다.
그러나 여불위의 권세와 능력은 이미 세상에 너무 잘 알려져 있었다. 썩어도 준치라고, 그가 상방 직위를 잃고 중앙 정계에서 축출당한지 1년 남짓한 시간이 흐르는 와중에도 각국의 제후들이 빈객과 사신을 보내서 여불위에게 인사를 하러 왔다. 이 광경을 지켜보던 진시황은 한때 진의 상방으로서 국정을 좌우했던 여불위의 영향력이 여전히 남아있었다는 점을 깨달았고, 그가 또다시 변란을 일으킬까 염려하게 되었다. 결국 진시황은 여불위와 그 가솔들을 험지 중의 험지인 촉으로 추방할 것을 명하는 친서를 보냈는데, 이를 받아 본 여불위는 절망에 빠진채 독약을 마셔 자살하였다.
진시황이 여불위에게 보낸 친서의 내용은 매우 모욕적인 것이었다. 비록 여불위가 자신의 아버지를 왕위에 올리는 공을 세우기는 하였으나, 그 외에 국가를 위한 뚜렷한 공을 세우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재상으로서 군림한 그가 어떻게 자신으로부터 '상보'라는 호칭으로 불리울 수 있냐고 비난했던 것이다. 다시 말해 이는 너 따위가 뭐라고 여태 엄청난 대우를 받으며 살았냐는 식으로 힐난했다고 할 수 있다. 여불위는 아마도 이를 읽고는 진시황이 마침내는 자신을 살려두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여 모든 희망을 잃고는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으로 보인다.
여불위가 자살하기 전에 평소 그를 충직하게 따르던 이사가 와서 그에게 여러번 조정으로 돌아와 달라고 부탁했지만 거절했다고 하며, 그는 자신은 죽어서 왕이 되고 싶으니 땅을 왕관삼아 머리가 아래로 향하도록 수직으로 몸을 세워 몸의 반만 묻어달라고 유언했다고 한다.
훗날 한무제는 지금의 윈난 성 지역을 정복하면서, 여불위가 추방된 이후에 촉 지역에 모여살던 여씨들을 이 지역으로 이주시켰다. 아예 현 이름에 여불위 이름까지 붙여주기도 하였다. 아니 여불위 자결한 지도 100년이 지났는데 뭔 죄가 있다고 일족을 죄다 귀양살이보내냐 중국 삼국시대 촉한의 운남 태수였던 여개도 이런 여씨 일족 중의 한 명이다.
3 평가
그저 맨 손에 아무것도 없었던 떨거지 왕족을 일국의 왕으로 만들고, 자신도 일개 상인에서 한 나라의 실세를 거머쥔 정치 거물로 성장했다는 점을 보면 분명 범상치 않은 인물이었다는 평이 다수이다. 그러나 결국 진실되지 못하여 왕을 속였고, 이로 말미암아 하루아침에 모든 권력과 명성을 잃고 추락한 끝에 자결로써 비참한 최후를 맞았으니 인격적으로는 그리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하였다. 사마천은 《사기》 열전에 여불위에 대한 기록을 남겼는데, 사마천은 그의 허무한 몰락을 논하며 "소위 이름만 알려진 자(所謂聞者)"라 평하였다. 이는 그 대단한 명성과 지위와는 대조적으로 그 행동은 올바르지 못한 간사한 자라는 말 정도로 해석된다.
다만, 이렇게 사후의 평이 박했던 것에 비해 생전의 평판은 상당히 좋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여불위 자신이 권력을 손에 쥔 이후로도 학자나 선비, 도인 등을 후원해주며 투자를 아끼지 않았기 때문에 그는 당시의 지식인들에게는 꽤나 존경받는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당장 여불위가 왕을 능멸하는 큰 죄를 지었음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석학들과 선비들이 목숨을 걸고 여불위를 변호한 덕분에 일단은 관직에서 물러나는 선에서 사건이 마무리 되었던 것을 생각하면 여불위가 당대 사람들에게 어떤 평가를 받던 인물이었는지 알 수 있다.[14]
사실 여불위가 장양왕을 만든 킹메이커이긴 했지만 그 뒤로는 눈에 띄는 업적이 없는 것 또한 사실이다. 진시황은 어찌되었든 간에 영걸이라 할 만한 인물이라 중원의 통일을 노렸지만 여불위는 상인 출신이라 현상 유지를 원했을 가능성이 높고 따라서 노애의 반란이 아니더라도 언젠가는 진시황과 여불위는 대립하게 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4 그 외에
사마천의 《사기》에 의하면 여불위는 애첩을 자초에게 주었는데, 그녀는 훗날 진시황의 생모인 조희다. 이 때문에 진시황의 친아버지가 여불위라는 설이 있다. 자신의 자식을 임신한 여성을 남에게 주는 일이 전국시대에 종종 있었기 때문에[15] 사마천 시기까지만 해도 정설로 받아들여진 듯 하지만, 확실한 역사적 증거는 없으니 어디까지나 카더라일 뿐이다. 많은 창작물에서도 십중팔구 이 가설을 채용하기 때문에 사실이라고 여기기 쉬운데, 어디까지나 가설일 뿐이다. 다만, 중국 학자들 사이에서도 논란 거리가 된 것은 사실이며, 현대에 이르어서는 대체로 정통성을 떨어뜨리기 위해 일부러 만든 이야기로 추정한다고 한다. 그럴만도 한게 열전의 기록도 '조희가 영자초과 혼인한 뒤 12개월 뒤에 자식 영정을 낳았다.'는 기록으로 되어있는데 혼인 후에 사통한 것이라면 몰라도 의학적으로 진시황이 여불위의 자식이 되는건 불가능하다. 거기에다가 사마천은 같은 사기 안에서도 공식 역사라고 할 수 있는 본기의 시황제편에서는 시황제는 장양왕의 아들이라고 분명히 적고 있다.
자신의 이름을 영원히 남기기 위해 현재로 비유하자면 백과사전인 여씨춘추라는 책을 편찬했다. 막대한 자금을 들여 수많은 석학들을 동원하여 지었는데, 무려 20여 만 개의 단어를 수록하였다고 한다. 여불위는 이 여씨춘추에 큰 자부심을 가졌는지 책이 완성된 후 그 책에서 한자라도 더하거나 빼면 천금을 주겠다고 하였다고 전한다. 오늘날 '일자천금(一字千金)'이란 사자성어가 바로 여기서 유래한 것이다. 또한 조나라 한단에서 이인을 처음 만났을 때 했던 말인 '기화가거(奇貨可居)'라는 사자성어도 유명하다. 진귀한 보물은 제 때 잡아야 한다는 뜻.
성산, 함양, 성주 여씨 족보에서는 여불위를 자신의 선조로 취급한다. 자세한 것은 여(성씨) 항목 참조
5 대중문화 속의 여불위
5.1 만화 《킹덤》
공식능력치 | ||||
시기 | 무력 | 지휘력 | 지력 | 정치 |
20권 | ? | ? | 90 | 90 |
가이드북 | 60 | 90 | 90 | 90 |
야망과 도박운이 100이다.
초반에는 뒷모습이나 언급정도만 있다가 이후 진시황이 자신이 보낸 암살자들에게서 살아남자 다음 날 아침에 조문하며 등장, 여기서 님한테 암살자들 보낸 거 내가 그랬삼 ㅋㅋㅋ(...) 하여도 처벌할 수가 없어서 왕도 농담한다며 받아넘길 정도로 막강한 권력과 배짱을 가지고 있다. 게다가 몽무,채택,이사,창평군을 필두로 여러 인재들까지 보유한, 진시황에게는 있어서는 최종보스...지만 역사형태로 흘러간다면 나중에 비참하게 관광당한다는 역사가 기다리고 있다.
주인공 이신이 왕의와 더불어 깜놀할 정도로 압도된 상대로 문신들조차 중압감을 발하는데, 유일하게 중압감 같은 것은 없었지만 오히려 사람을 포용하는 느낌이 중압감 이상으로 주변을 압박한다는 식으로 묘사되었다. 유방처럼 자체적인 힘은 없지만 사람을 끌어모으는 인품이 있는 인물을 중국에서 높이 쳐주기 때문에 만든 전개가 아닌가 싶다.
18권에서는 사기의 기록을 바탕에 둔 건지, 진시황의 생모인 조희와 간통을 하는데 과거 연인사이였다고 나온다. 그리고 이를 알게 된 궁녀 한 명이 중상을 입으면서까지 진시황에게 사실을 알려서 진시황 일파에게 반격을 당하게 되는데...역사대로라면 아마 이 일이 후에 크게 작용하게 될 듯하다.
이후에는 자기 마음대로 승상에서 상국[17]이 되어버리고는 진시황일파의 세력을 빼앗아가다가, 진시황이 과거 성교의 반란에서 살려둔 성교와 왕족,귀족들을 세력으로 끌어들여 좌우승상 중 창문군을 승상으로 세우고 진시황이 이제는 자신과 싸울 것이라하자 제법 성장했다고 생각한다.
연재분 263화에서는 위나라,초나라,조나라와의 3국 동맹까지는 여유를 부리며 웃음을 지었으나, 이후 연나라의 출진과 한나라,제나라의 출진까지 보고받자 작중 최초로 평정심을 잃고 안색이 변해서는 식은 땀을 뻘뻘 흘리는 굴욕적인 모습을 보였다.[18] 그런데 다음화에서는 다시 정상화가 되었다. 그러다 후에 정과 이신, 최의 주민들, 양단화 등의 분투로 합종군의 별동대를 완전히 퇴각시킨 뒤 해당 보고를 듣고는 다소 떫은 표정을 짓는다. 합종군이 함곡관을 우회하여 수도 함양으로 진격해 들어오자 진왕 정의 목으로 자신의 안전과 권력을 유지하려고 했던 여불위입장으로써는 낭패라고 할 수 있다.
이후 대왕파의 영향력이 늘어나 처음으로 그의 세력과 호각을 보였으나...자신의 창고를 조금 열고 베푸는 것으로 엄청난 수의 권력자들을 다시 자기 편으로 만들었다. 이 창고를 조금 열었다는 것이 그야말로 엄청나서, 여불위의 거주지는 말 그대로 주지육림. 나라가 빈궁한데도 이 곳만 지나치게 초호화여서 심복인 이사가 처음에는 국고의 재산을 쓴 것으로 착각할 정도였다.
불위는 이어서 이사에게 지금 당장 정을 상대로 찬탈해봤자 백성들을 납득시키진 못할 거라면서 1년 반 후에 있을 정의 성인식에서 '모든 걸 당당하게 엎을' 것을 선언한다. 그리고는 371화에서 모략으로 성교가 반란을 일으킨 것처럼 꾸며 진 조정을 혼돈에 빠뜨린다.
후에 포학의 발언을 통해 밝혀진 바로는, 원래 계획은 성교가 반란을 일으킨 것처럼 하여 정이 최 공방전에서 쌓아올린 이미지를 흐리게 만들고 진의 왕족에 대한 백성들의 불신감을 키워 여불위의 찬탈을 용이하게 만드는 것. 그것을 위해 용우가 진압군을 격파한 뒤 대장의 목을 가지고 조나라로 투항하고, 그 후 포학은 다른 진압군이 오기 전에 포학이 성교의 목을 쳐서 진 조정에 바치고 전공자 행세를 하려고 했다. 결국 계획이 틀어지긴 했지만 성교의 목숨을 뺏는 데는 결과적으로 성공했다.
반란이 종결된 뒤 신이 "넌 대왕이 될 수 없다.", "너에겐 정의가 없다"라고 하는 말에 코웃음친 뒤 "정의는 승자가 정한다"고 받아치고는 지나친다. 그리고 나레이션으로 여불위와 정의 결전이 1년 남짓밖에 안 남았다고 나온다.
조희(태후)가 '애국'[19]을 세우는 소동을 벌인 뒤 태후에게 찾아와 한바탕 원망을 잠자코 들은 뒤 자신은 여전히 조희를 사랑한다는 말을 남기고 돌아간다. 돌아가면서 말미에 "나중에 나를 더 원망할 일이 생길지라도..."라고 한 부분이라던가, 정의 가관의식을 앞두고 "23년 전에 준 것을 되돌려받을 때가 왔다"고 말하는 것으로 보아, 조희의 이번 '건국 사건'을 정치적으로 이용해 먹으려는 것으로 짐작된다. 하지만 실제 역사의 일을 생각해보면 이 사건이 그의 몰락의 단초를 제공했으니 애국 소동은 여씨 진영에 치명적인 결과로 끝날 가능성이 높다.
413화에서 그의 계략이 드러난다. 정의 성인식에 맞춰 함양으로 진격중인 노애의 군대가 함양을 급습하면 몽무의 군대를 동원해 토벌케 하되, 그 속에 자신의 심복을 숨겨두어 함께 행동시키다가 정을 비롯한 진의 왕족들을 몰살시키고는 이를 애국의 소행으로 덮어씌운 뒤, 왕위를 물려받을 사람이 없어진 진나라에서 자신이 왕위에 오른다는 계획. 정황으로 볼 때, 노애와 조희의 사생아에 대한 얘기를 초나라에 흘려보낸 것도 여불위일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조희가 여불위의 예상을 뛰어넘어 잡병까지 긁어모은 3만의 대군을 보낸데다, 정도 여불위의 흉계를 미리 알고 있어서 가관의식을 예정대로 진행케 한다. 여불위가 무슨 깡으로 그리 태연하게 구는지 묻자, 정은 이신 등의 군세가 오고 있음을 넌지시 알린다... 그러나 이미 여불위도 준비를 해놓아서 성문이 열리고 애국군이 성내에 진입했지만... 창평군이 배치한 친위대에게 애국군들이 썰려나간다. 알고보니 창평군은 여불위의 모략이 시작 전에 이미 여불위를 버렸던 것. 허나 창평군의 배신을 예상한 듯 여불위는 별로 괘념치 않는 모습을 보였다.[20] 이후 그는 '여씨사주는 자신의 장식품에 불과하다, 그들이 없다고 해서 자신의 강함에 조금도 흠집이 나지 않는다'는 여유로운 태도를 취하며 정과의 독대를 해서 여불위가 왜 정의 천하통일을 헛된 소리로 여기는지 서로가 생각하는 천하론을 두고 설전을 벌이게 된다. 허나 도중 정의 의지에 따라 이사, 채택, 조희가 참객하게 되어 독대는 아니게 되는데 이는 정이 여불위를 타파한 후 그의 우수한 인재들을 자기 것으로 만들기 위한 것이었다.
여불위는 이 또한 괘념치 않고 자신의 천하론을 펴는데, 이 세상은 사람의 추악한 탐욕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를 가장 잘 반영하고 탄생한 존재가 바로 돈. 그리고 돈, 즉 통화정책이 그리고 그 돈이 담고 있는 욕망이 중화의 역사를 만들어 냈다는 것이다. 여불위는 진의 왕이 되면 진을 10년내에 천하 최고의 부국(富國)으로 만들어[21] 타국이 진을 시기하고 부러워하도록 만들고, 이 부의 분배를 미끼로 타국이 끝내는 자신들과 손을 잡을 수 밖에 없는 상황을 만들겠다는 것. 그러면 천하의 모든 것이 진을 거쳐가게 되므로 결국 세계 경제의 중심은 진이 될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면 전쟁같은 짓은 할 필요가 없으며 영정의 천하통일을 부정하고 대상인인 자신이라면 그것이 가능하다며 자신의 포부를 밝힌다. 이를 들은 영정은 전쟁을 상정하지 않은 통치는 있을 수 없으며 추악한 탐욕은 인간의 본성 그 자체가 아니라 일부일 뿐이고 인간이 가진 빛을 강조하며 여불위를 부정한다.[22]
이를 들은 여불위는 정이 여기까지 성장했다며 슬그머니 감격의 감정을 내보이는 한편 양자간의 타협점이 없고 그렇기에 논쟁도 의미가 없음이 확실해졌으며, 그렇기에 누가 승자가 될지 결말은 이 함양성의 결전을 통해 나올 것이라는 말로 이 대담을 끝맺는다. 그 이후 함양성 결전에서 애국군이 패배했다는 소식을 듣고 조용히 패배를 인정한다. 그 뒤 연금 상태로 재등장하며 슬그머니 정이 자신의 아들일지도 모른다고 말한 뒤 뒤이어 그렇게 생각했는데 알고보니 날짜가 안 맞는다(즉 거짓말)며 허허 웃는다.
5.2 삼국지 시리즈
삼국지 12,13 |
삼국지 12에서 고대무장으로 등장. 능력치는 72/42/88/89 전법은 진시황과 같은 전공격강화
삼국지 13에서는 통솔만 조금 높은 문관A 정도로 생각하면 된다. 능력치는 전작과 같고. 전법은 정보교란 특기는 상업9 / 농업5 / 문화8 / 교섭8 / 언변8 로. 내정 혹은 사신용으로 자주 활용하게 된다.
5.3 만화 《달인전 ~9만리를 바람에 타고~》
진의 재상이 되기전 젊은 시절의 상인모습으로 등장한다. 조선시대 선비를 연상하게 하는 특이한 복장에 망건을 착용하고 조선식 흑립을쓰고 있다. 주인공 일행과 조우하여 짧지만 강한 인상을 보여주며 위기에 처한 주인공 일행을 구명 해주고 헤어지며 그를 목격한 점술가 그를 보고 차갑고 푸른뱀이 늑대항문으로 파고들어 뱃속에 들어가 입으로 뚫고 나오며 용을 태어나게 하는 환상을 보게 된다.- ↑ 기원전 292 ~ 기원전 235년까지 살았다고도 하지만 확실하지 않다.
- ↑ 참고로 이름은 영주고, 안국군은 칭호다.
- ↑ 사실, 당시 초강대국인 진나라가 조나라에 인질을 보낸 것도 그저 조나라를 안심시켰다가 공격하기 위함이었다. 간단히 말해서 이인이 죽던 말던 소양왕이나 안국군은 별 신경을 쓰지 않았다는 것이다…
- ↑ 사기 여불위 열전에서는 5백금이라고 한다. 구체적인 단위는 나오지 않고 五百金으로 표기.
- ↑ 다만 조희가 실제로 무희였고, 여불위의 첩이었을 것이라는 내용은 의심스러운 구석이 많다. 이미 여불위열전에 이를 부정할 만한 서술이 있기도 하고. 진시황 항목 참고.
- ↑ 여불위의 사람 보는 비범한 능력을 알 수 있는 부분으로, 보통 사람이 사람을 판단할 때에는 그 사람 개인의 자질만을 보고 판단하지만, 여불위는 그 사람의 자질 뿐만 아니라 그 사람이 처한 환경이 어떤 이득을 창출해낼지 간파하여 이인을 지목한 것이었다. 즉, 이인이 아닌 다른 안국군의 다른 아들을 골라서 만들어도 상관이 없었던 것인데 저런 볼모로 잡힌 상황까지 이용해서 이인을 왕으로 만든 뒤 벌어질 자신의 입지까지 도모한 것이다. 당시 어느 정도 진에 기반이 있었을 다른 왕자들과는 달리 이인은 믿을 사람이 여불위밖에 없었으므로 그가 하는 말이라면 팥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믿었을 것이다.
- ↑ 한나라때의 1근은 233g인데, 전국시대에도 같았다면 황금 오백근은 오늘날의 kg단위로 환산하면 황금 139.8kg에 달한다. 참고로 1근이 6백그램이 된 떄는 송나라때다.
- ↑ 현재는 1근에 500그램이다.
- ↑ 나중에 장양왕의 아들인 진시황은 장양왕을 태상황제로 추증했는데, 그의 휘인 자초가 초나라의 초와 같다는 이유로 피휘하기 위해서 초나라를 뜻이 같은 한자로 형(荊)나라로 바꿔 부르게 했다. 그래서 사기에는 초나라가 형나라로 기록되어 있기도 하고 초나라의 별칭으로 형나라로 부르기도 한다.
- ↑ 오죽했으면 장평대전에서 조괄이 큰 실수를 저질러 백기한테 크게 당하고 수많은 병사가 생매장 당했을 때도 조왕은 그를 화풀이로 삼아 죽일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여 죽이지 않았다.
- ↑ 이렇게 환관으로 위장한채 궁에 들어오는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에 중국에서는 험보라는 제도를 만들었다. 이후로 환관이 승진을 하려면 자신이 고자가 되기 전에 달고 있었던 양물을 방부처리해서 보관하다가 상관에게 보여줘야 했다.
- ↑ 고우영 십팔사략에서 표현하기를 환관으로 변장시키기 위해 노애를 함정에 걸리게 하여 궁형을 받게 만드는 데 당연히 하는 척만 하고 대신 동물의 것을 잘라 매달아 알려놨다. 당나귀의 것으로(...)
- ↑ 그러나 후에 신하들이 뜯어말린 덕분에 어머니에게 더이상 해를 가하지는 않았고, 다시 함양의 궁으로 돌아오도록 하는 것으로 끝을 맺었다.
- ↑ 이는 그가 전국사군자를 따라하면서 많은 식객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식객들과 자신의 부를 통해 만든 것이 바로 여씨춘추라는 책으로 여불위가 이 책을 만든 뒤 이 책에서 한 글자라도 더하거나 빼는 자에게는 만금을 주겠다고 한 것으로 유명하다.
- ↑ 대표적으로 춘신군의 몰락. 춘신군은 이원의 여동생을 임신시킨 후 그녀를 초나라 고열왕에게 바쳤다. 후사가 없던 고열왕은 이원의 여동생을 왕후로 세웠는데, 그녀가 쌍둥이 형제를 낳자 매우 기뻐했다. 이 형제는 초나라 고열왕이 죽자 유왕과 애왕으로 각각 즉위했는데, 유왕은 요절했고 그의 동생 애왕은 그의 이복형인 부추(초나라 마지막 왕)에게 피살되었다. 근데 갑자기 이복형이 등장하는 걸 보면 고열왕에게 다른 친자식이 있었던 듯하다.
- ↑ 겐다 텟쇼는 게임판에서 창문군 역을 맡았다.
- ↑ 작중에는 상국이라 적혀있지만 원래 관직명은 상방이 맞다
- ↑ 과거 조희가 자신의 처소까지 찾아오자 한 번 식은 땀을 흘리며 놀라기는 했지만 다음에 바로 여유를 부리며 만리장성을 쌓았으나...이번에는 완전히 당황해서는 이 상황에 대한 분노까지 표출했다.
- ↑ 노애의 '애'에서 따온 국명.
- ↑ 이때 창평군을 보고 '애당초 자네는 누군가의 밑에 있을만한 자가 아니었지"라고 말하는데, 문제는 창평군이 여불위를 배신한 후 진왕에게 충성맹세는 커녕 진왕파측에 섰음조차 확실히 하지 않는다. 하료초조차 그가 진왕편에 섰다고 묘사하지 않고 단지 여불위와 다른 길을 가기 시작했다고 말한다. 즉 창평군이 여불위를 버리듯 언제든지 진왕도 버릴 수 있다는 소리. 훗날 창평군의 반란을 고려하면 여불위의 이 말 또한 복선이라 볼 수 있겠다.
- ↑ 그런데 실제로 작중 배경인 전국시대 말기에 이르면 진나라의 국력이 나머지 육국의 국력을 합친 것을 뛰어넘게 된다. 정의 증조부인 소양왕 때에 이미 전국의 1/3에 가까운 영토를 차지 하고 있었고 비옥한 관중과 촉을 바탕으로 전국의 재화생산량 2/3을 차지하고 있었다. 나머지 육국을 상대로 양면전쟁이 아니라 삼면전쟁(북쪽의 조, 동쪽의 위, 남쪽의 초)을 치룰 정도로 국력의 차이가 심했다. 전국칠웅중에 나머지 육국이 괜히 합종책으로 연합을 하는게 아니다.
작중의 여불위는 국제정세에 어두운 듯상인이라며? - ↑ 후일 중국 통일왕조들이 중화(中華)라고 지칭할 수 있을 정도로 동아시아 사회에서 최고 입지에서 오를 수 있던 이유가 중국이 가진 문화와 부때문이었다. 주변 국가들이 통일왕조의 엄청난 문화와 부를 보고 싸우기 보단 교역하는게 더 이득이다라는 생각이 들어 결국 중국왕조들의 권위를 인정해준 것. 어찌보면 여불위는 훗날의 중화사상(정확히는 중국이 정말 넘사벽으로 부유해지는 송나라 시기의 중화)을 주장한 셈이 된다. 허나 영정의 말대로 전쟁을 무시하고 오로지 경제력만으로 천하를 유지하는 것은 한계가 있다. 훗날의 송나라가 그 대표적인 사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