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육군의 참모총장 | ||
초대 이응준 | → | 2대 채병덕 |
1 소개
李應俊. 1891년-1985년. 한국의 군인. 계급은 일본군으로는 대좌, 대한민국 국군으로는 중장이었다.
2 생애
평안남도 출신으로 1906년 상경하였다. 고향선배이자 일본육군사관학교 출신인 노백린의 영향을 받아 군인이 되기로 하였고 육군무관학교에 1909년 진학하였다. 조선인 일본군으로 일본 유학을 허가받아 1914년에 일본육군사관학교를 26기로 졸업하고 일본군 육군 소위로 임관하였다. 당시 일본군이 될 수 있는 조선인은 왕공족이거나 한일강제병합 당시에 협조했던 대한제국군의 장교들, 그리고 합병 당시에 사관생도였던 일부 인원만이 가능했다. 26기 동기로는 쿠리바야시 타다미치나 홍사익, 지청천, 김경천이 있다.
1919년 3.1 운동이 일어나자 지청천,김경천은 일본군을 벗어나 중국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할 것을 주장하고 홍사익과 이응준을 설득하였으나 홍사익과 이응준은 참여하지 않았다. 그후 적백내전이 일어나자 백군을 지원하여 일본군으로 시베리아에 갔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근무한 뒤에 만주를 거쳐 조선에서 근무했다. 1936년 중령으로 진급했고 이듬해 중일전쟁이 일어나자 중국 전선에 배치되어 주로 병참 업무에 종사했다. 산동성에선 직접 팔로군과 싸웠다. 1941년엔 대령으로 진급했고 학병 홍보 등을 했다.
1945년 8월 15일엔 원산에 있었고 미군정에 들어가 군사고문으로 일했다. 당시 미군정은 한반도에 대한 정보가 거의 없었고 한반도를 일본과 마찬가지로 패전국으로 생각했다. 한국광복군이 받은 처우를 보면 알 수 있다. 일본군 중장이었던 홍사익은 전범으로 필리핀에서 처형당했고 마찬가지로 중장인 영친왕의 경우엔 이승만이 입국을 허가하지 않았다. 이건은 종전 당시 중령이었고 일본에서 돌아오지 않았으며 마찬가지로 중령이었던 이우[1]는 히로시마에서 피폭사했기 때문에 한반도에서 일본군 출신 최고 계급자는 그였다. 김석원도 종전 당시 일본군 대령이긴 한데 육사 27기로 26기인 이응준보다 후배이다. 다른 장성급 조선인 일본군들은 이미 노환 등으로 사망한 후였다. 조선임시군사위원회라고 군경력자들 친목 도모를 하는 모임을 이끌었으며 당시 50대로 군에선 원로급이었다.
미군정에 들어간 후 조선경비대의 챔프니 대령을 도와 뱀부계획을 세웠다. 뱀부계획은 각 도 별로 1개 중대를 배치한 뒤 병력을 모아 도마다 1개 연대 수준을 만들고 합계 25,000명 수준의 육상병력을 만든다는 것이었다. 1945년말에 미군정이 군사영어학교를 세우고 60명의 1기를 선발할 때 만주군 출신 20명은 원용덕이 중국군 출신 20명은 조개옥이 추천하기로 했고 일본군 출신 20명은 그가 추천하기로 했는데 중국군, 즉 광복군 출신들이 미군정의 정책을 보이콧하는 바람에 대다수는 일본군과 만주군으로 채워졌다. 광복군들은 나중에 1946년 9월에 통위부 장관에 자군 출신인 유동열이 오르자 입대하였다.
이응준은 사위인 이형근이 조선경비대에서 입대하자 따라 들어가 특별임관으로 대령 계급을 받았다. 그후 1948년에 대한민국 육군 초대 육군참모총장[2]을 맡았다. 송호성이 전에 육군사령관을 지내긴 했지만 호적 파인 상태라.. 1952년에 제주도 모슬포 제1훈련소 소장으로 부임하면서 중장으로 진급했고[3] , 3년 후인 1955년에 동계급 예편했는데 나이 60이 넘은 상태였다. 그후 체신부(현 미래창조과학부) 장관과 한국반공연맹 이사장(현 한국자유총연맹 총재) 등을 지내다 1985년 7월 8일에 93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2.1 성폭행
1915년 7월 소위 시절 도쿄 변두리의 아오야마 연병장 근처 숲에서 함께 산책중이던 작가 김명순(1896∼1951년?)을 성폭행했다. 가부장제의 제물 된 김명순, 근대문학사에 부활시켜야 충격을 받은 김명순은 강에 뛰어들어 자살을 시도했다. 김명순은 이 사건이 세간에 알려지면서 여학교의 명예를 더럽혔다는 이유로 졸업생 명부에서 삭제되고 귀국해야 했다. 그럼에도 당시 언론은 오히려 김명순이 이응준을 짝사랑하다가 실연하자 자살을 시도한 것으로 보도했고, 소설가 김동인은 그를 모델로 한 소설 '김연실전'에서 자유분방한 성품이 빚어낸 사건인 것처럼 묘사했다.
3 여담
16세 때부터 93세로 사망할 때까지 약 80여 년간 일기를 거의 빠짐없이 썼다고 한다.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됐다. 일본군 대좌 출신이었던 점이 강하게 작용했다. 장인이었던 이갑이 독립운동하느라 러시아에서 젊은 나이에 죽은 걸 생각하면 꽤 씁쓸한 일. 다만 출세에 부담이 될 수 있음을 알면서도 객사한 독립운동가 딸인 이정희 여사와 혼인을 했고 본인도 젊을 적엔 지청천을 따라 망명하려다가 포기했다.
하지만 이정희 여사와 혼인할 무렵 그가 맡았던 임무는 러시아인·중국인·조선인 공산주의자의 동태를 파악하는 것이었다. 그런 점을 고려한다면 이정희 여사와의 혼인이 출세에 불리했으리라고 보기도 어렵다. 독립운동가의 자녀와 혼인을 했기 때문에 오히려 독립운동가들의 동태를 파악하기 유리해지기 때문이다.
이미 1915년에 소설가 김명순을 데이트 도중 성폭행한 전력이 있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혼인의 의도가 순수했는지는 의문이다.
훗날 일본군 장교로 재임하면서 중일전쟁을 선전하고 조선인의 입대를 권유하며 적극적인 참여를 건동했으며 1943년에는 독립 제7여단에서 편성한 토벌부대의 지휘관을 맡아 산둥성[山東省] 황해안지구의 팔로군 진압작전에 참여한 전력이 있어 결국은 친일반민족행위자로 분류되고 말았다.
이원규의 저서 <마지막 무관생도들>에도 이와 관련된 이야기가 나오는데, 여기서도 이응준은 변절자로 분류했다. 글
창씨개명에 따른 일본식 이름은 가야마 다케토시(香山武俊)였다.
부인은 이정희(李正熙) 여사며, 독립운동가 이갑 선생의 따님이다. 1897년생이고, 1985년 남편 이응준 장군을 사별하고, 2년여를 더 살다가 남편이 별세한 곳과 같은 집에서 1987년 9월 29일 새벽 3시 반에 향년 91세로 별세하였다. 사후 남편의 장군묘역에 합장되었다.
아들 이창선(1921~1996, 대령 전역)은 1955년 육군대학 컨닝사건으로 퇴교 후 전역조치되었다. 당시 육군대학 총장은 이종찬 장군이었는데 이 대령을 전역조치할 때 많은 고심을 하였으나 원칙대로 해결하였다. 그러나 훗날 이것이 마음의 짐이 되었는지 1976년 이창선의 사업이 어렵게 되자 박정희에게 찾아가 도와달라고 요청하여[4] 이창선이 운영하던 사업체 H스텐을 부활할 수 있도록 도왔다.
사위 이형근 또한 육군참모총장과 합동참모의장을 지냈다.- ↑ 사후 대령으로 승진.
- ↑ 후임자는 채병덕
- ↑ 백선엽 장군의 회고록을 보면 백 장군이 중장계급으로 갓 육참총장으로 부임했을 때의 당시 모슬포 훈련소는 여러 여건이 좋지 않아 인격적으로 원숙한 사람이 훈련소장으로 부임해야 적합하다고 생각헀으며, 당시 육군대학 총장으로 있던 이응준 장군을 찾아가 훈련소장으로 부임해달라고 간청하였다. 이 장군은 "국가를 위해서라면 노골이나마 헌신해야겠지"라고 하였고, 백 장군은 이에 대한 화답으로 훈련소장 부임과 함께 중장진급을 상신하여 진급토록 했다고 전해진다.
- ↑ 당시 이종찬은 유정회 소속 국회의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