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방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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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3세기 초반 (204) 위나라낙랑군의 남부를 분할, 독립시킨 군현.
원래 낙랑군 25현 중 하나인 대방현이 어원이며, 진번군이 있었던 자리이다.

고조선이 복속했던 진번의 땅이며 한사군 중 진번군이 설치되었던 곳이다.
그러나 B.C 82년 진번군과 임둔군이 폐지되어 낙랑군에 통합되었고 진번군의 자리는 낙랑군의 남부도위가 되었다.

2세기 후반이 되어 주변 세력들의 압박을 받자 204년 요동의 지배자 공손강이 후한 헌제 건안 연간 (後漢 獻帝 建安年間196~220) 낙랑군 둔유현 (황해도 황주) 이남의 땅을 분할시켜 대방군을 설치하였다.

대방군은 낙랑군 남부도위의 소관이었던 대방현, 열구현, 남신현, 장잠현, 제해현, 함자현, 해명현의 7현을 관할하였고 치소는 대방현에 두었다.

현 황해 봉산군 사리원 동남쪽 문정면에 있는 당토성이 대방치소로 추정된다.

2 역사

2.1 공손씨 시대

후한 말 군벌 세력이었던 공손씨는 자립하면서 한반도 제종족에 대한 영향력을 넓히려고 하였다.

당시 한반도 제종족의 세력이 커지면서 낙랑군의 영역과 군사력이 줄어들고 있는 상황이었고, 점점 낙랑군이 반독립화되어가던 중이었는데 공손강의 대방군 신설은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려던 목적으로 보인다.

즉, 자신의 세력 기반을 넓히기 위해 , 반독립화되어가는 낙랑군을 견제하기 위해[1] 대방군을 설치한 것이다.

하지만 당시 한반도 제종족에 대한 영향력을 넓힐 수 없었다는 점과 낙랑군의 교역 확대를 이루지 못한 것은 지방 정권이던 공손씨의 한계로 보인다.

2.2 위나라 시대

238년 위나라는 공손씨 세력을 멸망시키고 해로를 통해 낙랑군과 대방군을 접수하였다.

그때 위나라는 대방군으로 하여금 동예와(고구려를 견제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한강 유역의 국가들을 공격하게 한다.

물론 이러한 강경책에 이어 삼한의 신지들에게 읍군, 읍장의 지위와 의책을 하사하는 등 유화책도 선보였다.

위나라는 공손씨 세력이 이루지 못한 한반도 제종족에 대한 영향력과 교역의 확대를 이루려고 하였으나 당시 중국의 삼국시대에서 우위를 점거하기 위한 하나의 수단으로 생각하였기 때문에 이루지 못했다.

한편 부종사 오림은 진한의 8국을 낙랑군 소속으로 넣으려고 했는데 통역 실수로 인해 한인(韓人)들이 모두 격분해 대방군의 기리영을 공격하였다. 대방태수 궁준과 낙랑태수 유무가 이들을 토벌했는데, 궁준은 전사했지만 한을 멸망시켰다고 한다.[2]

이것을 백제 고이왕 13년(246)의 기록[3]과 결부시키기도 하나, 시기가 다르고, 침략 대상이 다르다는 점에서 아닌 듯 하다.

2.3 진나라 시대

진나라는 274년 낙랑군과 대방군을 평주 동이교위에 소속시키며 강력한 동방 정책을 구사하려 하였으나 곧 5호16국시대가 들이닥치면서 이 또한 무위로 돌아갔다.

이때 대방태수는 딸 보과(寶菓)를 백제 책계왕[4]의 사위로 보냄으로써 혼인동맹을 꾀했는데 고구려가 대방군을 침입하자 백제가 이를 구원함으로써 이루어진다.

애초에 동이교위가 동방정책의 중심이 되면서 낙랑, 대방, 현도는 점점 세력이 쇠퇴해 간다.

2.4 멸망

311년 미천왕이 서안평을 점령하고 낙랑군과 대방군의 유력한 자들이 모용씨 (전연)에 귀부하면서 결국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만다.

이후 전연에 의해 대방군이 요서 대릉하 유역에 설치되기도 하였으나 430년 대 북위가 폐지하였다.

3 주변 세력과의 관계

낙랑군과 대방군은 서로 대립하는 추세였고, 백제와 대방군은 서로 친밀한 사이였다고 한다.
  1. 공손강의 아빠인 공손도가 백제에게 자신의 딸을 보내 혼인 동맹을 한 것도, 후한의 낙랑태수 파견을 막은 것도 낙랑군을 견제하기 위한 의도로 보인다.
  2. 실제론 공격을 받았던 마한도 완전히 멸망했다는 정황이 보이지 않는 걸로 봐서 삼한을 없앴다기보단 한계 국가 하나를 멸망시켰다고 본다. 현재는 선빵을 날린 한계 국가는 마한 북부의 일개 국가 중 하나인 신분고국이라는 설이 힘을 얻고 있다.
  3. 가을 8월, 위(魏)나라 유주자사(幽州刺史) 관구검(毌丘儉)이 낙랑태수(樂浪太守) 유무(劉茂)와 삭방태수(朔方太守:대방태수를 잘못 기록한 듯) 왕준(王遵)과 함께 고구려를 쳤다. 임금이 그 틈을 타서 좌장 진충을 보내 낙랑 변경을 습격하여 백성을 잡아왔다. 유무가 소식을 듣고 분노하니, 임금이 침범 당할까 두려워 백성들을 돌려보냈다. 삼국사기 권 24 백제본기 고이왕 13년
  4. 한나라(낙랑군)의 침입으로 죽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