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례성

1 개요

700년 백제역사에서 500년 가까이 수도였던 곳[1]

백제도읍. 이 시기의 백제를 한성백제라고 한다. 온조왕이 최초로 성을 쌓았고, 문주왕이 오늘날 공주시웅진으로 천도하기 이전까지 근 500여년 동안(기원전 18~ 서기 475) 백제의 수도 였다. 그 위치가 아직까지도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다.

2 건립에서 파괴까지

고구려에서 건너온 소서노비류. 온조 등 유민들이 건립했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최초의 위례성이 한강 이북에 있었을 것으로 추청하는데, 그 위치는 중랑천 근처, 오늘날의 중랑구 일대로 비정하고 있다. 실제로 개발되기 전 중랑천 일대에 무덤과 성곽 일부가 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그외에 세검정이나 북한산 기슭이 아니냐는 의견도 있다.

이후 온조왕 13년에 하남, 그러니까 한강 이남으로 위례성을 옮기게 된다. 이후 개로왕이 고구려 장수왕의 침입을 받는 475년까지 백제의 수도는 하남 위례성이었다. 백여년 뒤 백제가 중흥하고 고구려가 약화된 성왕(백제) 시대 551년에 잠깐 고토회복에 성공했지만 곧 진흥왕신라에게 다시 빼앗겼다.

3 어원에 대하여

위례성(慰禮城)의 어원에 대해서는 수많은 학설이 제기된 상태다. 우선 한자의 뜻 자체를 풀이하여, 예를 다하는 성이라는 추측이 있다. 온조등 고구려에서 탈출한 난민들의 정착을 도와준 마한 임금에 대한 성의 표시라는 해석이다. 초창기에도 그들의 도성을 위례성으로 칭했던 것을 볼 때, 어느정도 합리적인 의견이지만 마한 멸망 이후에도 계속 썼다는 것이 걸린다.

또한 울타리라는 고유표현을 음차해 위례라고 쓴 것 아니냐는 의견도 많다. 이것은 몽촌토성에서 목책 흔적이 나온 이후에 본격적으로 힘을 얻은 의견이다. 정약용도 이 설을 지지한 바 있다. 하지만 풍납토성의 등장 이후 이 의견도 상당부분 모순 점이 많다.

가장 합리적인 해석은 서라벌의 뜻과 마찬가지로. 큰 성, 또는 왕성이라는 뜻이라는 추측이다. 백제인들은 자신들의 임금을 어라하 라고 불렀는데 이 어라하의 음차를 위례로 파악하는 식이다. 하지만 이 경우 어떻게 어라하의 음차가 위례가 되는지는 명확히 설명되지 않는다.
또는 한자 독음 방식에 따라서 禮(례)자를 '예'로 읽어 위례성 → 위예성 → 위에 (계신 분이 사는) 성 → 왕이 사는 성이라는 의견도 있다.

4 위치 문제

하북 위례성은 둘째치고, 하남 위례성조차 그 위치가 불명확해 이를 알아내는 것은 백제 멸망 이후 한국 고대사의 큰 이슈 중 하나였다. 현대는 물론이고 고려나 조선시대 때도 위례성이 어디냐를 두고 갑론을박이 벌어졌다. 후보지도 여러군데가 꼽힌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하남 위례성은 북으로는 강, 동쪽으로는 높은 산, 서쪽으로는 바다, 남쪽으로는 비옥한 농토가 있다. 근데 문제는 한국에 이같은 입지는 수두룩하게 많다는 것.

우선 삼국유사에서는 충남으로 비정하고 있다. 저자인 승려 일연은 위례성의 위치를 충남 직산으로 생각하고 삼국유사에 그렇게 기록했다. 하지만 현대의 학자들에게 이 같은 의견은 거의 무시되고 한강 이남 지역으로 좁혀진 상태다.

조선시대부터 주목했던 지역은 광주 춘궁리(현재는 하남시 춘궁동)였다. 고을의 중심지는 삼국 시대부터 내려오는 경우가 많은데 광주 춘궁리가 당시 광주의 중심지였기 때문이다. 다산 정약용 이래 정설시 되었으며, 사학계의 대부 이병도도 춘궁리를 밀었다. 특히 춘궁리의 이성산성이 위례성으로 유력시되었다. 하지만 발굴 조사 결과 여기서도 백제 유물은 발견되지 않고 대신 신라 유물만 잔뜩 발견되었다.

그러다가 1980년대에 몽촌토성이 발굴되면서 유력한 다크 호스로 떠오르게 된다. 삼국사기의 기술과도 맞는데다, 발굴 결과 2~3세기 백제 유물품이 나왔기 때문, 그 이후 몽촌토성이 위례성이라는 가설이 거의 정설로 굳혀지나 했다. 국사책에서도 몽촌토성을 위례성이라 했으니..

근데 1997년 풍납토성 발굴이 이뤄지면서 확 뒤집혀 진다. 삼국사기 초기 기록과 부합되는 데다 몽촌토성에서 나온 유물보다 훨씬 더 많은 숫자가 우루루 쏟아져 나왔다. 한국 고고학계는 이 결과에 입이 툭 하고 빠졌고, 고대사학계는 부랴 부랴 위례성을 풍납토성으로 바꾸는 논문을 발표하느라 진을 빼야 했다. 자세한 내용은 풍납토성 참고.

그렇다고 해 풍납토성이 위례성이라고 완전히 결정된 것은 아니다. 고고학적 성과가 나오긴 했지만, 몽촌토성의 전례에 따라 고고학계가 신중하게 접근하고 있다. 더구나 한강 바로 옆에 위치했다는 특성이, 유사시 과연 방어성으로서의 기능을 제대로 하고 있는지도 의문이다.

현재 고고학계의 대세는 평상시에는 풍납토성, 위기시에는 몽촌토성에 머물렀다는 의견이다. 그리고 위례성은 이 모두를 통칭한 것이었다는 의견이 많다. 이 같은 구조는 고구려에서도 엿보이는데. 대성산성- 장안성이나, 국내성- 환도산성 등이 그렇다. 학교의 역사 수업시간에도 위례성은 지금의 서울이라고 배우는 편이다. 다만 지금은 서울시 시역이 넓어지다보니 위례성(풍납토성, 몽촌토성) 지역까지 포함하게 됐고, 훗날 조선의 수도 한양(사대문 근처 지역)과 이 위례성이 둘 다 지금의 서울이라고 하니까 위례성과 한양이 역사가 이어지는 같은 도시라고 학생들은 착각하기 쉬운데, 한강을 끼고 있다는 점만 빼고는 완전히 다른 도시로 봐야 한다. 전근대시대에는 한강 같은 큰 강 건너편이면 생판 딴 동네나 마찬가지였고, 조선시대 수백 년 동안 강남 지역 대부분은 서울이 아니라 광주군의 변두리였다.

2011년 12월에 천안지역 향토사학자들이 오랜만에 천안-직산 백제 초도설 을 다시 주장하고 나섰다. 그 근거로 들고 있는게 삼국사기 온조왕 13년조에 마한과 웅천을 경계로 했다는 기록이 있고, 24년조에 웅천에 목책을 쌓았다는 기록이 있는데 웅천=공주임으로 천안 직산이 백제 초기도읍이라는 예전 정설을 다시 들고나온것. 정약용 이전의 고문헌들을 참고해야 마땅하며 정약용으로 인해서 몽촌토성과 풍납토성이 위례성으로 해석되었다는 주장을 펴고 있다. 그러나 기존 주장의 되풀이인데다가 어딘지 모르게 향토색이 강한 주장이라 얼마나 받아들여야 될지는 미지수. 아직은 학문적 근거가 있다기보다는 향토 차원의 주장이라고 봐야 할듯.# 게다가 마한과 웅천을 경계로 했다는 기록은 온조왕때가 아니라 백제가 본격적인 정복전쟁에 나서는 근초고왕 이전의 백제 영역을 온조왕때로 소급해서 기록했다는 해석이 있기 때문에 천안-직산 초도설은 무리하다는게 대체적인 시각. 상식적으로 생각했을때 백제가 그렇게 빨리 남쪽으로는 공주일대, 동쪽으로는 춘천까지 영역을 확장하는건 무리라고 생각할수 있다.

그와는 별개로, 조선 초 까지만 해도 직산에 온조왕 사당이 있었으며, 직산에서 성곽 흔적 같은 것이 출토되기는 한다.# 이로 보아 직산은 '위례성'은 아니라도 백제와 어느 정도 연고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백제 무왕이 직산으로 천도하려 했다는 설도 있다.

또 직산은 마한의 중심국가인 목지국의 위치로 추정되기도 한다. 충남에서 위례성 찾으려고 발굴조사 하다가 '목지국 유적'을 캐내면 그것도 나름대로 대박인데.(…)

또한 몇몇 역사학자는 현재도 위에 언급된 광주 춘궁리(현재 하남시 춘궁동)에 대형 사찰 유적 등이 있다는 점을 들어 춘궁리가 위례성이고, 풍납토성은 위례성이 아니라고 주장하고 있으며, 풍납토성 보존 때문에 부동산 재산권 행사에 많은 제약을 받는 풍납동 주민 단체의 지지를 받고 있다. 위례성만 아니라면 백제 유적은 파헤쳐도 상관없다 이건가

하지만 풍납토성이 위례성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역사학자들도 풍납토성이 보존할 가치가 부족한 유적이라고는 절대 말하지 않았다. 이희진, 강찬석 공저 「잃어버린 백제 첫 도읍지」에서, 풍납토성 발굴 유물의 고고학적 절대연대가 기원전후까지 올라가는 것과 관련해 저자들은 삼국사기에서 처음 온조왕이 고구려에서 망명해 왔을 때 '마한이 동북쪽 1백리의 땅을 할양해주어서 그 토대 위에서 백제가 건국'되었다고 한 기록을 풍납토성이 실제 사실로서 증명해줄 수도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이병도가 처음 위례성이라고 지적했던 하남은 풍납토성이 있는 서울에서 보면 동북쪽 방향이다) 온조왕이 사냥하는 척 하면서 합병한 것으로 삼국사기에 기록된 마한의 세력 거점이 풍납토성일 수 있다는 것이다. 이 가설을 따를 경우 처음 마한의 소국으로 시작했던 백제가 이후 거꾸로 마한을 합병하고 세력을 넓혔다고 기술한 삼국사기의 기록이 고고학적인 설득력을 갖게 된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그리고 최근 풍납토성의 건축 연도가 기존 추정치보다 100년 정도 늦어질 수 있다는 연구 결과가 나와서 이 가설도 고려해 볼 점이 많다.

위례신도시의 위치는 하남시 춘궁동과도, 송파구 몽촌토성과도, 송파구 풍납토성과도 엄청 멀리 떨어져 있다. 송파구, 성남시 수정구, 하남시가 만나는 지점에 세 지자체가 모두 걸쳐 있으며 비범하게도 세 지자체에서 모두 위례동이란 이름을 제각기 붙여버렸다. 택시 탈 때 기사한테 목적지 말하기 피곤할 듯 하남시 춘궁동은 위례신도시와는 산으로 완전히 막혀 있으며, 풍납토성과 몽촌토성은 같은 송파구라도 위례신도시보다는 훨씬 북쪽에 있다. 뭐, 서울대공원도 서울에 있는 거 아니니까 그러려니 하자. 이러다가 위례신도시에서 위례성임을 암시하는 유적이라도 나오면 그 땐...

  1. 현대 매체나 일반인들의 막연한 인식으로 백제는 지금의 충청도나 전라도 지역에 기반을 둔 왕조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은데, 이는 백제 역사에서 절반도 안 되는 후반부 잠깐만 그랬다.