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상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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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선생 노릇을 하다가 지원병이 된 것을 무슨 출세를 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물은 얕은데로 흐르며 자식은 부모에게 효도하는 것과 같이 일본 남자인 우리들이 폐하(일본 왕)의 군인이 되는 것은 당연히 해야 할 일입니다..(중략)..참으로 황국신민이 될 생각이 있거든 그리고 내선일체를 실행하려고 생각하거든 이 훈련소로 오시오.”[1]

친일파. 그냥 먹고 살자고 친일한 수준이 아니다. 일본군에 지원하여 그 악명높은 일본 헌병으로서 독립운동가들을 고문한 악랄한 케이스.
전라북도 익산 출신으로, 일제강점기 당시 대구사범을 졸업했다.

졸업 후 1938년 전라남도 화순군 청풍소학교에서 훈도로 근무하다가, 1940년 교사를 그만두고 군에 입대했다. '조선특별지원병'으로 일본군에 지원했다. 교사라는 안정적인 직업을 버리고, 일본군장교도 아닌 하사관으로 지원한 셈이라 적지 않은 화제를 모았다.
일본제국은 교사에 대한 대우가 극진했다. 1930년대 중반 기준으로, 교사의 초봉은 조선총독에게 사령장을 받는 판임관(判任官)과 같았다.[2] 더구나 조선인에게 병역의무는 없었으나, 사범학교 졸업생은 일정기간 근무를 마치면 예비역 하사관으로 자동편입되었다. 그런 마당에 굳이 교사를 때려치고, 최말단 하사관을 지원한 것은 납득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극도의 군국주의 국가였던 일본제국이니 만큼, 장교를 지원했다면 또 모를까...

정확한 이유야 신상묵 본인만이 알겠지만, 신상묵 본인은 문서 상단에 나온 것처럼 "무슨 출세를 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 일본 남자인 우리들이 폐하의 군인이 되는 것은 당연히 해야 할 일입니다."라고 말했다. 신상묵은 매일신보가 주최한 좌담회에 참석해 이렇게 지원 각오를 피력했고, <삼천리>에는 "나의 이 감격을 한 가지로 나누지 않으시렵니까. 이렇게 좋은 기회를 잃어버리지 않기를 바랍니다."라며 지원병제를 선전하는 기고문을 싣기도 했다.

일본 헌병으로서 진해일본 해군 군용기 공장에서 근무하며, 오장(伍長, 일본군 하사)을 거쳐 조장(曹長, 일본군 상사)에 올랐다. 조선인 출신 일본 헌병으로, 오장에서 조장까지 승진한 자는 신상묵이 유일하다. 이 때 항일운동을 탄압하고, 항일 혐의로 체포된 피의자를 직접 고문한 혐의가 있다. 피해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신상묵은 창씨개명한 일본 이름 시게미쓰 구니오(重光國雄)를 사용했으며, 조직의 배후를 대라며 수십일 동안 혹독한 고문을 가했다고 한다.

일본제국이 패망하고 해방이 되자, 신상묵은 1946년에 국립경찰 양성 1기로 미군정 경찰에 지원했다.[3]경상북도 도경 보안과장에 올랐으며, 한국전쟁 개전 이후로는 서남지구전투사령관으로 조선인민유격대와 전투를 벌였다. 이후 1954년부터 1956년까지 제주도 경찰국장을 역임했다. 지리산한라산에는 신상묵의 기념비가 남아있다. 서남흥업이라는 기업체 고문으로 재직 중이던 1964년에는, 지리산 도벌사건[4]의 배후로 지목되어 구속되었으나, 이듬해에 대법원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다. 이 사건은 국유림 내 벌채허가를 받은 기업들이 불법으로 나무를 베어낸 사건으로, 현직 공무원도 연루되어 사회적인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본디 신상묵의 이력은 대한민국 건국 초기에 경찰을 지냈다는 정도로 알려졌다. 그러나 2004년,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 개정을 둘러싸고 진상 규명에 적극적인 입장의 열린우리당과 반대하는 입장[5]한나라당이 대치하던 중, 한나라당과 보수언론에 의해 당시 열린우리당 의장이었던 신기남의 아버지 신상묵의 이력이 드러났다. 처음 폭로가 나왔을 때, 신기남은 신상묵이 일제 강점기에 교사로만 재직했다고 주장발뺌했다. 거짓 해명 논란이 인 끝에 신기남은 열린우리당 의장직을 사퇴했다. 신기남 뿐 아니라 이미경 열린우리당 의원의 아버지도 일제강점기 일본 헌병 오장으로 복무한 사실이 폭로되는 등, 기세좋게 한나라당을 몰아붙이던 당시 열린우리당은 자충수를 둔 셈이었다. 덕분에 법안 발의도 흐지부지...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는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중 군 부문에 신상묵을 포함시켰으며, 2009년 11월 최종적으로 친일인명사전에 수록시켰다.
  1. 잡지 삼천리에 ‘지원병 일기’를 기고하며 일본군에 참여하라고 선동하는 글 중 일부삼천리 잡지에 소개
  2. 보통 전문학교를 나와 총독부 기수가 되거나 일반문관시험에 합격한 정식 관료가 판임관이거나 판임관 대우였으니 지금식으로 하면 7급 공무원정도로 초임 교사를 대우해줬다고 보면 된다.
  3. 일제강점기 민중을 가장 가까이에서 악랄하게 착취하던 것은 말단 경찰들과 헌병이었다. 이들은 해방 후 적지 않게 다시 경찰에 투신했고, 일본군 경력자라도 별다른 전투경험도 없이 끽해야 위관급으로 채워진 국군과 달리 친일파 소굴로 손가락질 받았다. 실제로 한국전쟁 직전까지 경찰과 국군은 서로 앙숙이었으며, 상호간 총격전(!!!)도 빈번했다.
  4. 벌이 아니라 벌이다. 盜伐. 국유림의 나무를 몰래 베어내 멋대로 사용하는 것을 말한다.
  5. 당시 한나라당이 마냥 반대한 건 아니다. 친일반민족행위자 재산의 환수에 관한 특별법안이 통과될 때는 찬성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