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육군의 참모총장 | ||||
2대 채병덕 | → | 3대 신태영 | → | 4대 채병덕 |
역대 대한민국 국방부 장관 | ||||||
3대 이기붕 | → | 4대 신태영 | → | 5대 손원일 |
일본육군사관학교 26기로 졸업했다. 동기생으로 이응준, 홍사익, 김경천, 지청천 등이 있다. 김석원은 27기로 그의 후배. 일본군에서의 최종 계급은 중좌였다. 대좌였던 이응준, 김석원보다는 한 계급 아래, 소좌였던 이종찬보다는 한 계급 위.
8.15 광복 이후 그의 다른 동기생들은 대부분 조선경비대에 참여했으나, 그는 일제에 부역한 것에 대한 자숙 및 근신의 의미로 참여하지 않았다가 여순사건이후에야 입대했다. 1949년 10월인용 오류: <ref>
태그가 잘못되었습니다;
이름은 숫자가 될 수 없습니다. 설명적인 이름을 사용하세요에 육군참모총장자리에까지 올랐으나, 대한민국 국방부의 높으신 분들과의 의견 충돌로 7개월만에 그만뒀다. 6.25 전쟁에서는 전라북도 방어를 맡았으나 국방장관 신성모와의 마찰로 얼마되지않아 해임되었다가 1952년에야 복직되었다.
예편 후에는 이기붕의 후임으로 제 4대 국방장관이 되어 휴전 협정 직전까지 재임했다.
일본군 복역 기록으로 친일인명사전에 아들과 함께 수록되어있다. 그나마 자숙했다는 점에서 봐줄만 하지만 일단 복역했다는 것이 중하다고 봐야할 수 밖에 없다.
그의 아들 신응균 역시 일본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일본군으로 복역했으며, 종전 당시 계급은 소좌였다. 광복 후 일본군 복무 경력을 치욕으로 여겨 이등병으로 입대했다가 한국전쟁 당시 포병사령관으로 특별임관되었다. 예편 후에 국방과학연구소의 초대 소장을 맡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