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원일


대한민국의 성우에 대해서는 손원일(성우) 문서를 참조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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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이 몸을 삼가 바치나이다.”
해방병단 단장조선해안경비대 총사령관대한민국 해군참모총장
초대 손원일초대 손원일초대 손원일2대 박옥규
역대 대한민국 국방부 장관
4대 신태영5대 손원일6대 김용우


1 소개

孫元一
대한민국독립운동가, 초대 해군참모총장. 최종 계급은 중장. 1909년 5월 5일(음력) ~ 1980년 2월 15일.

대한민국 해군대한민국 해병대의 아버지



2 상선사관 시절

중국에서 중학교를 마치고[1], 열강들의 조계가 여럿 설치되어 있던 상하이에서 이들 조계를 보호하고 친선 방문 등의 목적으로 들어와 있던 각국 해군들을 보고 감명받아, 중화민국 해군에 입대하려 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당시 중화민국 해군은 특정 지역 파벌이 장악하고 있어 타지인은 성공하기 힘들다는 말을 듣고 꿈을 접은 뒤, 대신 상선사관이 되기로 결심한다.

항해사로 임관 후 중국 및 독일에서 상선 항해사로 근무했는데, 이 때 동양인으로는 드물게 독일의 2만톤급 대형 원양 여객선 람세스 호에서 근무하는 등으로 해운 업계에서 명성을 쌓았다. 유럽쪽 여객선은 지금도 한국인이 들어가기 힘들다 근데 2만톤이면 별로 안큰데? 20세기 초반임을 감안하면 상당히 큰 배 맞다. 호화여객선으로 건조된 히요, 준요가 배수량 2만 4천톤급에 전장은 200m를 넘었다. 이 둘은 미군에서도 경항모가 아니라 정규항모급(함대형항모지만)으로 분류되었을 정도로 큰 배이다.

공식적인 언급은 없으나, 이 때의 이력이 해군 창설기에 사람들을 모으는 데 큰 도움을 줬을 것이라 추정된다.

3 독립운동

손원일의 부친 손정도 목사는 당시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참여해 독립운동을 하였는데, 일제가 어떤 사건으로 독립 운동가를 잡아들이면서 고문하던 도중에 손원일의 이름이 나왔고, 그가 손정도 목사의 아들인 것을 안 일제가 당시 휴가를 내 잠시 국내에 들어와 있던 손원일을 체포 및 고문했다. 이 부분은 홍은혜 여사의 회고록에도 나온다. 그렇다고 손원일이 독립운동에 관심이 없었던 것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손원일은 1930년 상하이의 독립운동 단체의 비밀연락원의 임무로 입국하였다는 혐의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투옥된 경력이 있다.[#]

여담으로 손정도 목사는 놀랍게도 김일성이 어렸을 때 다니던 교회의 담임목사였다.[2] 이 인연으로 손정도 목사와 김일성은 어느 정도 친분이 있었다고 한다. 훗날 손원일 제독이 혹부리우스에게 통렬한 한 방을 먹였단 사실을 생각해 보면...

4 대한민국 해군의 아버지

[눈물없이 볼 수 없는 손원일 제독의 활약상.]
참조 항목 : 대한민국 해군 역사 문단

광복 이후 귀국해 대한민국 해군의 모체가 되는'해방병단(海防兵團)'을 창설했다. 해방 후 난립했던 여러 육군이 되려고 난립한 군사조직이 자기들끼리 등수놀이처럼 서로서로 먼저 생겨났다고 기싸움이나 하고 있을 때, 손원일 제독은 미군정이 사실상 한반도 남부를 장악한 사실을 담담하게 받아들이고 미군정을 직접 찾아가 승인을 얻어서 정식 군대로 인정받게 된다. 국군준비대를 비롯한 다양한 단체들이 1945년~1948년 사이에 그야말로 공중분해당했던 것에 비하면 정세를 읽는 눈이 정확했다고 볼 수 있다. 대한민국 해군이 해방병단의 전통을 이어받아 독자적으로 생긴 조직임에 비하면, 애석하게도 대한민국 육군은 사실상 미군정의 국방경비대에 의해 '이식'된 군대라 할 수 있다.

또 손원일 제독은 보유한 선박이라곤 구 일본군이 쓰다가 버린 소형 목선 몇 척이 전부였을 뿐 그야말로 아무 것도 없었던 대한민국 해군을 키워내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하였다. 이 부분이 굉장히 의의가 큰 것이,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이후 국군 창건되었을 때 육군, 공군은 주요인사들 대다수가 과거 일본군/만주군 출신 라인 인맥이 대부분 형성되어 훗날 부정적인 이미지가 많이 남아 오점으로 남게 되었으나, 해군의 경우는 손원일 제독이 독자적으로 자주적으로 지켜 대한민국 정부 수립이후 창건 역할에서도 '자주적'으로 실현시켰다는 점이라는 것이다.[3] 그리고 1948년 12월 10일에 한국군 최초로 준장으로 진급했다. 그때 진급한 또 다른 인물은 송호성, 채병덕, 이응준 등이었다.

해방 이후 조선해안경비대 총사령관을 역임하다가 초대 해군참모총장을 지내며 해군을 건설하고 대한민국 해병대를 창설했다. 백두산함을 미국에서 고생고생하여 겨우 사왔던 바로 그 위인이다. 인천상륙작전 당시 국군 최고 사령관으로 "국군과 유엔군은 수도 서울을 탈환했다."라는 포고문을 남긴 것으로도 유명하다. 대한민국 최초의 해군 제독으로 미국으로부터 신현준 장군(초대 해병대사령관)[4]과 함께 은성 무공훈장을 받은 바 있다.

5 한국전쟁때의 활약상

5.1 개전 당시

개전 당시에는 해군 함정 인수를 위해 미국에 가 있었다. 개전 소식이 들리자 귀국을 서둘렀으나, 이승만 대통령이 인수중인 함정을 이끌고 오도록 지시해 전쟁이 어느 정도 진행된 뒤에야 한국에 돌아올 수 있었다.


5.2 인천상륙작전

우리는 지금 인천 앞바다에 와 있습니다. 우리는 드디어 오늘 상륙작전을 감행하게 되었습니다. 이 작전이야말로 불법 남침한 북괴군을 분쇄하고 위기에 처한 조국과 민족을 위하여 정의와 자유를 회복하는 계기가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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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상륙작전을 앞두고 USS Pikaway (APA-222)함 함교에서 상륙개시를 기다리는 해병대 장병들에게 한 훈시.

인천 상륙작전 성공을 위해 영흥도와 덕적도의 탈환을 이희정 중령 및 함명수 소령[5]에게 지시, 이를 성공시켜 인천 상륙작전의 밑거름이 되게 했다.[6] 상륙작전 당시에는 함대 지휘권은 없었지만, 직접 소총을 들고 한국 해병대의 상륙작전을 지휘했다. 원래 손 제독은 미군 지휘부와 함께 기함 함교에서 작전을 참관하도록 되어 있었지만 어느 순간 사라진 손 제독이 직접 돌격하고 있다는 보고에 미군 장성들이 기겁했다고 한다. 애시당초 한국 해병대가 인천 상륙작전에 참가할 수 있었던 것도 손 제독의 공이 컸다고. 이런 사령관이 직접 돌격한 사례는 같은 한국전쟁 당시의 백선엽 장군의 예 정도가 고작.그런데 그런거 하다가 전사해버리면...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7]


5.3 흑역사

흑역사라고 해도 본인은 아니고 부인인 홍은혜의 흑역사이지만, 이게 개인적 문제가 아니라 부부라면 모르기 어려운 수준이라 여기에 적힌다.

피난 시절[8]에 외교관이나 주한 미군 고관들을 접대할 목적으로 여배우나 엘리트 여성들을 알선해서 붙여주는 일(..)에 홍은혜가 힘쓴 일도 있었다. 모윤숙이 조직한 낙랑클럽이 대표적인 모임이다. 모윤숙도 자신의 회고록에서 화신백화점 사장 박흥식의 부인 허숙자와 함께 홍은혜를 꽤 칭찬한다. 후대에는 두고 두고 욕먹을 일이지만 막상 당사자들은 자랑스러워 하고 있으니 판단은 알아서들 하자.[9] 근데 자랑스러워 한다는 것 자체가 좀..... 단적으로 미국 CIC는 자체 조사를 벌인 결과 이걸 로비를 위한 고급 호스티스 단체로 규정해버리기도 했다. 저것과는 별개로 손 제독 본인은 청렴결백했고, 일본군이 아닌 독립운동가 출신이었다. [10]

6 전쟁 이후

1952년에 중장 계급으로 예편했으나 이듬해 국방부장관이 되어 1956년까지 역임했다. 이후 주서독 대사를 지냈다. 대장으로 진급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지만 전투함이 한 척도 없는 해군에서 대장이 나온다면 그건 비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한국 해군에 전투함이 갖춰지거든 그 이후에 대장 계급을 받겠다고 본인이 고사했다. 대한민국 해군에 최초의 대장 계급이 등장한 해는 1966년이다. 해병대사령관이 해군참모총장보다 먼저 대장을 받은 하극상을 포함시키면 더 빨라질지도?

대한민국 해군에서 이순신, 장보고와 함께 추앙받는 3대 제독 중 하나. 화려한 전과는 없지만 겨우 일본 해군에서 목선 몇 척 인계받은 아무 것도 없는 한국 해군을 일으켜 세웠고 장성으로서의 모범을 보인 인물이라 할 수 있다.

1980년, 신장병으로 투병중에 끝내 사망하였는데, 이때 아내와 자녀들에게 다음과 같은 유언을 남겼다.

사랑하는 내 조국을 위해 나에게 일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신 하나님께 먼저 감사한다. 그들은 모두 바르고 굳건한 신념으로 해군을 만들어 보려고 힘썼고, 오늘날의 해군으로 발전하는데 밑거름이 됐다고 확신한다. 내 나라를 도로 찾으려고 귀한 생명을 바친 우리 조상들의 사무친 한과 나라를 지키려고 싸우다 산화한 장병들의 넋과 한을 잊지 말아야 한다. 나라없는 서러움보다 더한 것은 없다는 것을 명심하고, 다시는 내 조국을 남에게 빼앗기지 않도록 잘 지켜주기를 간절히 바란다.

7 손원일급 잠수함

한국 해군이 장보고급 잠수함의 후계함으로 도입한 214급 잠수함이 그의 이름을 따서 손원일급으로 명명되었다. 경상남도 창원시에 위치한 해군 진해기지사령부 영내에 손원일 제독의 동상이 있다. 진해 군항제 기간에 이루어지는 부대 개방시 일반인도 직접 볼 수 있다.


7.1 가족 관계

부친은 독립운동가였던 손정도 목사. 중국 상하이에 있는 국립중앙대학 항해과를 졸업하고 중국 해군의 국비유학생으로 독일에서 3년간 수학하였다.

한 가지 아이러니한 점은, 김일성이 손정도 목사와 깊은 관계가 있었다는 점. 손 목사가 중국 길림 지역에서 목회 활동을 할때 김일성은 그의 교회에 다녔고 손 목사으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았다. 또한 손 목사의 차남인 손원태 박사와는 의형제처럼 지냈고, 이러한 인연 때문인지 1994년 8월에 김일성이 사망하자 조문 차 방북한 손원태 박사의 생일잔치를 김정일이 평양에서 마련해주기도 하였다. 손원일 제독이 대한민국 해군의 참모총장으로 6.25 전쟁 당시 김일성과 대립할 수밖에 없었던 상황을 생각하면 아이러니.[11]

부인인 홍은혜는 독실한 개신교 신자로서 개신교 관련 증언이나 서적에 자주 나온다. 회고록도 절반 정도는 개신교 관련 이야기다. 2015년 현재 100살을 맞이하여 여전히 살아있다. 최초의 한국 해군 군가인 바다로 가자를 작곡하였다.

누나 손진실은 윤치호의 이복동생이자 윤치영의 사촌동생인 윤치창과 결혼했다.

전 국회의원 홍정욱은 손 제독의 손녀사위가 된다.


8 대중 매체에서의 등장

제3공화국(드라마)에서 배우 민욱씨가 손원일 역을 맡았다.

커맨드 앤 컨커 레드얼럿 2 소련군 4번째 미션 동영상에 한국군 사령관이 등장하는데 손원일 제독을 모티브로 한 듯 하다. 하필 소련군 미션에 등장하시다니 명백한 고인드립 물론 고증따윈 씹어버리는 전통(?)을 자랑하는 시리즈답게 입고 있는 동정복 상태가 심히 엉망(미 육군 방공병과 장교 병과장을 달고 있는 등)이며, 계급도 이등해좌중령밖에 안 된다(...). 해상자위대 간부처럼 생겼다는 의견도 있다[12]


위에서 두 번째 사진은 개그맨 이홍렬을 닮았다는 의견이 있다
  1. 이 때, 훗날 북한독재자가 되는 혹부리와 친분을 쌓은 적도 있다. 1920년대 초반 부친인 손정도 목사는 길림 지역에서 선교사로 활동중이었다. 이때 숭실학교 2년 선배이자 독립운동가인 김형직의 아들이 길림으로 유학온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그가 바로 김성주였다. 이때 손정도 목사는 김성주를 물심양면으로 지원하여 육문중학교에 입학시켰고, 손병도 목사의 자녀들과 형제자매처럼 지냈다고 한다. 손원일 제독의 동생 손원태씨가 김일성과 육문중학교에서 함께 수학했다고 한다.
  2. 믿기지 않겠지만 김일성의 집안은 대대로 개신교 집안이었다!
  3. 그렇다고 손 제독이 무슨 일본군 출신을 배제하려고 했던건 아니다. 그저 일본해군이 육군에 비해 폐쇄성이 매우 강해(해군의 특성에 기인한 것으로 미 해군도 유색인종을 가장 늦게 받아들였다) 식민지 출신에 대한 불신이 커서 조선인은 끝까지 항해장교로는 받아주지 않고 전부 육지근무만 시켰기에 일본해군 출신 항해사관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해병대 창설에 적극적으로 나서 육상에서 근무했던 구 일본해군 출신자들을 받아들인데서 알 수 있듯이 일본군 출신들이란 이유로 꺼리거나 하진 않았다.
  4. 만주국 간도특설대 출신으로 친일인명사전에도 수록되었다. 중장으로 예편하였다.
  5. 북한 간첩에 의해 미군 배가 북한으로 건너갈 당시 특공대를 조직해 옹진만을 급습한 장교. 이후 국회의원이 됨.
  6. 다만 아쉽게도 당시 작전에 직접 참가한 해군 육전대는 북한군과의 총격전 끝에 모두 전사했다.
  7. 실제로 맥아더는 전역 사령관이면서 최전선에 자주 들락거려 욕을 많이 먹었다. 이건 2차세계대전 때 태평양에서의 일이고 한국전쟁때는 매스컴용 사진촬영 외에는 전선시찰따위 개나 줘버렸고 1차세계대전 장교들 마냥 도쿄타워 지휘실에 앉아 지도를 보고 지휘했다.
  8. 이건 모윤숙의 주장인 1951년 창립설을 따를 경우. 미국 CIC 보고서 기준이면 전쟁 발발 이전인 1948년이다.
  9. 홍은혜의 소개로 미국 해군 고위고문단과 동거한 여배우 윤인자의 회고록 《나는 대한의 꽃이었다》가 2011년에 출간되었다.
  10. 한 예로 박정희 정권 당시 해군을 음해할 목적으로 부정축재자 명단에 손 제독을 포함시키자 박정희 본인이 "내가 그분을 잘 아는데, 그분은 절대 그럴 분이 아니다"라고 일축했고 실제로도 털어봐도 아무것도 없었다. 그 이후 박정희는 육사 출신임에도 해군력에 공 들이기 시작, 기어링급 구축함을 후진국이었던 1960년대에 들여오고 70년대 후반 울산급 호위함을 건조하는 등 없는 형편에 신경 썼다. 이후 후임자 전두환은 해군을 대놓고 적대시해서 함장만이 앉을 수 있는 함장석에 지가 앉는다든가 수장을 지가 못 읽는다며 없애려고 한다든가 하는 등의 병크를 저질러 해군 예비역은 전두환을 매우 증오한다. 그리고 실제로 전두환 및 노태우 하나회정권은 해군력 발전에 소홀해서 포항급울산급이라는 염가형 싸구려 배가 주력인 바람에 해안경계에 구멍이 뚫려 강릉 무장공비 침투사건 당시 적 잠수함을 강릉시까지 내려보내고 제대로 당했다. 바로 앞의 동해1함대가 동해항 방호를 위해 엄연히 해안경계를 서는데도 불구하고 뚫려버린것. 이 때의 대잠전에 대한 외면이 결국 천안함 피격사건으로 이어진 것. 이후 허약한 해군이 도마 위에 올랐고 김영삼 전 대통령의 지시로 KDX 프로젝트가 진행, 이제는 세종대왕급충무공 이순신급 등의 대형함을 많이 갖춘 세계적 해군국이 되어 북 해군이 해상침투를 포기하기에 이른다.
  11. 김일성의 회고록에도 손정도 목사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이거 자체가 따지고 보면 역사의 아이러니인 셈.
  12. 그런데 실제로 맡은 배우가 일본계 미국인인 리처드 나리타다. 어쩐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